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별 -
☆ 2013년 가해 12월24일 (자) 대림 제4주간 화요일
[청주]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제1독서 : 사무 7, 1 - 5. 8ㄷ - 12. 14ㄱ. 16
† 복음 : 루카 1, 67 - 79
★ 다윗 임금은 하느님의 궤가 천막에 모셔져 있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성전을 짓겠다고 다짐한다. 하느님께서는 다윗에게 영원한
왕좌를 약속하신다. 이는 예수님의 탄생을 예고하는 것이다(제1독서).
★ 요한 세례자의 아버지인 즈카르야는 아들의 이름을 짓고 난 뒤에
성령으로 가득 차서 주님께서 아들을 통하여 이루시려는 계획을
노래하며 주님을 찬미한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에서 즈카르야는 아들의 이름을 ‘요한’이라고 지은 뒤에
찬미의 노래를 부릅니다. 그가 부른 찬미의 노래, 곧 ‘즈카르야의
노래’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나옵니다. “아기야, 너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예언자라 불리고, 주님을 앞서 가 그분의 길을 준비하리니, 죄를
용서받아 구원됨을 주님의 백성에게 깨우쳐 주려는 것이다.”
즈카르야 스스로 아들이 예언자가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사실 이
말은 아버지로서 쉽게 꺼낼 수 있는 말은 아닙니다. 예언자들은
하나같이 박해 속에서 시련과 고통을 받았고, 때로는 불의에
항거하다가 처절하게 죽기도 하였기 때문입니다(마태 5,12; 23,31
참조). 그러니 아버지가 아들의 앞날에 대하여 예언자의 삶을 살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들에게 시련과 고통을 예고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는 아들의 고통스러운 삶을 예고하면서도
오히려 찬미와 기쁨의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까요?
즈카르야는 아들이 비록 예언자의 삶을 살면서 박해와 처절한 죽음을
피하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짐작하고 있지만, 그에게는 그보다 더
큰 가치가 있었습니다. 그는 아들의 그러한 삶으로 구약에서부터
예고된 참된 구원이 실현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곧,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는 모든 이가 구원의 빛을 받아 평화의 길로
나아간다는 사실을 믿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즈카르야는
주님의 더 높으신 뜻을 깨닫고 기꺼이 아들 요한을 하느님께
봉헌하였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가족의 안위보다 하느님의 더 큰 뜻을 헤아리려고
하는 마음가짐이 있습니까?
- 매일 미사 -
◈ [청주]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 /
반영억라파엘 감곡매괴 성모성당 신부님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3년 가해 12월24일 대림 제4주간 화요일
<높은 곳에서 별이 우리를 찾아오셨다.>
+루카 1,67-79
모든 것이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
주객전도라는 말이 있습니다. 주인과 손님의 위치가 바뀌었다는 뜻으로,
사물의 선후, 경중, 본말이 서로 뒤바뀌었음을 말합니다. 국가의 지도자는
지도자의 위치가 있고 권위가 있어야 합니다. 백성은 백성의 자리가 있고
지도자에 대한 존경과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지도자라고 하는
이들의 권위가 사라진지 오래고 그러니 존경과 사랑도 없습니다. 백성이
더 크게 나라를 걱정하고 지도자는 자기의 잇속에 매여 있습니다. 각자의
본분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알고도 실천하지 않는 것이 현실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어둠을 비추는 빛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철도노조 파업과 강경진압의 상황들을 보면서 국민을 위하는 방법이
무엇인지, 국민의 소리를 들어야 하는 이들의 귀가 열려있는지를 생각해
봅니다. 남을 탓하기에 앞서 내 마음을 단속해야 하겠습니다. 소통의
문제는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오늘 복음의 즈카르야의 노래는 이스라엘을 해방하시는 하느님을 찬미하는
부분과 하느님의 예언자로 태어난 아기의 장래를 축복하는 부분으로
구별됩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 베푸시는 해방은 일찍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바를 그대로 이루시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덕분에 이스라엘은 원수들의 손에서 벗어나 떳떳하게
주님을 섬기며 주님 앞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원수들 손에서 구원된”
사람들이 두려움 없이 한평생 거룩하고 의롭게 주님을 섬기도록 해
주셨습니다(루카1,75). 이것이 해방의 시작이요, 마침입니다.
하느님의 예언자로 태어난 요한이 제 몫을 감당하여 주님의 길을 닦고
알려주는 것도 “하느님의 크신 자비”(루카1,78)덕분입니다. 시작도 마침도
모두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요한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예언자로서
주님의 길을 준비하였습니다. “나 이제 특사를 보내어 나의 행차 길을
닦으리라”(말라기3,1). “사막에 길을 내어라”(이사40,3).하신 말씀대로
광야에서 회개를 외치는 소리가 되었습니다. 예언의 말씀은 반드시 그대로
이루어지는 법입니다. 마침내 요한은 오시는 주인의 길을 닦고 자신은
그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만한 자격도 없다는 겸손을 잃지 않았습니다.
세상은 주인의 행세를 하려는 사람들이 넘쳐나서 큰일입니다. 주객이
전도되고 있으니 문제입니다. 우리 믿는 이들만이라도 요한의 삶을
본받고 주님의 뜻을 헤아리고 행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강경진압의
분노를 '사면'이라는 달콤한 유혹으로 해결할 수 있을까요? 시작도
마침도 주님께서 하시는 일이니 주님의 뜻을 찾고 주님께 의탁하고
주님께서 이루시는 일에 헌신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어둠을 탓하기에
앞서 하나의 촛불을 밝히는 희생을 감당하며 그 안에서 아기 예수님을
만나 뵙기를 바랍니다.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영억 라파엘 신부 -
◈ [인천] 이 주님께서 바로 오늘 밤에 오십니다.
요즘에 우울증 환자들이 참으로 많다고 합니다. 저도 잘 몰랐는데,
제 주위에서도 우울증 치료를 받고 있는 사람들이 꽤 많더군요.
“신부님, 저 요즘에 우울증 약 먹고 있어요.”라고 고백을 하는데,
전혀 우울하지 않아 보였던 사람도 우울증 치료를 받고 있다는
사실에 깜짝 놀랍니다. 그만큼 사회 전반에 우울증이 퍼져 있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어떤 책에서 보았는데, 우울증을 판단하는 커다란 기준은 ’긍정적인
사고의 결여‘라는 것입니다. 우울해보이거나 심한 감정기복을 보이는
등 누가 봐도 안 괜찮아 보이는 표정에서 우울증이라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 자체에서 우울증인지 아닌지가 결정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현대인들의 대부분이 잠정적인 우울증 환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이 부정적인 말들을 말하고 있거든요.
남 탓을 얼마나 많이 이야기 합니까? 나라 탓, 회사 탓, 교회 탓,
부모 탓, 자녀 탓……. 스스로의 불행함을 자랑하려는 것처럼 자신이
얼마나 지금 어렵고 힘든지를 그리고 어렵고 힘듦이 모두 남 탓임을
강조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다보니 다른 이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너무나도 힘든 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나와 다르면 적이고,
원수입니다. 절대로 말도 붙여서는 안 되고, 이 사회에서 영원히
사라져야 한다는 무서운 말도 서슴지 않고 합니다. 원수도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은 과연 어디에 있는 것인지…….
솔직히 부정적인 말을 듣고서 기분이 좋아지는 사람은 없지요. 괜히
힘이 빠지기도 하고, 우울한 감정이 생기면서 정말로 우울증 환자가
된 기분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회 전반에 퍼져 있는 긍정적 사고의
결여가 사회 전체를 환자로 만들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세례자 요한의 잉태 소식을 듣고서 즈카르야가 의심을 품고 부정적인
말을 했을 때, 벙어리가 되었던 이유를 좀 알 것 같습니다. 주님의 일을
하는데 있어서는 절대로 부정적인 말과 생각을 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이 부정적인 말과 생각들이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시는데
커다란 방해가 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세례자 요한의 명명식 때
혀가 풀리면서 그가 처음 말했던 것은 곧바로 하느님을 찬양하는
소리였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말과 생각은 하느님을 찬미 찬양해야
함을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즈카르야는 이렇게 찬미합니다.
“우리 하느님의 크신 자비로 높은 곳에서 별이 우리를 찾아오시어,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는 이들을 비추시고, 우리 발을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이 주님께서 바로 오늘 밤에 오십니다. 이렇게 큰 사랑으로 오시는
주님을 향해서도 부정적인 말과 행동으로 섣부른 판단을 하시겠습니까?
부정적인 생각보다는 긍정적인 생각으로 찬미 찬양할 때 커다란 기쁨을
가지고 오실 주님을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름을 알면 이웃이 되고 색깔을 알면 친구가 되고 모양까지 알면
연인이 된다(나태주).
깨진 유리창의 법칙
깨진 유리창의 법칙(Broken Windows Theory)이라고 있습니다.
미국의 범죄학자인 제임스 윌슨과 조지 켈링이 1982년 3월에 공동
발표한, ‘깨진 유리창’(Fixing Broken Windows)이라는 글에 처음으로
소개된 사회 무질서에 관한 이론입니다.
이 법칙은 아주 간단합니다. 깨진 유리창 하나를 방치해 두면, 그 지점을
중심으로 범죄가 확산되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즉, 사소한 무질서를
방치하면 큰 문제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는 의미를 담고 있지요.
우리의 죄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습니다. 처음부터 겉으로 드러나는
커다란 범죄로 시작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마음속에서 시작한
깨진 유리창인 부정적인 생각에서부터 죄가 시작하는 것이 아닐까요?
따라서 부정적인 생각 자체를 피할 수 있어야 합니다. 대신 긍정적인
마음, 사랑의 마음으로 바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비판을 위한 비판이
아닌, 화합을 위한 우리의 정성들이 모여져야 합니다.
무조건적인 비판이 난무하는 이 세상 안에서 점점 우울한 세상이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나만의 기준으로 내세운 부정적인 생각과 말도
우울한 세상이 되는데 한 몫을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아기 예수님께서 오늘 밤에 우리의 구원을 위해 평화와 사랑을 가지고
오십니다. 그 평화와 사랑을 받아 우리 역시 세상에 말하고 실천합시다.
그러한 노력과 실천이 이제 더 이상 우울한 세상이 아닌, 기쁨과 평화가
넘치는 하느님 나라를 만들게 될 것입니다.
- 인천교구 성소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기타] ‘임마누엘(Immanuel)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2013년 가해 12월24일 성탄 대축일 전야 저녁미사 복음묵상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 (마태오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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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마누엘(Immanuel)
예수님을 부르는 또 다른 이름이다.
그리고 그 뜻은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 (God-is-with-us)’
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가만히 그 의미를 생각해본다. 임마누엘이라는 그분의 이름 속에
그분께서 오신 모든 이유가 숨겨져 있는 것은 아닐까?
결코 만만하지 않은 우리의 삶,
넘어야 할 산도 많고, 건너야 할 강도 많다. 쏟아야 할 눈물도 많고
두려움에 몸을 움츠려야 하는 시간도 적지 않다.
이 삶을 내려놓고 싶을 정도의 아픔을 만날 수도 있다.
그런 우리에게 하느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사랑을 고백하신다.
더 이상 안타까워 그냥 볼 수 없다고 하신다. ‘하느님인 내가 너희와
함께 있다.’ 라는 이름을 붙인 당신의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신다.
그리고 그 아들은 철저하게 그리고 무참하게 우리의 죄를 대속하신다.
다름 아닌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
세상의 부조리는 결국 악에서 나온다.
그 악은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세상을 악하게 만들고자 한다.
그래서 선이라는 것은 약해빠진 무능한 패배자들의 것이라고
몰아가며, 선의 근원이신 하느님을 부정하게 만들고자 한다.
그것이 악이 존재하는 이유이고 목적이기 때문이다.
힘들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희망하며 살았으면 좋겠다.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
여기서 ‘우리’란 옳음 때문에, 사랑 때문에, 선 때문에, 복음 때문에
아플 수밖에 없는 이들을 말한다. 가장 큰 힘이 함께 하고 있으니,
희망을 버리지 말고 끝까지 감사하며 기쁘게 사랑하며 살라는
말씀이다. 바로 이 사랑 고백을 위해서,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성탄의 의미이다.
오늘 밤 우리는 성탄 전야 미사를 봉헌한다.
각 성당과 예배당에는 캐럴이 울려 퍼질 것이다.
그리고 기쁨을 표현하게 될 것이다.
기쁨의 진정한 이유 때문에 기뻐하는 우리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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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 대축일 밤 미사 복음에 대한 묵상을 원하시면 링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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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진심으로 성탄을 축하 드립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김 대열 신부
- 사이타마 교구 오타(太田)본당 주임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https://www.facebook.com/WithfatherPinetree
-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
◈ [서울] 대림 제4주간 화요일
2013년 가해 12월24일
<높은 곳에서 별이 우리를 찾아오셨다.>
루카 1, 67-79
‘받아 놓은 날은 오기 마련입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멀 것만
같았던 제대 날짜도 시간이 지나면 오기 마련입니다. 강의 부탁을
받는 경우도 아직 멀게 느껴지지만 어느덧 강의를 해야 할 날은
코앞에 다가 옵니다. 출산을 기다리는 산모에게도 아이 탄생의 순간은
오기 마련입니다. 추운 겨울 맛있는 음식 점 앞에서 차례를 기다리는
손님에게도 ‘빈자리’는 나오기 마련입니다.
1991년 8월에 사제서품을 받았던 제게는 ‘본당신부’가 되는 날이
기다려졌습니다. 8년이 지난 1999년 본당신부가 되었습니다. 지금
보좌 신부님들은 제가 기다리던 때보다 훨씬 많은 시간을 기다려야
합니다. 15년 정도는 되어야 본당 신부가 될 수 있습니다. 보좌신부로
지내는 것도 좋습니다. 책임 질 일도 적고, 주어진 일만 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본당신부를 하는 것은 또 다른 의미에서 좋습니다.
본인의 생각과 본인의 뜻을 그려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책임과
의무는 더 크지만 그에 따른 성취와 보람도 크기 때문입니다. 받아
놓은 날이기에 오겠지만 교구 차원의 준비와 대책도 필요하리라
생각합니다.
시간은 두 가지 의미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나이를 먹은 것과 어른이
되는 것과 비슷한 의미라고 하겠습니다. 나이를 먹은 것은 누구나 시간이
되면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나이를 먹는 것을 굳이 축하하거나,
기뻐할 것도 아닙니다. 어른이 되는 것은 경륜을 쌓은 것입니다. 존경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더 좋아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어른이 되는
것은 축하할 일입니다. 하루 24시간, 한 달 30일, 1년 365일은 자연의
이치에 따라서 정해져 있습니다. 그렇게 우주는 150억년이 지났고,
지구는 40억년이 지났다고 합니다. 물리적인 시간의 척도에 따르면
인류의 등장, 짧은 한 개인의 삶은 너무나 작고 미미할 뿐입니다. 하지만
의미의 시간, 가치의 시간, 영혼의 시간은 다른 것입니다. 순간을 살면서도
영원을 느낄 수 있습니다. 짧은 나의 삶이 150억년 우주의 시간과 접속이
되는 것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이제 곧 성탄입니다. 물리적인 시간으로는 2000년 전에 있었던 하나의
사건입니다. 하지만 그 사건은 새로운 시간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바로
의미의 시간, 가치의 시간, 영원의 시간, 부활의 시간입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입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었어도 다시 살
것입니다.’ 물리적인 시간의 법칙에 지배를 받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따라서 하느님의 시간을 살 수 있다고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뜻은 ‘말씀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행복은 하느님의 뜻을 먼저 생각할 때 이루어집니다. 물건은 자기의
기능을 다 할 때 유용합니다. 시계는 정확하게 시간을 알려 주어야
합니다. 마이크는 소리를 증폭시켜 주어야 합니다.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하는 물건들은 쓸모없고, 쓸모없는 물건들은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사람은 하느님의 모상을 닮았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하느님의 뜻을 따를
때 가장 행복하다고 하겠습니다.
이제 곧 성탄이 다가옵니다. 저는 이렇게 기도드리고 싶습니다.
주님! 우리에게 사랑으로 오시니 감사합니다. 그 사랑은 세상의
어둠을 밝게 비추었습니다. 그 사랑은 가난한 이, 외로운 이들에게
희망을 주었습니다. 그 사랑은 절망 중에 있는 사람, 고통 중에 있는
사람에게 행복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주님, 오늘 나의 삶 속에서
주님의 사랑을 전하도록 용기와 힘을 주소서. 주님의 그 사랑을 저
또한 살아가도록 이끌어 주소서! 하나의 시간으로서 성탄이 되기보다는
하나의 의미로서 성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서울 대 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수도회] 구원의 현재화, 구원의 개인화
2013년 가해 12월24일 대림 제4주간 화요일
루카 1,67-79
“높은 곳에서 별이 우리를 찾아오셨다.”
<구원의 현재화, 구원의 개인화>
오늘 복음에 소개되고 있는 즈카르야의 노래는 쇠락해가는 말기
환자 같은 이스라엘을 소생시키기 위해 가까이 다가오시는 하느님께
드리는 찬미와 감사의 노래입니다.
아들 세례자 요한의 탄생에 대한 천사의 메시지에 즈카르야는 살짝
의혹을 품었습니다. 그 대가는 너무나 가혹했지요. 즈카르야는 10달
동안이나 말 한 마디 못하는 언어장애자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오늘
즈카르야는 하느님의 크신 자비에 힘입어 드디어 말문이 열렸습니다.
그 첫마디가 바로 즈카르야의 노래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10달 동안 단 한마디 말도 못했습니다. 그 동안
생각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억울한 생각도 들었을 것입니다.
원망도 많았을 것입니다. 답답하기도 엄청 답답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혀가 풀린 즈카르야의 입에서 최초로 나온 것은 하느님을
찬양하는 노래였습니다. 즈카르야는 심연의 침묵 속에 깨달은 바가
있었던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바라시는 바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얼마나 큰 은총을 베풀어
주셨는지에 대해서도 잘 알 수 있었습니다. 비록 고목(枯木)과도
같은 즈카르야와 엘리사벳 부부였지만 크신 하느님 자비에 힘입어
새싹을 틔워내게 하셨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부당하고
부족한 자신들을 당신의 인류 구원사업의 중요한 도구로 선택하셨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즈카르야는 10달 동안 말 한마디 못하며 답답한 세월을 보냈지만
다른 한편으로 제대로 된 대 피정을 한 것입니다. 그는 대 침묵
가운데 하느님이 얼마나 자비하신 분인지를, 하느님께서 아무 것도
아닌 자신에게 얼마나 큰 사랑을 베풀어주셨는지를 확실히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즈카르야의 내면 안에서 큰 깨달음이 이루어지게 되었고,
그런 과정에는 그는 마음속으로 굳게 다짐했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만일 내 입만 열어주신다면 그분께서 내게 베푸신 크신 사랑을 있는
힘을 다해 외치리라.
마침내 하느님께서 즈카르야의 입을 열어주시자 마자 그의 입에서는
봇물 터지듯이, 기다렸다는 듯이 하느님을 찬양하는 노래가 흘러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 찬미 받으소서. 그분께서는 당신 백성을
찾아와 속량하시고, 당신 종 다윗 집안에서 우리를 위하여 굳센
구원자를 일으키셨습니다. 당신의 거룩한 예언자들의 입을 통하여
예로부터 말씀하신 대로, 우리 원수들에게서,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것입니다.”
즈카르야는 운 좋게도 ‘침묵의 10개월’을 통해 그토록 고대했던
‘구원’을 온 몸으로 맛보았습니다. 강렬하고도 짜릿한 구원체험이
즈카르야의 내면 안에 이루어진 것입니다. 즈카르야는 은혜롭게도
이미 낡은 세상에서 새로운 세상으로, 죄와 죽음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암흑에서 빛으로 건너오는 파스카 체험을 맛 본
것입니다.
그 행복한 체험으로 인해 즈카르야 삶의 태도는 180도 변화되었습니다.
어두웠던 그의 낯빛은 기쁨과 설렘의 얼굴로 바뀌었습니다. 절망의
세월은 희망의 나날로 변화되었습니다. 우울하고 어두웠던 그의
일상은 화사한 봄날로 탈바꿈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필요한 체험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즈카르야가 맛본 구원 체험입니다. 파스카 체험입니다. 하느님께서
인류 전체를 위해 선물로 주시는 보편적인 구원을 개인화하는
작업입니다. 하느님의 구원을 오늘 이 자리에서 내 것으로 만드는
작업입니다.
과거 역사 안의 구원을 현재화시키고 보편적 구원을 개인화시키기
위해 가장 필요한 노력이 또 한 가지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리고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리고 하느님 인류 구원 사업의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큰 협조자 성모님께서 지속적으로 보여주신 겸손의 덕입니다.
육화의 영성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육화강생을 바탕으로 한 지속적
겸손, 그 바탕 위해 인류 구원이란 아름다운 꽃이 활짝 피어나게
되었습니다.
- 살레시오회 한국 관구 부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곰곰이 생각해야 할 소재
2013년 가해 12월24일 대림 제4주간 화요일
< 높은 곳에서 별이 우리를 찾아오셨다. >
복음 : 루카 1,67-79
< 곰곰이 생각해야 할 소재 >
감사에 관한 시 한 편을 소개해 드립니다.
생에 감사해.
내게 매우 많은 것을 주었어.
샛별 같은 눈동자를 주어 흑백을 구분하고
하늘을 수놓은 별을 보고 수많은 사람 중에 내 님을 찾을 수 있네.
생에 감사해.
내게 매우 많은 것을 주었어.
내 지친 발을 이끌어
도시와 시골길, 해변과 사막, 산맥과 평원,
그대 집과 거리와 정원을 거닐었네.
생에 감사해.
내게 매우 많은 것을 주었어.
비올레타 파라라는 시인이 나이가 쉰을 바라보며 지은 것인데,
그런데 정말 감사의 정이 느껴집니까? 비올레타는 이 시를 짓고
몇 달 후 자신의 머리에 권총을 쏘아 스스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녀의 이 시는 살기위한 몸부림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시에서는 ‘수많은 사람 중에 내 님을 찾을 수 있네’라고 노래하지만
실제로는 매번 사랑 앞에서 늘 울어야 했던 여인이었기 때문입니다.
감사는 받아들여져야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즉 감사의 대상을 잘
정해야합니다. 비올레타는 생명이 없는 세상이나 있지도 않은
남자친구에게 감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살아보겠다고 감사할
것을 찾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받아들여지지 않는 감사는
오히려 절망으로 자신을 내어 몹니다.
‘감사’(thank)의 어원이 ‘생각’(think)라고 합니다. 죽음 앞에서는
생각이 깊어지기 때문에 감사할 것을 많이 찾으려고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생각만 한다고 감사가 나오는 것도 아니고,
감사를 한다고 하더라도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그 감사가 받아
들여지지 않는다면 나에게 절대 유익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참조: 송정림, 내 인생의 화양연화, 18-19]
역시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고 김광석씨의 ‘서른즈음에’란 노래를
들어볼까요?
또 하루 멀어져 간다.
내뿜은 담배연기처럼
작기만한 내 기억 속에
무얼 채워 살고 있는지
점점 더 멀어져 간다.
머물러 있는 청춘인 줄 알았는데
비어가는 내 가슴속에
더 아무것도 찾을 수 없네.
계절은 다시 돌아 오지만
떠나간 내 사랑은 어디에
내가 떠나 보낸 것도 아닌데
내가 떠나 온 것도 아닌데
조금씩 잊혀져 간다.
머물러 있는 사랑인 줄 알았는데
또 하루 멀어져 간다.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
세월은 가고 있는데 자신의 가슴을 채워줄 수 있는 사랑과 자꾸만
이별하며 사는 허무함을 노래하였습니다. 감사는 사랑할 때 생겨나는
감정입니다. 사랑하면 자신에게 사랑의 감정을 준 상대에게 감사하게
됩니다. 그러나 김광석 씨의 가사처럼 사람에게서 사랑을 채우려다
보면 반드시 한계를 경험하게 됩니다. 사랑하면 살고 싶어지고 사랑이
없으면 살고 싶어지지 않는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사람에게서 그런
삶의 의미를 찾으려한다면 아무리 감사를 하려고 노력해도 안 됩니다.
사람은 자신 가슴도 스스로 채울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목전에 둔 사람은 많은 생각을 합니다. 살려고도 노력합니다.
감사할 사람을 찾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그것이 생을 마감해야겠다는
생각을 굳히게 만들기도 합니다. 자신을 알아줄 사람이 결국 하나도
없음을 확신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 즈카르야는 10개월 동안 벙어리로 있다가 입이 열렸을
때의 첫 번째 말이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는 찬미 받으소서.”
였습니다. 자신의 아내나 장차 예언자가 될 요한보다는 하느님을
먼저 찬양했습니다. 우리는 시간을 내어 조용히 하느님께 감사할
수 있는 것들이 무엇이 있는지 찾아내야 합니다. 즈카르야는 처음에
그렇게 나이가 많은데도 아기를 가져서 세상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는 것을 걱정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자신의 집안에
그런 큰 예언자를 태어나게 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합니다. 어쩌면
이런 감사를 찾아내라고 벙어리로 만드셨는지도 모릅니다. 우리도
생각할 여유가 있다면 항상 ‘하느님께’ 감사할 수 있는 것들을 곰곰이
생각하여 감사하도록 합시다. 이런 면에서 저녁마다 쓰는 감사일기가
삶의 큰 에너지를 주는 것입니다.
- 수원 교구 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기획 연구담당 전 삼용 요셉 신부 -
◈ [서울] 성탄을 더 이상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2013년 가해 12월24일 대림 제4주간 화요일
성탄을 더 이상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성탄절은 어떤 날이라고 설명하며 사는 지 각양각색이니 안타깝습니다.
선물주고 받는 날? 그저 즐거운 휴일? 연말연시의 시작? 모두 아닙니다.
성탄절을 알고 성탄을 맞이해야 정신 있는 사람이거늘 왜들 이러지요?
즈카르야의 예언 같은 그런 선물은 이 세상에 또 있을 수 없을 겁니다.
유일하게 딱 한번 들려준 이 세상에 희망을 주는 예언의 말씀입니다.
성탄 전 날 이렇게 좋은 예언, 성탄을 더 이상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 하느님의 크신 자비로 높은 곳에서 별이 우리를 찾아오시어,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는 이들을 비추시고, 우리 발을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루카 1,78~79)”
- 이기정 사도 요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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