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자카르타 순다항 포구 왕국의 흥망을 넘나들던 목선들이 먼 항해로 지친 듯 옆구리 맞대고 웅크린 채 잠들어 있다
뱃길 내내 품고 왔던 원죄原罪같은 짐 햇살 검게 그을린 사내들 어깨를 빌려 내려놓는다
빈 배로는 먼 바닷길 긴 파도를 넘을 수 없다는 걸 배가 되기 전 무성한 나무였던 시절 잎과 열매를, 뿌리마저 버리며 온전히 몸으로 익혔을 터
시린 이빨의 틈새처럼 벌어진 뱃전에서 자맥질을 마치고 막 올라오는 아이들 부끄럼 하나 없는 나신裸身에 묻어나오는 바람 까끄라기 몇 목줄 묶인 목선 끝에 걸려 내내 뒤척인
그날 오후
주)순다(Sunda)항:순다 끌라빠 항구, 16세기 술라웨시 고아왕조 시대 만들어진'삐니시'라는 범선이 자바해를 통해 섬 전역을 항해 하였다.
■약력 :1968년 경북청도 출생, 영남대학교 경제학과 졸업.경남은행 근무, 대구시창작원 수료. 평사리문학 대상 수상 (시: 환승입니다. 2010). 인도네시아 롬복으로 이주(2011). 형상시문학동인.한국문협 <인도네시아지부> 사무국장, 롬복한인회 부회장. 시집 「인도네시아」, 「바타비아 禪」이 있슴.
■해설: 그날 오후에 일어난 일들의 기록이 곧 시가 되고 있다. 어쩌다가 한반도의 수많은 항구를 놔둔 채 시인은 순다 끌라빠 항구에 원죄原罪같은 짐을 부리게 된 걸까. 이러저러한 사연은 한 편의 시에서 다 알 수는 없지만, "왕국의 흥망을 넘나들던 목선들이/먼 항해로 지친 듯/옆구리 맞대고 웅크린 채/잠들어 있다"는 순다항의 풍경과 함께 먼 항해로 지친 자신과 순다항에 묶인 오래된 목선의 운명이 다르지 않다는 것인가. 시인은 지금 인도네시아로 이주해서 아들딸 낳고 잘살고 있다. "시린 이빨의 틈새처럼 벌어진 뱃전에서/자맥질을 마치고 막 올라오는 아이들/부끄럼 하나 없는 나신裸身에 묻어나오는/바람 까끄라기 몇"을 시인은 진정 사랑하기에 자신의 오후를 거기 순다항을 거쳐 롬복에 의탁한 것은 아닌지?-<박윤배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