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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출셋길, 장원급제
20100587 비교민속학과 이시헌
1. 서지 사항
⑴ 저자 : 정구선
<조선의 출셋길, 장원급제>의 지은이는 정구선이다. 그는 동국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였 다. 한국방송대학교 강사, 동국대학교 연구교수, 디지털서울문화예술대학교 겸임교수를 역 임했고, 현재 대학 강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저술과 연구 활동에 매진하고 있다. 지 은 책으로는 <조선시대 천거제도연구>, <한국관리등용제도사연구>, <성, 역사와 문화>(공 저), <한국사의 새로운 인식>, <한국 근대 관리 임용 연구>, <조선의 발칙한 지식인을 만나다>, <공녀>, <중세시대의 환관과 공녀>, <한국중세의 천거제도>가 있다.
⑵ 출판사 : 팬덤북스
⑶ 출판연도 : 2010년
⑷ 목차 구성
이 책은 크게 1부 ‘출세의 지름길 - 과거와 장원급제’와 2부 ‘장원들의 삶, 그 빛과 그 림자’로 구성되어있다. 1부에는 과거 시험이 무엇이고 이 과거 시험을 보기 위해 조선 백 성들이 고군분투하는 여러 문화들과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부정부패, 그리고 이를 막기 위해 어떻게 했는지 등에 대해 실제 역사 사료를 바탕으로 소개되어 있다. 제 2부는 주로 장원급제한 이들의 삶이 소개되어 있어 조선생활사 주제와 맞지 않다고 판단하여 주로 본 문에서는 과거에 급제하기까지의 시험장 문화 및 백성들의 수험 문화에 대해 다룰 것이 다.
2. 들어가며
조선시대에 과거제도에 급제하는 것은 결과적으로나 과정적으로나 여러 면에서 볼 때 오늘날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는 것과 같다. 시험 합격 후 국가의 부름을 받고 국민들의 원활한 삶을 위해 공적 업무를 수행한다는 점에서 말이다. 그러나 오늘날은 삼권분립의 원칙에 의해 공무원이 하는 일은 행정 업무에 한정되어 있고 조선시대에는 정치적인 행위까지 할 수 있다는 점에서 다르다. 앞으로의 글에서 본격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는 시험 볼 때까지의 고난과 자격의 제한, 취소 등으로 합격할 때까지의 과정이다. 수많은 경쟁자들을 뚫고 어렵게 공부하여 시험을 본다는 점에 있어서는 공무원 시험과 다를 바가 없다.
한 가지 예로 자격의 제한이 두 시험에 공통적으로 존재하는데 물론 구체적인 요건은 다르다. 공무원 시험에 있어서 3가지 측면의 요건이 존재하는데 자격의 제한과 관련한 소극적인 요건으로서 결격사유가 있다. 파산선고를 받고 복권되지 아니한 자, 금치산자와 한정치산자, 금고 이상의 실형을 선고받고 그 집행이 종료되거나 집행을 받지 아니하기로 확정된 후 5년이 지나지 아니한 자, 금고 이상의 형을 선고받고 그 집행유예 기간이 끝난 날부터 2년이 지나지 아니한 자, 법원의 판결 또는 다른 법률에 따라 자격이 상실되거나 정지된 자 등에 해당하는 자는 시험 자체를 보지 못한다.
이에 반해 경국대전에서 밝히는 조선시대 문과에 응시할 수 없는 결격사유는 다음과 같다. 매우 심각한 범죄를 저질러 관직에 임명될 수 없는 경우가 있고, 장리나 재가 또는 실행부녀의 아들과 손자, 서얼 자손의 경우 등은 문과에 응시할 수 없게 했다. 여기에서 그러면 과거는 양반들만 볼 수 있었을까? 대개의 연구자들은 양인들이 문과를 볼 수 없다는 법 규정은 없었다는 것에 동의한다. 그러나 문과의 구체적인 응시 자격에 대한 견해에서는 크게 두 가지로 갈라진다. 하나는 계층의 개방성과 이동 가능성을 강조하면서 양인이면 누구나 문과에 응시할 수 있었다는 견해가 있고, 다른 하나는 양반의 특권적 지위를 강조하면서 경제적으로나 사회적 부패한 관행 등으로 인해 현실적으로는 응시가 어려웠다는 견해이다.
조선시대와 현대 사회의 사회적 상황이 다르기 때문에 시험을 보는 과정이나 시험 제도 등이 다를 수밖에 없다. 이 책을 선택한 것도 과거 조선시대 사람들이 과거 시험을 보는 목적, 어떤 계층들이 주로 보았고, 그 과정에서 어떤 문화가 자리 잡고 있었는지가 현대와 비교해서 알아보고자 한 것이다. 앞서 밝힌 과거 응시의 자격과 같은 것들을 이 책에서는 여러 실제 조선 인물들에 관한 기록을 바탕으로 항목들을 분류하여 정리해놓았다.
본문에서는 이런 여러 사례들을 조선인들의 과거 급제에 이르기까지의 다양한 문화생활을 항목화하여 소개하고 이에 대한 필자의 의견을 곁들이는 방식으로 전개하고자 한다.
3. 본문
⑴ 과거 제도
조선의 과거제도는 기본적으로 고려의 과거제도를 차용했다. 다른 점은 고려시대에는 시 나 문장으로 실력을 평가하는 제술과와 유교경전이 시험과목인 명경과가 따로 있었는데 조 선시대에는 두 과를 합하여 하나의 문과로 두었다. 그리고 조선시대에는 따로 무과를 개설 하여 무인들도 같이 과거를 통해 뽑음으로서 균형 있게 문무 관료를 선발했다. 잡과는 고 려시대와 같이 역과, 음양과, 율과, 의과의 기술관을 뽑았다.
문과에는 다시 대과와 소과로 나뉘고 소과는 대과를 보기 위한 예비 시험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소과는 다시 생원시와 진사시로 나뉜다.
문과, 무과, 잡과로 분류할 때 각각의 영역에 따른 문화가 다른데 과거를 보는 시기에 따 라 정기시험과 부정기 시험과 관련한 문화 또한 다르다. 정기시험에는 3년에 한 번씩 보는 식년시가 있고 그 안에 초시, 복시, 전시가 있다. 식년시와 증광시에만 초시, 복시, 전시 가 있고 나머지 각종 부정기 시험에는 대체로 초시와 전시만 있다. 초시에는 향시, 한성 시, 관시가 있다. 부정기 시험에는 증광시, 알성시, 별시, 정시, 춘당대시 등이 있 다.
조선시대는 문치주의를 표방한 나라이기 때문에 무과보다는 문과에 급제하는 것은 가문을 빛내는 것이며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명예로운 것이었다. 그렇다면 본격적으로 과거에 급제 하기 위한 대표적인 교육 기관 성균관을 비롯해서 다양한 합격으로의 길에 어떤 문화들이 있었는지 소개하고자 한다.
⑵ 성균관 수험 생활
과거에 합격하기 위한 마지막 관문이 성균관이다.
양반 유생들은 보통 7세 정도에 가장 기초적인 교육기관인 서당에서 천자문, 동몽선습을 익히고 15세 정도에는 사는 지역이 서울이면 사학, 지방이면 향교에 들어가서 5~6년 정도 공부를 한 후 소과에 응시한다. 소과에 합격하면 생원, 진사라는 칭호를 획득하고 성균관 에 들어가 공부를 하다가 마지막 관문인 대과에 응시하게 된다.
성균관은 기본적으로 기숙사 생활을 원칙으로 했다. 성균관은 성현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 를 지내는 문묘, 공부를 하는 명륜당과 기숙사 건물로 구성되어 있다. 유생들은 엄격한 기 숙사 학칙에 따라 생활해야 했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명륜당에서 공부를 시작한다. 유생 들은 교수들에게 절을 한 후 이전 내용에 대해 교수가 물어보면 그에 답을 한 후에야 수 업을 들어갈 수 있었다.
그들은 정기적으로 까다로운 학업 성취도 평가를 받아야 했다. 매일 시험관이 어떤 경서 의 어떤 대목을 외우라고 하면 외워야 했고 열흘마다 학관순제라고 제술 시험을 치렀다. 한 달에 한번 씩 예조에서 주관하는 월강을 봐야 했고, 매 해 3월, 9월에는 육조, 의정부 에서 실시하는 연고라는 제술시험을 통해 평가를 받는 등 다양한 시험들을 봐야 했다.
태종 17년에 정해진 과거법에 따르면 성균관 유생은 적어도 원점 300점(성균관 식당에 서 아침과 저녁 두 끼 해결 시 1점)을 얻어야 대과 응시 자격이 주어진다. 이런 원점제도 는 잘 지켜지지 않다가 영조 때 이후에는 아예 묻지도 않았다. 이 당시에도 역시나 오늘 날처럼 긴 수험생활에 따른 지루함과 피곤함 때문에 그냥 빠지지는 못하고 부모님의 병을 핑계로 허위로 진성장을 작성하여 고향으로 내려가 버리는 유생들이 있었다. 요즘에 대학 생들이 병에 대한 허위 진단서 작성을 통한 수업 무단 불참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또 는 노량진에서의 오랜 공무원 수험생활로 인해 지친 심신을 풀어주기 위해 잠깐의 일탈을 자신에게 허용해주다가 계속해서 일탈하게 되는 양상으로 이어지는 사례가 조선시대에도 있었던 것이다. 성균관에서의 엄격한 학칙을 매일 지켜야 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성종 때는 성균관에서의 사치문화가 문제가 되었다. 그 이전까지는 검소하게 입고 다니 고 말도 타는 자도 없었는데, 성종 때는 공부하는 자의 자세가 아니라 성균관 유생의 지 위를 등에 업고 놀러 다니는 듯한 태도들이 만연하였다. 당시 유생들 중 재산이 상당한 사대부 집안 자제들은 오늘날 최대한 부모님 손 안 빌리려고 하는 노량진이나 신림동 고 시촌의 다소 집안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과는 달리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안 되면 그만이 라는 태도로 그렇게 놀면서 성균관을 다녔던 것이다. 게다가 성균관은 유생들이 공부하는 데 필요한 종이나 붓 등 학용품이나 식비 등을 모두 국가에서 대주었다. 학비 걱정은 없 으니 집에서 보내준 돈으로 마음껏 논 것이다.
⑶ 시험장 문화
문과 초시는 서울과 지방에서 치렀고 복시와 전시는 서울에서 치렀다. 시험장을 감시하 는 입문관은 응시자 명부를 확인하여 응시자들을 차례로 들여보냈다. 시험장을 들어가고 나갈 때도 응시자들은 증명서를 검사 받아야 했다. 응시자 명부는 사실상 시험 열흘 전까 지 끝내게 되어 있으나 점차 시험 당일 날에도 쓰고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이와 관련한 여러 비리가 존재했다. 응시자가 이름을 속이고 들어가서 대필해주는 행위가 대표적인 대 리시험 부정행위이다. 이에 세종 29년에 다른 사람을 시켜서 제술시험을 치르는 사람과 남을 위해 글을 지어주는 사람 그리고 이들을 중간에서 연결해주는 사람에 대해 곤장 100대와 도형 3년을 집행함과 동시에 영원히 등용하지 못하게 했다. 이와 관련해서 조선 후기로 가면 순조 18년 성균관 사성 이형하가 상소에서 지적한 여덟 가지 부정행위 중 하나인 수종협책으로 발전된다. 수종협책은 수종들이 책을 가지고 시험장에 따라 들어가 거나 응시자가 직접 책을 가지고 들어가서 베껴 쓰는 것이다. 원래 문밖에서 수협관이 응 시자들의 옷과 소지품을 수색하게 되어 있는데 책을 가지고 들어가다가 발각되게 되면 최 장 6년 동안 보지 못하게 하고, 이를 묵인한 수협관 본인 또한 처벌을 받았다고 한다. 그 런데 영조 15년 알성시에는 시험 보러 들어간 자들이 무려 1만7천명에 이르렀고, 정조 24년 인일제 시험장에는 10만 명이 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렇게 많은 인원이 한꺼번 에 시험을 봤으니 감독이 허술해지는 것은 불가피했고 ‘협책’ 또한 만연했다. 태조 6년에 지어진 경제육전을 보면 “문과에 응시할 때 책을 끼거나 초집을 가진 자는 2식년에 한해 정거한다”라고 규정되어 있다. 여기서 초집이란 것은 일종의 공부한 내용을 요약한 컨닝 페이퍼와 같은 것이다. 자신들이 공부하면서 중요한 것들을 정리한 것들을 안들키기 위해 콧구멍 사이에 넣는 등의 행위를 했다고 한다. 오늘날 공무원 시험 같은 경우 또한 이런 부정행위들을 방지하고자 다양한 제도들을 시행하고 있다. 대리 시험 같은 경우 직접 6개 월 이내에 찍은 현재와 유사한 사진이어야 하는 점, 부정행위 감시를 위해 교실에 최소 2 명의 감독관을 배치하고 넓게 퍼지게 하여 문제지 유형도 분단별로 다르게 한다. 그리고 강력한 부정행위 시 처벌 조항을 만들어서 부정행위 적발 시 해당 시험 무효화와 5년간 시험에 응시하지 못하게 하고 있다.
이와 유사한 부정행위가 차술이라는 것이다. 차술의 수법은 글을 잘 짓는 사람들과 같이 들어가서 10명 정도가 그 사람이 지은 글을 모방하여 몇 글자만 고쳐서 경서의 옳고 그 름을 논하지 않고 그대로 써 내는 방법이다. 이는 현대에도 만연한 논문 표절과 같은 사 례이다. 대학교에서도 과제를 함에 있어 자신보다 권위 있는 자의 논문을 제대로 봐서 이 해하고 창의적으로 변용하여 적용해야 하는데 그대로 쓰거나 조사만 몇 가지 바꿔서 쓰는 파렴치한 행위를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예나 지금이나 별 노력을 들이지 않고 다른 사람이 애써 이루어 놓은 업적을 그대로 쓰는 도둑질과 같은 행위를 별 죄책감 없이 행하 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에 안타까울 뿐이다.
입장이 끝나면 입문관은 수험생들을 여섯 자 간격으로 떼어 놓고 서로 이야기하지 못하 게 하고 금란관이 문을 잠갔다. 시험장 안에는 대간이 밖에는 의금부 낭관이 더 이상의 잡인의 출입을 금하기 위해 감시했다. 시험장에서 쓰는 시험지는 각각이 준비한 것을 사 용하게 했고 제출하면 관리가 도장을 찍어주었다. 여기서 또 비리가 발생한다. 질 좋은 시험지를 일부러 써서 시험관이 어느 권세가의 자제인지 알게 하거나 절과와 같은 가장 악질적인 부정행위가 이루어진다. 조선시대 때 과거의 공정성을 확보하기 위해 답안지 오 른쪽 끝에 응시자들이 자신의 이름과 주소 본관 등을 적고 이것이 안보이도록 봉미를 풀 로 붙이는 봉미제도로서 채점이 다 끝난 뒤에 접은 부분을 펴서 성적을 발표했다. 절과는 이를 악용하여 다른 사람 시험지에 자신의 봉미를 붙이거나 봉미관이나 서리를 매수하여 자신의 답안지 봉미를 합격될 만한 자의 봉미와 바꿔치기 하는 행위를 말한다. 시험지 바 꿔치기 행위인 것이다. 이는 오늘날 공무원 시험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OMR카드에 정확히 자신의 인적사항과 답안을 같이 기입하기 때문에 바꿔치기 할 수 없는 것이다. 아 날로그 방식의 조선시대에서나 통할 방법으로 남의 합격을 도둑질하는 개인적으로 최악의 부정행위인 듯 하다.
답안 작성이 끝난 후 답안지는 수권소에 제출되었고 수권관 두 명과 군졸 2~3명이 순서 대로 받고 시험 시간이 지나면 포장이나 멍석을 답안지 위에 덮었다. 마감 시간이 끝나면 더 이상 시험지를 받지 않았고 그 위에 던지는 답안지들은 그 위에 마감 이후 제출했다는 글자를 새기고 낙방 처리 했다.
시험 중 부정행위의 경우 앞서 소개한 것 외에 시험장 바깥에서 미리 답을 써서 들어간 다거나 시험관이 문제를 미리 응시자에게 알려주는 경우, 시험장 경비 담당 군졸들이 시 험장에 드나들면서 답을 알려주는 경우 등 다양했다. 이렇게까지 부정행위가 다양하게 발 달한 것은 역시 과거에 급제하는 것이 엄청난 영광이자 출세의 지름길이란 것을 보여주지 만, 한편으로 이렇게 해서 과거에 급제한 자들에 의해 나라의 일이 엉망으로 처리되었을 것을 생각하니 씁쓸하다. 오늘날에는 그래서 그런 부정행위를 최대한 없애고자 노력을 많 이 하는 듯 하지만 여전히 채용비리 관련 뉴스들이 쏟아져 나온다. 인간의 본성은 과거나 현재나 기본적으로 이기적이기 때문에 그런 이기심이 양심을 짓누르고 표출되는 사례들을 보면 ‘역사는 반복된다’의 의미를 통감하곤 한다.
⑷ 시험 합격으로의 험난한 길
현대의 공무원 시험 응시자 수는 해마다 기록을 경신한다. 이는 안정적인 직장과 수입 그 리고 무엇보다 삶의 질 향상의 핵심적인 요소인 여가시간의 확보의 메리트가 가장 중요한 원인이라 생각한다. 과거 시험에서는 역시 무엇보다 가문의 영광이 우선이고 임금의 눈 밖 에 나지 않는 이상 조용히 지내면 비교적 안정적으로 높은 수입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과거급제에 필요한 것은 시간과 돈이었다. 일단 문과에 급제하려면 소과에 합격하고도 조 선 전기의 경우 8년, 후기에는 10년 정도 더 공부해야 했을 만큼 공부 시간이 엄청났다. 평균적으로 20 ~ 30년간을 공부하는 데에 시간을 써야 했고 이에 투입되는 비용 또한 만 만치 않았다. 지방 출신의 경우 장원 급제자 비율이 50대 이후가 다수인 것을 보면 서울 출신에 비해 지방은 더 힘들었을 것이다. 대과는 둘째 치고 소과의 경우도 합격하기 힘든 시험이었다. 초시에 합격하려면 거의 15대1에 가까운 경쟁률을 뚫어야 했고, 복시에 합격 하려면 7대1정도를 뚫어야 했다. 소과에 합격하는데 얼마나 어려웠는지에 대해서는 퇴계 이황의 사례를 보면 알 수 있다. 이황은 23세에 서울에 올라가서 소과에 3번이나 떨어졌 다고 한다.
이처럼 어려운 시험을 합격하기 위해 가난한 선비들이나 양인들은 오로지 공부밖에 길이 없었다. 명망가의 자제들은 연줄과 각종 부정행위를 이용해 급제하는 경우가 있으면 가난 하거나 연줄이 없는 사람들은 억울하게 보고만 있어야 했다. 그들은 오로지 공부에만 집중 했으며 얼마나 절박했으면 당시 조선이 유교를 국가이념으로 삼고 불교를 탄압했는데도 몰 래 불공을 정성스럽게 드리기도 했다.
이 책에서는 이런 조선 과거 수험생들의 다양한 절박한 사연들을 소개하면서 당시 조선 시대의 과거 시험 문화들을 실증적인 기록들로 보다 생생하게 알 수 있게 했다.
3. 나오며
필자는 이 책을 읽으면서 조선시대에서 수험생들에게의 과거 급제가 가지는 의미와 현대의 고시라고 할 수 있는 시험들이 현재 수험생들에게 가지는 의미를 끊임없이 생각하며 읽었다. 그 과정에서 다양한 문화들이 생겨나고 이에 관련한 제도들 또한 시행되는 것을 보면서 역사 가 반복되는 것이 이런 사례에서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을 느꼈다. 시험이 사회에서 가지는 의 미는 명확하다. 누구에게나 합격하여 높은 지위에 오르고 명예로운 사회생활을 꿈꿀 권리가 있다. 이를 위해 누가 절실하게 노력하느냐가 시험에서의 당락을 결정하고 그런 사람이 사회 에서 좋은 대접을 받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이 의미를 모두 알고는 있지만 그대로 실천하려 는 사람들만 있다면 사회는 조용할 것이다. 역시 사회에는 다양한 성향의 사람들이 존재하고 여러 문화와 제도들이 이들에 의해 발생하는 것은 이 책에서 소개한 여러 부정행위들이나 오 늘날 사회에서 이슈가 되는 채용비리와 같은 것들을 보면 알 수 있다. 노력하는 자들과 그런 노력에 편승하려는 자들이 사회에서 일으키는 갈등들을 통해 새로운 문화와 제도들이 탄생하 고 그렇게 역사는 반복되고 새롭게 생성된다는 것을 이 책을 보면서 느꼈다.
4. 참고 논문
이선엽, 김도현(2007), 「과거제도에 관한 비판적 성찰: 조선의 ‘문과시험’을 중심으로」, 『한국 행정사학지』 VOL. 21 No.0, pp.1~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