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 5: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성령의 열매 - 여기 "열매"란 말은 단수명사 되었다. 그것은 신자의 여러가지 덕행이 성령의 단일하신 역사로 말미암아 여러 방면으로 나타난 것임을 알려준다. 그리고 그 모든 덕행을 "열매"라고 한 것은, 그것들이 사람의 노력을 주로 하고 성립되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이 모든 것들은 성령에게서 나오는 것이다. 사랑 - 이 "사랑"은 믿음과 함계 있는 사랑인 사실을 우리가 알아야한다.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하였다. 신자의 사랑은 그가 하나님의 속죄의 사랑을 믿는 데서 반영된 사랑이니만큼, 하나님의 사랑을 원천으로 하고 나온다고 할 수 있다.. 희락 - "희락"은 언제나 성령으로 말미암은 사랑의 열매이다. 사랑이 있는 곳에 희락이 있나니, 사랑하는 자도 기쁘고 사랑을 받는 자도 기쁜 법이다.
언제든지 남을 미워하는 자의 얼굴에는 수심과 번민과 고통의 그늘이 있지만, 남을 사랑하는 자의 얼굴에는 즐거움이 속에서부터 솟아난다. 희락의 필요성은 육체의 건강을 위한 의미도 있지만, 그 보다도 신앙을 건전하게 하려는 것고 하나님께 감사를 많이 하려는 것이다. 희락이 있어야 신앙이 자라나고 감사가 넘친다.
화평 - 이것도 성령으로 말미암은 사랑의 열매인데, (1) 서로 사과함으로 이루어지며, (2) 서로 용서함으로 성립된다.. 이 두 가지 방법으로 화평이 이루어지지만, 그것도 하나님께서 사모하는 자에게 주시는 선물이다. 오래 참은 - 이것은 '따가움을 멀리함'이란 뜻이다. 사람은 대인관계에 있어서 혹은 무엇이 마음대로 안될 때에 그 심령이 따갑게 되기 쉽다.
이런 떼에 이기는 방법은 신앙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다림이다. 우리가 인력으로 할 수 없는 떼에는 침착하여 하나님을 기다리는 것이 좋다. 구원하여 주시는 하나님을 기다림이 우선 안식의 복이 아닌가! 애굽 사람들이 이스라엘 백성을 잡으려고 홍해까지 따라 올 떼에 모세는 말하기를, "다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모압과 압몬 족속이 큰 무리로 유대에 육박하였을 떼에 여호사밧 왕이 말하기를, "이 전젱에는 너희가 싸울 것이 없나니 항오를 이루고 서서 너희와 함께 한 여호와가 구원하는 것을 보라",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하였고,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고 하였다.
자비. - "자비"란 말은 남에게 주는 '친절'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친절"이라고 번역되어야 한다. 친절은 행실로만 아니라 말로도 나타난다. 우리의 말은 중요하다. 잠 12:18에 "혹은 칼로 찌름같이 함부로 말하거니와 지혜로운 자의 혀는 양약(良藥)과 같으니라"하였고, 잠15:1에는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하였고,, "온량한 혀는 곧 생명 나무라도 패려한 혀는 마음을 상하게 하느니라"고 하였다.
영시에 말하기를 , "노여운 말 한마디가 한 친절한 마음을 상하게 만들고, 부지중에 나온 실언이 앞날을 캄캄하게 만들고, 찌르는 가시를 일평생 남겼도다. 그러나 친절한 말 한 마디가 슬펐던 마음에 광명을 주고, 동정의 말 한 미디가 한 영혼을 살려 놓고, 기쁨의 말 한마디가 캄캄하던 앞길을 광명하게 만든다. 남의 마음을 섭섭케 만드는 것은 네가 발표한 말뿐이 아니다. 네가 말하지 아니하는 그 때에 많은 마음들이 아픈 상처를 받는다.
네가 말했더면 많은 아픈 마음이 풀어졌으리라. 사림들이 언필칭 공평을 부르짖으며 사람에게 사납게 행한다. 그러나 격분된 말로 의를 말할진대 말하지 않는 것이 낫다"라고 하였다. 양선. - "양선"은 자선 행위를 말하는데 성령께서 주신것이니만픔, 질적으로 선하다. 이 세상에는 자선 사업이나 적선을 말하는 자들도 많고 실행하는 자들도 있다.
그러나 흔히 질적 선미를 지니지 못한 외부적 행동에 그치므로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자선이 아니라 생명없는 사업 혹은 외식(外飾)에 불과하다. 진정한 자선은 끝날의 심판 때에 그대로 다 드러낼지라도 전정한 가치가 있는 것이 되도록 행해지는 것이다. 충성. - 이것은 진실하게 주님의 부탁을 지킴이다. 우리는 구원의 소식을 전함에 있어서 우리 자신이 어떤 새로운 공의를 기증할 필요는 없다.
만일 그럴 필요가 있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이루신 구원이 불완전하다는 뜻이 된다. 구원은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셨다는 것이 성경의 교훈이다. 그러면, 우리의 "충성"이란 것은 그리스도께서 전하신 구원의 복음을 그대로 전함이다. 충성하는 자는 구체적으로 다음고 같은 자들이다. (1) 주님을 두려워하는 약한 자. 주님께 충성하는 자는 반드시 영웅적 기질을 가진 사람이 아니다.
겁약한 자라도 주님만을 두려워하게 되면 주님께 충성하는 자가 된다. 이 세상에 속한 충성을 살펴보면, 생래적으로 영웅적 기질을 가지고 국가에 충성한 자들이 있다. 예를 들면, 헬쿨라네움이 함락당할 때에 로마 파수병이 죽기까지 자리를 옮기지 않고 그 자리에서 임무를 다한 것과 같다.
또 예를 들면, 당나라의 충신 장흥이 역적 안록산의 부하에게 잡혀서도 항복하지 않고 콥에 키워 죽으면서 끝까지 원수를 꾸짖은 것 등이다. 그러나 그것은 인력을 가지고 썩을 것에게 충성한 것이다. 하나님께 충성하는 것은 반드시 호걸이어야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이유는 , 호걸은 자기의 잘난 것 때문에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지 않기 때문이다. (2) 주님 앞에 진실한 자. - "충성"으로 번역된 말은 진실을 의미하기도 한다. "중심에 진실함"을 주님께서 원하신다.. 주님께 사
[갈 5:23]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 "온유"란 말은 특히 대적에게 복수하지 않고 부드러운 인격으로 이기는 덕을 가리킨다. 위대한 지도자들은 이 덕을 소유하였다. 모세는 그 시대에 가장 온유의 근본이시다.. 크렌머에 대한 후세의 속담은, "캔터베리의 감독 크렌머와 충돌하여라. 그리하면 네가 영원히 그의 친구사 되리라"고 하였다.
중세대의 성자 버나도는 그 눈이 비둘기 눈같은 온유한 인물이었고, 보나벤츄라를 보면 아담이 범죄하지 않은 것다"고 하였다. 오리겐은 말하기를 , "우리는 남을 위해서 지음이 되었고, 남을 저주하기 위함은 아니라"고 하면서 논쟁에 있어서도 온유를 주장하였다. 키프리안은 교회 정치가로서 권위를 존중히 여기면서 온유를 실천하였다.
"절제"란 말은 '자기 자신을 분잡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죄를 범하지 못하게 자기를 제재함이다. 바울은 자기를 "쳐 복종하게"한다고 하였는데 그것이 바울의 자기 제재라고 생각된다.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이 말씀은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와 율법이 서로 충돌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성령에 의하여 그기스도 신앙으로 행하는 자의 행실은 율법을 이루는 것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