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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태복음 6장 1절 율법을 넘어선 의의 관점
의라고 하는 것은 옳은 것, 또는 옳은 일을 말합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다같이 마태복음 6장 1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 이 말씀은 짧지만 많은 것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6장 전체에 하시는 말씀의 시작부분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이 내포하는 첫 번째는 관점의 문제입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입니다. 사람들이 사람에게 보이고 싶어하는 것은 많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 안에 있는 욕망은 누군가에게 멋있게 보이거나 특별하게 보이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그렇게 보일 수만 있다면 이것도 해보고 저것도 해봅니다.
어릴 때는 아빠 엄마에게 그러한 것들을 시도해봅니다. 그러면 아빠 엄마는 좋아하면서 예뻐하기도 하고 칭찬하기도 합니다. 그것이 아이들의 성장에 큰 플러스요인이 됩니다. 자라는 아이들을 효과적으로 칭찬하는 부모에게서 자란 아이들은 그 개인이나 가족들은 물론이고 나라와 온 세계에 좋은 영향력을 끼치는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다 줍니다.
이런 아이는 자라면서 어린이집이나 학교에 들어가게 되면서 친구들에게 인정을 받고자 노력하게 되고, 선생님에게 사랑을 받고자 노력하게 됩니다. 그리고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를 들어가면서 그 영역은 확대가 됩니다. 직장에 들어가면 상사와 동료들에게 인정을 받고자 애쓰고 노력합니다. 그로인해 회사에 많은 유익을 끼칩니다.
그리고 그 지위가 올라가면 올라갈 수록 많은 사람들을 알게 되고 또 많은 사람들을 다스리며 이끄는 자리에 올라가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어떤 사람은 자기를 위해 다른 사람들의 장점을 이용하는 사람이 되거나 아니면 다른 장점을 가진 사람들을 키워 자신의 동반자로 삼거나 하는 사람이 됩니다.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자신의 지위가 더 확고해지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람에게 보이는 관점입니다. 대인관계가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그들에게 보이는 면을 더 조심스럽고 완전하게 보이기위해 많은 시도들을 합니다. 몸가짐, 마음 가짐을 조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초점을 사람에게 놓을 때 그는 사람 중심의 삶을 형성합니다. 젊을 때는 승승장구하며 잘 나가다가 어느 정도 나이가 차면 육체도, 정신도 하향세를 타게 됩니다. 그때는 점점 다른 유능한 사람들에게 자기 자리를 내주게 됩니다. 그때 그는 자기가 행했던 모든 것이 아무것도 아니었음을 느끼게 되는 상실감과 허무와 고독을 맛봅니다.
여러분들이 만일 사람들이 여러분들을 어떻게 보아주느냐에 관점을 맞추고 살게 되면 그것은 반드시 끝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그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 발거둥을 치든지, 아니면 스스로 자신의 한계를 깨닫고 그 자리를 누군가에게 물려주든가 간에 여러분은 그 자리를 다른 사람에게 물려주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을 자신의 중심으로 보는 사람들은 모든 것을 다 물려주고 그 자리를 떠날 때가 옵니다. 솔로몬은 전도서를 통하여 이 세상에 모든 것을 다 누려보았지만 나이들어 늙어서 보니 “모든 것이 다 헛되도다”하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 땅이 자기를 어떻게 보는 지에 대한 관점을 가지고 사는 사람의 끝은 허무와 고독과 슬픔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사 그런 날이 온다는 것을 인식할지라도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게 잘 보이고 싶어하는 마음이 많이 있습니다. 사탄은 그것을 자꾸만 세상에 내보이라고 부추깁니다. 하나님은 사람마다 나름대로의 장점들을 주셨습니다. 우리 나라 속담에 굼뱅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여리고에서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소식을 들었던 두 소경에게 있는 비장의 무기는 목소리였습니다. 그들의 큰 목소리를 사람들의 방해를 뚫고 에수님의 귀에까지 들리게 했고 자기들의 눈을 뜨는 놀라운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그 장점에 예수님 앞에 이르렀을 때 그들은 눈을 뜨게 하시는 예수님을 체험한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도 역시 장점은 있습니다. “나는 잘 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하는 말을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들어보았습니다. 저 역시도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 것도 잘하는 것이 없다는 그들 역시 하나님이 선용하고 계시는 것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때로는 잘하는 것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막기도 하고 못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지만 사탄은 자꾸만 사람들을 의식하게 하며, 사람들에게 장점을 보여주라고 부추깁니다. 그것을 사람들을 통해 부추기는 것입니다.
세상은 사람들을 사람 앞에 잘하는 것을 보이라고 부추깁니다. 그로인해 명예가 주어지고 돈이 주어지며, 또한 어느 정도의 권세와 혜택도 주어집니다. 그것을 얻고 누리고 싶어서 사람들은 발거둥치면서 도전하고 또 도전합니다. 비록 시간이 걸리더라도 반드시 그것을 얻고자 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자신이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다른 사람이 가지고 있을 때 그를 지지하고 후원하면서 대리만족을 얻기도 합니다. 연예인이나 운동선수들을 공인이라고 하는 이유가 거기 있습니다. 공인이라는 것은 공동의 사람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너는 이제부터 너의 것이 아니고 우리 모두의 것이야 너희는 우리의 지지와 돈과 후원에 힘입어 우리를 즐겁게 해주어야해. 물론 그에 대한 대가는 충분히 주겠어 하지만 우리를 실망시키면 안돼. 알았지?” 이것이 세상이 무엇인가 뛰어난 사람에게 요구하는 방식입니다.
이런 세상의 요구에 만족하면서 살던 사람에게 찾아오는 것이 있는데 바로 두려움과 고독과 허무입니다. 그들은 자기가 잘 하던 것이 언젠가는 못할 때가 온다는 것을 잘 압니다. 그때 자기를 지지하던 수많은 팬들이 냉담하게 자기를 비난하며 떠나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그 공포감에 어떤 사람은 그것이 닥치기도 전에 자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그런 일이 터지고 난 뒤에 자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어떤 사람들은 그 일로 인해 하나님을 찾기도 합니다. 그것의 헛됨을 맛보았기 때문에 이제는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 의지해보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이 어떤 의미에서는 종교적인 현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종교적인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왔을지라도 그를 만나주시고 새로운 관계를 시작하게 하십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찾을 때 만나주시는 이것이 은혜이며 축복입니다.
다음으로 마태복음 6장 1절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입니다. 사람들 앞에서 사는 것입니다. 사람들 앞에서 사는 사람들은 사람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온갖 애를 씁니다. 이것은 극도의 긴장과 피곤함을 가져옵니다. 극도의 스트레스를 줍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마음의 자유함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의 눈을 의식해서 살면 마음의 자유를 잃어버립니다.
바라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은 사람들 앞에서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금식을 했고, 기도를 했고, 구제를 했으며, 경건하게 보이고자 노력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아닌 사람들 앞에서 살았습니다. 그런 그들의 영적인 실체를 예수님이 드러내셨을 때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시도했고 결국은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그러면서 자신들의 위선을 덮었습니다. 그런 그들은 양심조차 죽어있어서 하나님을 위해 마땅히 해야할 일을 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사람 앞에서 사는 사람들의 위험입니다. 사람 앞에서 사는 사람은 하나님이 보이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사는 코람데오의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은 성경은 경건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언제나 하나님을 의식하며, 신뢰하며, 의지하고 사는 믿음의 삶입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사셨습니다. 코람데오의 삶을 사신 것입니다.
다음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끄는 것은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사람이 말하는 의는 여러 형태로 나타납니다. 우선적으로 지역적인 공동체에서 발생한 의의 개념입니다. 이것은 한 가족에서도 발견되고, 한 동네에서도 발견이 되며, 한 직장에서도 발견이 됩니다. 그리고 크고 작은 동네와 농촌과 도시에서도 조금씩 다른 형태로 사람들의 관습으로 자리잡습니다. 뿐만아니라 크게는 나라와 나라 사이에도 각자의 의가 만들어집니다.
이렇게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의는 나라와 나라 사이에 같은 점도 있고 다른 점도 있습니다. 나라 안에서도 지역과 지역이 다릅니다. 도시와 도시, 그리고 도시와 농촌, 농촌과 농촌 사이에도 비슷한 것이 있고 다른 것이 있습니다. 한 가정에서도 남편과 아내가 말하는 의가 같은 것이 있고 다른 것이 있습니다.
사람에 의해 정의된 의는 이렇듯 같음과 다름을 이루며 한 가정과 지역과 나라와 세계를 이룹니다. 사람들은 이 의의 기준을 가지고 서로 호감을 느끼기도 하고 서로 격한 감정으로 다투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이 의의 관점이 자신이 자란 국가적, 지역적, 가정적인 환경의 영향을 받으면서 생성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서로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는데 서로 다른 결과를 옳은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예를 들어 지금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사람들은 서로 지지하는 사람들이 다릅니다. 그런데 지지자들은 자기기 지지하는 후보가 옳다고 생각합니다. 이 바탕에는 자기가 지지하는 후보가 잘못된 사람일 수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여러분들에게 말하고 싶은 것은 이 땅에 절대적인 의는 없다는 것입니다. 한 가지 만을 제외한다면 말입니다. 그 한 가지의 의가 바로 하나님의 의입니다. 사람들이 주장하는 자 자기의 의는 사람들의 지지를 받을 수도 있고 받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많은 지지를 받는 사람들은 그 지역의 사람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의를 행하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도 그런 의를 행하는 사람을 무조건 옳다고 이야기할 수가 없습니다. 특히 그런 사람들의 지지를 받고 있지만 하나님에게는 지지를 받지 못하는 의의 사람도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이 그랬습니다. 그들은 율법에서 나온 의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율법은 모든 삶을 구체적으로 이것이 옳다, 저것이 옳다를 다 이야기해주지는 않습니다. 예를 들어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고 하고 있지만 어느 영역에서 어떻게 지켜야 거룩한 안식일을 지키는 것인지가 분명치 않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을 위한 열심을 가지고 나름대로의 법칙을 만들었습니다. “안식일에는 십리 이상의 길을 가지 마라,” “안식일에 불을 켜지 말라,” “안식일에 일을 하거나 음식을 만들지 마라” 이 외에도 많은 법칙을 만들고 마치 하나님이 명령하신 것처럼 지키게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하나님의 본 뜻과 멀게 만든 결과를 가지고 왔습니다.
예수님이 “너희 의”라고 말씀하시는 부분이 바로 그런 것들입니다. 이것은 그 다음에 나오는 구제, 기도, 금식, 재물관에 많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존경하는 사람들이 만든 법칙들을 마치 하나님의 율법처럼 생각했고 그것을 어기면 정죄했습니다. 그러면서 자기는 그것을 지키고 있다면서 자기 의를 드러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사람들에게 너희는 너희 의를 앞세워 하나님의 의를 가리고 있다고 책망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너희 의를 행치 아니하도록 해라 그런 마음을 품고 자기들의 의를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이미 이 땅에서 자기 상을 받았느니라”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보였고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았기 때문에 더 이상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상이 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에게 보이려고 하던 것을 하나님의 존재는 믿지 못하면서 믿는 척하고 이 세상에서 칭찬을 받는 것으로 만족하는 사람들은 화가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종교적으로 살았으면서도 결국 지옥에 들어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코람데오의 삶을 살 때 그것이 사람들에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서 행하는 것과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이 자연스럽게 사람들에게 보이는 것은 다릅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살다보면 그 거룩함이 사람들에게 자연스럽게 드러납니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행하는 사람들과는 무엇인가가 다릅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여러분들의 마음에 사람들이 여러분들을 보아주는 눈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고 계시는 것에 대한 여러분에 대한 마음이 있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음으로 그렇게 경건하게 살아가는 여러분들을 보시며 여러분들과 함께 계시기를 기뻐하셔서 성령을 충만하게 부어주시고 이 땅에서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의 열매를 맺도록 이끄시고 복을 주실 것입니다. 이 축복을 받으시는 여러분들이 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