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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2-5 정치가 이해찬진면목 국무총리 대담영상
조동화는 74세(1952년생)의 이른나이에 이해찬 전 국무총리가 저 세상으로 떠나갔다는 비보를 접하고, 정치가 이해찬이 살아온 삶을 조명해 보았다.
한국 민주주의의 거인 이해찬은 1972년 서울대학교에 입학하였는데, 그해에 박정희는 10월 유신을 선포하여 총통제 국가를 구축하였기, 휴교령이 선포되여 청양에 내려오니 청양면장을 하시었던 아버지로부터 학생들이 불의에 항거하는 데모는 않하고 뭐하러 내려왔느냐는 호된 질책을 받고 상경하여 학생운동에 뛰어 들어 고난과 영광의 길을 걸었다.
이해찬은 학생운동하였다는 죄목으로 감옥살이 몇 년 하면서 고문도 많이 받았으며, 전두환이 조작한 김대중내란음모사건에 연루되여 또다시 감옥가서 고문을 받았다.
이해찬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이 2026년 1/25일 별세했다. 향년 75세.
고(故) 이해찬 수석부의장은 민주평통의 아태지역회의 운영위원회 참석차 지난 22일 베트남 호찌민에 도착했으나, 베트남 공항 도착 후 호흡곤란으로 호찌민 탐안(Tam Ahn) 병원으로 긴급 이송됐다.
이 수석부의장은 심근경색 진단을 받고 스텐트 시술과 함께 중환자실에서 에크모(ECMO·체외막산소공급장치) 치료를 받았지만 끝내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별세하였다.
국가는 이해찬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전 국무총리)의 영결식을 국회에서 사회장으로 1/31 5일장으로 장례식을 엄수하였다.
이해찬(李海瓚, 1952년 7월 10일 ~ 2026년 1월 25일)은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7선 국회의원으로 제13·14·15·16·17·19·20대 국회의원, 김대중 정부의 제38대 교육부 장관, 노무현 정부의 제36대 국무총리를 지냈고, 이후에는 제2대 민주통합당 대표최고위원, 제3대 더불어민주당 당대표를 역임했다.
1952년 7월 10일에 충청남도 청양군에서 아버지 이인용과 어머니 박양순의 5남 2녀 중 3남이자 다섯째로 태어났다. 어머니의 고향은 충주이다. 아버지인 이인용은 해방 이후 청양면장을 지냈으며 4.19 혁명 때까지 재직하였다.
1965년에 청양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상경하여 1968년 덕수중학교를 졸업했다. 용산고등학교에 입학하여 1971년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섬유공학과에 진학했는데 적성에 맞지 않아 자퇴하고 이듬해인 1972년 서울대학교 사회학과에 입학했다.
1972년 10월 17일 유신 선포를 계기로 학생운동에 뛰어들었다. 그는 유신 선포로 휴교령이 내려지자 고향 청양에 내려왔는데 아버지로부터 "나라가 이모양인데 학생들이 데모도 하지 않느냐?"는 질책을 받고 바로 상경하여 학생운동 동아리에 가입했다고 한다. 어려운 환경에서 그는 직접 막노동을 하며 생계와 학비를 마련해 나갔으나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투옥되어 1년을 복역하고 출소했다. 이후 이해찬은 생계를 위해 무역회사에 다니기도 하고 동아일보에서 해직된 기자들이 차린 번역실에서 번역을 하기도 했으며 엠네스티 한국지부 상근자로 일하다 평소 관심이 많던 출판일을 익히려고 범우사에서 일하기도 했다. 1978년 사회학과 학술모임에서 만나 사귀어 오던 김정옥과 결혼하고 광장서적을 설립하였다. 출판사 '한마당'과 '평민서당'을 설립했으나 불온서적을 출판했다는 이유로 등록을 취소당하여 돌베개 출판사를 설립하고 사회과학 서적을 주로 출판했다.
1980년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에 연루되어 이해찬은 재판을 받고 투옥되었다가 수감 2년 6개월 만에 크리스마스 특사로 석방되었다. 이후 재야운동에 본격적으로 투신하여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총무국장에 선출되었다. 군사 독재 정권은 그를 요시찰 인물로 삼아 감시했으나 굴하지 않고 반독재운동과 출판 활동 등에 종사했다. 입학하고 14년만인 1985년 8월에 서울대학교를 졸업하였다. 1987년 이해찬은 민주쟁취국민운동본부 상임집행위원에 선출되었고, 6월 항쟁 당시 민주쟁취국민운동본부 상황실장을 맡았다.
이해찬 전 총리는 1980년 신군부가 조작한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 사건에 연루되어 고초를 겪었습니다. 당시 서울대 복학생협의회장이었던 그는 김대중 전 대통령과 함께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배후 조종했다는 허위 혐의를 받았습니다.
<이해찬은 1980년 5월 연행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했으며, 군사재판에서 징역 10년 및 자격정지 10년을 선고받았습니다. 이후 안동교도소 등에서 약 2년 6개월간 수감 생활을 하다 1982년 형 집행정지로 석방되었습니다.
이해찬은 김대중내란음모조작사건 법정 최후진술에서 1심 공판 당시 "구차하게 징역을 구걸하지 않겠다"라며 신군부를 강하게 비판한 최후진술은 민주화 운동사의 유명한 일화로 남아 있습니다.
이해찬은 사건 발생 24년 만인 2004년 재심을 통해 무죄를 선고받아 공식적으로 명예를 회복했습니다.
1980년 9월 12일. 이른바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으로 군사 법정에 선 28살의 젊은 피고인은 재판부를 향해 또렷이 말했다. 전두환을 우두머리로 하는 신군부 내란 세력은 1979년 12.12 군사 반란에 성공한 뒤 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했다. 이튿날 광주에서는 계엄 해제와 민주주의를 요구하며 시민들이 떨쳐 일어났다. 그에 대한 신군부의 대답은 군대를 동원한 학살이었다.
학살 다음 단계는 조작이었다. 전두환 신군부는 광주 학살을 정당화하고 권력 장악의 마지막 단계를 마무리하기 위한 조작 사건을 만들었다. 그 어떤 증거도 없었다. 오직 비열하고 잔인한 두 달간의 고문에 의한 거짓 자백이 전부였다. 광주의 5.18 민주화 운동은 김대중이 북한의 사주를 받아 일으킨 내란이어야 했다. 이것이 2004년에 와서야 공식 조작 사건으로 인정된 ‘김대중 내란 음모 조작 사건’이었다.
“가슴 아프게 무수한 사람이 죽어갔다. 그런데 구차하게 이 자리에서 징역을 구걸하겠는가?”
신군부의 위세와 잔인한 고문도 청년의 결기를 꺾지 못했다. 김대중의 ‘공범’인 28살의 청년은 징역을 구걸하지 않았다. 청년은 자신의 안위가 아닌 피 흘리며 죽어간 광주 시민들과 함께하지 못한 것을 자책하며 신군부의 사건 조작을 고발하고, 민주화 운동의 정당성을 서슬 퍼런 군사 재판에서 당당히 외치고 있었다.
청년 이해찬, 앞선 박정희 군사 정권에 대항하다 ‘민청학련’ 사건으로 이미 한 번 옥고를 치렀던 그는, 다시 전두환 군사 정권의 법정에 섰다. 그리고 모든 희망이 사라진 순간, 전두환 신군부의 정권 탈취가 확실해진 그 순간, 그들이 만든 법정에서 청년 이해찬은 군사 반란 세력에 끝까지 맞서 싸울 것이며 민주주의를 포기하지 않을 것임을 일갈하고 있었다.
“이 목숨 다 바쳐 이 땅이 민주화될 때까지 싸워나가겠다. 당신들이 저지르고 있는 역사적 범죄를 결코,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
- ‘이해찬 회고록(돌베개)’ 中 -
김대중 내란음모조작사건
1980년 전두환 신군부 세력은 정권을 강탈하기 위해 ‘김대중내란음모사건’을 조작했다. 신군부는 이 사건 조작을 위해 김대중, 문익환, 예춘호, 이문영, 한완상, 조성우, 이해동, 이해찬 등 민주화 운동 인사들을 상대로 가혹한 고문을 했다. 사건의 주동자로 지목된 김대중은 5월 17일에 연행돼 9월 17일 사형선고를 받았다. 전 세계적으로 발생한 김대중 구명운동의 영향으로 1981년 1월 23일 대법원에서 사형확정 직후 무기징역형으로 감형되기까지 4개월여 동안 김대중은 사형수로 지냈다.
☞김대중대통령 사형수시절 1980년 12월 3일 옥중유언
나는 나의 그리스챤으로서의 신앙(信仰)과 우리 역사(歷史)의 최대(最大) 오점(汚點)인 정치보복(政治報復)의 악폐(惡弊)를 내가 당(當)한 것으로 끝마쳐야겠다는 신념(信念)을 특히 76년(七六年)의 3·1민주구국선언사건(三一民主救國宣言事件)으로 투옥(投獄)된 후(後) 굳게 하며 그 이후(以後) 이에 일관(一貫)했다. 10·26 사태(十·二六事態) 이후(以後)는 계속해서 국민적(國民的) 화해(和解)와 단결(團結)을 제창해 왔다. 그러나 나의 그러한 호소(呼訴)는 아무런 반응(反應)도 얻지 못하고 오늘의 운명(運命)에 이르렀다.
나는 박정권(朴政權) 18년(十八年) 동안 일관(一貫)해서 비폭력적(非暴力的) 방법(方法)에 의한 평화적(平和的) 정권교체(政權交替)를 국민(國民)의 성숙(成熟)된 힘으로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主張)했으며 특히 10·26(十·二六) 이후(以後)는 어떠한 성명(聲明)이나 연설(演說)에서도 이를 강조(强調)하지 않는 일이 없었다. 그러나 나는 지금 내란음모자(內亂陰謀者)로서 오늘의 처지(處地)에 서게 되었다.
나는 박정권(朴政權) 아래서 가장 가혹(苛酷)한 박해(迫害)를 받은 사람이지만 나에 대(對)한 납치범(拉致犯), 자동차사고(自動車事故) 위장(僞裝)에 의한 암살음모자(暗殺陰謀者)들, 기타(其他) 모든 악(惡)을 행(行)한 사람들을 하느님의 사랑과 용서(容恕)의 뜻에 따라 일체(一切) 용서(容恕)할 것을 선언(宣言)했다.
나는 지금 나를 이러한 지경(地境)에 둔 모든 사람에 대(對)해서도 어떠한 증오(憎惡)나 보복심(報復心)을 갖지 않으며 이를 하느님 앞에 조석(朝夕)으로 다짐한다. 그러나 나는 이 시간(時間)까지 나의 반대자(反對者)들로부터 무서운 증오(憎惡)와 모욕(侮辱)과 보복(報復)의 대상(對象)이 되고 있다.
그러나 나는 결(決)코 실망(失望)하지 않는다. 하느님만은 진실(眞實)을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나의 행적(行蹟)대로 심판(審判)하실 것이고 우리 국민(國民)도 어느땐가 진실(眞實)을 알 것이며 역사(歷史)의 바른 기록(記錄)은 누구도 이를 막지 못할 것이다. 하느님이 안 계신다면 내가 지금 어떻게 마음의 평화(平和)를 유지(維持)할 수 있겠는가? 국민(國民)과 역사(歷史)에 대한 신뢰(信賴)가 없다면 나의 일생(一生)은 완전(完全)한 실패작(失敗作)이었다는 간탄(艱嘆) 이외(以外)에 나의 입에서 나올 말이 무엇이겠는가?
<1980년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 비상군법회의 재판 이해찬 최후진술>
이 재판이 과연 정당한 재판이냐?
이 군사법정이 혁명 재판부인지 쿠테타 재판부인지를 분명히 밝혀라.
만일 이 재판이 혁명 재판부라면 혁명의 대의명분이 무엇이냐?
수천명의 광주 시민을 살상하고 전국에서 수천명의 학생 시민을 구속한 혁명의 명분이 과연 무엇인가를 분명히 밝혀라.
명분이 없는 혁명은 없다. 그것은 바로 권력을 뺏는 쿠데타다.
이 재판이 혁명재판부가 아니라 쿠테타 법정이라면 내란 음모를 자행한 것은 여기 이 자리에 오랏줄로 묶여있는 김대중 선생, 문익환 목사, 이문영 교수, 고은 시인, 한승헌 변호사를 비롯한 우리 24명의 동지들이 아니라 전두환 일당인 바로 당신들이다.
박정희가 18년만에 비참한 종말을 고했듯이, 당신들 전두환 일당도 10년이 못 가 망할 것이다.
이것이 역사의 심판이다.
남녘땅 광주 등지에서 무수한 동포들이 비명에 사라져 갔는데
내가 이렇게 시퍼렇게 살아 있다는 것이 한없이 부끄럽다.
당신들의 총칼에 죽어간 우리 동포들의 원혼이 구만리 청천 하늘을 떠돌고 있는데 내 어찌 편한 잠을 자겠는가.
이 영혼들을 위로하는 길은 이 땅을 민주화하는 것뿐이다.
나는 이 목숨을 다바쳐 이 땅이 민주화 될 때까지 싸워 나가겠다.
전두환 일당인 당신들을 붙잡아 이 법정에 세우겠다.
나는 당신들이 저지르고 있는 역사적 범죄를 결코,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
---이해찬 1980년 비상군법회의 재판 최후진술---
김민석 국무총라 고(故) 이해찬 제36대 국무총리 사회장 영결식 조사
빚졌습니다.
민주주의도 대한민국도 고인에게 빚졌습니다.
고문과 투옥에도 민주주의를 지켰고,
민주세력의 유능함을 보여
후배들 정치 진출의 길을 냈습니다.
"정책, 조직, 정무 뭐에 제일 강하세요?" 제 질문에
"나야 정책이지" 하셨던 것이 생각납니다.
탁월한 정책 역량으로
나라와 국민을 섬겼습니다.
민주정부도 민주당도
이해찬에게 빚졌습니다.
네 번의 민주정부 모두
이해찬이 앞장서 화살을 막아내며
후보들을 지켜낸 결과였습니다.
그의 시스템 공천은 정당정치의 진보였습니다.
10년 선배인 고인께 참 많이 배웠습니다.
최고의 선거였다 자부하신 95년 서울시장 선거부터
마지막으로 선대위원장을 맡으신 2024년 총선까지
수많은 선거를 바로 옆에서 치렀습니다.
흐름을 읽는 것, 흐름을 바꾸는 것.
다 선배님께 배웠습니다.
지난 30년 민주당의 큰 선거는 다 이해찬을 거쳤고,
선배님 밑에서 선거를 치러 온 것은
제게 자부심이었습니다.
돈도 협박도 안 통했습니다.
윤석열의 계엄 소식이
하도 시시해 다시 주무셨다는 기백은
당당함을 넘어 통쾌했습니다.
원칙의 힘을 지니셨습니다.
밥 먹고 술 사는 친목 정치가 아니라
공적 책임의 원칙 정치가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 이재명의 동지들을
모두 빈소에 모아냈습니다.
제게는 은인이셨습니다.
10년 후배의 서울시장 선대위원장을 맡아줄 만큼 아껴주셨고,
열 번 넘게 당의 선거를 총괄해 본 제 경험의 원류였고,
제 정치적 과오를 뼛속 깊이 반성케 한 가장 무서운 채찍이셨고,
18년 만의 정치 복귀를 길터주신 감사한 선배셨습니다.
선대위원장과 상황실장을 각각 맡아 치른 24년 총선 직후,
"이게 마지막이니 이젠 자네들이 해",
몇 번이나 반복하신 그 말씀이
지난 대선에 임하는 무거운 압박이자
책임감이 되었습니다.
서거 일주일 전에
김대중 대통령께서 같은 말씀을
이해찬에게 남기셨음을 후에 알았습니다.
총리가 되고 처음 길을 여쭌 것도 선배님께였습니다.
선배님처럼 대통령을 잘 모시고 싶었습니다.
"나는 판단관이지"
하신 말씀도 기억합니다.
그 판단관의 시야가
이미 다음 민주정부 너머까지 향해 있던 것도 압니다.
여쭤볼 수 있어 좋았고,
혼날 수 있어 좋았고,
의지할 수 있어 좋았습니다.
여쭤볼 게 아직 많은데,
판단할 게 너무 많은데,
흔들림도 여전한데,
이제 누구에게 여쭤보고,
누구에게 판단을 구하고,
누구에게 의지해야 합니까?
빈소를 찾으신 대통령님과 김혜경 여사께서
그리도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괜히 평통 수석부의장을 하시게 해서"
멀리 베트남에서 공무 중에 돌아가신 데 대한 자책이셨습니다.
유해를 모신 비행기를 기다리며 생각했습니다.
"왜 베트남이었을까?"
한반도 평화의 마지막 소명을 불태우던 그가
분단과 전쟁을 겪은 나라,
북미 회담의 아쉬움이 남은 나라
베트남에서 쓰러진 것은 운명적 상징이었습니다.
쓰러지는 순간까지 겨울 광야의 독립군처럼 싸우며 일했던
우리의 대장부엉이는 그렇게 이해찬답게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
하여 더는 슬퍼하지 않겠습니다.
대신 그의 평생 주문을 외칩니다.
"성실하고 절실하고 진실하라!"
"공적책임감! 퍼블릭 마인드를 가져라!"
평생 공사가 분명했던 이해찬이지만
독재와 싸워라 응원했던 선친을 자랑했고,
평생 동지 아내를 사랑했고,
손주를 예뻐한 딸 바보였고 ,
무뚝뚝한 듯 속정 깊은 따스한 선배였음을 압니다.
형수님도 따님도 외롭지 않게 하겠습니다.
대한민국 제36대 국무총리
역대 최고의 공직자
저의 롤 모델. 이해찬 선배님.
이제 일을 멈추시고
직접 설계하신 세종에서 편히 쉬십시오.
한반도 평화에 딱 남기신 숙제는
저희가 반드시 이뤄내겠습니다.
빚 많이 졌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국민과 함께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 다섯 가지가 즐거워야 삶이 즐겁다 ◑
첫째, 눈이 즐거워야 한다.
눈이 즐거우려면 좋은 경치와 아름다운 꽃을 봐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행을 자주 해야 아름다운 경치와 아름다운 꽃들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가능하다면 해외나 국내 여행을 자주 하여야 할 것 같다.
외국 사람들은 돈을 벌어 어디에 쓰느냐고 물으면 여행하기 위해 번다는 사람이 많다.
여행은 휴식도 되고 새로운 에너지를 충전하는 기회도 되는 것이다.
꼭 여행만이 눈이 즐거운 것은 아니다.
개인에 따라 여행이 여의치 않는다면, 하루 시간 중 짬나는 대로 웃기는 글이나, 웃기는 사진을 보면서 맘껏 웃을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진다면 그것이 바로 즐겁게 사는 것이 아니겠는가.
둘째, 입이 즐거워야 한다.
입이 즐거우려면 맛있는 음식을 먹어야 한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란 말이 있지 않은가.
어떻게 보면 먹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고 볼 수도 있다.
우리 몸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우리 몸에 필요한 영양소를
골고루 섭취해야 하기 때문이다.
식도락가는 아니더라도 미식가는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미식가는 맛있는 음식을 찾는다.
지방에 따라 그 지방의 유명한 향토 음식이 있다.
특별한 향토 음식점을 미리 알아보고 찾아가는 것이 현명하다.
셋째, 귀가 즐거워야 한다.
귀가 즐거우려면 아름다운 소리를 들어야 한다.
계곡의 물소리도 좋고 이름 모를 새소리도 좋다.
자기가 좋아하는 가수의 음악을 듣는 것도 귀가 즐거운 것이다.
조용히 음악을 감상하는 것이 정서에 얼마나 좋은지 모른다.
음악을 즐기는 사람치고 마음이 곱지 않은 사람이 없다.
넷째, 몸이 즐거워야 한다.
몸이 즐거우려면 자기 체력과 소질에 맞는 운동을 하여야 한다.
취미에 따라 적당한 운동을 하면 건강에도 좋고 몸도 즐거운 것이다.
다섯째, 마음이 즐거워야 한다.
마음이 즐거우려면 남에게 베풀어야 한다.
가진 것이 많아야 베푸는 것이 아니다.
자기 능력에 따라 베푸는 것이다.
남에게 베풀 때 정말 마음이 흐뭇한 것이다.
마음으로라도 베풀어야 한다.
남을 칭찬하는 것도 베푸는 것이다.
마음이 즐거워야 진정한 즐거움이 있는 것이다.
-좋은글 중에서-
우리 앞에 남은 세월
푸른잎도 언젠가는
낙엽이 되고
예쁜꽃도 언젠가는 떨어 지지요
이세상에
영원 한것은 없습니다
오늘 이시간도 다시 오지 않습니다
영웅호걸 절세가인도
세월따라 덧없이 가는데
우리에게 무엇이 안타깝고
미련이 남을까요
누구나 그러하듯이
세월이 갈수록 곁에있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떠나가고
남은 사람들 마저 세상과
점점 격리되어 외로워 집니다
이별이 점점 많아져 가는
고적한 인생 길에
서로 서로 안부라도 전하며
마음 함께하는 동행자로 인하여
쓸쓸하지 않은
나날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나이들어 외롭지 않은
행복한 삶을 사는데
활력적이고 적극적인 활동이 대안입니다
세월앞에 누구도 예외는 없습니다
풍성하고 넉넉한 마음으로
좋은시간 보내야 합니다
아껴쓰면 20년 ....
대충쓰면 10년 .....
아차하면 5년 .....
까딱하면 순간 ....
우리앞에 남은 세월들 입니다.
= 좋은글 중에서 =
인생무상 (人生無常),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여행 중에 누군가 선술집에 걸어둔 글을 보고 옮겨 적었는데 웃기면서도 의미심장합니다.
사랑에 빠(溺)지는 18세ᆢ
욕탕서 빠(溺)지는 81세ᆢ
도로를 폭주하는 18세ᆢ
도로를 역주행하는 81세ᆢ
마음이 연약한 18세ᆢ
다리뼈가 연약한 81세ᆢ
두근거리는 것이 안 멈추는 18세ᆢ
심장질환이 안 멈추는 81세ᆢ
사랑에 숨 막히는 18세ᆢ
떡 먹다 숨 막히는 81세ᆢ
학교 점수 걱정하는 18세ᆢ
혈당, 당뇨 걱정하는 81세ᆢ
아무 것도 모르는 18세ᆢ
아무 것도 기억나지 않는 81세ᆢ
자기를 찾겠다는 18세ᆢ
모두가 찾아 나서는 81세ᆢ
불지 않으면 바람이 아니고,
가지 않으면 세월이 아니런가!
세월이 가도 늙지 않는다면 사람이 아닐 것입니다.
여보시게! 이 사람들 좀 보고 생각 좀 해보시게!
담배는 피웠으나, 술은 마시지 않았던 린바오[林彪]. 63세 사망.
술은 마셨으나, 담배는 피우지 않았던 주은래[周恩来]. 73세 사망.
술도 마시고, 담배도 피웠던 모택동[毛泽东]. 83세 사망.
술도 마시고, 담배도 피우고, 카드도 즐겼던 등소평[邓小平]. 93세 사망.
술도 마시고, 담배도 피우고, 카드도 즐기고,
첩도 있었던 장학량.103세사망.
술도 안 마시고, 담배도 안 피우고, 카드도 안 하고, 여자도 없고,
오직 좋은 일만 한 레이펑[雷锋]. 23세 사망ᆢ
그런데 왜 죽어?
인물 좋고, 허우대 좋고, 학벌 좋고, 가문 좋고,
인심 좋고, 돈 많고,
부러울 것이 하나도 없는데.
긴병에 효자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나마 가족들 고생 안 시키고 한 순간에 간다면 복 받은 것입니다.
세상 걱정한다고 크게 달라질게 없습니다.
그래도 걱정이 되면 오늘 까지만 걱정하고,
내일은 즐겁고 행복하게 웃고 살자!
힘들다고 술에 코 박을 수는 없는 일,
아프다고 세상을 떠나 버릴 수도 없는 것이다.
원망하고 짜증내면 주어진 삶, 자기만 괴로우니,
그냥 웃으면서 그러려니 하고 살자.
악몽을 꾸었다면 바로 잊어버리고
내일은 내일의 꿈을 꾸고 살자.
고맙게도 인생은 내일에도 계속되는 것처럼,
사는 날까지 우리는 건강하고
즐겁고 행복하게 웃으면서 살면 됩니다.
당신은 몇 살까지 살 수 있다고 생각 하십니까?
근래 부쩍 '100세 시대'라고 하니
100살까지는 살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은 하지만,
아래 자료를 보시면
80세까지 사는 것도 대단한 행운이요, 축복입니다.
한국인의 연령별 생존확률!
70세 생존확률 86%
75세 생존확률 54%
80세 생존확률 30%
85세 생존확률 15%
90세 생존확률 5%
90세가 되면 100명중 95명은 저 세상으로 가고
5명만 남는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확률적으로 건강하게 오래 살 수 있는 나이는 80세~85세입니다.
아파트나 돈은 90세까지 쓸 요량으로 하고
그 후의 일은 나 몰라라 하세요.
노자의 <도덕경>에는 우리의 삶을
귀생(貴生)과 섭생(攝生)으로 설명합니다.
귀생, 즉 자신의 생을 너무 귀하게 여기면
오히려 생이 위태롭게 될 수 있고,
섭생, 자신의 생을 억누르면
생이 오히려 더 아름다워 질 수 있다고 한 것입니다.
선섭생자, 이기무사지(善攝生者, 以基無死地)
"섭생을 잘 하는 사람은
죽음의 땅에 들어가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물질의 풍요와 삶의 편리함이 내 몸을 한없이 귀하게 대접하는
오늘날의 귀생이 오히려 화와 병이 될 수 있고,
내 몸을 적당히 고생시키는 섭생이
건강한 생을 위해 이롭다는 역설이 귀에 들어 옵니다.
"몸은 귀하게 여길수록 건강은 더욱 나빠진다."고 합니다.
대추나무에 대추를 많이 열리게 하려면
염소를 매어 놓는다고 합니다.
묶어 있는 염소는 특성상 잠시도 그냥 있지 않고
고삐를 당기며 나무를 흔들어 괴롭히면,
대추나무가 잔뜩 긴장하면서
본능적으로 대추를 많이 열도록하여 자손을 번식시키려는
필사적 노력을 하게 된다는 것이지요.
우리 몸도 그냥 편히 두면 급속히 쇠퇴하고
질병과 노화에 취약해 집니다.
적게 먹고, 많이 움직이고, 굽혔다 펴기도 하고,
흔들어 주고, 문질러주고,
비틀어주기도 하여야 생기가 더욱 발랄해 진다고 합니다.
사는거 별거 있을까요?
시간 만들어서 친구도 만나 식사도 하고,
막걸리도 한 잔 나누면서 사세요.
사는 날까지 운동도 하고,
좋은 일도 많이 하시고 웃고 사십시오.
맛 있는 것도 먹고, 먹고 싶은 것도 먹고,
두 다리 좋을 때 돈 아끼지 말고
가족과 함께 친구와 함께 여행도 다니세요!
좋은 것 보고, 맛 있는 음식 먹고 죽은 귀신은
때깔도 좋다고 하지 않나요?
나이 들어, 남에게 시키지 말고,
자기가 할 일은 두 발과 두 손으로
자신이 몸을 움직여 해야 건강합니다.
오늘도 사랑과 감사가 가득한 희망찬 하루와
당신의 행복을 응원합니다.
-옮긴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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