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작시 | 전형철
몰沒 외
물길이 끊어진 데까지 걸었지
과거는 없지 과거는 다만 기억이어서 돌아갈 수 없지 기억이 기억을 잡아먹고 뒤집어진 거북이에 몰려든 거북이같이
할 수 없는 것과 할 수 있는 것이 그만 다르지 않네
이제 내가 추문이고 중심이고 아무도 안 보니까
나는 사막의 뱀처럼 외로웠으니
기어가고 있으니 화내지 마시게
모래알이 슬골에 자리 잡고 별처럼 빛나고
사포와 심장과 벌과 나무의 시간이
실같이 튿어진 해가
등을 짓누를 테니
무릎에 자물쇠를 채워 걸어 두고
기어가고 있으니 화내지 마시게
동굴과 어둠 속에서는 내가 켠 랜턴을 꺼야 출구가 보이기도 하는 법
없는 나 속에 나를 찾아 울음주머니에 머물다간 마음이 가만 초록 여우로 변하니
기어가고 있으니 화내지 마시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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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설柹雪
냉동실에 묵은 곶감을 꺼낸다.
미이라의 심장처럼 오래 그리고 느리게 굳었다.
감타래에 달린 알전구들이 가을 저녁을 밝히는 동안
봄 다시, 감꽃이 달릴 때까지 지지 않던 감물
단감을 심어도 땡감이 되는 뒤란.
깎인 감 껍질의 끝을 따라
하얀 분은 내 것이 아니었거나
마른 흔적으로 두터워졌거나.
햇곶감은 다시 묵은 곶감이 되고
공중에 떠있는 대지의 붉은 공은
교체 선수를 기다릴 것이다.
윤곽을 알 수 없는 시간이
쪼그라들며
이 오랜 순환이 흰 바람에 저물 것을
나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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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형철
충북 옥천 출생으로 2007년 《현대시학》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으로 고요가 아니다, 이름 이후의 사람이 있으며 조지훈문학상, 현대시학작품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