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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재가 되는 산야초가 많다고 이름 붙여진 채약산(採藥山·499.1m)은 전형적인 육산이다.
영천IC에서 빠져나와 남쪽으로 꺾어 내려온 지점의 500m가 채 되지않는 나지막한 산이지만 주위 조망이 빼어나다.
지형지물이 돋보이는 팔공산과 주위 산군들이 북서쪽으로 바라보이고, 산아래엔 크고 작은 저수지를 싸고 있는 너른 들판이 펼쳐진다.
들머리를 놓고 이리저리 궁리하다 결국 부산일보의 가이드(보국사)대로 따르기로 하였다.
꼬불꼬불 운치있는 함양 오도재를 닮아 지루하지 않다고 하였지만 그건 보는 사람의 시각에 딸린 것.
태양이 이글거리는 여름이라면 양팔을 휘저어 말리고 싶은 길이다.
채신2공단의 밤무골산(193m)을 거쳐 보국사 진입로 우측의 나즈막한 능선을 따라 가고 싶었고, 성일가(신성일 가옥)를 잠깐 들렀다가 괴연지에서 능선을 통해
오르고도 싶었으며, 또 ‘괴연노인정’ 환종주(채약산~도로~삼면봉~예향산)를 기웃거려 보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부산일보의 가이드대로 버스를 대창초교에 두고, 코스만 옥비(玉碑)가 있는 유후재(遺厚齋)로 바꾸었다.
언론사의 가이드를 더 선호하는 회원들에겐 안내만 하였고...
정상에는 큰 삼각형 모양의 자연석 정상석이 놓여 있고, 능선길은 평이한 편이지만 작은 오르내림이 잦다.
쉰질바위는 바위의 높이가 사람 키의 50배나 된다고 해서 붙은 이름으로 조망이 빼어나지만 고도를 5~60m 낮추었다가 신질로 되올라 와야만 한다.
코스를 변경한 유후재(문화재자료 제101호)엔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청백리인 조치우(曺致虞 1459~1529)선생이 왕으로부터 하사받은 옥비(玉碑)가 있다.
옥비는 원래 두 좌였는데, 한 좌는 부인 창원박씨의 묘소가 있는 경남 창원의 구룡산(九龍山) 아래 모원재(慕遠齋) 옥비각에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또한 채약산 동쪽 괴연제 위에는 왕년의 영화배우 신성일씨의 집(성일가)이 있다.
최근 병이든 그를 둘러싸고 성일가에 대한 풍수가들의 입방아가 그리 유쾌하지 않다.
산행코스: 괴연노인정-고분군-보국사-능선삼거리-채약산-쉰질바위-철탑-임도-해맞이광장-송청산-안부(독도주의지점)-유후재-과수원-농로-대창초교
산행궤적
약 9km를 3시간 30분 가량 걸린 셈.
고도표
참고 개념도<밤무골산~채약산~도로~삼면봉~예향산>
<부산일보 개념도>
괴연노인정. 괴연동(槐淵洞)은 괴동(槐洞)과 용연동(龍淵洞)이 통합되면서 생긴 이름이다.
보국사로 가는 길은 빨간 화살표 방향.
괴연노인정에 주차한 버스 뒤로 100여m 후방이다.
두번째 마을길.
천주교 괴연공소 안내판이 반대쪽을 가리키며 붙어 있으며...
새도로 주소는 '유삼길'.
조그만 소류지를 지나고...
뒤돌아 보니 괴연동 뒤로 예향산(446.5m)이 솟아 있다.
도로를 따라 보국사 가는 길은 30여분 이어지고 ...
줄 친 솔숲 안으로...
매장문화재 유존지역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장사진을 이룬 정면에 둘러진 산자락이 채약산이고, 채약산이 감싸고 있는 오목한 곳에 보국사가 보인다.
보국사 뒤 잘록한 능선이 올랐던 지점.
당긴 사진의 탑 좌측 당우가 삼성각으로, 진입로는 이 건물 좌측 뒤로 열려있다.
오르막 보국사 표석을 지나고...
신축 중인 듯한 절마당에 커다란 백색탑이 우람하다. 기계화된 석공법으로 정형화된 탑을 세웠지만 뭔가 낯설은 느낌.
너른 절터에 새로 지어지는 건축물이 보국사의 현재를 짐작케 하고, 우리가 올라온 방향으론 훤히 트인 공간이 시원하다.
맞은 편 석물 두 기가 있는 곳으로 밤무골산 능선으로 붙을 수 있을 텐데...
우린 오층석탑 좌측 삼성각 돌계단을 올라...
삼성각 좌측 뒤로 오를 것.
계단을 오르기 전 우선 우측 용왕당으로 올라...
사방 한 칸짜리 맞배지붕의 앙증스런 건축물인 용왕당.
반듯한 길의 삼성각 반대편으로 올라본다. 이는 지형도 상에 묵은 길이 나있기 때문.
보국사를 내려다 보며 올라 보지만...
길은 여기까지가 전부. 위로 시선을 돌려보지만 사람들이 다닌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되내려와 삼성각 뒤로 일행들의 꽁무니를 따른다.
다소 가풀막이지만 불과 10여분 만에 이정표가 있는 안부에 올라섰다.
이정표의 글자는 훼손되어 식별불가.
흡사 피겨스케이트 포즈를 닮은 나무를 지나고...
두 번째 보국사 갈림길 이정표가 있는 밤무골산 능선 삼거리에 올라선다.
이정표의 밤무골산은 필자가 써 넣은 것.
이 지점은 조망이 좋은 곳. 북서쪽으로 유난히 작은 소류지가 많이고 멀리...
팔공산(?)
푸른 창공에 난해하게 채색된 하얀 물감.
자동 산불감시 시설물을 지나고...
사방이 잡목으로 가려져 있어 조망이 없는 채약산 삼각 자연표석에 모자를 씌웠다. 이렇게 인증을 하는 수밖에...
벤치 쉼터를 지나고...
쉰질바위 갈림길을 만난다.
갈림길 안내판엔 약남리(1코스) 갈림길.
이정표엔 약남마을(2.2km) 방향.
약남마을 이정표 아래 누군가 쉰질바위전망대라고 써 놨다.
이정표 갈림길에서 조금 올라서면 운동시설이 있는 작은 봉우리. 누군가 '쉰질봉'이라 부른다.
고도를 낮추어 계단을 내려섰더니 벤치가 있는 쉰질바위전망대. 이제 신질로 올라와야만 한다.
이후 산길은 오르락내리락 쌓인 낙엽을 쓸고 다녀야만 하고...
오래지 않은 철탑을 따르게 된다.
철탑을 세운 뒤 복원을 위한 듯 새집을 달아 놓았지만 내가 새라면 이 집에 들어가 살지 않겠다.
너무 낮게 달려 있으니 천적으로부터 보호될 수 없을 것.
복원은 산길도 없애 버렸지만 식재된 어린 묘목 사이를 요리조리 피하며...
다시 너른 개활지가 된 철탑에 닿았다. 우린 이곳 양지바른 바람막이 지점에서 점심도시락을 풀었다.
그리곤 임도가 지나가는 안부.
안내판과...
제일 상태가 좋은 이정표. 진행 방향으로 300m 지점에 해맞이광장(삼각점)이 있단다.
그렇다면 차를 타고 이곳까지 올라와서 해맞이광장으로 올라가나 보다.
금세 온갖 글귀가 난무하는 너른 공터인 해맞이광장에 닿는다.
판자에 새겨진 글귀는 '사랑은 남에게 주었을 때 활짝 핀다.'
삼각점이 있는 해맞이광장에선...
남동쪽 해뜨는 방향으로 조망이 열린다.
늦은 산행기를 쓰면서 짚어보니 비슬지맥과 그 뒤로 낙동정맥인 듯하지만 자세히 가늠할 순 없어.
사룡산과 구룡산, 그리고 그 뒤로 낙동정맥에서 벗어난 여근곡이 있는 오봉산(?)
오봉산이 맞나싶어 더 당겨보았다.
또다시 철탑이 있는 개활지에 서서...
아까본 남동쪽 산군들을 살핀다. 가까이 비슬지맥의 사룡산과 구룡산, 좌측 뒤로 낙동정맥과 오봉산.
그러고보니 채약산의 해는 천년의 역사 신라 고도 경주에서 뜨고, 경주의 천년불(佛)은 늘 동쪽을 바라보고 있다.
발아래 옹기종기 촌락을 이룬 평화스런 마을.
다시 작은 오르막 철탑을 지나면...
아무런 표식이 없이 참나무 몇그루 버티고 선 송청산(松靑山 395.4m). 푸른 소나무가 있을 법 했지만 근거없는 이름인가?
지형도에 없는 이름이지만 산아래 사찰 용화사가 '송청산 용화사'이고, 유후재 '송청서당' 편액이 버젓이 걸려있으니 이만하면 충분하지 않는가?
북서쪽 방향...
팔공산인가?
더 당겨보니 그 지형지물이 확실하다. 동봉과 서봉 사이에 시설물이 확연한 비로봉이 맞을 터.
덩쿨식물이 말라붙은 등로에서 돌아본 송청산.
무덤을 지나 내리막을 내려가면서 우측 유후재 방향으로 촉각을 곤두 세운다.
<독도주의 지점>이다.
삼각점(290.7m)이 있는 봉우리를 오르기 전 잘록한 안부에서 지팡이를 'ㅏ'자 모양으로 걸쳐 놓았다.
점선으로 표시된 직진은 삼각점봉으로 올라 대창초교로 가는 길이고, 우측의 빨간 실선이 유후재로 내려서는 길.
유후재로 내려가는 길은 예상했던 것보다 좋은 편.
경사도가 완만한 반듯한 길로 바뀌더니...
찾는 이가 그리 많아 보이지는 않지만 유순한 길로...
금세 임도에 내려선다. 이 임도 우측으론 송청산 용화사에 이를 것이고...
좌측 임도로 내려서자 왼쪽 산자락에 일군의 무덤들이 보여 잡목을 헤치고 들어가 본다.
무덤 앞에 세워진 석물들을 살핀다.
전형적인 사대부 무덤의 양식으로 문인석(文人石)과 망주석(望柱石)을 비롯한 여러 석물들이 무덤을 지키고 섰다.
마주 보고 있는 한 쌍의 석양(石羊)도 묘소를 지키는 석물.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면 무인석은 없고 문인석만 보인다.
비석에는 '문간공 지산 조선생지묘(文簡公 芝山 曺先生之墓)'
지산 조호익(曺好益 1545~1609) 선생은 경남 창원 출생으로 어려서부터 학식과 효성이 뛰어났고 31세에 군적을 정리하는 검독이라는 관직을 제수 받았으나
부모 삼년상중이라 거절한 이유로 억울하게 17년간의 유배생활을 했다.
그 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금부도사에 제수되어 의병활동을 전개해 큰 전공을 세웠으며, 전쟁이 끝난 후에는 영천에 터전을 마련해 많은 문인들을 배출해
지산학파를 형성하였다.
그 조금 위에 있는 무덤은 '청백리 정우당(淸白吏 淨友堂) 조선생지묘'
무덤의 주인은 유후재의 주인인 정우당 조치우(曺致虞 1459~1529) 선생이다.
조선 성종(成宗)~중종(中宗) 때의 문신으로 청렴하고 효행이 뛰어나 왕으로부터 '소학(小學)'과 옥비(玉碑)를 하사받았다.
정우당 조치우 선생처럼 효성이 지극해야 집안이 번창하고, 충신열사를 낳는 것처럼 그의 증손 5형제가 모두 명성을 떨쳤다.
지산 조호익(芝山 曺好益)은 조치우의 증손으로 도덕과 문장이 당대에 이름을 날렸고, 또다른 증손인 조광익(曺光益, 호 취원당(聚遠堂)은 효자로써 정려가
세워졌으며, 조희익(曺希益)은 임란 때 의병을 일으켜 영천복성에 크게 활약하였다.
선생의 비석 옆면과 뒷면이다.
우측 비석의 마지막에 '숭정기원후5임인10월(崇禎紀元後五壬寅十月)'이라 적혀있다.
숭정기원후(崇禎紀元後)에서 숭정은 명나라 마지막 황제 의종(毅宗)의 연호. 숭정제가 1628년에 즉위했으니 그 후 다섯 번 째 임인년이라는 뜻.
그러니까 1628년 후의 다섯 번 째 임인년은 1902년(고종 39년)인 셈.
제일 위에 있는 무덤을 찾아가 비석을 확인하니 '정부인 거창신씨지묘'
묘지는 높은 사람이 위에 있는 법.
따라서 모두 창녕 조씨 무덤이 맞다면 신씨 할머니가 제일 윗사람이고, 다음이 조치우, 그 다음이 조호익 선생이라고 보면 맞을 것.
산소에서 조금 내려오면 만나는 유후재.
우선 담너머로 유후재 전경을 카메라에 담는다.
우측 제일 위에 있는 '내사옥비각(內賜玉碑閣)'
우선 담벼랑에서 줌으로 비각안을 기웃거려본다.
앞으로 돌아나와 5칸 팔작지붕의...
송청서당(松靑書堂)을 당겨본다.
그리곤 옆 관리인의 집으로 들어가 쪽문을 통하여 안으로 들어왔다. 유후재엔 송청서당 현판과 입교당.
화ㅇ헌(花ㅇ軒).
이 편액의 글자를 해독할 수 없어 오만 방법을 다 동원하였지만 끝내 정확한 해독을 할 수 없었다.
여러 문화재를 탐방하면서 어딘가에서 본 듯하였지만 초서로 휘갈긴 글자를 읽기에는 필자의 식견이 부족하였으니 이를 어쩌랴.
충효당과 송청서당.
옥비각기(玉碑閣記). 말미에 '상지5년갑인3월'이라 적혀있다. '上之(상지)'는 '上之卽位(상지즉위)'의 준말로 '임금에 오른지'라는 뜻이다.
옥비각 입구의 휘어진 소나무에 유달리 눈길이 간다.
내사옥비각(內賜玉碑閣) 현판이 걸린 비각. * 내사(內賜)란 임금이 신하에게 물건을 내리는 것을 의미한다.
이 옥비는 청백리로 추천되어 관리로 뽑힌 조선 중종 때 문신 정우당 조치우(曺致虞) 선생에게 중종이 내린 옥비.
조치우 선생은 대구부사, 예천군수 등을 지냈는데 재임하는 동안 청렴결백하고 선정을 베푼 목민의 치적이 뛰어난 청백리의 관료로 기록될 만큼 깨끗하고
근검한 선비였다.
늙은 어머니를 모시는 효심 또한 지극하여 임금이 소학(小學)을 내렸고 그 뒤에 옥비(玉碑) 두 개를 하사했다고 전해진다.
그 하나는 조치우 선생에게 내린 청옥이며 또 하나는 선생의 부인 숙인 창원박씨에 내린 백옥이다.
임금에게 옥비를 하사받는 일은 드물다.
순백색 반투명의 돌로 조치우의 청렴하고 효심이 지극함이 그의 부인도 내조와 소박한 생활들이 임금을 감동시켰을 것으로 추측된다.
백옥비는 부인의 묘가 있는 오체향마을에 있다.
부부의 비가 떨어져 있는 건 원래 북면 대한리에 함께 있던 것을 문중에서 파손이나 도난을 우려하여 지금의 장소로 옮겼다고 한다.
귀부(龜趺)의 이목구비가 해학적이다. 똥그란 눈동자에 선명한 눈섶, 한 일자로 꽉 다문 입술은 무거운 옥비를 등에 짊어지고 있는 인고의 세월을 말하는가?.
이수(螭首)는 좌우 대칭으로 이목구비가 선명한 무엇을 닮긴 닮았지만 알 수가 없다.
한 바퀴 빙 비각을 돌아...
측면에서 바라보는 모습. 유후각의 옥비는 청옥(靑玉)이고 창원의 옥비는 백옥(白玉)이다.
유달리 특이한 모습의 소나무는 청백리 정우당 선생의 올곧음을 말해 주는 듯.
안내판.
이 안내판의 옥비 1좌는 부인의 묘소가 있는 청용산 모선재 안의 옥비각에 안치되어 있다고 하였는데, 기록이 잘못되었다.
모선재(慕先齋 )는 청용산(작대산)이 아니고 구룡산 아래에 있다. * 어사옥비: 경남 창원시 의창구 북면 지개리 529
유후재 탐방을 마치고 돌아보는 창녕조씨 묘역(▽).
우측으로 대재지(대재저수지)를 지나고...
925번 큰 도로를 나서기 전 좌측으로 계곡을 따라 내려간다.
이 길은 좌우 과수원이 있는 농로. 좌측으로 멀리 쉰질바위 밑둥까지 내려갔다 올라섰던 한덤님이 쉰질바위를 가리킨다.
그래서 당겨 보았더니 이름값을 하겠넹.
버스가 있는 대창초등학교로 가는 길은 과수원 농로로 걷기 편한 길.
사과나무인 듯.
에구~ 불쌍해라~ 까마귀의 풍장(風葬). 인간을 제외하고 늙은 에미를 봉양하는 동물은 까마귀가 유일하다고 하던데...
대창초등학교가 가까워졌다.
대창초등학교 옆으로...
조곡리복지관 앞마당에 뒷풀이가 준비되고 있다.
조곡리복지관은 대창초등학교 정문 앞에 있다.
조곡리복지관
대창초등학교 정문을 통해 교사(校舍) 끄트머리의...
충무공 이순신 동상을 당겨 본다.
충무공 이순신 동상 옆 파란색 철문을 통해 채약산 산길(B팀)이 열려 있었기 때문.
컴퓨터에 앉은 지금은 창원 구룡산과 모원재의 어사옥비를 탐방하고 돼지고기 목살에다 소주 일 병으로 허기를 채운 뒤 행복함에 취해 있는 시간이다.
창원 구룡산과 어사옥비 탐방기 ☞ http://blog.daum.net/bok-hyun/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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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김 대장님 공부 많이 햇습니다.
사진 한장한장 설명에
수고 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