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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서 은총을 베푸시어, 너희가 법의 종으로서가 아니라 은총의 지배 아래 자유인처럼 영적인 아량으로 준수하기를 바란다. [8,1]
그는 사람들이 풋 열심에서 수도생활을 하겠다고 어떻게 수도원을 찾아왔으며, 그러고 나서 얼마나 빨리 싫증을 내고 자신들의 의무에 부실한 자가 되는지를 종종 보아 왔음에 틀림 없다. 그러므로 그는 규칙서 마지막 항에서 우리에게 규칙을 충실히 지키라고 권고한다. (172쪽)
☕ 주어진 규칙을 충실히 지키는 것이 신심생활의 시작이며 끝이다.
그는 하느님께 향한 마음에서 우러나온 기도의 형식으로 이렇게 권고한다: “주님께서 은총을 베푸시어, 너희가 … 이 모든 규칙을 사랑으로 준수하기를 바란다.” 그는 하느님만이 수도생활을 훌륭히 할 수 있는 힘을 우리에게 주시고 지탱시킬 수 있다는 것을 잘 깨닫고 있었다, (172-3쪽)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하는 ‘사랑’은 복음에서 말하는 사랑을 뜻한다. 그것은 그리스도적 생활의, 따라서 수도생활의 기본 법칙이다. 만일 이 규칙서가 사랑의 정신에서가 아니라 아우구스티누스의 훌륭한 저서들에 나타나 있는 것처럼, 어떤 세속적 이유나 자신의 어려움들을 피하려는 이기적 목적으로 지켜진다면, 그러한 수도생활은 하느님의 눈에 가치 없고 궁극적으로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이다. (173쪽)
☕ 사랑 없는 믿음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사랑만이 인간을 하느님과 결합시킨다. 그러므로 아우구스티누스는 돌을 반드시 땅에 떨어지게 하는 중력의 힘에 사랑을 비유한다: “물체는 제 무게 따라 제자리로 기울고 … 불은 위로 당기고, 돌은 아래로 떨어지고 … 나의 무게는 나의 사랑, 어디로 이끌든지 그리로 내가 가오리이다”(『고백록』 13,9,10) (173쪽)
사랑은 우리가 져야 할 어떠한 무거운 짐이라도 가벼운 것으로 그리고 기쁨의 원천으로까지 바꾸어 놓을 수 있다고 그는 또한 확신하고 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사람이 사랑을 하게 될 때, 수고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지 않고, 오히려 그 수고 자체도 사랑하게 된다“(『과부 신분의 유익함』 21,26). (173쪽)
☕ 사랑은 수고를 감사로 변화시킨다.
하느님은 “너희에게 하느님의 딸들이 되는 능력을 주셨으니, 내적으로 아름답게 되라고 너희에게 요구하실 권리를 갖고 계시다(요한 1,12 참조). 그분이 너희에게 바라시는 것은 육체적인 아름다움이 아니라 정신적인 아름다움이다”(『거룩한 동정』 55,56). (174쪽)
☕ 진정 아름다운 것은 육체적인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우리에게 “영적인 아름다움을 사모”하는 사람이 되라고 할 때, 단순히 또는 우선적으로 덕을 갖춘 영혼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영혼 위에 있는 아름다움”을 염두에 두고 있다. 즉, 이 아름다움은 영혼 자신이 끊임없이 갈망하는 하느님의 창조되지 않은 아름다움이다(『고백록』 10,34,53). 그가 선호하는 하느님에 대한 전형적인 표현은 최고의 아름다움, 즉 창조된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을 무한히 초월하는 아름다움인 것이다. (174-5쪽)
그의 “영적인 아름다움" 이란 표현은 신적 지혜의 아름다움을 우선적으로 의미한다. 그는 개종 초부터 이 신적 아름다움을 사모하고 마음을 다해 묵상하는 것이 그의 열렬한 소망이 되었다. 개종한 그는 『독백』이란 저서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 아름다움을 보려는 내 희망이 커지면 커질수록 그만큼 나의 사랑과 열망이 그것에 집중된다”(『독백』 110,17). 그러나 그는 하느님의 아름다움과 참된 지혜를 발견할 때까지 길고 어려운 여정을 가야만 했다: “늦게야 임을 사랑했습니다. 이렇듯 오랜, 이렇듯 새로운 아름다움이시여, 늦게야 당신을 사랑했습니다. … 임 한번 맛본 뒤로 기갈 더욱 느끼옵고, 임이 한번 만지시매 나는 당신의 평화에 대한 사랑의 불길로 타오르나이다”(『고백록』 10,27,38). (175쪽)
우리 또한 우리의 갈리지 않은 사랑을 하느님의 최고 아름다움에 집중시켜야 한다. 이것은 영적인 아름다움과 하느님의 지혜를 조용히 묵상하고 관상하기 위한 시간을 항상 마련하는 것과, 이로써 강생하신 하느님의 아들 우리 구세주의 아름다움을 또한 만나게 된다는 것이, 우리 수도생활을 위해 왜 그처럼 중요한지 그 이유가 된다. (175-6쪽)
☕ 하느님을 묵상하는 즐거움을 가져야 한다.
“마음을 다해 그분을 사랑하십시오. 그분은 모든 인간보다 훨씬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이 사랑하는 분의 아름다움을 응시하십시오! … 거만한 자들이 조롱하는 바로 그분의 특징들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들인지를 생각해 보고 깨달으십시오. 마음의 눈으로 삽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의 상처를, 부활하신 주님에게 남겨져 있는 상흔(傷痕)들을, 그리스도께서 운명하시면서 흘리신 피를 묵상해 보십시오. 이것들은 신자들의 보화이며 우리 구속의 대가인 것입니다!”(『거룩한 동정성』 54,55). (176쪽)
수도 규칙을 준수해야 하는 그 정신과 마음의 태도를 우리에게 더 생생하게 주지시키기 위해 아우구스티누스는 신약성경에 나오는 두 가지 이미지를 사용한다. 먼저, 우리는 “착한 수도생활에서 오는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 이 말은 예수께서 산상설교에서 우리에게 하신 다음의 권고를 바꾸어 말한 것이다: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16). 이것은 수도자인 우리가 수행해야 할 첫째 사도직 활동이다. 우리는 우리의 생활양식과 선한 행위들로 우리의 천상 아버지께 영광을 드려야 한다. (176-7쪽)
☕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기는 사람이다.
수도 공동체와 그 안에 사는 각자는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 즉 교회이며, 따라서 공동으로 또는 개인적으로 그리스도를 증거해야 한다. 이 사도직은 그리스도적 증거의 뚜렷한 삶을 통해, 사랑의 행위들을 통해, 그리고 더 넓게는 교회에 봉사하려는 우리의 각오를 통해서 이루어질 수 있다. (177쪽)
☕ 그리스도께 봉사하기를 꺼리는 이는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없다.
“법의 종으로서가 아니라 은총의 지배 아래 자유인”으로 살아야 한다. 이미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적 자유의 주제를 발전시키기 위해 종과 자유인의 대비를 실감나게 사용하였다(참조: 로마 6,14-23; 2코린 3,17). 이 주제 역시 오늘날에 잘 적용된다. 하느님 자녀의 자유란 하느님과 인간에 대한 모든 의무를 무시하는 그런 자유를 뜻하지 않는다. 그리스도께서 주신 복음적 자유의 개념은 법을 지키지 않아도 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과 사랑을 갖고 외적 강요나 노예적 두려움 없이 하느님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을 뜻한다. 이 자유는 성령의 은사이다. (178쪽)
아우구스티누스가 규칙서 마지막 장에 해당되는 여기에서 의도하는 것은,수도생활은 자유롭고 즐겁고 하느님을 섬기는 생활이어야 하며, 그래서 우리가 규칙을 내심으로 거부하면서도 겉으로는 또 어느 정도 억지로 복종하는 체 하는 생활을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우리에게 심어 주려는 것이다. 외양적이고 법적인 봉사는 참된 그리스도인에게 어울리지 않으며, 더구나 수도생활을 하겠다고 하느님께 서원한 사람들에게는 더욱 그러하다. 수도 규율은 우리가 끙끙거리며 억지로 지고 가야 하는 가혹한 멍에가 아니라, 즐겁고 기꺼운 마음으로 그리고 더 나아가 기쁨과 사랑으로 우리 생활에 적응해 나가는 유쾌하고 가뿐한 짐이 되어야 한다. (178-9쪽)
☕ 수도자의 삶은 짐이 아니라 기쁨이다.
“강요에서가 아니라 사랑으로 바쳐질 때 그 섬김은 자유로운 것입니다. … 그러므로 여러분은 종이면서 동시에 자유인입니다. 여러분은 피조물이기 때문에 종이며, 여러분의 창조주이신 하느님으로부터 사랑받고 있기 때문에 자유인입니다. 여러분은 창조이신 그분을 사랑하기 때문에 또한 자유인입니다”(『시편 주해』 99,7). (179쪽)
누구든지 자신에게 어떤 잘못이 있음을 깨닫게 되면, 자기의 과오를 뉘우치고 앞으로는 더 조심할 것이며, 또 하느님께서 그 잘못을 용서해 주시고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해 주시도록 기도할 것이다. [8,2]
“여러분이 선하다 해서 자랑하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여러분의 선함을 자랑하는 가운데 여러분은 사악해지기 때문입니다”(『시편 주해』 25,2,11). 감사는 "온갖 선을 베푸시는” 분이신 하느님께 드려야 하는 것이다. (181쪽)
☕ 자랑과 교만은 종이 한 장 차이다.
수도생활로 부름받은 그 자체가 우리의 공로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완전히 자유롭게 주시는 사랑의 선물이라는 것이다. 서원을 하고 그것을 죽을 때까지 충실하게 지킬 수 있는 것 역시 오로지 하느님의 도우심이다. (182쪽)
“형제자매들이 화목하게 함께 사는 것은 하느님의 은총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 자신의 능력과 공로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부터 이슬처럼 내려오는 하느님의 선물과 은총에 의해서 되는 것입니다”(『시편 주해』132,10). (182쪽)
그는 평수사 수도원에 보낸 한 편지에서도, 모든 선행의 목표는 하느님의 영광이어야 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는 한 편지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여러분이 굳은 결심으로, 기도나 단식 또는 선한 행위 등 무슨 일을 행하든지 … ‘모든 것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십시오’(1코린 10.31). 하느님은 '모든 사람 안에서 모든 활동을 일으키시는’ 분이십니다(1코린 12,6). 또한 성령으로 열렬한 자 되어(로마 12,11 참조) 여러분의 '영혼이 주님 안에서 용약하게’[시편 34(33],3 참조]되도록 하십시오’(『서간』 48,3). 그는 또한 그 당시의 봉헌된 동정녀들에게, 속이 텅 빈 자기 자신을 하느님 앞에 내세워 자신의 의로움을 자랑하려(로마 10,3 참조) 들지 말고 오히려 그분께 자신을 복종시키고 그분께만 영광을 드리도록 노력하라고 권고한다(『거룩한 동정성』 52,53 참조). (183쪽)
우리가 양심을 자주 성찰한다면, 자기만족에 도취된 교만의 유혹에 빠지지 않고 오히려 규칙 준수에 있어 미진한 점이 많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이 때문에 아우구스티누스는 다음과 같은 지혜로운 충고로 규칙서를 끝맺는다: ”“누구든지 자신에게 어떤 잘못이 있음을 깨닫게 되면, 자기의 과오를 뉘우치고 앞으로는 더 조심할 것이며, 또 하느님께서 그 잘못을 용서해 주시고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해 주시도록 기도할 것이다.” 이와 같이 『아우구스티누스 규칙서』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주님의 기도’의 마지막 청원인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아멘"이라는 청원으로 끝을 맺는다. (183쪽)
☕ 양심의 성찰은 자신을 되돌아보게 한다.
첫댓글 하느님을 묵상하는 즐거움을 가져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