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ㅡ중국 최고의 화가 나빙이 그린 십팔나한도 ㅡ 아무리 멋진 예술작품도 그것을 알아보지 못한다면 한낱 쓰레기에 불과하다ㅡ
서양의 최후의 만찬&동양의 십팔나한도
레오나르도 다빈치 나빙 어느 그림이 더 예술성이 높을까 더 가치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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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의 그림 명작 대결 예수와 부처의 대결 서양의 화가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다빈치와 동양의 화가 나빙의 대결
예수님의 제자 그림을 그린 것으로 유명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 그림이 있다
세계의 걸작 그림으로 유명하다 가치를 논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난 명작 그림이다
그런데 동양에는 다빈치의 그림과 견줄만 하거나 오히려 더 뛰어 날수 있는 명작 그림이 있다
바로 양주팔괴로 유명한 중국 최고의 화가 나빙이 그린 십팔나한도 십팔나한회 그림이다
서양에서 다빈치가 예수님의 제자들을 그렸다면 동양에서는 나빙이 부처님의 열여덟 제자를 그렸다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 그림이 제자들의 아주 섬세한 얼굴 표정 모습을 그렸다면
거기에 견줄만큼 나빙의 십팔나한도 그림도 18명의 다양한 부처의 제자들의 모습을 상세히 특색있게 제각각 섬세하게 그 표정을 그렸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최후의 만찬 그림은 널리 알려져 있지만 나빙이 그린 십파나한도 그림이 지금까지 대중에게 공개된 적이 없고 알려진 적이 없기 때문에
그림의 가치를 제대로 아는 사람이 없다
개인적인 견해이지만 레오나르도 다빈치 최후의 만찬 그림과 양주팔괴 나빙이 그린 십팔나한도 그림은 거의 쌍벽을 이룰 만큼 대단한 그림이라고 생각한다
나빙이 그린 그림에 발문에는 마음을 가다듬고 정성을 다해 그림을 그렸다는 글이 적혀 있다
그만큼 온 심혈을 기울여 그린 대작이라고 할 수 있다
서양의 레오나르도 다빈치 그림 최후의 만찬이 있다면 동양에는 나빙이 그린 십팔나한도 그림이 있다
동양과 서양의 우위를 따질 수 없을 만큼 대단한 명작 그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굳이 유럽까지 가서 최후의 만찬 그림을 보는 것보다 우리나라에서 나빙이 그린 십팔나한도 십팔나한회 그림을 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싶다
크리스티 경매 소더비 경매에 출품한다면 엄청난 가격이 형성될 듯 합니다...
한국 미술 감정원 진품 감정서
박찬 감정위원 감정 ㅡ 중국 도자기 그림 전문가
한국 미술 감정원 진품 감정서
박찬 감정위원 감정 ㅡ 중국 도자기 그림 전문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 그림
레오나르도 다빈치 최후의 만찬 그림
나빙이 그린 십팔나한도 십팔나한회
나빙이 그린 그림도 다빈치 그림 못지않게 제자들의 섬세한 모습 다양한 모습을.
그림에 담아내었다
나빙이 그린 그림도 다빈치 그림 못지않게 제자들의 섬세한 모습 다양한 모습을.
그림에 담아내었다
이런 그림을 볼 수 있다는 것이 나빙의 덕분이 아닐까
동양의 나빙 서양의 다빈치 이 두 화가의 그림을 비교 감상해보는 것이 얼마나 재미있는 일일까
18명의 부처의 제자들의 모습을 아주 상세히 다양하게 그림으로 그렸다
부처 제자들 앞에서 재롱을 떠는 듯이 보이는 용의 그림 아주 작은 용의 그림
그 당시 왕권이 얼마나 실추되었는지 보여주는 그림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용과 호랑이를 그려넣어 청나라가 망하기 전의 부패하고 타락한 현실 속에 왕권이 추락하는 모습을 그림에 담아낸 것으로 보인다
용과 호랑이를 그려넣어 청나라가 망하기 전의 부패하고 타락한 현실 속에 왕권이 추락하는 모습을 그림에 담아낸 것으로 보인다
부처의 제자가 호랑이를 깔고 앉아 있다
닮은 점이 하나도 없는 완벽히 다른 18명이 부처님의 제자들
레오나르도 다빈치 최후의 만찬 예수님의 제자들과 비견될 만큼 명작 중에 명작 그림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최후의 만찬 예수님의 제자들과 비견될 만큼 명작 중에 명작 그림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접기/펴기
중국 최고의 화가 양주팔괴 나빙이 그린 그림 십팔나한회
다빈치 그림과 나빙이 그린 그림을 함께 전시해서 그 예술성을 따져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문의 공일공 삼삼육사 삼팔삼육 저에게 핸드폰 문자를 한통 보내 주시면 됩니다
제목: 청대 나빙(羅聘, 1733–1799) <十八羅漢會> 크리스티 홍콩 출품 문의
안녕하세요.
저는 [김형희]입니다. 현재 청대 화가 羅聘(나빙, 1733–1799)의 <十八羅漢會(십팔나한회)> 작품을 소장하고 있습니다.
작품 정보는 아래와 같습니다.
• 작가: 羅聘(나빙, 1733–1799)
• 제목: 《十八羅漢會(십팔나한회)》
• 제발문: “昔在辛巳年秋 楊柳羅聘為心祥寫”
• 제작연대: 辛巳年(1761, 건륭 26년)
• 매체/크기: 종이에 수묵채색, 47×490cm]
• 소장 이력·보존 상태: [ 작고하신 선진께서 물려주신 것입니다 전체적으로 상태 양호합니다만 작가 수결 뒤쪽 약간의 손상이 있습니다]
첨부파일에는 작품 전체 사진, 제발문과 인장 확대 이미지, 프로비넌스 요약을 포함했습니다.
Subject: Enquiry: Qing Dynasty Luo Ping (羅聘, 1733–1799) “Shíbā Luóhàn” (十八羅漢會), dated Xinsi year (1761)
Dear [Name],
I would like to submit the attached Chinese painting attributed to Luo Ping for your preliminary review and an auction estimate at Christie’s Hong Kong (Chinese Paintings).
Work details:
• Artist: Luo Ping (1733–1799)
• Title: “Shíbā Luóhàn” (十八羅漢會)
• Inscription: “… 昔在辛巳年秋 楊柳羅聘為心祥寫”
• Date: Xinsi year (1761, Qianlong 26)
• Medium/Size: [paper/in
Christie’s 서울 오피스 담당자(Hak Jun Lee / hjlee@christies.com
제목: 청대 나빙(羅聘, 1733–1799) <十八羅漢會>
작품 정보는 아래와 같습니다.
• 작가: 羅聘(나빙, 1733–1799)
• 제목: 《十八羅漢會(십팔나한회)》
• 제발문: “昔在辛巳年秋 楊柳羅聘為心祥寫”
• 제작연대: 辛巳年(1761, 건륭 26년)
• 매체/크기: 종이에 수묵채색, 27×480cm]
• 소장 이력·보존 상태: 전체적으로 상태 양호하며 낙관 아래쪽 약간의 손상이 있습니다]
본 작품의 크리스티 홍콩 Chinese Paintings 경매 출품 가능 여부와 예상가, 위탁 절차에 대해 안내 부탁드립니다. 필요 시 추가 자료를 제공할 수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김형희
010 3364 3836 kkkk000000@naver.com
② 영문 템플릿
Subject: Consignment Enquiry: Luo Ping (羅聘, 1733–1799) “Shíbā Luóhàn” (十八羅漢會)
Dear Mr. Lee,
My name is [Name], and I am currently holding a Qing Dynasty painting by Luo Ping (1733–1799) titled “Shíbā Luóhàn” (十八羅漢會).
Details of the work are as follows:
• Artist: Luo Ping (1733–1799)
• Title: “Shíbā Luóhàn” (十八羅漢會)
• Inscription: “… 昔在辛巳年秋 楊柳羅聘為心祥寫”
• Date: Xinsi year (1761, Qianlong 26)
• Medium/Size: [Paper/Ink, dimensions]
• Provenance & Condition: [Brief history]
I have attached high-resolution images of the entire painting, close-ups of the inscription and seals, and a short provenance summary.
Could you kindly advise on the suitability of this work for Christie’s Hong Kong Chinese Paintings auction, an estimate range, and the consignment procedure? I will be happy to provide any additional information you may require.
Thank you very much for your guidance.
Best regards,
[Kim huoung hee]
[010 3364 3836
kkkk000000@naver.com
이메일 발송 시 첨부파일
작품 전면·후면·상세 사진
제발문·인장 확대 사진
프로비넌스 요약(PDF) 돌아가신 선친께서 물려주신 것입니다
보존상태(컨디션 리포트) 전체적으로 상태는 양호하며 낙관 아래쪽에 약간 손상된 부분이 있습니다
1. 나빙(羅聘, 1733–1799)의 생애 개요
• 출생: 1733년(雍正 11년), 안휘(安徽) 출신.
• 사망: 1799년(嘉慶 4년).
• 호(號): 遯夫(둔부), 兩峰(양봉), 楊柳(양류), 金牛山人, 師蓮老人 등.
• 소속: 청대의 대표적 개성파 화가 집단인 양주팔괴(揚州八怪) 중 막내.
• 스승: 金農(金农, 1687–1763)에게서 화법을 사사.
• 화풍: 불화, 인물화, 괴석, 매죽난, 귀취도(鬼趣圖) 등 독창적 작품을 남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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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제작 시점 (辛巳年, 1761년)의 나빙
• 나이: 29세.
• 시기적 상황:
• 스승 金農이 아직 생존해 있던 시기(금농은 1763년 작고).
• 나빙이 막 성년기를 지나 화가로서 본격적인 독립 활동을 시작하던 때.
• 금농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으면서도 개성적인 불화와 괴이한 상상력을 드러내기 시작한 초기 대표작기.
따라서 1761년작 《十八羅漢會》는 나빙이 화단에 자신의 존재를 각인하기 시작하던 시기의 초기 불화 걸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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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十八羅漢會>의 의의
• 불교적 주제:
• 원래 나한도는 16존자(十六羅漢)를 기본으로 하지만, 청대에는 **降龍羅漢(가섭)**과 **伏虎羅漢(미륵)**을 더하여 18존자가 성립.
• 이 작품은 그 확장된 도상을 반영.
• 개인적 의의:
• 제발문에 “爲心祥寫(심상에게 그리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특정 후원자·지인을 위해 그린 헌정작임.
• 즉, 상업적 주문이 아닌 인연과 교유 속에서 탄생한 작품.
• 예술사적 위치:
• 1766년 대표작 <鬼趣圖(귀취도)> 이전 시기의 중요한 불화 시도.
• 금농의 필법을 잇되, 강렬한 필획, 괴이하면서도 인간적인 인물 묘사라는 나빙 특유의 화풍을 보여줌.
• 양주팔괴의 “파격적이고 기이한 미감”이 불화에 접목된 사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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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종합 평가
• 연대: 1761년(乾隆 26년), 나빙 29세.
• 성격: 스승 금농 곁을 지키던 젊은 시절의 작품, 불교적 주제에 독창적 화풍을 접목.
• 의의:
• 나빙 불화 연구의 초기 단계 귀중한 자료.
• 단순 종교화를 넘어 교유 관계·개인적 헌정·개성적 화법이 함께 담긴 작품.
• 후일 <귀취도>와 같은 사회풍자 걸작으로 나아가는 예술적 토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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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적으로, 사용자의 두루마리 《十八羅漢會》는 1761년, 나빙이 29세 때 제작한 초기 불화 작품으로, 그의 예술적 성장 과정과 청대 불교미술사의 중요한 교차점을 보여주는 자료입니다.
박찬 한국미술감정원 감정위원
만리장성 너머 세계로 저자
만리장성 넘어 세계로'(박찬 저) 자서전을 읽어 보는 것이 어떨까 싶다. 모처럼 생소한 분야의 책을 읽는다. '고려 한글'(조석현 박찬 채희석 공저) 독후감으로 인연의 끈을 맺게 된 박찬 선생님께서 보내 주신 자서전이다. 박찬 선생님은 현 중공 문박(文博-박물관)에서 중국 유물(중국 민간에서는 공예품으로 칭한다)에 정통한 전문가로 널리 알려진 분이신데 한국인이 어떻게 하여 중국 유물 전문가로 명성을 거듭나게 되었는지 자세한 내용이 없어 아쉽다.
필자 집안에는 고완(古玩) 골동품이 단 한 점도 없다. 그나마 오래된 족보 한 점이 있었는데 그나마도 족보 만드는 인쇄소에 넘기면서 분실되었다. 필자와 한마디 상의도 없이 형이 먼 친척이 대구에서 운영한다는 인쇄하는 분에게 맡기고 찾아오질 못했다. 두꺼운 현대 족보 한 권 받고는 그만이다. 그나마 정재공파 방계 혈족 집안에 하나 남은 오래된 족보인데 반납할 이가 만무한 것이다. 상의라도 하였다면 사무실 복사기로 카피해서 보냈으면 되었을 것이다.
그나마 종가이면서도 고완 하나 없고 그나마 귀하게 여겨온 족보마저 잃어버렸는데 이유는 매우 간단하다. 필자 태어나기도 돌아가신 조부께서 경상도에 거주하다 부친이 어릴 때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셨나 보다. 왜 가셨는지는 들은 바가 없으니 알 길이 없다. 강제 동원이었는지는 확연하지 않지만 어쨌든 해방 후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셨다.
방계 혈족의 종갓집이면서도 이주민의 삶이었으니 뭔 보완 골동이 있었을까. 아마 모르긴 해도 사정은 다른 집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강제 이주민이어도 사대부 집안이 아니라면 모두 후대에 직간접적으로 취득한 것이고 족보 또한 '고 김종윤' 선생의 주장에 의하면 '역사가 일제에 의해 조립되었듯 족보 또한 편재된 것'이라고 하였다. '족보는 대부분 위작으로 한자 성명이 2백 년 전에 쓰지 않았다'라는 이유다.(한국인에게 역사는 있는가 202쪽) 그래도 유일한 족보인데 그마저 사라지고 보완 골동 한 점 없이 매주 일요일 정오 경이면 어김없이 tv에 나오는 골동품을 가끔 눈요기 한 것이 전부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중국인 주진 선생의 수제자가 되어 고완계에서 명성을 날리고 있는 저자의 책이 생소한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저자께서는 요나라 아율아보기가 명령하여 만든 국보급 '고려문 사전'을 소장하고 계시다. 얼마 전 '고려 한글'(조석현 박찬 채희석 공저) 이름으로 세상에 나온 바로 그 사전이다. 국보 지정과 함께 시급히 재정비되어야 할 훈민정음이요, 고려문사전이다.
삶과 죽음은 한 끗발 차이다. 더구나 중국에서 돈과 얽힌 이야기라면 사뭇 진지할 수밖에 없는데 언제 어디서 슬그머니 사라져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될지 모른다는 저자의 말에 공감을 한다. 관광객이 홀로 골목길을 배회하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다는 무서운 나라이니 말이다. 이런 역경을 딛고 중국 고완계에 우뚝 선 저자의 용기와 지혜 그리고 슬기에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중차대한 위험을 무릅쓰고 고완을 하게 된 이유를 '행복(88쪽)이나 정품을 발견했을 때의 기쁨(89쪽)으로 승화'라고 꼽았는데 처음에야 골동품상들이 추구하는 금전적 보상이 자리 잡을 수 있었겠지만 최종에는 행복과 기쁨이라는 정신적 가치를 추구하는 것 이외는 달리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이는 비단 고완의 경지에 이른 저자만의 전유물은 아닐 것이다. 각 분야 모두의 최고봉들이 그럴 것이다.
하물며 저자에 비하면 비유 자체가 되지도 않는 필자도 입산에서 찾는 행복이 기쁨으로 승화하니 말이다. 다소 아쉬운 것은 예수의 생애 중 30년 사생활은 공적으로 드러나지 않고 3년간의 행적만 공개되듯 저자도 중국 고완에 입문하게 된 과정 없이 중국 고완계 정점인 주진 선생의 수제자부터 서술된다는 점이다.
중국에서 조선 고완이 심심치 않게 발견할 수 있는 이유로 '조선이 천여 년 동안 상국(上國)이었던 중국에 공물로 보냈거나 수출했던 유물(101쪽)'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태조 이성계 부왕과 세자 간의 관계로 공물이나 조공이 아닌 부자지간 의례라고 재야사학자들의 주장이 그럴듯한데 어쩌거나 한중 역사에도 박식하여 많은 부분을 할애한다.
중국 고완을 소장할 수 있었던 이유로 '비전문가 지식과 안목의 결여, 자의적이고 비과학적인 감정 뒤에 숨은 이익을 함과 이익이 없으면 진품이 가짜가 되고 반대의 경우도 흔하다.(110쪽)'라고 하였으며 "중국 문물(민간은 고동 예술품), 중국 문박전문가들이 민간 고대 유물 예술품을 '공예품' 취급으로 국문(세관) 출입이 자유로울 수 있다."(158쪽)라고 지적하였다.
다소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은 '중국 문박관으로 들어온 유물은 5%에 불과하다'라고 하는데 나머지 95% 민간 소유 고완은 하등에 가치가 없다고 여긴다는 것이다. 공무원의 헛된 자만심으로 수많은 국보급 유물들이 공예품이라는 이름으로 해외로 빠져나가는 것을 수수방관하고 있다는 점이다. 많은 중국 고완계에서도 이를 안타깝게 여기고 있으나 달리 대책이 없어 보인다.
홍산옥기, 중국도자기, 청동기, 불교미술품, 황실서화, 고대 보석류, 고대 회화류, 운석, 황실 보이차 등 실로 모든 분야를 망라한 섭렵한 저자의 방대한 지식이 놀랍기만 하다. '임진란 미국에서' 저자 채희석 님은 다이아몬드도 흠집을 내지 못하는 단단한 홍산옥을 가공한 도구는 고도 문명 외계인의 레이저뿐이라고 단언하고 있는데 이에 비해 저자는 홍산 지역이 고대에 열대일 당시 어떤 식물에 의해 물러진 '홍산옥을 유리 운석으로 가공'(299쪽) 한 것이라고 하였다.
"원나라 자주요로 분류된 철화백자에 그려진 그림을 보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라는 것을 단박에 알고 가톨릭은 조선 시대가 아니라 고려 때부터 신앙이 되었다고 주장한 바 '나는 고려왕(충숙왕/고려 제27대 국왕, 재위 1313-1330년, 복위 1332-1339년)한테 감사드린다. 고려의 가톨릭 신자들을 잘 보살펴주시기에.'라는 교황 요한 22세 편지가 발견되어 결국 나의 주장이 옳았다는 것이 증명되었다.(439쪽)"고 하며 '고려청자 예수성심상'(441쪽)을 보여준다.
천주교 전래는 조선 말기 이승훈에 의해 전래된 것이라고 백과사전에 나와 있지만 사뭇 다른 주장이며 이를 뒷받침하는 교황의 서한까지 발견되었으니 교과서는 수정되어야 마땅하다. 이를 계기로 수많은 왜곡과 조작된 부분에서도 실체적 접근이 이루어졌으면 한다. 한편, 저자는 천주교인이다. 저자의 독실한 신앙은 '기도는 다른 사람의 고통을 자신이 떠맡고, 그들에게 자신이 가진 모든 것, 건강, 재산을 준다고 마음속으로 상상하면서 하는 것이다.'(443쪽)라는 것에서 드러나 듯 참으로 인류애적 사랑이 묻어난다. 그런 기도를 하는 이들은 없다. 대다수 신자들은 오직 기복 신앙에 밑바탕을 둔 나와 내 가족을 위해서 기도할 뿐이다.
'사람이 이 세상에서 태어나 아름다운 이름을 남기는 것은 지극히 어렵고도 영광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250쪽)'라는 말에 지극히 동의한다. 저자가 자서전을 통해 이를 증명하였듯 필자도 비록 졸필이지만 그간 몇 번이나 글을 책으로 엮으려 하였지만 여러 사정이 녹록지 않아 인터넷으로 대신하고 하는데 책이 주는 감명과 소장은 감히 e북이 따라갈 수가 없다.
어쩌거나 끊임없는 열정과 신념으로 중국 고완계 거장으로 우뚝 선 저자가 참으로 위대하다. 목숨이 경각에 달린 순간에도 도전의 정신으로 무장하여 중국 고완계 각 부문을 섭렵하고 정상에 우뚝 선 인물이 되어 자랑스럽기 그지없다. 이는 성공한 고완인이 아닌 정상에 서려는 열정과 의지가 얼마나 강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세상에서 가장 비싼 것은 바로 사람의 마음이다.(257쪽)'라는 것을 이미 통달한 저자이기에 가능한 것이 아닐 수 없다. 사회생활에 중요한 매개체인 끈끈한 인간미는 어떻게 유지해야 하는 것인지를 교과서처럼 보여준다. 접착제와 같은 인간미로 하여금 유물, 역사, 문화, 예술, 인맥(487쪽) 등 다방면에서의 금계일학으로 나설 수 있었던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아무쪼록 저자의 바람대로 고려문사전과 수많은 유물들이 빨리 국보로 지정되어 바라보는 국민 모두가 감탄과 감동을 자아내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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