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선봉 주변의 마가목, 가을 설악의 진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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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악산은 우선 그 이름부터 시원스럽다. 잇소리 ㅅ으로 시작되는 상쾌한 첫소리에 유음(流
音) ㄹ을 달아 밝음 모음 ㅏ에 이어 붙여서는, 마침내 ㄱ으로 꽉 맺고 끊는 확실한 음형태의
명료도가 들어 입과 귀를 함께 시원하게 해준다. 게다가 후덥지근한 속세에 묻혀 사는 사람
들에게 설악산이란 이름은 또 흰 눈의 순결한 이미지며 그 냉기를 한줄기 청량한 바람처럼
끼얹어준다. 그것은 무슨 그윽하고 무거운 뜻으로 압도해오는 한국의 여느 산 이름에 비하여
한결 상쾌한 것이다.
―― 김장호(金長好, 1929~1999), 『韓國名山記』의 「설악산(雪嶽山)」에서
▶ 산행일시 : 2016년 9월 17일(토), 흐림
▶ 참석인원 : 21명(버들, 모닥불, 스틸영, 솔잎, 중산, 악수, 대간거사, 소백, 킬문, 온내,
상고대, 사계, 두루, 맑은, 신가이버, 해마, 해피, 대포, 가은, 승연, 메아리)
▶ 산행거리 : GPS 도상거리 11.4km
▶ 산행시간 : 8시간 52분
▶ 교 통 편 : 두메 님 24인승 카운티 버스와 해마 님 스타렉스에 분승
▶ 구간별 시간(산의 표고는 국토지리정보원 지형도에 따름)
06 : 30 - 동서울터미널 출발
08 : 50 - 창암 근처, 산행시작
09 : 12 - 상봉 서릉 능선마루
09 : 30 - △665.6m봉
11 : 08 - 1,000m 고지
11 : 57 - 1,206m봉, 점심
13 : 00 - 상봉(1,242m)
13 : 24 - ┣자 갈림길 안부, 화암재(禾巖-)
13 : 53 - 신선봉(神仙峰, 1,212m)
15 : 35 - 920m봉 직전 안부
16 : 30 - 너덜지대 통과
17 : 30 - 임도
17 : 42 - 화암사 입구 주차장, 산행종료
18 : 26 ~ 20 : 22 - 원통, 목욕, 저녁
22 : 19 - 동서울 강변역, 해산
1. 신선봉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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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신선봉에서 바라본 울산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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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상봉 오르면서 바라본 황철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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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봉(1,242m)
속삭이듯 창문을 가볍게 두드리는 빗소리에 잠을 깬다. 밖을 내다보니 캄캄한 새벽이다.
설악산을 가기로 했지. 가는 도중 차안에서 더 자자하고 일어난다. 배낭 꾸린다. 비가 오면
배낭이 훨씬 무겁다. 비옷, 여벌옷, 스패츠, 우산 등등. 오늘은 도시락을 배낭에 넣어가야 한
다. 스패츠는 천보다는 지지난주 태백산 산행 때 비닐봉지로 다리와 등산화를 감싼 대용 방
편이 효과를 보았기에 이번에도 비닐봉지를 준비한다.
동서울터미널 만남의 광장. 근래 드물게 많은 회원이 모였다. 21명. 비가 온다는 예보에 아랑
곳하지 않고 나왔다. 여러 산행 팀이 모인 합동산행 같다. 정확히 6시 30분에 출발한다. 빗발
이 점점 굵어진다. 아울러 산행지 선정에 대한 근심이 깊어간다. 신선봉은 암릉과 너덜지대
가 많아서 맑은 날에도 지나기가 여간 까다롭지 않다. 어떡할까? 공론에 부쳤으나 기상청의
빗나가는 일기예보가 오늘이라고 다르랴 당초 계획대로 진행하기로 한다.
잠깐 졸았는데 서울춘천간고속도로 동홍천IC를 빠져나와 화양강휴게소다. 여느 때와는 다르
게 산악회 대형버스가 보이지 않는다. 자판기 커피 뽑아 졸음 쫓아버리고 산행채비하기 시작
한다. 차창 밖 먼 데 산릉은 안개가 짙게 드리웠다. 그래도 카메라는 이중삼중으로 싸서 챙긴
다. 황태판매장 지나고 미시령 옛길 오르기 전 창암 근처다.
비가 뜸해졌다. 비옷 벗고 간이건물 뒤쪽 가파른 생사면의 풀숲과 낙엽을 헤친다. 곧 인적이
뚜렷한 엷은 지능선을 찾아낸다. 군인의 길이다. 사용한 지 오래된 군부대 침투훈련장을 지
난다. 펑퍼짐하던 등로가 가팔라진다. 저마다 갈지자 그리며 오른다. 상봉 서릉 능선마루까
지 겨우 22분 걸렸지만 가쁜 숨으로는 무척 긴 시간이었다.
인적은 더욱 분명하고 간혹 산행표지기가 보인다. 완만한 오르막이다. 길게 올랐다가 약간
내리고 다시 길게 오르기를 반복한다. 그러나 풀숲과 잡목 헤치자니 적잖이 힘이 든다.
△665.7m봉은 풀숲과 흙더미에 묻힌 삼각점을 발굴하고서 알아본다. 삼각점은 ╋자 방위표
시만 보인다. 그 뒤로 약간 되똑한 봉우리 턱밑에는 토치카가 두 눈 부릅뜨고 우리를 지켜보
고 있다.
4. 달걀버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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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노루궁뎅이버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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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능이(能栮), 산중에서 라면 끓일 때 넣었는데 아주 일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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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끈적민뿌리버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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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금강초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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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투구꽃, 산행 내내 동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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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상봉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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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이 버섯이 나오는 때이다. 그렇다고 등로 벗어나 빗물에 젖은 잡목 숲을 헤집을 엄두는
내지 못하고 걷는 중 눈으로만 사면을 스캔할 뿐이다. 더러 눈먼 송이 걸릴라 스틱으로 도드
라진 소나무 낙엽더미를 건드려본다. 버섯 또한 발로 딴다. 능이이며 노루궁뎅이버섯이 유독
가은 님에게만 걸리는 것은 종횡무진 누비는 그의 발 때문이다.
1,000m 고지는 평평한 하늘 가린 숲속이다. 모두 모여 휴식한다. 휴식 중에도 가은 님의 눈
은 빛났다. 도대체 20명이 가은 님 한 명을 당해내지 못한다. 나를 비롯한 몇몇은 해피 님이
가져온 족발(돼지 앞발이다. 대간거사 님이 족발을 잘 몰라서 부기한다) 뜯는 데 정신이 팔
려 그렇다 치고, 쌍둥이 노루궁뎅이버섯을 바로 곁에 두고 그냥 지나친 상고대 님은 할 말이
없다.
가파른 오르막이 이어진다. 고산 냄새가 물씬 난다. 잡목이 철사보다 더 굳세다. 고개 빳빳이
세우다가는 나뭇가지에 머리 받친다. 머리 조심! 줄줄이 복창하며 지난다. 등로는 투구꽃과
산구절초가 어울린 꽃길이다. 그들과 동무하며 걷는다. 1,206m봉. 평평한 터 골라 점심자리
편다. 오늘도 신가이버 님이 셰프와 마담을 겸한다.
무릇 음식 맛은 ‘재료의 맛’이기도 하다. 물론 좋은 재료를 알아보고 사용할 것인가 말 것인
가 선별하는 것은 오로지 셰프의 몫이다. 라면에 설악산의 능이와 표고버섯을 찢어 넣었다.
일찍이 경험하지 못한 별미요 진미다. 특히 그 라면 국물은 더 없어 여러 사람 입맛을 버려놓
았다. 긴 오르막길 젖은 풀숲 헤치느라 가뜩이나 후줄근하였는데 비로소 생기가 돈다. 따끈
한 커피로 입가심하고 일어난다.
바윗길이 나온다. 밧줄 잡고 슬랩을 오른다. 등로 옆 바위 위가 경점이다. 교대로 들려 미시
령 건너 황철봉 휘감아 도는 운무의 유희를 구경한다. 암릉 오른쪽 아래 너덜지대를 한 피치
오르면 상봉 정상이다. 산구절초와 커다란 돌탑은 여전하다. 원경은 안개에 가렸지만 근경은
맑다. 속초 앞바다는 하늘의 경계선을 분간하지 못하겠다.
11. 상봉 가는 도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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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신선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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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상봉 가는 도중에 바라본 황철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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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앞 왼쪽은 상봉 남동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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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상봉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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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상봉 남동릉, 그 왼쪽 아래는 속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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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상봉 남동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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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상봉 북릉으로 내리는 도중에 뒤돌아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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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선봉(神仙峰, 1,212m)
미시령에서 상봉 넘어 신선봉 가는 길은 아직 설악산국립공원 비지정탐방로다. 조심스러운
걸음 한다. 바윗길을 내린다. 밧줄구간이다. 레펠 흉내한다. 암봉은 다만 눈으로 넘는다. 가
쁜 숨 고르며 뒤돌아보는 상봉 북릉이 가경이다. 바닥 친 안부는 ┣자 갈림길인 화암재(禾巖
-)다. 여기서 중산 님을 비롯한 후미 3명은 메아리 대장님이 안내하여 화암사로 하산한다.
신선봉 오르는 길. 등로는 파여 수로로 변했다. 다행히 비가 오지 않아 말랐다. 가파른 등로
를 긴 한 피치 오르면 완만한 너덜지대다. 큰 바위를 연신 기어오르는 암릉 같은 너덜이다.
헬기장 지나고 너덜 잠깐 오르면 신선봉 정상이다. 누군가 바위에 ‘신선봉 1,204m’라고 표지
를 붙여놓았는데 높이를 어디에서 근거했는지 모르겠다. 여러 지도에는 1,214m다.
신선봉에 부는 바람이 차다. 조망은 갈 길 바쁜 안개로 순식만변한다. 울산바위가 등대다. 신
선봉 북동릉을 내린다. 오늘 산행의 하이라이트다. 너덜 돌아내려 암릉을 간다. 비라도 오면
혼쭐이 날 법한 험로다. 여기저기 쑤셔보며 더듬어 내린다. 암릉을 돌아 넘으려면 북사면 너
덜지대를 횡단하여야 한다. 이때부터 마가목의 풍성한 열매를 감상하느라 걸음이 더디다.
너덜지대를 횡단하고 숲속에 들어 가느다란 밧줄 달린 암릉 암봉을 기웃거리다 인적 쫓아 골
로 갈 듯이 북사면을 크게 돌아내린다. 마가목 군락지대다. 흔히 식물학자들은 울릉도 성인
봉에 자라고 있는 마가목을 높이 평가한다. 높은 산꼭대기에 고고하게 자란다고 상찬한다.
나는 식물학자들이 이곳의 마가목을 몰라서일 거라고 생각한다.
마가목은 한자 마아목(馬牙木)에서 유래했다. 마아목은 새싹이 마치 말 이빨과 닮아 붙여진
것이다. 마가목은 풍성한 꽃만큼 열매도 많이 맺는다. 붉은 열매는 가을에 떨어지지 않고 꿋
꿋하게 겨울을 맞이한다(강판권, 『나무사전』). 초동만추에 잎사귀 하나 없는 붉은 열매만
의 마가목을 보는 것은 설악산의 또 다른 진경(珍景)이다.
바위에 걸터앉아 눈앞의 마가목을 감상한다. 이유미(현 국립수목원장)의 『우리가 정말 알
아야 할 우리 나무 백 가지』에서 마가목에 대한 설명 중 일부다. “산정에서 만나는 마가목을
볼 때마다 가장 높은 이상을 지닌 나무는 마가목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 마가목을
보노라면 소나무나 대나무마저도 속세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 속인처럼 느껴진다. 우거진
숲의 높디높은 산꼭대기에서 세상을 아래로 굽어보며 구름을 이고 사는 마가목은, 희고 풍성
한 꽃으로 순결한 품성을 드러내다가도 잡다한 빛 한 점 뒤섞지 않고 오직 붉기만 한 열매로
불타는 열정과 카다르시스를 보여 주며(…).”
19. 신선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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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신선봉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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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건너편은 상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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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상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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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울산바위와 달마봉(왼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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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울산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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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암릉 바위 틈에 핀 산구절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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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운봉산(284.9m)과 도원저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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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마가목 열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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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목은 오래전부터 약용식물로 이용되어 왔다. 익은 열매는 채취하여 볕에 말렸다가 물에
달여 복용하는데 이뇨, 진해, 거담, 강장, 지갈 등의 효능이 있어 신체 허약증을 비롯하여 기
침이나 기관지염, 폐결핵, 위염 등에 쓴다. 또한 열매를 술에 담가 반년 이상 두었다가 매일
아침저녁으로 조금씩 마시면 피로를 회복시켜 주고 강정 작용한다고 알려져 있다.(이유미의
위 책)
그런데 우리는 술에 담그되 석 달이 지나자마자 마시고, 그것도 취하도록 왕창 마셔버리니
상기한 약효와는 무관할 것 같다. 얼추 마가목 열매를 땄다. 모처럼 배낭에 각이 나온다. 나
는 이때까지만 해도 마가목 열매를 따지 않았다. 따지 않을 작정이었다. 하여 920m봉 직전
안부에서 오른쪽 생사면을 내린다. 낙석 아닌 비석(飛石)을 경계하며 가파른 숲속을 빠져나
오면 대 너덜지대가 펼쳐진다. 암릉 같은 너덜이다.
너덜지대 가장자리에 있는 마가목, 그 유혹하는 장관을 보고 나는 더 이상 참지 못하였다. 그
만 마가목주 대열에 끼고 말았다. 가지가 축축 늘어지게 달린 빨간 열매를 보고서 그냥 지나
친다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고(스틸영 님의 버전이다)’ 생각했다. 솎아주었다! 갈 길이 급하
여 손이 닿는 가지만 조금 솎아줄 수밖에 없었다.
암릉 같은 너덜지대라 내리기가 한층 힘들다. 노천의 너덜지대 벗어나도 숲속 너덜은 계속된
다. 여러 지능선을 갈아탄다. 인적이 보인다. 일정한 간격으로 돌을 2개씩 포개놓았다. 분명
한 등로를 만나기까지는 부지런한 걸음이 1시간 가까이 걸린다. 우리가 신선봉 내린 길이 출
입금지구간이다. 위험하다는 이유까지 적어 그걸 알리는 안내판을 지난다.
계류 건너고 임도와 만난다. 나뭇가지 사이로 수암이 보름달 뜨는 것처럼 보인다. 샘치골교
에서 바라보는 황혼녘의 상봉, 화암재, 신선봉이 고즈넉하다. 화암사 일주문 앞 너른 주차장
에는 우리 차뿐이다. 오늘도 무사산행을 자축하는 하이파이브를 손바닥이 화끈하게(인원이
많아) 나눈다.
29. 마가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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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마가목, 이 빨간 유혹을 이겨낼 이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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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너덜지대 내리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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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울산바위, 왼쪽은 속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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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울산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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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울산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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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화암사 가기 전 샘치골교에서 바라본 상봉과 신선봉(오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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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원통 가는 길에서 차창 밖으로 바라본 울산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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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원통 가는 길에서 차창 밖으로 바라본 울산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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