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면서**
우리는 이번의 시지각의 다섯영역의 내용을 " 조형의 기초와 분석(김춘일, 박남희 편역)"에서의 뵐플린의 견해를 중심으로 공부하였다. 그리고 게쉬탈트의 심리학적 측면과 연관성이 있음을 알고 거기에 대한 내용을 첨가하였다. 이 시지각의 다섯 가지 영역은 보편적인 시각과 지각의 인지되어지는 측면을 정리하여 놓은 것으로써 어떤 특정한 시기나 학파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므로 우리는 이것을 건축의 색채와 공간과 연관시켜 보았다. 시지각의 다섯영역 뵐플린은 예술의 주제와 매체의 변화는 양식에 내재하는 공통성을 그 속에 지니고 있으며 따라서 그 양식을 분석함으로써 지각하는 방식, 상상하는 방식을 찾아낼 수 있고, 이것은 애인 국가 사회가 어떤 발달단계에 속하는지를 특징짓는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시지각에 대한 뵐플린의 접근방법은 심리학적 내지 지각론이다. 이러한 지각적 접근은, 예술에 대한 표현론적인 접근의 취약점인 지나친 문학적 도덕적 사회적 연합을 피할 수 있다는 잇점이 있는 것이다. 지각론적 방법은 또한 시각예술에 매울 잘 들어 맞는다,. 뵐플린은 어느 한 학파나 민족 또는 한 지역의 '표현'으로서의 '양식'에 대한 논의는 예술작품의 독특한 질에 대해서 논할 수 없다고 본다. 따라서 그는 하나의 미수 사기로서 자기의 과제는 시각의 역사에 대한 해석과 분석이 되어야 하며 인류의 시각발달상의 필연적인 단계들에 대해 타구해야 한다고 보 았던 것이다. 아마도 뵐플린은 자신을 양식사가나 양식심리학자로 생각했던 것 같다. 예술가의 '눈'보다도 '예술의 형식' 예 과제가 더 많다는 것을 인식했다. 그는 '표현' 으로서의 미술에 대한 분석은 미흡했으나 미술에 구현되어 있는 지각적 인종 내지 국가적인 관련과 법칙성을 발견하는데 더 집착했다. 그러나 우리는 보는 것의 예술적 방식에 대한 이러한 야심적인 관찰에서 얻어진 결과를 무시할 수 없다, 그의 '피와 흙' 의 심리학화는 간과해도 좋겠으나, 그의 '시지각의 영역'들을 상당히 설득력이 있고, 또 그것을 적절히 활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모든 화가가 다 '자기의 피'로써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오래 전부터 알려져 있다." , " 상이한 시대는 상이한 예술을 낳게 했다. 시대와 종족은 상호 작용한다." ,"라틴족의 선적인 특징은 게르만적 감정을 멸시하려고 했던 징표다..."는 등등의 표현양식을 결정짓는다는 이론을 심리학적으로 했다는 것은 바로 이것을 말한다. 뵐플린은 사람들이 충분히 이해하고 깨달으리라고 생각했던 시각의 차이에 대한 인종적, 민족적인 관련에 대한 분석을 시도함으로써, 오히려 자기의 형안의 가치를 흐리게 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는 미술사를 재현적 표현양식의 역사로서 이해했고, 그 역사는 어떤 시대와 장소에서 지각에 대한 특성적, 전형적 양식에 입각한다 고 보았던 것이다. 이러한 지각의 양식들은 그에게 있어 다시 다섯가지의 영역, 또는 개념의 짝들로 나누어진다. 그 각 영역에는 두 개의 극점이 있으며 , 발전과정은 그중 한 극에서 다른 극에로 이동하는 과정이다. 예를 들면, 첫 번째 영역은 선적인 표현양식에서 채색적인 양식에로 발전된다. 이것은 우리들이 하나의 채색미술을 대할 때, 그것은 선적인 단계를 이미 통과한 수준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즉, 그것은 하나의 개인으로서 변전을 이룬 것이며, 또는 그가 속하는 집단이나 전통에 의해서 그러한 진전이 그에게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국가와 미술유파들은 서로 다른 역사적 시대들에서의 발전을 거듭해 나간다,. 그리하여 어떤 나라는 채색적 단계에 도달했는가 하면 어떤 나라는 선적인 단계에 머물러 있다. 인종적 요인과 다른 여러 요인들이 예술가로 하여금 어떤 양식의 영역을 다른 진보된 양식보다도 더 좋아하게끔 하는 수가 있다. 그러나 뵐플린은 어떤 양식이 다른것보다 우수하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다섯 개의 양식 발전의 영역은 다음과 같다. 1)선적인 양식에서 채색적인 양식에로 2)평면에서 후면으로 3)닫힌 형태에서 열린 형태로 4)중다성에서 통일성에로 5)절대적 명료성에서 상대적 명료성에로 한 범주에서 표현의 첫 번째 개념이 그 다음 번으로 이어지듯이, 시각적인 만족을 주는 가능성도 계속 변천된다. 이러한 개념들은 시각적인 실재를 재현 내지 모방하 는 형식으로 작용하는데 그것들은 또한 장식적인 역할을 하기도 한다. 즉. 지각대상을 묘사하는 것은 물론이요, 기쁨을 제공해 주는 힘을 가진다. 다시 말하면, 어떤 미술양식도 재현이나 모방, 장식이나 미적 심화, 개인적 및 사회적 표현양식 등의 미적 기능을 수행할 힘이 충분하다. 그러나 뵐플린에 의하면, 양식의 변화는 이러한 역할들을 수행할 새로운 방식을 제공해 주고, 또 선행이 퇴보할 것을 막는다. 이것은'심리학적 법칙'이 궁극적으로는 예술형태로 스스로를 표출하는 '지각의 흐름'을 지배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 영역양식에서 또 다른 영역으로 발전한다고 하는 미적 지각양식의 변화에 대한 뵐플린의 심리학적인 해설에 대해 우리는 많은 흥미를 가지게 된다. 이제 그 중요한 요지를 지각적 심리와 관련하여 정리해 보기로 한다. 1)선적인 양식에서 채색적인 양식에로 먼저 선적인 지각양식이란 무엇인가? 이것은 보는 양식으서 그 용어가 말해주듯이, 형태의 윤곽선이나 외곽선을 강조한다. 그것은 사물의 촉각, 또는 질료 내지 질적인 것과 관계가 된다. 이것은 질감에서 보여주는 바와 같은 배타, 독점적인 속성과 혼돈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것은 반대로 물질세계의 비물질적, 정신적 또는 관념적인 것이다. 어린이의 선화는 때로 이런 유의 선묘성을 드러낸다. 어린이들은 한 사물의 형태를 다른 형태가 침범하는 것을 싫어한다. 왜냐하면 그것을 침범하게 되면 사물의 경계선을 헤져서 그 사물과 혼돈 되기 때문이다. 어린이들의 선적인 작품에는 색채의 구별과 명암의 구분이 매우 분명하다는 것을 알게된다. 그것을 보고 있노라면 형태들의 윤곽이 그 사물에 대한 지식이 되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 다. 다른 한편으로' 채색양식' 은 지각과 형태의 표현에 있어서 사물의 입체감과 양감을 강조한다. 형태의 경계선이나 한계선 따위는 사물들이 보여지는데는 이차적인 것들이기 때문이다. 지각한다는 것은 사물간의 차이보다도 사물들 가운데서 어떤 사물의 일관성을 가지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사물을 독립해서 지각하지 않고 사 물들과 공관들의 관계속에서 보는 것이다. 우리는 선적인 관계를 가지고 대상의 안정감과 고정감의 인상을 받게 되지만 반면에 채색적인 양식을 통하여 대상의 질의 변화, 그리고 사물의 고정적인 특수한 질의 현상을 인식하게 된다. 이제 이 지각의 양식을 선화와 채색화, 그리고 건축과 조각 등에 적용시켜보자, 파울 로치의 <일본전쟁의 신>은 확실히 채색적인 작품이다. 이 작품의 윤곽선은 특별히 눈을 끌지 못한다 즉, 시선이 곧바로 형태의 안으로 끌려들어가 버린다. 강조점이 명암에 주어져 있기 때문이다. 이와 달리 마리니의 <말과 기사>는 확실히 선적인 작품이다. 관찰자의 눈이 윤곽선에 먼저 간다음에 작품의 내부로 옯겨간다. 형태의 내부를 지각할 떄도 우리는 작품이 스스로를 제시하는 분명성과 구별성을 깨닫게 된다. 이는 단계적인 지각의 흐름이 뚜렷한 경우이다. 선적인 양식 및 채색적인 양식의 개념은, 우리들이 형태적 질서의 양식과 정서적 양식으로 서술했던 것과 일치한다. 그런데 이제 우리는 선성(linearty)을 지각에 대한 태도와 관련짓게 된다. 뵐플린의 범주들은, 보여지는 것과 미술적으로 묘사되는 것은 객관적으로 지각이 가능한 것이 아니다. (이점에서 그는 게쉬탈트 심리학과 유사하다). 오히려 미술가가 객관적 지각의 양식에서 선택한 결과라는 것을 과시한다. 뵐플린은 어떤 시대와 장소에서는 지각적 선택이 아주 한정 돠어 있다고 말한다. 이것이 미술의 역사에서, 미술을 지리학적 범주와 역사적 범주에 따라 나누는 이유가 된다. 학자들은 특정한 시간과 장소에서 어떤 지각양식이 가능한가를 알아야만 한다. 뵐플린은 북부유럽과 남부유럽에서의 르네상스로부터 바로크에 이르는 시대에 걸쳐 근본적인 변천에 대해서 연구하고 있다. 그러나 현대미술에 대해서 보면, 지각에서의 심리적인 차이는 미술양식을 분석하는 도구로서 유용할 수도 있지만, 민족성과 지역성을 언급하기엔 지나치다는 것이 오늘날 일반적인 비판이다. 2)평면에서 후면에로 두 번째의 개념은 평평한 면에서 화면뒤쪽으로 쑥 들어간 후면에로 이행되는 방전과정이다. 평면적인 양식을 구사하는 미술가는 화면상에 존재하는 액션만이 아니라, 화면과 '평평하게'이어지는 액션도 본다. 다시 말하면, 화면상의 어떤 형태들에 적용된 동작을 수직화면과 나란하게 ,그리고 또 화면과 직각적으로 만나는 상하면에서 나온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전후면적 운동, 즉 나오고 들어가는 운동이 아니다. 회화에서 볼 때,'깊이' 에 대한 묘사는 위의 두 가지 양식을 통해 다뤄진다. 그러나 후면적인 양식은 시각의 장애에서 전진 후퇴의 운동을 하면서 균형을 유지한다. 회화에서의 평면적인 양식의 고전적인 예는 쇠라의 <그랑자트>가 될 것이다. 거기서는 회화적인 깊이에 대해 여러 개의 깊이가 표현되어 있지만, 그 각각의 깊이는 결국 화면 그 자체와 평행하는 평면에 존재한다. 후면적 운동의 한 사례는 마르크의 <청마>에서 볼 수 있다. 말들의 갈기부분이 특히 그림의 뒤쪽과 앞쪽으로 곡선운동을 보여주고 있다. 형태들을 '단축' 시킨 것은 확실히 그림에서 중요한 후면적인 효과를 주는 장치가 되고 있다. 한편, 조각에서 보면, 조각은 묘사적인 장치를 필요로 하지는 않지만, 그러면서도 후면적 운동을 보여준다. 가령 리베라의 구성<청과 흙>과 퍼버의 <피라네시에의 존경>이 그 예이다. 반대로 라소는 평면적인 조각가이다. 이 작품의 모든 선의 운동은 작품이 분명하게 보여지는 전면에 대해 직선적이고 평행적이다. 라소의 조각작품은 또한 초기의 브라크의 분석적 입체주의 그림과 유사한 평면성을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