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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24. 묵상글 들 ( 연중 제30주일. - 선교사적 사랑.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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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24. 연중 제30주일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전교 주일 - 선교사적 사랑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 이는 모두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가 믿지 않는 분을 어떻게 받들어 부를 수 있겠습니까?
자기가 들은 적이 없는 분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선포하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
파견되지 않았으면 어떻게 선포할 수 있겠습니까?"
전교 주일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 이는
모두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하는데 즉시 든 생각은
모든 이가 구원받기를 원하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원하더라도 구원받도록 실제로 복음을 전할 사람은 얼마나 될까였습니다.
그런데 제가 왜 이렇게 도발적인 질문을 할까요?
실로 구원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이 없거나 줄어들고,
구원을 위해 선교를 하고자 하는 사람도 참으로 적기 때문입니다.
제가 단적인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다음달이면 위령성월인데 옛날에는 이 위령성월에
부모나 조상들을 위한 연미사 봉헌이 많았는데 요즘 점점 줄어들고,
평사시에도 부모를 위한 연미사보다 자녀들을 위한 생미사가 더 많습니다.
물론 이것은 치사랑과 내리사랑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영혼의 구원보다는 현세의 복을 더 바라는 표시이기도 하지요.
그러니까 여기에는 두 겹의 문제가 같이 있습니다.
사랑이 영혼의 구원보다는 현세의 복을 기원하는 쪽으로 기우는 것과,
보편적인 사랑으로 확장되지 못하고 협소한 자기와 가정에 갇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복음 선포하는 사람이 되려면
선교사적인 사랑을 지녀야 하는데 선교사적인 사랑이란
나와 우리 가정뿐 아니라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는 사랑입니다.
이런 뜻에서 제 얘기를 좀 하겠습니다.
제가 선교사적인 사랑을 얘기하고 있지만
저도 미국에 살다가 오기 전까지 선교란 꿈도 꾸지 않았습니다.
복음을 전해야겠다는 생각은 있었지만 제가 우리나라를 떠나
다른 나라에 가서 복음을 전할 생각은 없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외국생활이나 선교에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이전에 복음이 우리나라에 갇혔기 때문입니다.
사실 10대 때는 복음이 우리나라가 아니라 저 자신 안에 갇혔고
25살이 넘어서야 겨우 나를 벗어나 이웃에게 복음을 전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저의 복음 선포가 아직 우리나라에 갇혔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미국생활을 하면서 다른 세상을 보게 되었고,
특히 외국에서 우리민족을 보면서 북한의 복음화를 생각게 되었으며,
북한 복음화를 위해 일하다가 중국과 러시아, 일본으로 차츰 확장되었고,
이제는 해외뿐 아니라 국내에 와 있는 이주민들에게로 향하게 되었으며,
그래서 <여기 선교 협동조합>과 <여기 국밥>까지 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복음이 자주 자신 안에 갇히고,
자기 가족과 나라와 민족에 갇히는데
우리의 사랑이 모든 사람과 나라와 민족에게로 향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이나 독서나 전례 기도문을 보면
'하느님 백성', '모든 사람/만민', '모든 민족'과 같은 표현들이 많이 나오는데
'나' 또는 '나의'가 '모든'과 '하느님의'로 바뀌는 것이 선교사적 사랑임을
다시 한번 마음에 새기고 선교를 위해 기도하는 오늘이 되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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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24. 연중 제30주일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터키 에페소 기도의 집
오늘은 연중 30주일이자 전교 주일입니다. 교회는 전교 사업에 종사하는 선교사와 전교 지역의 교회를 돕고자 1926년부터 해마다 시월 마지막 주일의 앞주일을 전교주일로 정하여 신자들에게 교회의 본연의 사명의 선교의 삶을 살도록 초대합니다.
선교는 무엇보다도 사랑의 원천에서 흘러나와야 합니다. 하느님 사랑에 근원을 두고 있는 선교는 기도안에서 사랑을 깨달아 실천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마리아의 삶은 우리들에게 선교의 본질을 보여줍니다. 가난 속에 주님의 여종이시고 베들레헴에서 갈바리아까지 아름다운 사랑의 모친이셨으며 그것을 넘어 하느님께 ‘예’라는 응답을 주심으로써 우리의 역사를 바꾸어 놓은 순종의 동정녀이시고 헤브론까지 달려 가시는 선교사이셨습니다.
선교에 중심에는 십자가가 놓여져야 합니다. 십자가는 그리스도의 신비의 실현이며 믿음의 길입니다. 동방교회의 교부 신비가 오리게네스는 그리스도의 지혜와 사랑에 사고의 중심을 두며 사는 인간이 주검의 십자가를 자랑으로 생각해하지 않는다면 아무런 진보도 없을 것이라고 하며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할때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해서 반드시 설교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많은 기적 중 몇가지를 빠뜨리고 설교할 수는 있어도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의 죽음을 설교하지 않고는 선교할 없습니다”
성 보나벤투라는 네 종류의 착한 수도자들을 구분합니다. 이 구분은 선교열정을 살고 있는지 성찰케 하는 것이고 우리 신앙인에 적용하여 보고자 합니다.
첫째 종류는 악한 행실을 범하지 않지만 선행에도 열중하지 않는 착한 신앙인입니다. 이들은 다른 사람들과 평화로이 살고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으며 나쁜행실로 악한 표양을 주지 않습니다. 타고난 성격으로 평화스럽고 남과 잘 어울리기 때문에 이들은 착한 사람으로 인정받습니다.
둘째 종류는 악한 행실을 범하지 않을 뿐더러 자주 선행에 열중하는 착한 신앙입니다. 이들은 절제, 정결, 겸손, 이웃사랑 기도의 생활에 때때로 열중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생활로 만족하고 더 완전한 생활을 열망하지 않습니다. 이들은 절제, 포기, 단식 일 등 모든 생활에서 얼마만큼의 노력을 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더 높은 이상을 바라지 않습니다.
셋째종류는 선행에 최선을 다하는 신앙입니다. 그리고 최선을 다하고나서도 만족하지 않고 그 이상을 할 때까지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그러나 오로지 자기자신과 하느님께만 모든 관심을 쏟고 살기 때문에 선교 열정이 부족합니다. 이들은 이웃의 선익에 자기 자신의 평온을 앞세웁니다.
넷째종류는 가장 완전한 신앙인은 위에 말한 세가지 종류의 착한 신앙인들이 가지고 있는 덕행을 가질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만 덕행 생활에 열중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주님의 모범을 따라 다른 사람들도 하느님께 이끌기 까지 쉬지 않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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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24. 연중 제30주일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치고 지키게 하여라.”
오늘은 “민족들의 복음화 주일”입니다. ‘전교’ 혹은 ‘복음화’라는 말을 떠올릴 때 주의해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곧 ‘전교’ 혹은 ‘복음화’를 교회의 대형화와 거대화처럼, 몸집 부풀리기로 알아들어서는 안 될 일입니다. 왜냐하면, 복음화는 커져가고 중심이 되어가고 힘을 길러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라기보다, 오히려 나누어지고 쪼개져서 번져가는 것이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양적으로 물리적으로 늘려가는 것만이 아니라 나아가서는 이미 복음을 받아들이는 이들의 진정한 내면화와 성숙, 신앙의 실천도 포괄적 의미에서 복음화에 포함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이미 신자가 된 우리 역시 여전히 복음화의 대상이라 할 수 있으며, ‘새 복음화’, ‘자기 복음화’라는 말을 떠올려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모든 민족들에게 복음이 전파되어 그들이 하느님의 백성이 될 것을 이사야의 환시를 통해 보여줍니다.
<제2독서>에서는 바오로 사도가 복음이 전파되어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 이들에게 구원이 베풀어질 것을 선포합니다.
<복음>은 스승을 잃고 슬픔에 빠져 아직도 두려워하고 의심하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새로운 신원과 복음전파의 사명을 부여하십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절망하고 의심에 떨어져 있는 제자들에게 꾸짖고 책망할 만도 한데, 오히려 새로운 신원과 사명을 주십니다. 그만큼 당신께서는 언제나 제자들보다 더 사랑하시고, 더 믿고, 더 희망하십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항상 우리의 사랑보다 더 크신 우리 주님의 사랑을 보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항상 우리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보다 우리를 더 사랑하십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의 말씀은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부분은 “전권선언”이요, 두 번째 부분은 “전도명령”이요, 세 번째 부분은 “현존약속”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마태 28,18)고 전권을 선언하십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자신이 지니신 권능으로 가르치시고, 죄를 용서하시고,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부활하신 후, 이 모든 권한으로 세상을 통치하심을 선언하십니다. 그리고 바로 이 전권으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면서 새로운 사명과 함께 새로운 신원을 부여하십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 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치고 지키게 하여라.”(마태 28,19-20)
이는 제자들에게 있어, 두 가지 의미의 어마어마한 사실이었습니다. 곧 제자들의 새로운 신원과 새로운 사명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단지 복음의 선포자로만이 아니라 사람들을 ‘제자로 삼는’ 새로운 신원인 ‘스승’으로의 사명을 주어 파견하십니다. 곧 “모든 민족”, 유다민족이나 이방민족이나 우방이나 적국이나 구별 없이 모든 민족에게로 가서,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고 누구에게나 복음을 선포하라는 새로운 사명입니다.
그리고 그 사명, 곧 제자로 삼는 사명을 구체적으로 두 가지로 말씀하십니다. <하나>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어”(마태 28,19) 제자로 삼는 일이요, <또 하나>는 “주님께서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마태 29,19) 제자로 삼는 일입니다. 곧 자신의 주장이나 의견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파견하신 분께서 “명령하신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는 일이요, 자신들의 제자가 아니라 파견하신 분의 제자로 삼는 일입니다.
이처럼, 말씀을 실행하는 일이 곧 제자가 되고, 동시에 스승이 되는 일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일을 위해서 당신께서는 언제나 제자들과 동행하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
이는 ‘항상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이신 당신 존재의 정체성에 대한 계시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당신의 동행에 대한 약속이요, 항상 우리와 함께 일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와 함께 계시면서 당신이 부여하신 사명을 동행하십니다. 복음은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것이지, 우리 자신으로부터 우러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사실은 ‘복음을 선포하는 일’이 곧 자기 자신을 복음화 시키는 일이 됩니다. 그렇습니다. 만약 자신이 복음을 선포하지 않는다면, 자신 역시 복음화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 곧 제자 되는 길이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먼저 참된 제자가 되는 이가 참된 스승이 됩니다.
오늘 우리는 “전교주일”인 “민족들의 복음화 주일”을 맞이하여, 특별히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하신 말씀 하나를 되새겨 봅니다.
‘우리가 가난한 이들에게 다가가야 하는 것은 우리가 그들을 복음화 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우리를 복음화 시켜주기 때문이다.’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마태 28,20)
주님!
가르치기에 앞서 먼저 가르침을 배워 익히고 지키는 자 되게 하소서!
당신께 뿌리박고 살아가게 하소서!
무엇을 하더라도 당신과 함께 하게 하소서!
어디에 있더라도 당신께 눈을 떼지 않고 당신께 속한 자 되게 하소서!
당신의 숨결이 되고 당신의 생명을 드러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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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24. 연중 제30주일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믿고 감당하면 눈이 열린다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모두가 구원을 받고, 진리의 말씀을 선포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당신께서 명령한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이 시간 전교의 사명에 대해서 생각하는 가운데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복음을 전해야 하는 것은 우리 모두의 의무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주님께서 명한 것을 지키고, 가르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리고 믿음은 들음에서 오기 때문에 말씀은 선포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듣게 되고 들음으로써 주님께 문을 두드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부르짖음이 우리 안에 숨겨지지 않도록 우리 각자의 능력에 따라 구원의 진리를 전해야 합니다.
많은 분이 나는 말을 잘못한다. 아는 게 없다고 하면서 개신교 신자들의 전교열정과 성경에 대한 해박한 지식, 말 잘하는 것을 부러워합니다. 그러나 축구를 잘하려면 늘 축구를 해야 합니다. 농구든 야구든, 피아노를 치든 잘하려면, 그만큼 노력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기도를 잘하려면 자꾸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면서 기도를 배우게 됩니다. 성경을 읽음으로써 하느님을 더 잘 알게 됩니다. 주님을 다른 사람에게 전함으로써 더 전할 수 있는 용기, 잘 전할 수 있는 지혜도 얻게 됩니다. 그런데 그것에 대한 수고 없이 잘하려고 하니 문제입니다.
솔직히 여러분이 말을 잘못하십니까? 남 얘기하는 데는 뒤떨어지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아는 게 없습니까? 여러분이 좋아하는 것에는 많은 것을 알고 있습니다. 쓸데없는 것으로 가득 채우면 꼭 필요한 것이 들어갈 데가 없습니다. 사실 주님을 전하는 것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의 빛을 사람들 앞에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5,16). 고 하셨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세례를 베풀라고 나를 보내신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라고 보내셨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말재주로 하라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인간의 말재주로 전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 뜻을 잃고 맙니다”(1코린1,17).
사실, 말씀을 실천함으로써 더 큰 믿음을 얻게 됩니다. 믿음이 있어야 따를 수 있기도 하지만 따름으로써 믿음을 다지게 됩니다. 어느 모임은 릴레이 성경 읽기를 합니다. 반응도 아주 좋습니다. 큰 감동이 있다고 했습니다. 선한 일을 하고자 하면 우리가 감히 상상하지 못한 은총으로 넘치도록 채워주십니다. 우리가 “내가 세상 끝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28,20).하신 주님의 약속을 믿고 맡겨진 일을 성실히 감당할 때 이윽고 믿음의 눈이 더 크게 열리게 됩니다. 사도행전이 그것을 증언합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다락방에 숨어 지내던 사도들이 어떻게 변했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1코린2장 4절에 보면 “내가 말을 하거나 설교를 할 때에도 지혜롭고 설득력 있는 언변을 쓰지 않고 오로지 하느님의 성령과 그의 능력만을 드러내려고 하였습니다”라고 적혀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능력을 믿고 전교하시기 바랍니다. 때로는 실패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패는 늦춰진 성공일 뿐입니다. 더 큰 결실을 위한 믿음의 단련 시기입니다. 그러므로 상대방의 반응 여하에 실망하지 말고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하느님의 뜻을 전하시기 바랍니다. 온 세상이 우리의 활동 무대입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주저하지 말고 나아가십시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교회는 하느님처럼 되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 언제나 바깥으로 나가야 합니다. 교회가 바깥으로 나가지 않을 때, 교회 내에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수많은 악 때문에 교회는 병들고 맙니다. 왜 교회 내에 이런 병페가 있는 것일까요? 바같으로 나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물론 바깥으로 나갈 때 사고의 위험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안에 갇힌 채 병든 교회가 되는 것보다,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 바깥으로 나가 사고를 당하는 교회가 더 낫습니다. 하느님은 언제나 바깥으로 나가십니다. 하느님은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사랑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이와 동일하게 행동해야 합니다. 언제나 바깥으로 나가야 합니다.”
베드로 전서 3장 15절의 말씀을 보면 “여러분의 마음속에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거룩히 모시십시오. 여러분이 지닌 희망에 관하여 누가 물어도 대답할 수 있도록 언제나 준비해 두십시오”라고 적고 있습니다. 우리가 먼저 주님의 말씀으로 무장 되어있어야 주님을 제대로 전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자주 읽고 또 말씀을 실천함으로써 주님을 깊이 만났으면 좋겠습니다.
몇 년 전부터 한국에서는 개신교신자가 줄고 있다고 합니다. 여러 이유가 있지만 “사회봉사 및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데 인색하고, 전도활동이 지나쳐서 혐오감을 주며 헌금을 너무 강조한다. 진리 추구보다 교세 확장에 집착하고 너무 시끄럽고 요란하다. 물량주의에 물들어 있다. 도덕적으로 사회에 물의를 일으키는 경우가 많다”(이원규. 감신대.종교사회학교수)고 분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러한 전철을 밟지 말아야 합니다.
천주교에서도 경계의 목소리가 나옵니다. “천주교인들이 개인화하고 있고, 부유해지고 있다.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 관한 관심이 줄어들고 점점 보수화, 권력화하고 있다.”고 합니다. 거리홍보나 공연, 작품활동을 통한 문화 선교를 개신교에서 배우는 것은 긍정적인데 기존의 좋은 것을 잃어서는 안 된다는 반성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주님의 말씀을 통한 새 삶을 살아감으로써 주님을 증거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전교주일을 보내면서 무엇보다는 내 마음을 풍요롭게 하시길 빕니다. 비대면 시대를 맞으면서 복음을 전하는 새로운 방식을 고민해야 하게 되는데 성경 말씀을 소홀히 해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습니다.
세례를 받은 지 몇 년이 되었든 나를 통해서 성당을 찾아 세례를 받은 사람이 있다면 그나마 다행입니다. 그것은 열매를 맺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앙인이 되었으면서도 나의 영향으로 하느님을 찾게 된 사람이 아직 없다면 나는 열매를 맺지 못한 것입니다. 들꽃이나 과일나무도 일 년에 한 번 열매를 맺는데 우리가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참으로 부끄러운 일입니다. 주님께서 허락하시는 구원의 은혜를 이웃과 더불어 나누는 가운데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길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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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24. 연중 제30주일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 이기우 사도요한 신부님.
◈ 주님의 빛 속에 걸어가자! - 펜데믹 시대의 복음화
1. 오늘은 전교 주일이며, 이 미사는 민족의 복음화를 위하여 봉헌되고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현재 인류가 당면하고 있는 이 위기보다 훨씬 더 심각한 것은 우리가 위기상황을 속수무책으로 흘려보내고 있다는 비극”이라는 호소를 기회가 될 때마다 강조한 바 있습니다. 위기를 기회로 바꾸자는 뜻입니다. 당연히 이 위기는 코로나 19 바이러스로 인한 봉쇄 위기이며, 기회란 복음화의 기회입니다.
2. 보건 위기를 복음화의 기회로 바꾸려면 우리에게 익숙해진 발상을 참신하게 전환해야 합니다. 우선, 성당에서 거행되던 미사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던 전례 위주의 신앙생활로부터 일상에서 가정과 사회 전반을 아우르는 실천적인 신앙생활로 관심을 돌려야 합니다. 그리고 습관적으로 자기 자신과 가족만을 위해 기도하며 미사를 바치던 자기중심적 신앙생활에서 보건에 취약한 계층과 북녘 동포들까지 포함한 이웃 사랑을 중심으로 하는 이타적 신앙생활로 옮겨가야 합니다. 이는 사제들을 중심으로 하는 직무 사제직에서 평신도들이 능동적으로 실천하는 보편 사제직에로 무게 중심을 옮기는 일입니다. 직무 사제직은 보편 사제직을 활성화시키기 위해 생겨난 것입니다.
3. 사회적 거리두기 상황이 장기화되는 상황에서는 성당에서 봉헌되는 주일 미사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던 전례 생활에 있어서도 첫째, 주일에 성당에서 미사에 참례할 수 있는 인원이 제한되고 있는 이상에는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주간에 봉헌되는 평일 미사에 참례함으로써 성당에 모이는 인원을 분산시키는 일이 필요합니다. 이로써 주일 미사 참례 의무를 대체할 수는 없어도 주일과 평일 모두 미사를 걸르는 것보다는 평일 미사라도 참례하는 것이 더 유익한 일임을 상기하여 권장할 필요가 있습니다. 둘째, 평일에도 미사에 참례하기 어려운 경우에는 방송 미사와 방송 강론을 적극적으로 듣고, 가족들이 가정 기도를 바치며 특히 아이들에게 부모들이 교리를 가르치는 가정 교리를 활성화시켜야 합니다. 셋째, 미사나 기도로 그치지 말고 가족 단위로 이웃 사랑을 실천하도록 독려해야 합니다. 펜데믹 위기 이전에도 주일 미사에 참례하지 않는 냉담자 수는 영세자의 80%가 넘었었는데 어차피 이들는 성당에서 만날 수 없는 이상 가까이 이웃에 사는 이 냉담자들을 찾아서 함께 이웃 사랑을 실천한다면, 애덕 실천과 냉담 해소라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얻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들이 냉담해 온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지만 적어도 신앙을 버리겠다고 냉담하는 것은 아닐 것이기 때문입니다.
4. 사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사회가 제기하는 물음에 교회는 응답해야”(복음의 기쁨, 182항 이하) 한다고 촉구해 오고 있습니다. 이 시대에 코로나 사태만큼 뚜렷한 시대의 징표는 없는 만큼, 우리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시대의 징표를 식별해서 사회가 무슨 역할을 필요로 하고 있는지와 우리 자신의 존재 이유를 성찰해야 할 때입니다. 그 응답은 분명하니, 세상이 겪고 있는 보건 위기에 대해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울타리를 벗어나서 야전 병원처럼 세상에 나가서 육체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심지어 정신적으로 상처 입은 사람들을 도움으로써 고통을 함께 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부여된 응답이자 복음화의 기회로서 주어진 행동의 사명입니다.
5. 세상은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한 감염의 고통 때문에만 힘든 것이 아니라, 고립되고 버림받을 지도 모른다는 공포감 때문에도 힘듭니다. 바이러스도 눈에 보이지 않지만 공포감도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코로나로 인한 보건 위기 상황에서 질병과 죽음은 사회적 약자들을 먼저 쓰러지게 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쓰러져 죽어도 코로나 감염 위험 때문에 문상을 받지도 못해서 더욱 쓸쓸하고 조용히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코로나 백신을 접종받듯이, 방역수칙을 지키는 가운데 관심과 도움이라는 백신을 접종함으로써 사람들에게 사랑의 면역력을 길러주는 예방 활동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상처 입은 사람들이 받은 정신적 충격을 해소해 주는 회복력을 줄 수 있습니다.
6. 어린이와 청소년들은 학교 수업이 축소되고 원격 온 라인 수업이 장기화되고 있지만, 주일학교까지 비대면 교리 수업을 하기가 어려워서 그냥 쉬고 있는 중입니다. 하지만 원래는 어린이와 청소년들에 대해서는 가정에서 실시하는 신앙 교육이 기본이고 본당의 주일학교는 이를 보충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에 학원을 보내듯이 주일학교에 내맡기는 부모들 탓에 학년이 올라갈수록 주일학교 참석율이 떨어지는 등 어린이와 청소년의 신앙교육이 부실해져 왔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참에 가정의 일상에서 부모에 의한 신앙 교육이 대면으로 이루어지는 정상화가 필요합니다.
7. 신자들이 가정에서 직접 실천해야 할 전례생활에 대해 더 보충하겠습니다. 감염병 시대의 전례는 달라지고 있지만, 현재 겪고 있는 이 보건위기가 장기화될 가능성이 있고, 코로나 바이러스가 아닌 또 다른 바이러스도 발생할 수 있는 작금의 상황에 능동적으로 대처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회적 거리두기와 비대면 종교활동 등으로 방역지침을 잘 준수했기 때문에 우리 교회에서는 현재까지 집단 감염이 일어나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좀 더 자신감을 갖고 전례와 신앙 활동에 적극적인 자세를 가질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즉, 이제는 주일에 성당에서 거행되는 미사에 참례하는 것이 신앙생활의 대부분이었던 종래의 관행을 벗어나서, 가족 끼리나 가까운 이웃이 모여 함께 성경 말씀을 읽으며 식사의 친교를 나누는 등 사제직 개념이 확장된 형태, 즉 보편 사제직의 실천을 강조할 필요가 생겼습니다. 과거 박해시대의 교우촌에서는 지금 이 위기보다 더한 위기를 백 년이나 겪으며 공소 단위로 신앙 생활을 해 나갔던 역사적 전통을 되살려야 합니다. 교우촌은 우리 신앙의 뿌리요 맥입니다.
8. 성무일도를 통한 시간 전례도 강조될 필요가 있습니다. 구약시대에 왕국 분열과 바빌론 유배, 이민족의 침입과 식민 통치 등 갖가지 시련을 겪으면서도 하느님의 가난한 이들이라고 불리었던 아나빔들은 하느님께 탄원하고 찬양하거나 감사드리고 용서를 청하는 속죄기도를 잊지 않았었습니다. 이 기도의 전통이 무려 천 년이 넘습니다. 그렇게 하여 바쳐졌던 기도들이 모여 150편의 시가 되었고, 신약시대와 교회시대에 들어서서는 이 시편 기도를 중심으로 일상의 시간들을 성화시킬 수 있도록 성무일도가 편찬되었습니다. 이 성무일도를 성직자, 수도자들이 매일 의무적으로 바치고 있는데, 대다수 평신도들은 이 성무일도를 모른 채 묵주기도만 바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평신도들에게도 이 성무일도를 바치도록 권장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 등 모든 하느님 백성이 감염병을 예방하기 위한 사회적 거리두기 조치나 미사 중단 및 제한 등 그 어떠한 사태가 발생해도, 하느님께 대한 신앙 감각을 잃지 않음은 물론 서로 공유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박해시대에 우리 신앙 선조들이 치명을 불사하면서 신앙을 유지하고 계승시킬 수 있었던 비결을 우리가 지금 배우자는 것입니다. 성무일도는 평신도의 보편 사제직을 위해서 더욱 필요한 기도입니다.
9. 이 보건 위기가 찾아오기 전에도 공식 통계에서 주일 미사 참례자 수는 영세자의 20%로 떨어져 있었고, 보건 위기가 찾아와서 미사 참례 인원을 제한하거나 심지어 일시적으로 중단하게 되었을 때, 그 20%의 숫자마저도 반토막나는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하지만 위기를 기회로 바꾸려는 발상의 전환을 우리가 할 수 있다면, 주일에 성당을 찾지 않던 냉담자들도 지역에서는 신자들이 손쉽게 찾아가 만날 수 있습니다. 보건위기 상황에서도 하느님은 여전히 존재하고 계시고, 당신의 역할을 신자들의 마음속에서 한결같이 수행하고 계심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며, 더욱이 일시적으로 주일미사 참례를 쉬고 있던 교우들의 마음속에도 어김없이 하느님께서는 함께 하고 계실 것이며, 그런 하느님의 현존을 잊지 않고 있을 냉담 교우들은 누군가 자신들을 찾아주기를 기다리고 있을 지도 모릅니다.
10. 민족 복음화의 지향으로 미사를 봉헌하는 우리가 또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 보건 위기로 한층 더 어려워진 북녘 동포들의 형편입니다. 우리는 지금 보건 위기 와중에서도 김대건 신부 탄생 200주년 기념 희년을 지내고 있는데,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노래에 보면 5절 가사의 끝 후렴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거룩한 주의 나라 이 땅에 펴주소서”. 휴전협정이 체결된지 70년이 다 되어가도록 정전선언과 평화협정조차 체결하지 못하고 있는 이 정치적 굴레 속에서, 더군다나 보건 위기가 남북한 모든 겨레를 힘겹게 하고 있는 이 상황에서 이 김대건 신부의 염원은 더 절박하게 다가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에 대한 면역력을 강화시키기 위해서 백신 접종이 필요한 것은 우리만이 아니므로 북녘 동포들에게도 백신 나눔을 우선적으로 추진하는 한편 국경 폐쇄로 더욱 어려워진 북녘 동포들의 삶이 나아지도록 폭넓은 나눔을 실시해야 합니다. 코로나 19 바이러스로 인한 보건 위기도, 심지어 겨레의 만남을 시기하고 방해하는 그 어떠한 세력도, 거룩한 주의 나라를 갈라진 이 땅 한반도에 펴시려는 하느님의 뜻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11. 이것이 우리가 이 위기 속에서 주님의 빛을 받으며 걸어가야 할 길입니다. 남녘에서나 북녘에서나 고통 받는 이들을 일으켜 세우고, 냉담하던 이들을 불러 함께 주님의 빛을 받으며 걸어가는 것, 이것이 오늘 전교주일에 들려오는 하느님의 메시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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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24. 연중 제30주일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 키엣 대주교님.
하늘로 오르신 예수님은 구원의 신비의 정점입니다. 땅으로 내려오신 예수님께서 다시 하늘 나라로 돌아가심으로써 완벽하고 영화로운 임무를 완수하셨습니다.
우리는 막연히 우주를 3층으로 구분했습니다. 세상을 다스리는 신이 사는 하늘과, 죄인과 마귀를 가두는 지하, 그리고 인간이 사는 땅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과학이 발전하면서 우주는 점점 더 팽창하고 있습니다. 무한대 우주에 대한 탐험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 넓은 우주에서 보는 지구는 그저 작은 점과 다름없습니다. 그럼 하늘은 어디를 의미합니까?
예수님께서는 하늘로 돌아간다고 말하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아버지 하느님께로 돌아간다"라고만 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버지 하느님께 돌아가시지만 세상 끝까지 우리와 함께할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결국 하늘이란 우리가 올려다 보는 물리적인 하늘이 아닌 하느님이계시는 곳, 바로 그곳이 하늘입니다.
오른쪽에 앉으심
‘하늘로 오르시고 오른쪽에 앉았다’고 하셨습니다. 하느님은 무형이시기에 볼수도 물리적 공간적으로도 표현할 수 없습니다. 오른쪽이라는 의미는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느님의 권능을 나누어가지심을 의미합니다.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나의 것이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그분께서는 인간으로 내려오셔서 아버지 하느님의 뜻에 순명하고 죽음까지 감내하는 모든 고난을 이기셨기에 마치 그 상으로 하느님의 하늘에 오르시는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늘나라에서 누리시는 영광이 곧 우리의 희망입니다. 예수님의 승천을 통해 하느님께서는 세계를 지배하는 권능을 가지신 존재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최후의 심판자는 다른 누가 아닌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공정한 심판을 하시는 분도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의 뜻을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한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에서 그에 합당하는 모든 것을 얻으셨을 것입니다. 불의로 고통받으신 예수님께서는 더없이 정의로운 천상에서 진정한 행복을 얻으셨을 것입니다. 이제 하느님 옆에서 온전한 행복을 누리실 것 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이땅에서 정의를 위해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살아야하는 이유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늘나라에 오르셨기에 자녀인 우리도 하늘나라로 올려질 것입니다. 그분께서 영광을 받으셨기에 자녀인 우리도 영광을 받을 것입니다. 양들의 우두머리가 어디를 향하든 양떼는 그 우두머리를 따라가게 되어있습니다. 우리를 하늘나라로 이끌기 위해, 우리의 자리를 만들기 위해 먼저 하늘로 오르셨습니다. 지금 이 세상의 고통과 어려움은 하늘나라에서 참 행복으로 보상을 받을 것입니다.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행복한 미래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마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인도하여주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의 임무를 마치고 하늘나라로 가신 것처럼 이곳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임무를 완수해야만이 하늘나라의 행복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 임무는 바로 언제나 하늘을 지향하는 마음과 영혼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언젠가 사라질 이 세상의 고통과 인연에 얽매여 내가 가야할 길을 잃지 마십시오. 주님의 뜻을 찾는 것을 게을리 하지 마십시오. 오늘이 내일이 되고 내일이 모레가 되면 영원히 주님의 손을 놓게 됩니다. 지금 이 순간 바로 하늘로 승천하신 예수님의 길을 따라가기를 주저하지 마십시오. 그게 바로 지금은 보이지않지만 참행복에 도달하는 길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놓아버리면 마음과 영혼은 행복과 사랑으로 가득 해워질 것입니다. 이 땅에서의 진정한 행복과 사랑의 삶은 하늘 나라의 영광을 누릴 것입니다.
오늘 전교주일을 맞이하여 주저하지 말고 선교의 길을 떠나십시오. 선교는 다름 아닌 주님 안에서의 행복을 이웃에게 전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선교할 지 몰라 주저하고 있다면 바오로와 베드로 성인의 선교의 길을 따라가보십시오. 그러기 위해서 무엇보다 먼저 주님과 가까이, 주님과 함께, 하나되어야 합니다. 즉 영혼으로 주님을 만나고, 모든 일을 주님과 함께 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깊은 사랑을 체험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가장 중요한 선교의 시작입니다.
나의 삶을 바꾸어야 합니다. 주님께 의지하는 삶, 의로운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모든 사람에게 주님과 같은 사랑을 베푸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선교에 대한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열정은 다른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언제나 선교를 떠나기 전에 기도로써 모든 것을 주님께 의탁하고, 스스로 믿음의 모범이 되는 생활을 하며, 봉사와 박애정신의 실천을 보이는 생활, 나아가 바로 옆에 사람에게 주님을 전하는 것 입니다. 이처럼 선교는 적극적으로 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열심히 미사에 참석하고 성경도 열심히 읽지만 그들 모두가 선교를 하지는 않습니다. 성당 미사에 참여하고 성경을 읽는 것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주님의 복음을 전하는 선교입니다. 주님과 함께 하는 기쁨을 이웃에게 전하는 것이 선교라는 것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주님, 저희가 베드로와 바오로 성인의 열정적인 선교를 이어갈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아멘.
함께 묵상해 봅시다.
1. 베드로와 바오로 성인이 위대한 선교자가 되기 이전에 체험한 것을 묵상해보십시오
2. 선교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3. 주님안에서 행복하다면 그 행복을 이웃에게도 전해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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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24. 연중 제30주일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제삼자로서는 너무 고되고 힘든 시간처럼 보이는 데도 기쁨을 가지고 그 시간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분들은 “저보다 더 힘드신 분도 많은데, 저만 힘들다고 어떻게 말할 수 있어요?”라고 이야기하십니다.
언젠가 읽은 책을 통해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 이유를 알 수 있었습니다. 물리학자 스테판 클라인에 따르면 힘든 시간을 받아들이면 그 기억은 더는 부정적인 감정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즉, 어떤 경험을 부정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기로 하면 전뇌의 영역이 편도체를 통제해서 부정적인 감정을 억제한다고 말합니다.
사실 부정적인 감정을 갖는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긍정적인 감정이 있어야 문제 해결에 긍정적인 실마리를 찾을 수 있게 됩니다. 그렇다면 어렵고 힘든 시간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너무나 당연해집니다.
주님께서도 십자가를 피하지 않으셨습니다. 인간적인 모든 모욕과 치욕을 받으며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주님도 이를 긍정적인 감정으로 받아들이신 것이 아닐까요? 주님께서 직접 모범을 보여주셨기에 우리도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당신 제자들을 갈릴래아에 있는 산으로 소집하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예수님을 직접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것은 직접 만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안에 의심하는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을 직접 보고, 예수님과 직접 대화를 하고 있음에도 의심하는 그 모습이 이해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평소에 유혹에 쉽게 넘어가는 모습을 생각해보면, 제자들의 의심을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이 담겨 있는 복음을 접합니다. 그 안에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방법이 담겨 있습니다. 하지만 복음의 말씀을 따르는 것에 우선순위를 두십니까? 그보다 사회의 법칙을 따라야 더 현명한 것처럼 생각하지 않습니까?
사회의 법칙에 충실할 때, 우리는 죄의 유혹에 쉽게 넘어갑니다. 그리고 이때 주님께 대한 의심도 생기게 됩니다. 이런 부정적 감정이 자신을 어떻게 만들까요? 문제의 크기를 계속해서 만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법칙에 충실한 우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더군다나 주님께서는 “내가 세상 끝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라는 말씀으로 사랑을 멈추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그 사랑을 기억하면서 더 긍정적인 감정으로 지금을 사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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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이란 당신이 당신의 모든 경험으로부터 진실로 가치 있는 것을 선택하는 실험실이다(마거릿 뮬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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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미래에 대한 희망
어느 한 부족의 추장이 자신의 후계자를 뽑기 위해 부족에서 제일 지혜로운 사람 세 명을 뽑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가장 높은 산봉우리를 가리키며 산에서 가장 귀한 것을 가져온 사람에게 추장직을 물려주겠다고 했습니다. 이 말을 듣자마자 세 사람은 곧바로 산에 오릅니다.
시간이 흘러 한 명씩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제일 먼저 도착한 사람은 고산지대에서만 자라는 귀한 약초를 가져왔습니다. 두 번째로 도착한 사람은 산봉우리 꼭대기에서 뜯은 푸른 이끼를 가져왔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들어온 이는 빈손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부족의 미래를 보고 가슴에 담아왔습니다. 이는 바로 언덕 너머의 옥토입니다. 제가 추장이 된다면 그 넓은 옥토를 바탕으로 부족을 더 풍요롭게 살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누가 추장이 될 수 있었을까요? 미래를 바라볼 수 있는 사람, 미래에 대해 희망을 꿈꾸는 자가 바로 추장이 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희망과 미래는 중요합니다. 나의 미래에 대한 희망은 어떤지를 묵상해 보았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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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24. 연중 제30주일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세례를 받아 신앙인이 된 우리에게, 예수님께서 세우신 교회에게 가장 큰 사명이 있습니다. 그것은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역사를 보면 복음이 전해지는 과정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들은 주님의 부활을 체험하였고, 박해와 순교를 영광으로 생각하면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렇게 전해진 복음은 마침내 당시 가장 강대한 국가인 로마에 전해졌고, 콘스틴티노스 황제에 의해서 로마의 국교가 되었습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이 있듯이, 로마가 만든 길을 따라서 복음은 전해졌습니다. 봉건주의 시대에는 군주가 명령하면 백성들은 모두 따라야 했습니다. 군주가 복음을 믿고 교회를 받아들이면 모든 백성이 신앙인이 되었습니다. 유럽의 마을은 중심에 교회가 있었습니다.
유럽에는 그렇게 복음이 전해졌지만 아시아는 달랐습니다. 아시아의 군주들은 유교의 ‘틀’을 정치의 근본으로 삼았고, 통치의 기반으로 삼았습니다. 새롭게 등장한 이슬람은 신정일치의 통치체제를 통하여 이슬람을 전하였습니다. 아시아와 이슬람 지역에서는 복음을 전하는 방법이 달라야 했습니다. 아시아의 문화와 전통을 이해하면서 교회는 복음을 전해야 했습니다. 이슬람과 대화하면서 교회는 복음을 전해야 했습니다. 복음은 이식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복음은 새롭게 뿌리를 내리고 적응해야 했습니다. 교회는 그것을 ‘토착화’라고 이야기합니다. 교회가 복음을 이식하려했을 때는 많은 박해와 순교가 있었습니다. 교회가 복음을 이식하려했을 때는 전쟁과 폭력이 있었습니다. 창과 칼, 총과 대포로는 복음을 전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전해진 복음은 사람들의 몸은 복종시킬 수 있을지라도 마음을 열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1784년 이승훈이 북경에서 베드로로 세례를 받으면서 한국의 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새로운 학문을 받아들이려는 지식인들이 교리와 전례를 연구하면서 시작된 한국의 교회는 많은 사람들이 믿기 시작하였습니다. 지식인들은 호기심이 있었고, 양민과 천민은 교회에서 높고 낮음이 없는 참된 자유와 평화를 느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중국에서 주문모 신부가 와서 사목할 때까지, 한국의 교회는 소위 ‘가성직제도’를 만들어서 스스로 주교, 사제가 되어서 교회를 이끌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교회의 법과 제도에 어긋난다는 것을 알았고 사제가 오면서 교회의 제도와 법을 따르게 되었습니다. 활발하게 뿌리를 내리던 한국교회는 몇 가지 이유로 엄청난 박해를 받게 되었습니다. 정치적인 이유가 있었습니다. 문화적인 이유가 있었습니다. 사회적인 이유가 있었습니다. 박해는 근 100년간 이어졌고, 만여 명이 넘게 순교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으로, 순교자들의 피와 땀으로 교회는 박해를 견뎌내고 뿌리를 내릴 수 있었습니다.
1970년대에 100만 명이었던 한국교회는 매 10년 마다 100만 명씩 증가하여 2020년 현재 교적상 5,923,300명의 신자가 있습니다. 본당은 1,767개가 있으며 공소는 704개가 있습니다. 사제는 5,538명, 수도자는 11,788명, 주교는 40명이 있습니다. 박해를 견뎌내고 한국교회가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교회를 알릴 수 있는 큰 행사가 있었습니다. 1981년 조선교구 설정 150주년 행사가 여의도에서 있었습니다.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저도 참가했습니다. 80만 명이 넘는 신자가 여의도 광장을 가득 매웠습니다. 교회도 놀랐고, 한국사회도 놀랐습니다. 이후 1984년에는 성 요한 바오로 2세께서 방한하여서 103위 성인의 시성식을 주관하였습니다. 1989년에도 44차 세계 성체대회가 한국에서 있었고, 교황님의 방한이 있었습니다. 두 번째는 교회의 활발한 사회참여입니다. 지학순 주교님을 중심으로 자유와 민주를 위한 활동이 있었고, 자유를 열망하던 사람들에게 교회는 희망의 빛이었고, 마지막으로 숨을 수 있는 피난처였습니다. 꽃동네를 비롯해서 교회는 약하고, 외롭고, 가난한 이들의 친구가 되어주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종교를 갖는다면 천주교회를 선택하겠습니다.’ 자발적으로 성당을 찾는 사람들이 많았고, 예비자 교리에 등록하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오늘은 전교주일입니다. 인터넷이 있고, 각종 소통 수단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주님을 전하는 것이 예전보다 어렵지는 않습니다. 주님께서 전해주신 복음의 기쁨을 삶으로 드러내지 못하는 것이 아쉬움입니다. 맛집은 멀리 있어도, 작은 곳이어도 사람들이 찾아갑니다. 인터넷 검색으로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맛집의 음식이 맛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고 있습니다. 신앙생활의 맛을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복음이 무엇이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복음의 기쁨을 알려주는 사람도 적고, 복음의 기쁨을 삶으로 드러내며 향기를 전해주는 분도 적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복음이고, 무엇이 복음의 기쁨일까요? 예수님께서 하느님나라를 선포 하셨고, 예수님께서 구원자이심을 신앙으로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해 주시고, 예수님께서 우리를 악으로부터 구원해 주시고, 예수님께 우리를 죽음으로부터 구원해 주심을 믿는 것입니다. 그런 믿음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그런 믿음을 행동으로 드러내는 사람들에게는 그리스도의 향기가 전해 질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어둠을 밝히는 등대처럼 위로와 용기의 희망의 빛이 드러날 것입니다.
어둔 밤을 항해하는 배들이 등대를 보고 길을 찾듯이, 많은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는 사람들로부터, 희망의 빛을 보여주는 사람들로부터 삶의 위로를 받을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전교이고, 이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온 세상에 전하는 것입니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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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24. 연중 제30주일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주님의 참된 선교 제자들
- 꿈, 고백, 실천 -
오늘 10월24일은 제95차 전교주일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 성하의 전교 주일 담화문 일부를 인용합니다.
“우리로서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사도4,20)
올해 전교 주일의 주제입니다. 이 주제는 우리가 보고 들어 마음에 지닌 것을 우리가 저마다 책임지고 다른 이들에게 전하도록 하는 요청입니다. 전교 사명은 언제나 교회의 특징이니, 교회는 복음화를 위하여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선교 소명은 과거의 일이거나 이전 시대의 낭만적인 흔적이 아닙니다. 특히 요즈음과 같은 코로나 19 감염병의 세계적 유행의 시대에 우리 삶의 반경을 넓히고, 우리의 관심권에 직접적으로 속하지 않더라도 그들에게 다가가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곧 주님과 함께 우리 주변에 있는 이들도 우리의 형제자매라고 기꺼이 믿는 것입니다. 주님의 자비로운 사랑이 우리의 마음을 어루만져 우리 모두 참된 선교 제자들이 되도록 합시다.”
전교주일, 우리의 신원이 새롭게 확인됩니다. 우리 하나하나가 주님의 참된 선교 제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주님의 참된 전교 제자들이 될 수 있겠는지요. 거창하지 않습니다. 각자 삶의 자리에서 주님의 전교 제자들 답게 복음 선포의 사명에 충실하는 것입니다. 어제 수도형제와 언뜻 주고 받은 대화가 잊혀지지 않습니다.
“하루가 참 빨리 갑니다.”
“하루만인가요, 하루도, 일주일도 한달도 일년도 금방입니다.”
“그러다 보면 인생도 금방입니다.”
평범한 대화지만 깊어가는 기도의 계절 가을과 함께 시리도록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더불어 시편 90장 10절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인생은 기껏해야 칠십년, 근력이 좋아서야 팔십년,
그나마 거의가 고생과 슬픔이오니 덧없이 지나가고,
우리는 나는 듯 가버리나이다.”
새삼 짧은 인생, 주님의 참된 선교 제자로서 깨어 잘 살아야겠다는 자각을 갖게 합니다. 선교는 교회의 존재이유이며 복음 선포의 선교적 삶은 우리 삶의 의미입니다. 복음 선포의 삶에 충실할 때, 삶은 역동적이 되고 생동감이 넘치며 방향감 역시 뚜렷해질 것입니다. 주님의 참된 선교 제자로 살아갈 때 비로소 인생 무지와 허무로부터 벗어나 참으로 의미 충만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주님의 참된 선교 제자로서 살아갈 수 있을까요. 셋으로 요약됩니다.
첫째, 꿈입니다.
머리의 꿈입니다. 우선 꿈이 비전이 희망이 있어야 합니다. 꿈이, 비전이, 희망이 생생해야 합니다. 사람은 꿈이, 비전이, 희망이 있어야 삽니다. 이들이 사라지면 살아있어도 살아있는 것이 아닙니다. 의식주가 보장되도 타락하게 되고 나태해집니다. 무기력해지고 무감각해집니다. 세상 것들에 중독되어 내면은 날로 황폐화 됩니다. 정말 지옥은 꿈이, 비전이, 희망이 사라진 곳입니다.
우리의 꿈은 비전은 희망은 하느님이요, 하느님의 나라요, 그리스도 예수님입니다. 바로 우리 삶의 궁극의 목표이자 방향이 되는 꿈이요 비전이요 희망인 하느님입니다. 바로 오늘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가 그가 받은 환시를 통해 우리의 꿈을 환히 보여 줍니다.
-세월이 흐른 뒤에 이러한 일이 일어나리라. 주님의 집이 서있는 산은 모든 산들 위에 굳게 세워지고, 언덕들 보다 높이 솟으리라. 모든 민족들이 그리로 밀려들고 수많은 백성들이 모여 오면서 말하리라.
“자, 주님의 산으로 올라가자. 야곱의 하느님 집으로! 그러면 그분께서 당신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치시어, 우리가 그분의 길을 걷게 되리라.”-
얼마나 멋진 꿈이며 비전입니까! 언젠가의 꿈이, 비전이 아니라 오늘 지금 여기 ‘주님의 집’에서부터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앞당겨 실현되는 꿈이자 비전이요 희망입니다. 이어지는 영원한 평화의 비전은 얼마나 황홀한지요!
“그분께서 민족들의 재판관이 심판관이 되시리라. 그러면 그들은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리라.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거슬러 칼을 쳐들지도 않고, 다시는 전쟁을 배우지도 않으리라.”
언젠가 그날의 꿈이 아니라 오늘 지금 여기 우리 몸담고 있는 공동체에서 실현되어야 할 평화의 꿈이자 비전이자 희망입니다. 참으로 꿈이 없다, 비전이 없다, 희망이 없다 탄식할 것이 아니라 우리 몸소 하느님의 꿈이, 비전이, 희망이 되어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 모두 영적 야곱 집안의 공동체가 되어 그렇게 살아가라고 격려합니다.
“야곱 집안아, 자, 주님의 빛 속에 걸어가자!”
둘째, 고백입니다.
가슴의 고백입니다. 성서의 언어는 대부분 고백 언어입니다. 오늘날의 비극이자 불행은 고백이 사라져 간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하느님 꿈을, 비전을, 희망을, 사랑을, 믿음을 생생하게 살아나게 하는 것이 사랑의 고백입니다. 바로 매일 평생 끊임없이 바치는 시편과 미사의 공동전례기도를 통해 마음을 담아 주님께 사랑을, 믿음을, 희망을, 찬미를, 감사를 고백하는 우리들입니다.
고백의 기도와 함께 가는 믿음이요 사랑이요 희망입니다. 참으로 행복한 시간이 주님께 찬미와 감사를, 믿음과 사랑과 희망을 고백기도로 바치는 시편성무일도 시간입니다. 참으로 알게 모르게 우리 모두 신망애信望愛의 사람으로 만들어 주는 공동전례은총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제2독서 로마서에서 특히 강조하는 바 ‘고백’입니다. 바오로의 고백이 참 아름답고 고무적입니다.
“그대가 예수님은 주님이시라고 입으로 고백하고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셨다고 마음으로 믿으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곧 마음으로 믿어 의로움을 얻고, 입으로 고백하여 구원을 얻습니다.
주님께는 차별이 없습니다. 같은 주님께서 모든 사람의 주님으로서, 당신을 받들어 고백하는 모든 이에게 풍성한 은혜를 베푸십니다. 과연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고백하는 이는 모두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부르는’을 ‘고백하는’ 말마디로 바꾸니 더 실감나게 마음에 와닿습니다. 도대체 이렇게 믿음을, 사랑을, 희망을, 찬미를, 감사를, 기쁨을, 평화를, 행복을 고백할 수 있는 하느님이 계시다는 것이, 이런 고백기도를 바칠 공동전례기도 시간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요. 평생 살아도 주님을 몰라, 주님을 잊어 이런 고백기도 한 번 못해보고 세상을 떠난다면 얼마나 억울하고 허망하겠는지요!
이런 고백기도보다 영적스트레스를 해소하고 내적 위로와 치유를 주는 수행도 세상에 없을 것입니다. 바로 이런 주님을 향한 한결같은 사랑의 고백이 우리를 알게 모르게 정화淨化하고 성화聖化하여 우리를 신망애信望愛의 사람, 진선미眞善美의 사람으로 변모시켜 주니, 이런 우리의 모습 자체가 그대로 참 좋은 복음 선포입니다.
셋째, 실천입니다.
발의 실천입니다. 꿈과 고백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복음을 선포하는 실천의 삶이 뒤따라야 합니다. 관상의 친교는 활동의 선교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참으로 꿈의 사람만이, 고백의 사람만이 비로서 주님의 참된 선교 제자가 되어 실천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부활하신 파스카의 주님은 열한 제자들에게 복음 선포의 사명을 부여 하십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우리를 통해 늘 현재화되어야 하는 주님의 명령입니다.
“나는 하늘과 땅과 모든 권한을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멀리 갈 것도 없습니다. 세례를 강요할 것도 없습니다. 각자 내 삶의 자리에서 주님의 가르침을 몸소 실천하여 삶의 모범을 보여 이를 보고 배우고 깨닫고 감동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통해 이웃이 주님을 만날 때 이보다 더 좋은 복음 선포도 없을 것입니다. 저는 일을 일컬어 존재론적 복음 선포라 칭합니다. 이는 특히 우리 베네딕도회 정주 수도승들에게 어울리는 선교입니다.
바로 찾아오는 모든 이들을 사랑으로 환대함으로 복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바로 사랑의 환대를 통한 선교입니다. 그러니 비단 베네딕도회 수도자뿐 아니라 믿는 이들 모두가 각자 삶의 자리에서 만나는 이들을 사랑으로 환대하는 존재론적 복음선포의 선교사라 할 수 있겠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다음 말씀이 큰 울림을 줍니다.
“선포하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 파견되지 않았으면 어떻게 선포할 수 있겠습니까? 이는 성경 말씀 그대로입니다.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우리 모두 각자 삶의 자리에 복음을 선포하라 파견된 주님의 선교사입니다. 신망애의, 진선미의 삶자체로 기쁜 소식을 전하는 모습은 얼마나 아름답겠는지요! 우리 믿는 모두에게 주어진 복된 사명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꿈의 사람, 고백의 사람, 실천의 사람으로, 참 아름답고 행복한 주님의 참된 선교 제자로 살게 하시며 말씀하십니다.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28,20ㄴ).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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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24. 연중 제30주일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가 무엇하는 사람인지 알려 주십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마태 28,19-20)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십니다. 그들 중 더러는 여전히 의심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그들을 열외로 내치지 않으시고 함께 사명을 부여하십니다. 이미 주님께 믿음을 굳힌 이들과 달리 그들은 사명을 수행해 나가면서 믿음 또한 키워나가게 될 것입니다.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
제자들은 예수님에게서 들었던 수 차례의 수난 예고와 실제 십자가 사건을 통해 스승을 따르는 길이 결코 녹록치 않음을 깨달았을 터입니다. 게다가 지금은 로마 지배층과 유다인들이 새로운 길에 적대적이니 '세상 모든 민족에게 가서 복음을 전하라'는 명령이 큰 부담일 수 있지요. 자기들에게 여전히 신앙과 지혜가 부족함을 절감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동행 약속이 얼마나 든든했을지 짐작이 갑니다.
"세상 끝 날까지"
예수님은 당신 현존의 기간을 세상 끝 날까지라고 하십니다. 부활하시어 제자들 곁으로 돌아오신 이 순간부터 앞으로 계속, 이 세상이 끝나고 영원으로 이어지는 그 순간까지 계속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전하는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부할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과거 어느 한 시기를 살다 떠난 어느 위인 정도가 아니시지요. 그리스도교는 박제화된 과거를 전하는 종교가 아니라, 지금 여기 현존하시는 주님을 전하며 살아계신 그분과 함께 생활하는 이들의 모임이라는 뜻입니다.
"자, 주님의 빛 속에 걸어가자!"(이사 2,5)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모든 민족이 하느님의 지붕 아래로 모여 들 평화의 날을 노래합니다. 그때에는 서로 대립할 일도 싸울 일도 없을 겁니다. "예루살렘에서 나오는 주님의 말씀"(이사 2,3)으로 모든 이가 깨우치고 위안을 받으며, 살상 무기들은 생산을 위한 도구로 변할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이 닫힌 마음들을 열고 무기들을 녹이며 어둠을 밝힙니다. 제자들을 통해, 제자의 제자, 그 제자의 제자들을 통해 전해진 말씀이 모든 이들 안에 내재된 하느님의 모성을 흔들어 깨워서, 사랑과 자비를 되살려내고 충만하게 키워줄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만난 이들의 마음에 그분을 닮고 그분과 하나 되려는 열망을 심어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미 주님의 빛 속을 걷고 있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로마 10,17)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한 존재 안에 믿음이 형성되는 과정을 간결히 전합니다. 먼저 말씀이 계시고, 그 말씀을 전하는 이와 듣는 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선포된 말씀께서 듣는 이의 마음 안에 믿음을 형성하십니다. 말씀께서 그이 안에 거처하기 시작하신 겁니다.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이 말씀은 이 세상에 정해진 날수가 계속되는 날까지 지속될 약속이지요. 예수님은 끝까지 우리와 함께하실 겁니다. 이 말씀은 믿는 이들에게 위안이고 용기이며 힘이 되어 주십니다. 설령 주님이 계시지 않는 것 같은 어둠과 고통의 한복판을 지나는 듯해도 우리는 이성과 감각을 뛰어넘어 이 약속을 믿어야 합니다.
언어와 문화, 인종과 종교, 민족과 신분을 넘어 우리는 모두 한 아버지의 한 자녀입니다. 우리가 말과 행동과 기도로 사심 없이 전하는 사랑의 복음이 모든 이에게 빛이 되고 평화를 선사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우리와 함께하시는 예수님께서 힘이 되어 주실 겁니다. 기쁜 소식을 전하는 여러분의 발걸음이 얼마나 아름다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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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24. 연중 제30주일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라."(마태28,19)
'선교는 복음화!'
오늘은 '전교 주일'입니다.
하느님의 완전한 계시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원한 생명을 희망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지금 여기에서 '기뻐하는 사람들'입니다.
지금 여기에서 '기도하는 사람들'입니다.
지금 여기에서 '감사하는 사람들'입니다.
지금 여기에서 '부활하는 사람들'입니다.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야 할 이 모습들이 바로 '선교인 복음화의 아주 중요한 첫 단계'입니다.
내가 기쁘지 않고,
내가 기도하지 않고,
내가 감사하지 않는데...
내가 부활하지 않는데...
어떻게 너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시오!"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 '기쁨과 감사와 부활의 원천'은 내 뜻이 이루어진 데에 있지 않고,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진 데에 있습니다. 그래서 믿는 이들은 끊임없는 영적 행위인 '기도와 미사와 말씀을 통해서'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찾습니다.
'기도와 미사와 말씀'이 목적이 아닙니다.
이를 통해서 지금 여기에서 기뻐하고, 감사하는 삶인 부활의 삶을 사는 것이 목적입니다.
지금 여기에서 이 목적을 이루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은총의 선물이 바로 '영원한 부활이요 완전한 하느님의 나라'인 '영원한 생명'입니다.
"자기가 믿지 않는 분을 어떻게 받들어 부를 수 있겠습니까? 선포하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로마10,14)
내가 먼저 굳게 믿고,
내가 먼저 기뻐하고,
내가 먼저 감사하고,
내가 먼저 부활합시다!
내가 먼저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로움과 평화와 기쁨 안에 머뭅시다!
'선교인 복음화'는 이것이 '너에게로 흘러 넘치는 것'이고, 그리고 이것이 '선교인 복음화의 구체적인 모습'인 '코이노니아(koinonia 친교)'입니다.
"우리로서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사도4,20)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로마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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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24. 연중 제30주일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 박형순 바오로 신부님.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은 마태오 복음서의 가장 마지막 부분입니다.
다윗의 자손이시며 아브라함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로 시작된 복음서가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라는
말씀으로 마무리됩니다.
주목할 점은, 마태오 복음사가가 예수님을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이라는 의미를 지닌
‘임마누엘’로 소개한다는 것입니다(마태 1,23 참조).
복음서의 시작과 함께 ‘임마누엘’로 불린 예수님께서
복음서의 마지막에 당신을 ‘임마누엘’이라고 밝히십니다.
이렇게 마태오 복음서는 예수님께서 바로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이시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 줍니다.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이시요 주님이시라고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은 ‘임마누엘’이신
예수님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오늘은 ‘전교 주일’입니다.
선교 사명을 깨닫고 주님의 복음을 선포하며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해서 기도하는 날입니다.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설명하고 그들을
교회로 이끄는 것이 전교에서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전하고 선포하는
우리 자신이 ‘임마누엘’이신 예수님과 함께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지 못한다면, 우리가 뿌리는 전교의 씨앗은
많은 열매를 맺지 못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과 함께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이 바로 전교의 시작점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주일에만, 성당에만 계시지 않습니다.
우리의 일상 안에 언제나 ‘함께’ 계시는 하느님이십니다.
또한 오늘은 전교를 위하여 삶을 봉헌한 선교사와
그들이 활동하는 교회를 기억하는 날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살아가는 그들과
그들의 공동체를 기도 가운데 함께 기억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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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24. 연중 제30주일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오늘은 전교주일이다. 오늘 독서와 복음의 주제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복음선포이다. 복음선포를 통하여 모든 민족이 복음화되어 하느님 안에 진정한 평화와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세상의 변화를 이룩하기로 하는 날이다. 더욱이 우리는 분단의 현실을 갖고 있다. 오늘, 이 미사를 통해 온 민족의 염원인 평화적 통일을 기원하며 민족 복음화를 위하여 기도하여야 하겠다.
“교회는 그 본성상 선교하는 것을 사명으로 한다.”(선교 2항). 선교야말로 교회가 이 세상에 존재해야 할 확실한 이유임을 분명하게 천명한 선언이다. ‘본성상 선교해야 하는 교회’라는 말 안에는, 교회는 “믿지 않는 만백성의 빛이 되고 구원이 되기 위해 파견된 자”임을 의식하고 있다는 뜻이 내포된 것이 아니겠는가?
사실 “교회는 예수님과 열두 사도들의 복음 선교 활동에서 생겨났고, 그 활동의 당연한 결과요, 그 활동이 원한 것이며, 그 활동에 가장 가까울 뿐만 아니라 그 활동에서 볼 수 있는 결과가 교회인 것”이다(현대의 복음 선교 15항). 이처럼 교회는 예수님과 같은 사명 완수를 위해 예수께로부터 파견되었으며, 「떠나셨지만 머물러 계신」 예수님의 새로운 현존에 대한 명백한 표징으로 계속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교회는 성령의 인도 아래 그리스도의 사명을 이 세상에서 계속 수행하기 위해 불린 것이다. 교회는 그리스도 파견의 연장(延長)이다.
“교회는 그 본성상 선교하는 것을 사명으로 하니 이것은 성부의 계획을 따라 교회가 성자의 파견과 성신의 파견에서 그 기원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교회는 성부의 구원계획을 이루기 위해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에 의해 파견되며, 궁극적으로 성자와 성령을 파견하신 성부의 「샘솟는 분출적 사랑」을 파견의 최종 근거로서 인식하며, 마르지 않고 끊이지 않는 샘물인 이 「원천적 사랑」에서 끊이지 않고 활력과 열성을 길어내는 것이다.
“선(善)은 자기 확산성(自己擴散性)을 지닌다.”(Bonum est diffusivum sui). “샘 같은(원천적) 사랑”이신 하느님의 사랑이 끊임없이 자신(사랑)을 확산시켜 나가기를 바랄 것은 당연한 결론이다. 왜 성부의 “원천적(샘 같은) 사랑”이 선교의 최종 근거가 될 수 있는지, 그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지 않은가? 조금 더 들어보자. “선은 자기를 확산시킨다.”라고 했다. 그러므로 선하면 선할수록 자신을 더욱 확산시켜 나가야 마땅하다.
따라서 하느님은 선의 최상의 결과를 위해서 자신을 최대한으로 확산시켜야 했다. 그런데 하느님이 할 수 있는 선의 최상의 결과는 무엇일까? 인류의 구원사업이었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인류 구원을 위하여 자신을 최대한으로 쏟아부으며 최상의 결과를 기대할 것은 자명한 이치이다. 그러므로 선교는 <하느님의 자기확산>이라고 할 수 있다. 하느님의 자기확산인 선교는 <선=사랑=하느님>에 너무 잘 어울리고, “기원을 갖지 않으시는 기원”이신 성부의 사랑에까지 거슬러 올라가 귀속되는 것이 당연하다. 따라서 선교의 최종 근거는 결국 성부의 자기 확산적인 “분출적 사랑”에 귀착된다.
하느님은 만선의 근원이요 사랑 자체이시다. 지선(至善)하신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은 그 본성상 선과 사랑을 확산시키지 않을 수 없는 분이시다. 선과 사랑은 합일시키고 합성시키는 힘일 뿐 아니라 동시에 자신을 확산시키는 힘을 가졌기 때문이다. 최고선이요 최고 사랑이신 하느님께서 자기확산의 일환으로 하신 최상의 사업이 바로 “만민 구원”이 아니겠는가?
이처럼 “만민 구원”은 하느님의 “샘 같은 분출적 사랑”에서 나오고, 하느님은 당신 사업의 성취를 위하여 최고의 방법으로 성자와 성령을 파견하시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교회의 파견이 이루어지고, 이로써 하느님은 ‘선교하는 하느님’이 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교라는 것은 바로 하느님을 확산시키는 일이다. 이 세상의 모든 이들이 하느님을 우리와 같이 아버지로 부를 수 있도록 확산시키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모두 한 형제요, 자매로서 구원의 길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지금 이 시대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다.
복음: 마태 28,16-20: 모든 사람을 내 제자로 삼아라.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부활하신 후 갈릴래아에 나타나셔서 만민에게 세례를 베풀고 당신의 계명을 지키도록 가르침으로써 만민을 제자로 삼으라고 명하신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세상 끝까지 교회 공동체와 함께 계시겠다고 약속하신다. 구약에서 야훼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계셨듯이, 이제 부활하신 예수께서 하느님의 새 백성인 교회 공동체와 함께 계시는 것이다.
그러기에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 임마누엘”(1,23)이시다. 그러기에 교회는 모든 민족을 주님의 제자로 삼아 세례를 베풀고 주님의 기쁜 소식을 전해야 한다. 우리가 처한 위치에서 자기 자신의 본분과 책임, 의무를 다하는 삶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 이 시기는 그것이 더 필요한 때이다. 특히 오늘 우리의 삶과 신앙의 현주소를 다시 한번 되돌아보며 복음화의 소명을 새롭게 하도록 하자. 이러한 모든 은총을 주님께 청하여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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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24. 연중 제30주일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마태 28, 20)
모든
민족들 속으로
들어가야 할
가장 아름다운
진리가 복음이다.
복음과 봉사는
분리될 수 없다.
봉사가 가장
적극적인
복음의
모습이다.
복음은
모든 민족들을
향한 참된
봉사로
드러난다.
이와같이
복음은
봉사와
공동선의
추구로 우리를
초대한다.
전교는
신앙인들의
본래적
소명이다.
소명은
어떻게
살 것인가의
문제이다.
아집과
교만에서
벗어나
건강한 삶을
나누는 것이다.
건강한 삶의
나눔이
진정한
전교이다.
신앙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다시금
일깨워주는
일이다.
전교는
일방적이지
되어서는
아니된다.
참된 전교는
배려와
나눔으로
이루어지는
쌍방적인
사람의 소통이다.
서로를 통해
서로를 위한
우리의
복음화이다.
복음화는
이 시대에
필요한
서로간의
위로와
정화이다.
전교는
거창한 구호가
아닌
생활 속의
참된 실천이다.
올바른
생활의
실천이 바로
전교이다.
우리의 전교는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를
묻게된다.
복음화의 미래는
복음화에 있다.
복음화는
올바른 삶의
나눔이다.
나눔의
한가운데에
계시는
주님이시다.
나눔은 전교의
시작이며
힘찬
출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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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24. 연중 제30주일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복음 선포>
“열한 제자는 갈릴래아로 떠나 예수님께서 분부하신 산으로 갔다.
그들은 예수님을 뵙고 엎드려 경배하였다. 그러나 더러는 의심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다가가 이르셨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16-20)”
1) “복음을 선포하는 일은 성직자들과 전문적인 선교사들이 하면 되지
꼭 모든 신앙인이 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이 질문의 답은 다음 말씀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자리 잡은 고을은 감추어질 수 없다.
등불은 켜서 함지 속이 아니라 등경 위에 놓는다. 그렇게 하여 집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비춘다.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14-16).”
신앙인은 예수님의 빛을 받아서 사는 사람이고,
동시에 그 빛으로 다른 사람들을 비추는 등불이 되어야 하는 사람입니다.
비추는 일을 하지 않는 등불은 꺼진 등불과 같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하지 않고 자기가 신앙인이라는 것을 적극적으로
드러내지 않는 것은 자신의 신앙을 감추는 것과 같고, 신앙을 감추는 것은
자신이 받은 ‘복음의 빛’과 ‘구원의 빛’을 꺼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신앙인이 전문적인 선교사들이 하는 것과 같은
선교활동을 해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각자 자기가 있는 곳에서,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됩니다.
2)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말씀을 선포하십시오.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꾸준히 계속하십시오.
끈기를 다하여 사람들을 가르치면서, 타이르고 꾸짖고 격려하십시오(2티모 4,2).”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라는 말을,
‘언제나, 어디서나, 누구에게나’로 바꿔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신앙인은 언제나 어디서나 신앙인으로서 사는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신앙을 드러내고 증언하는 일은
언제나 어디서나 해야 하는 일입니다.
‘방식’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상황에 따라 적당한 방식이 있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자기가 신앙인이라는 것을 감추지 않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
그러나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마태 10,32-33).”
여기서 ‘누구든지’ 라는 말은,
이 말씀이 ‘모든 신앙인’에게 해당된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3) 바오로 사도는 이런 권고도 했습니다.
“어리석고 무식한 논쟁을 물리치십시오. 알다시피 그것은 싸움을
일으킬 뿐입니다. 주님의 종은 싸워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모든 사람에게
친절하고 잘 가르치며 참을성이 있어야 하고, 반대자들을 온유하게 바로잡아
주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느님께서 그들을 회개시키시어 진리를 깨닫게
해 주실 수도 있습니다. 또 악마에게 붙잡혀 그의 뜻을 따르던 그들이
정신을 차려 악마의 올가미에서 벗어날 수도 있습니다(2티모 2,23-26).”
신앙을 증언하고 복음을 전하는 일이 ‘논쟁’처럼 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선교활동은 전투가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을 전해 주는 봉사활동입니다.
(다른 종교의 교리를 공격하고 비난하는 것은 ‘어리석고 무식한 일’입니다.
그런 논쟁은 반감만 일으키고, 역효과만 만들어냅니다.)
4) 신앙을 증언하고 복음을 전하는 일은,
‘말’로 하기 전에 먼저 ‘삶’으로 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다음 말씀은 중요한 지침이 됩니다.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입을까?’ 하며
걱정하지 마라. 이런 것들은 모두 다른 민족들이 애써 찾는 것이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함을 아신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마태 6,31-33).”
‘걱정하지 않는 모습’ 자체가 믿음을 증언하는 일입니다.
(이 말은, 의식주에 대한 걱정뿐만 아니라 모든 걱정에 다 적용되는 말입니다.)
언제 어떤 상황을 만나든지 간에 신앙인은
주님께서 지켜 주신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걱정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서 ‘다른 민족들’이라는 말은, ‘믿음 없는 사람들’을 뜻합니다.
믿음 없는 사람들은 보호자와 구원자가 없는 사람들이고,
그래서 조금이라도 힘든 상황을 만나면 걱정하게 되고, 두려워하게 됩니다.
걱정하지 말라는 말씀은,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 나오는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가시덤불 속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이 그 말씀의 숨을 막아 버려
열매를 맺지 못한다(마태 13,22).”
숨이 막힐 정도로 걱정에 사로잡혀 있으면 신앙생활을 제대로 할 수가 없습니다.
신앙생활을 못하고 있으니 신앙을 증언하는 일과 복음을 전하는 일도
할 수 없게 됩니다.
5) ‘사랑 실천’은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실천이기도 하고,
선교활동의 기본자세이기도 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3,34-35).”
여기서 “서로 사랑하여라.” 라는 말씀은,
“너희끼리만 서로 사랑하여라.”가 아니라 “모든 사람을 사랑하여라.”입니다.
물론 교회 공동체 구성원들이 서로 사랑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렇지만 신앙인의 사랑 실천은 온 세상의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해야 합니다.
울타리를 세워 놓고서 울타리 안에서 신자들끼리만 사랑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사랑 실천이 아니라 집단 이기심입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라는 말씀은,
“사랑 실천은 자기가 신앙인이라는 것을 증언하는 일이다.” 라는 뜻입니다.
반대로 생각하면, “사랑 실천이 없으면 신앙인이라고 말할 자격이 없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르치는 입장에서 ‘서로’ 라는 표현을 사용하셨지만,
우리 입장에서는 ‘내가 먼저’로 생각하는 것이 옳습니다.
사랑 실천은 언제나 항상 ‘내가 먼저’ 해야 하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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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24. 연중 제30주일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 방효익 바오로 신부님.
전교주일
제1독서(이사 2,1-5)는 예루살렘이 구원의 중심이 된다는 예언자의 현시입니다.
예루살렘이 구원의 중심이 된다는 것은 이사야 예언서 전체에서 반복되는 주제로서 “세월이 흐른 뒤에 이루어질 일”이라고 합니다. 50년 동안 바빌론 유배생활을 한 뒤에 이루어질 일이기 때문에 매우 슬픈 예언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께로 돌아서야만 했는데도 당시(기원전 8세기)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아무도 바빌론 유배를 예언한다고 믿지 않았습니다. 민족들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귀가 열리게 된다면 하느님의 영광을 보는 눈이 열리고, 평화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때에는 구원의 중심이 될 “주님의 산으로 올라가자.” “야곱 집안아 자, 주님의 빛 속에 걸어가자!”라고 만백성이 소리치면서 예루살렘으로 모여들 것이라고(미카 4,1-3) 합니다. 예루살렘에서 구원과 평화를 가져다주는 하느님의 말씀이 선포될 때 하느님께서 민족들과 백성들의 심판관이 되신다고 합니다. 그래서 구원의 기쁜 소식이 세상 끝까지 널리 퍼져나가야 하고, 그렇게 된다면 민족들 사이에 전쟁이 없어질 것이기 때문에 무기들은 모든 민족들의 안녕과 발전을 위한 생산적 도구들로 바뀔 것이라고 합니다. 세월이 흐른 뒤에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아 예루살렘은 구원의 중심이 될 것입니다.
복음(마태 28,16-20)은 제2의 행복선언인 복음 선포의 사명을 주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처음 목격한 여자들(마리아 막달레아와 다른 마리아)에게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들은 거기에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28,10)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을 듣고 열한 제자들이 갈릴래아(28,10)에 있는 높은 산에 모였습니다. 산이란 유혹이 넘실거리는 곳이며(4,8), 참된 행복이 선포된 곳이고(5,1), 예수님께서 영광스럽게 변화되신 곳입니다(17,1-9). 예수님께서는 사랑과 권위를 가지고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가르치신 산(5,2; 7,29)에서 제자들에게 복음 선포의 사명을 주십니다. 예수님의 활동의 근거지였으며(4,18; 16,13.18) 피난처였던(2,22; 3,12) 갈릴래아로 모인 열한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뵙고, 엎드려 경배하였으나, 그분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아직도 믿지 못하기 때문에 더러는 의심했다고 합니다. 복음사가는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고백하는 “경배”(2,11)와 믿음이 약함에서 나오는 “의심”을(14,31-33) 함께 말하면서 제자들 사이에 논쟁이 있었음을 암시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께로부터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으셨습니다.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하며, 오직 아들을 통해서만 하느님 아버지를 알 수 있습니다(11,25-27). 오직 예수님만이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실 수 있으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질 수 있게 하는(6,10) 권한을 받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가르침은 늘 권위가 있었습니다(7,29). 제자들은 예수님을 본받아서 백성 위에 군림하거나 세도를 부리지 말고, 섬기는 종이 되어야 하며, 스승이라 불리지 않게 하고(20,25-28; 23,8) 평화를 빌어주면서(10,12) 모든 민족들을 예수님의 제자로 삼아야 합니다. 제자들은 주님의 계명을 스스로 지키고 또 모든 민족들이 그렇게 지키도록 가르쳐야 합니다(5,19).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두세 사람이라도 당신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늘 함께 계실 것은(18,20) 물론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할(10,5-8) 제자들과 세상 끝 날까지 영원히 함께 하시겠다(임마누엘: 1,23)고 약속하십니다.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과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고쳐주는 권한을 받은(10,1) 제자들은 이스라엘의 길 잃은 양들(15,24)과 온 세상 사람들에게 찾아가 세례를 통하여 그들을 예수님의 제자로 삼아야 합니다(사도 14,21). 유다인들이 유배생활을 마치고 바빌론을 떠날 때 페르시아 임금 키루스가 말했듯이(2역대 36,23), 제자들은 모든 민족을 하느님 아버지께서 사랑하는 아들, 마음에 드는 아들이(3,17) 되게 해야 합니다.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까지”(5,18), 성부께서 성령을 보내시면서 세례를 주신 것처럼(3,16), 온 세상을 하느님을 섬기는 믿음의 공동체, 성자의 가르침에 따라서 사랑을 실천하는 공동체, 그리고 성령의 도움으로 그리스도를 증거하면서 천상 예루살렘으로 모일 희망의 공동체로 만들어야 합니다.
제2독서(로마 10,9-18)는 복음을 전하는 이들의 사명과 책임을 말합니다.
바오로는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이들로부터 일으키셨다(부활)”고, “예수님은 주님이시라”고 마음으로 믿어서 입으로 고백해야 의로움을 얻고 구원을 받는다고 합니다. 이것은 곧 성령의 인장을 받는(에페 1,13) 세례의 조건이기도 합니다. 세례를 받아 성령에 힙 입어(1코린 12,3)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 이들은(요엘 3,5) “자신을 하느님께서 기쁘게 받아주실 산 제물로 바치는”(로마 12,1)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튼튼한 기초로 쓰일 값진 모퉁잇돌”이 되셨음을 믿기 때문에(이사 28,16) 그분의 주권에 대한 확실한 고백과 믿음이 있어야만 구원에 이른다고 선포합니다. 사실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은 마음만 있으면 언제, 어디서든지 구원의 말씀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신명 30,14). 그런데 의심이 많았던 이들은 구원의 말씀을 듣고서도 그리스도를 믿으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바오로는 이들에게 구원의 말씀을 들려주려고, 믿음을 불러일으키려고, 예수님께서 주님이심을 고백하는 방법을 가르쳐주려고 죽음을 무릅쓰고 복음을 선포했습니다(1코린 1,14-17).
이렇게 열심히 온 세상에 복음을 선포하는 데도(로마 15,19-21) 구원의 조건으로 율법만 지키면 된다는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은 말씀을 입으로만 떠올리면서 표징(기적)을 요구했고, 논리와 합리성을 추구하는 그리스계 그리스도인들은 인생의 지혜를 찾으려고만 했습니다(1코린 1,22). 이들 모두 복음에 귀를 기울이지 않기 때문에 바오로는 자신을 바빌론 유배에서 벗어나 예루살렘의 해방을 알리는 제3이사야 예언자에(52,7) 비유하면서 복음 선포자의 소중함을 말합니다. 복음 선포자의 말씀을 들음으로써 믿음이 생기고, 그 믿음에서 주님의 이름을 고백하면서 다시 선포할 수 있다는 순환논리를 말합니다. 결국 말씀을 선포하는 이들은 구원의 빛 속을 걸어가는 사람이라서 그들의 발길이 아름다운 것이고, 하느님의 집으로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이들의 공로가 대단히 크다고 합니다.
복음을 선포하라는 말을 듣고, 이웃에게 가서 “하느님을 믿으시지요!” 하면, 많은 이들이 “하느님을 보여 달라.”고 합니다. 그런데 천주교 신자들 하느님을 보여 달라는 말을 듣기만 하면 그야말로 “찍” 소리도 못하고 돌아섭니다. 그런 이들에게 “바람을 보았느냐”고, “사랑을 보았느냐?”고 되묻지도 못합니다.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것들인 바람과 사랑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어린왕자), 그것들이 만들어낸 결과를 보고서야 바람이 분다고, 사람들이 사랑한다고 말합니다. 하느님은 자유로운 바람(영)이십니다(요한 3,8).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1요한 4,16). 아무도 바람과 사랑 자체를 볼 수 없듯이, 우리는 그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하느님을 보여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성당에 나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대로 산다면 하느님이 계심을 느낄 수 있을 것이며, 하느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이심을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차마 우리 공동체를 “와서 보시오!”(요한 1,39)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없는 것은 아니겠지요!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있기 때문에 사람의 마음을 꿰찌르고 움직일 수밖에 없습니다(히브 4,12; 묵시 1,16). 이런 하느님의 말씀을 이웃에게 들려주는 선교의 시작은 먼저 우리 자신이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따라 살려고 노력하면서 가장 가까운 곳에 함께 사는 이들에게 주님을 행동으로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 선포를 위해서 먼저 “주님의 빛 속에 걸어가야” 합니다. 선교란 그리스도를 믿기 때문에 나는 행복하다고, 내 삶이 늘 기쁘다고 자랑하고 증거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집에 열심히 모이면서도 아직도 누구를 믿어야 하는지, 어떻게 믿어야 하는지, 왜 믿어야 하는지 명확하게 알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의 행복과 기쁨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이며, 이웃에게 자랑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함께 하시는 공동체(교회)는 있는데, 성당에서 하느님의 말씀이 선포되기는 하는데, 그것이 무슨 뜻인지 깨달을 수 있도록 제대로 해석되지도 않기 때문에 도대체 무슨 소리인지 알아듣지 못해서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증거할 줄 모른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용기가 없어서 그럴 수도 있지만, 복음을 모르기 때문에, 주님의 빛 속에 걸어가는 삶을 살지 못하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닮지 못했기 때문에 “주님의 집으로 갑시다.”라고 권고할 자신이 없는 것은 아닌지 한 주간 동안 돌아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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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24. 연중 제30주일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모두가 행복해지는 날까지 함께 ♣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마태 28,20)
성경의 가르침과 그리스도교 전통은 구원의 보편성과 모두를 위한 사랑을 추구해왔습니다.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도 “하느님께서 이루어 주시고 교회가 기쁘게 선포하는 이 구원은 모든 이를 위한 것”(복음의 기쁨, 113항)임을 선언하셨습니다. 오늘날처럼 복잡하고 혼란스러우며 무엇보다도 자본이 맹렬한 힘을 떨치고 있는 이때에 과연 교회와 신앙인은 ‘모든 이의 모든 것’이 되고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겟세마니 동산에서 체포되자 제자들은 달아나버렸습니다(마태 26,47-56). 그런데 예수님의 무덤을 보러갔던 여인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전해줍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들은 거기에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28,10) 유다를 제외한 열한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분부하신 갈릴래아의 산으로 가서 그분을 뵙고 엎드려 경배드립니다(28,17).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28,18) 하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예수님의 말씀과 삶이 하늘과 땅, 곧 전 우주적으로 결정적이며 그분이야말로 모든 피조물의 주님이시며 우주의 주님이시라는 뜻입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소명을 주십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28,19-20)
마태오복음에 따르면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소명은 성경 말씀을 알리고, 봉사활동을 하며,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루카24,47)와 같은 부분적인 것이 아니라 총체적이고 우주적인 소명입니다. 곧 모든 존재를 창조하시고 사랑하시며 생명의 호흡을 불어넣어주시는 주님의 ‘모든 것’을 ‘모든 이’에게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런 소명을 사는 이들과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함께 계실 것’입니다(28,20). 이러한 소명은 결코 자랑거리가 될 수 없는 의무이며 행복의 조건입니다(1코린 9,16).
교회와 세상을 성(聖)과 속(俗)으로 엄격하게 구분하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그런 구분 속에 교회와 세상은 소통하지 못한 채 속화된 세상을 단죄하고 배척하였습니다. 그런 교회는 결국 배타적이고 폐쇄적으로 변하기 마련이었고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의 선민의식을 재현함으로서 ‘악한 사람이나 선한 사람 모두에게 햇빛을 내려주시는’ 하느님의 그 사랑 앞에 편 가르기를 하면 착각에 빠졌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의 모습, 신앙인들의 모습에서도 이런 모습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제 눈 속의 티는 못보고 자신에게 맡겨진 일은 책임 있게 하지 않으면서 남의 허물을 비판하고 부정적으로 말하길 즐기면서 어떻게 모든 이의 모든 것이 될 수 있겠습니까?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회에 불의가 판치고, 정치권력이 공동선을 지향하지 않고 사회 곳곳에서 신음소리가 들려도 무관심한 채 교회의 외적 성장만을 추구한다면 어찌 예수님께서 명하신 모든 것을 건네는 교회라 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명하는 모든 것을 가르치고 지키도록 하는 것은 곧 그분의 삶 전체인 사랑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은 돈으로 전해지거나 수치로 계산할 수 있는 효율성의 범주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철저히 가난하신 예수님을 전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가난한 모습, 신앙인들의 오직 하느님을 믿고 의지하며 그분의 사랑을 전하는 일에 몰두하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살아내야 할 근본소명입니다.
우리 모두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해 우리 자신이 먼저 회개함으로써 사랑의 존재가 되어야겠습니다. 하느님께로 되돌아가고 예수님의 말씀과 삶에 일치되지 않고서는 예수님처럼 모든 이의 모든 것이 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느님이 의미가 되고 생명의 힘이 되지 못하는 세계 구석구석의 가난과 고통, 전쟁, 사회갈등, 이념 대립, 차별, 소외 등에 대한 사랑 깊은 관심을 가져야겠습니다. 왜냐하면 이해한 만큼 사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함으로써 행복하다는 것을 삶으로 보여 줄 때, 종교를 초월하여 모든 이가 복음이 참되며 기쁜소식임을 믿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내면의 평화나 기도 안에서 체험하는 기쁨에 만족해서는 안 되며, 좀 더 능동적으로 세상을 바꿔나가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소명은 하느님의 생명과 얼이 인간 삶의 전 영역 깊숙한 곳까지 스며들어 모두가 인간다운 삶을 누리고 행복해지는 그날까지 멈추어서는 안 되는 것임을 기억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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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24. 연중 제30주일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주 예수 그리스도와 바꿀 수 없네!
이제는 모든 고통도 상처도 다 내려놓으시고, 주님 제단 앞에 편안히 누워계신 모예수 신부님의 영정사진을 바라보다가, 펄펄 날아다니시던 시절의 여러가지 에피소드들이 하나 하나씩 머릿속에 떠올랐습니다.
모신부님께서는 스페인 출신의 선교사들이 대체로 그러셨던 것처럼, 그분의 마음은 예수님을 향한 확고한 신앙심, 성모님께 대한 지극한 효심, 불타는 복음선포의 열정, 이단을 향한 강한 적개심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한번은 전철역을 빠져나갈 때였습니다.
모신부님의 예리한 레이더에 한 남자가 포착되었습니다.
계단끝 출구에서 ‘예수천국 불신지옥’이라는 팻말을 들고 행인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분이었습니다.
평소 틈만 나면 하느님의 크신 자비를 강조하시던 신부님의 거룩한 분노가 순식간에 폭발했습니다.
한번에 두 계단씩 성큼성큼 뛰어 올라가신 신부님은 피캣을 확 뺏들고서는 지나가는 사람들이 모두 들을 수 있게 큰 목소리로 외치셨습니다.
“여러분들, 하느님은 두려운 분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느님은 자비하십니다!”
모신부님께서 수녀님들과 함께 미사를 드리기 위해 입당하실 때, 입당성가가 울려퍼졌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와 바꿀 수 없네. 이 세상 부귀영화와 권세도...”
입당성가가 끝나고 제대 위에 서신 신부님께서 수녀님들 향해 크게 외치셨습니다.
“거짓말!” 그러시면서 하셨던 말씀이 늘 기억에 남아있습니다.
“여러분들 입술로만 ‘주 예수 그리스도와 바꿀 수 없네.’ 하지 마십시오.
아름다운 성가 가사를 노래로만 부르지 마시고, 삶과 행동으로 실천하십시오.”
돌아보니 모신부님의 신앙이 참으로 깊었으며, 마치 스페인 검투사처럼 적극적이고 능동적이었습니다. 당신의 깊은 신앙을 내면에만 간직하지 않으셨고,
말과 적극적인 행동으로 표현하셨습니다.
물론 때로 너무 지나쳐서 옆에 있던 형제들이 무안해질 경우도 있었지만...
그래서 신부님께서는 당신의 그 적극성을 통해 지극히 소극적이었던 저희 후배들의 신앙에 자극과 활기를 불어넣어주셨습니다.
모신부님은 미사나 강의, 고백성사 등을 통한 복음선포의 기회가 당신께 주어 그렇게 행복해 하셨습니다.
말씀 선포를 위한 준비에 최선을 다하셨고,
큰 제스처와 흥미로운 말씀으로 신자들을 행복하게 만들어주셨습니다.
무엇보다도 복음선포를 향한 그분의 발걸음은 언제나 밝고 경쾌했습니다.
첫번째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외칩니다.
“선포하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
파견되지 않았으면 어떻게 선포할 수 있겠습니까?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로마서 10장 14~15절)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도 승천하시기 전 제자들에게 지상 과제 하나를 부여하십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오 복음 28장 19~20절)
다시금 맞이한 전교 주일, 그리스도 신자로서 함께 깊은 반성과 성찰의 기회로 삼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매일 우리 앞에 놓여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생명처럼 소중히 여기고 있습니까?
매일 선포되는 주님의 말씀을 선물이요 은총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생명수같은 축복의 말씀을 이웃들, 가장 가까운 이웃들과 적극적으로 나누고자 하는
열정이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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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24. 연중 제30주일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초대 교회 전교의 패러다임: 특별하면서도 오를성싶은 나무가 돼라!
오늘은 전교주일입니다.
전교에 있어 가장 중요한 점은 무엇일까요? 내가 먼저 믿는 것입니다.
내가 믿고 좋은 것은 드러내지 않을 수 없는 법입니다. 그런데 그 믿음은 대부분 더 믿는 사람에게서 옵니다.
사제가 이 역할을 담당합니다.
그렇다면 전교는 이 ‘믿음’을 갖게 만드는 것일까요?
우리는 전철에서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이라고 소리치는 사람을 보면 믿고 싶은 마음이 생기나요?
믿지 말라는 말과 같습니다.
궁극적으로 믿음을 주려는 것이 전교는 맞지만 바로 믿음을 주려고 하면 사람들은 한 발짝 뒤로 물러납니다.
‘최고의 스타들은 왜 키가 작을까요?’ 『언씽킹』이란 책에 나온 소제목입니다.
2008년 미국에서 수입이 가장 많았던 10명의 배우를 봅시다.
1. 해리슨 포드, 2. 애덤 샌들러, 3. 윌 스미스, 4. 에디 머피, 5. 니컬러스 케이지, 6. 톰 행크스, 7. 톰 크루즈, 8. 짐 캐리,
9. 브래드 피트, 10. 조지 클루니
배우로서 ‘주연’이란 말을 떠올리면 키 크고 조각처럼 잘생긴 외모를 떠올립니다.
하지만 여기 거론된 주연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 중에서 키가 180cm가 넘는 사람은 니컬러스 케이지뿐입니다.
그런데 니컬러스 케이지가 조각 미남인가요? 조각 미남이라 한다면 톰 크루즈나 조지 클루니를 들 수 있겠습니다.
조지 클루니는 178cm이고 톰 크루즈는 176cm입니다.
물론 저보다야 다 크지만, 서양인으로서 상상할 수 있는 키는 아닙니다.
우리가 아는 말론 브랜도, 멜 깁슨, 로보트 드니로, 알파치노, 슬베스터 스탤론, 숀 팬, 맷 데이먼 등의 평균 키는 175cm입니다.
우리나라 BTS 평균 키가 177.3cm입니다. 유일하게 RM만 181cm이고 나머지는 평균 175cm인데 모두가 사랑합니다.
우리나라 배우들도 보면 키가 크면 얼굴이 좀 만만하고 얼굴이 좀 부담스러우면 키가 만만한 경우가 많습니다.
180cm인 송강호 씨는 키가 크지만, 얼굴은 조각 미남이 아니고 이병헌 씨는 미남이지만 키는 좀 작습니다.
여자는 어떤 여자들이 매력 있을까요? 분명 솔직해서 자신을 다 드러내는데 또 뭔가 신비감을 감춘 여자입니다.
그냥 한 번 만났는데 다 알 것 같은 여자는 매력이 없습니다.
남자도 특별한 것을 꿈꾸고 누군가를 만날 때 특별해지고 싶기 때문입니다.
대신 부담스러우면 안 됩니다.
오르지 못할 것 같으면 아예 쳐다보지도 않습니다. 특별한 면이 있으면서도 백치미까지 있다면, 그래서 ‘가능할 거 같은데?’라는 마음을 주는 여자가 가장 매력 있습니다.
종교는 분명 특별한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오르지 못할 나무만 되지 않는다면 누구나 특별한 것의 일부가 되고 싶은 사람들에게 매력적일 수 있습니다.
문제는 스스로 오르지 못할 나무로 만들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특별한 것만 강조하면 그렇게 됩니다.
우리를 특별하게 만드는 ‘성사’입니다.
우리는 성체성사로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됩니다.
그리고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사람들에게 이것만 강조한다면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이라고 외치는 불친절한 복음 전파자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우리나라 출산율이 낮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내가 살기 부담스러운 나라에서 내 아이도 살게 하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매우 특별합니다.
요즘 전 세계적으로 가장 뜨거운 나라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귀화해서 우리나라에 살려면 어떨까요? 매우 부담스럽습니다.
그냥 멀리서 바라만 보는 게 낫습니다.
우리나라가 이렇게 살기 부담스럽게 된 이유가 무엇일까요?
어렸을 때부터 우리 스스로가 엄청난 경쟁을 시키며 한국인이라면 그 정도는 되어야 한다고 믿게 만드는
이상한 의식이 팽배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열등감이 있으면 자신 안에 있는 하나의 특징만을 강조하며 그것만을 부각하게 만듭니다.
우리나라가 살기 좋은 나라가 되어 매력적으로 되려면 그냥 큰 사고 안 치고 사람들과 어울려 살기만 하면 되는
그런 문화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나라는 돈이 없는 게 아니라 부자가 아니면 무시당하는 문화가 문제인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매력적인 나라가 되면 자녀도 많이 출산할 것입니다.
그러려면 그냥 어울려 살기만 하면 되는 문화가 정착되어야 합니다.
그냥 어울려 사는 것을 ‘친교’라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부담스럽지 않은 공동체가 무엇일까요? ‘가족’입니다.
가족이 부담스러우면 그 사람은 어디에도 속할 용기를 얻지 못합니다.
아버지에게 학대를 받은 사람이 아버지에 대한 온전한 개념을 회복하지 않고서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사랑하기는 불가능하리만치 어렵습니다.
마찬가지로 교회도 “아버지!”란 믿음만 강조할 게 아니라 우선은 모든 사람이 어울려 아버지와 같은 사람을 만나고, 어머니, 형제와 같은 사람을 만나는 공동체를 형성하는 게 우선입니다.
이것이 오를성싶은 나무가 되는 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들이 서로 친교를 이루며 사랑하는 것을 보면 세상 사람들이 그들이 당신의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초대 교회 때 사람들은 성체성사를 보고 교회로 들어오려고 했을까요,
아니면 가진 것을 나누고 주님을 찬미하는 교회의 모습을 보고 교회로 들어오려 했을까요?
성경에서 초대 교회 선교모델을 한 번 살펴봅시다.
“사도들이 계속해서 놀라운 일과 기적을 많이 나타내 보이자 사람들은 모두 하느님을 두려워하게 되었다.
믿는 사람은 모두 함께 지내며 그들의 모든 것을 공동 소유로 내어놓고 재산과 물건을 팔아서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만큼 나누어주었다.
그리고 한마음이 되어 날마다 열심히 성전에 모였으며 집집마다 돌아가며 같이 빵을 나누고 순수한 마음으로 기쁘게 음식을 함께 먹으며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이것을 보고 모든 사람이 그들을 우러러보게 되었다.
주께서는 구원받을 사람을 날마다 늘려주셔서 신도의 모임이 커갔다.”(사도 2,43-47)
일단 성직자들이 ‘놀라운 일과 기적’을 일으켜야 합니다. 물론 성사 거행보다 더 큰 기적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목적은 ‘교회 공동체의 친교’여야 합니다. 하느님 백성을 모아 친교의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 사제들의 몫입니다.
그 친교는 ‘가진 것을 나누는 사랑’이 바탕이 됩니다. 이를 위해 성사가 존재합니다.
성사는 그리스도처럼 이웃을 위해 자기 피를 흘리게 해줍니다.
이런 친교의 행복으로 ‘주님을 찬양’하는 공동체가 교회여야 합니다.
주님의 살과 피로 맺어진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공동체는 세상에 ‘매력을 발산’합니다.
누구나 친교의 행복을 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찬미하며 겸손해지고 싶습니다.
이렇게 되면 세상 사람들이 그 공동체를 보고 들어와 ‘신도들의 모임이 커집니다.’
이것이 초대 교회가 전하는 선교 방법이었습니다.
현재 성당에서 소공동체나 단체에서 형제들 간의 친교를 이루는 숫자가 얼마나 됩니까?
교적 인원에 비하면 매우 작은 숫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냉담자를 말할 때 3년에 한 번 ‘고해성사’ 한 것을 기준으로 삼습니다.
하지만 고해성사하고 성체성사 하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이 기적을 통해 ‘친교의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것’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성사의 목적이 친교입니다. 형제간의 친교를 지향하지 않는 성사는 어쩌면 방향을 잃고 무조건 달리는 자동차에 기름을 계속 채우는 것과 같습니다.
전교하지 않는 교회는 있을 수 없습니다.
표현되지 않는 사랑이 있을 수 없듯, 믿는데 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무엇을 믿습니까?
바로 교회 안에서 형제간의 친교로 참으로 행복하고 그 공동체가 구원의 백성임을 믿는 것입니다.
하지만 에너지를 채우는 것에만 목표를 두며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지 못하면 열심히는 하는데 효과는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는 먼저 특별한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를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성사입니다.
성사 때문에 교회는 특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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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24. 연중 제30주일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 이승화 시몬 신부님.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라.
한밤 중에 불빛이 보이면
사람은 희망과 안도감을 얻습니다.
혼란과 어두움은 불안을 가져오지만
불빛은 따스함과 안정감을 가져다주기 때문입니다.
한낮에 태양은
우리가 나아갈 방향을 보여줍니다.
빛이 떠오르는 곳저 높은 곳에서 세상을 우러러보며
모든 것을 품어주고 자라나도록 이끌어주는 빛
그 빛은 삶의 목적과 나아갈 방향을 보여주며
더 높고 넓은 세상을 보여줍니다.
누군가가 행복을 지니고 있다면
그 행복은 향기가 되어 다른 이에게 전해집니다.
행복은 따스함과 함께 삶의 목적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는지
어떻게 살아가며 무엇을 향해야 하는지
모두 행복에 담겨 있는 소중함입니다.
그렇기에 교회는
한밤 중의 불빛과 같은 존재이며
한낮의 태양과도 같으며
참된 행복을 지닌 이와 같습니다.
우리는 고난과 어려움의 시기에도 희망을 간직하며
이웃에게 따스함과 안정감을 주는 존재입니다.
또한 어디를 바라보며 나아가야하는지
삶의 방향을 보여주는 존재입니다.
동시에 누가 보아도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그런 충만한 행복을 간직한 존재입니다.
그렇기에 우리 교회는 본질상 선교하는 존재이며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됩니다.
오늘 예수님이 우리에게 전하는 말씀이
바로 그런 존재가 되어야 함을 알려줍니다.
세상의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는다는 것은
그들에게 참된 행복을 말과 행동과 삶으로 전해야 한다는 의미이며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는 것은
우리 삶의 중심에 삼위일체 하느님이 계신다는 뜻입니다.
그럴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가 받은 사명을 수행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오늘은 전교 주일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가
무엇을 바라보고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돌아보는 날이며
나의 믿음을 이웃에게 어떻게 전하고 있는지 성찰하는 날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말하듯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가 되어
이미 들어왔고 전해받은 믿음을 살아가며
세상에 생명의 말씀을 전할 수 있길 기도하며
오늘 이 시간,
주님과 함께 우리의 기쁨과 행복을 이웃에게 전하는
그런 한 주간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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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24. 연중 제30주일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 김 로마노 형제님.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 제1독서 (이사2,1-5)
수많은 백성들이 모여 오면서 말하리라. " 자, 주님의 산으로 올라가자. 야곱의 하느님의 집으로! 그러면 그분께서 당신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치시어, 우리가 그분의 길을 걷게 되리라." 이는 시온에서 가르침이 나오고, 예루살렘에서 주님의 말씀이 나오기 때문이다. (3)
앞선 2절에서는 세말에 모든 민족들이 주님의 집(성전)으로 모여드는 영광된 미래를 예언하였다. 이제 본절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날에 수많은 백성들이 주님의 말씀에 순종할 것을 예언한다.
그 가운데 본문에서는 주님의 통치를 받으러 모여드는 사람들이 아직 관망하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 동일한 여정을 떠나자고 촉구하는 내용이 직접화법으로 소개된다.
여기에서 '자'(오라)에 해당하는 '레쿠'(leku)는 '걷다' 라는 의미의 동사 '알라크'(alak)의 명령형으로서, 적극적으로 주님 신앙을 받아들이라는 강력한 요청의 의미를 지닌다.
아울러 '야곱의 하느님의 집으로' 에 해당하는 원문인 '엘 뻬트 엘로헤 야아코브'(el beth elohe yaqob ; to the house of the God of Jacob)에는 동사가 없다. 다시말해서 본문의 동사는 앞 문장에 나오며, '우리가 ~ 올라가자' (let us go up) 로 번역된 '웨나알레'(yenaalle)이다.
따라서 본문은 실질적으로 야곱의 하느님의 집으로 올라가자는 촉구이며, 여기서 '야곱의 하느님의 전'은 앞서 나온 '주님의 산' 과 동일한 곳임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주님의 산' 이 바로 '야곱의 하느님의 전' 임을 드러내는 것은 그들이 받을 축복이 본래 이스라엘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업을 근거로 세워진 신약의 교회는 구약의 성도들의 신앙과 결코 다른 것이 아니다. 바로 성조들이 섬겼고, 이스라엘 자손들이 만들었던 성전에 임재하신 하느님을 신약의 교회도 섬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르게 여겨지는 것은 구약의 선민인 이스라엘 자손들이 구원사의 점진적 전개 과정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폐쇄적으로 배타적인 선민 의식을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분명 민족중에서 하느님의 소유로 부르심을 받았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 자신만의 구원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부르시면서 그들을 민족 중 사제의 나라로 삼으셨다고 밝히셨다.(탈출19,5.6) 이것은 결국 그들만의 구원을 위해서가 아니라 천하만민을 중재하는 일을 감당하기 위해서이다.
즉 그들은 자신들이 사제의 나라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 자체에 자신들만의 구원이 아니라 이방인들, 곧 천하만민의 구원이 전제되어 있음을 깨달아야 했다.
이것은 그들의 조상이며, 거룩한 민족 공동체와 예배 공동체를 만들기 위한 시발점이라고 할 수 있는 아브라함을 하느님께서 부르시는 과정에서부터 구체적으로 표명된 것이기도 하다.(창세12,1-3)
이같은 측면에서 세상 만민, 모든 민족들이 하느님의 성전에 나아가 하느님을 섬기며 하느님의 통치를 받는다는 본문의 내용은 새로운 패러다임의 시대가 이르렀음을 선포하는 것이지만, 전혀 새로운 것만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도리어 이스라엘의 실패와 허물, 하느님의 구원사에 대한 오해와 왜곡을 바로 잡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그분께서 당신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치시어 우리가 그분의 길을 걷게 되리라.'
주님의 성전에 오르기 전까지 이방인들은 주님의 가르침과 전혀 무관한 삶을 살았지만, 그 산에 오른 후로는 주님의 가르침을 받으며 살 것이다.
여기에서 '당신의 길' 에 해당하는 '밋데라카이우'(mydderakaiu)의 원형 '떼레크'(derek)는 원래 여러 사람들이 오랜 시간 동안 밟아서 만들어진 탄탄한 길을 가리키는 단어이다. 본문에서는 3인칭 단수 소유격 접미어가 붙어 하느님께서 그의 백성들을 위해 이상적으로 정해 놓으신 삶의 방식을 의미한다.
주님께서는 당신과 상관없이 육신의 욕망에 이끌려 살아왔던 이방인들 중에서도 새롭게 그분 은총의 통치 아래 들어온 자들을, 당신 백성들이 이전부터 지켰던 삶의 방식으로 가르치실 것이란 사실이 예언되고 있는 것이다.
한편, 그 결과는 주님의 산으로 올라온 자들이 주님의 길로 걷는 것이다. 여기에서 '그분의 길' 에 해당하는 '뻬오레호타이우'(beorehothaiu)의 원형 '오라흐'(orah)는 '떼레크'(derek)보다 약간 작은 길을 의미한다.(창세49,17)
본문에서는 '~안에' 라는 의미를 지닌 전치사 '뻬'(be)가 접두되어, 새롭게 주님의 백성된 자들이 그분의 길 안에서 살 것이라는 사실을 나타낸다.
이것은 신약의 빛 아래 비추어 이해하면, 그들이 그리스도의 말씀을 통해 주님의 뜻을 알게 되고, 성령의 인도를 통해 새로운 삶을 살게 될 것임을 나타낸 것이 된다.(예레31,34 ; 요한14,26)
'이는 시온에서 가르침이 나오고, 예루살렘에서 주님의 말씀이 나오기 때문이다'
본문은 이유의 접속사 '키'(ki)로 시작되는 문장으로서, 주님의 통치 아래로 모여든 사람들이 어떻게 해서 그분의 가르침을 받고 그분의 길 안에서 거닐 수 있는 것인지, 그 근본적인 이유를 보여준다.
또한 본문은 '가르침'(율법)과 '주님의 말씀' 이 대응을 이루고, '시온에서 ~나오고' 와 '예루살렘에서 ~나오기'가 대응을 이루는 평행 대구 구조의 문장이다.
여기서 그 이유는 '가르침'과 '주님의 말씀' 이 '시온' 즉 '예루살렘' 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으로 제시된다. '가르침'(율법)에 해당하는 단어는 '토라'(torah)이며 기본적으로 가르침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이에는 관사가 부착되어 있지 않는데, 이것은 구약의 모든 율법을 포함하여 주님께서 당신 백성의 거룩한 삶을 위해 그들에게 계시해 주신 모든 뜻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말씀' 에 해당하는 '따바르'(dabar) 역시 주님의 계시를 가리킨다. 주님은 그분 계시의 말씀, 그분의 백성들이 분명히 분별할 수 있는 율법을 근거로 해서 그분에게 모여든 모든 사람들을 가르치실 것이 예언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명확히 계시된 주님의 말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분이 원하시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한편, 그 '가르침'(율법)과 '말씀' 이 '시온' 즉 '예루살렘' 에서 나온다는 것은 주님의 임재와 현존이 있는 곳에서 하느님의 말씀이 나올 것이라는 의미와 더불어, 복음 전파가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될 것을 암시한다. 이러한 예언은 사도행전에서 그대로 구현되었다.
실로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 제자들은 예루살렘에서 머물러 약속하신 성령을 받았으며 바로 그곳에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복음 전파를 시작하였다.(사도2장)
당시 16개국에서 모여든 디아스포라 유대인들 및 경건한 이방인들은 예루살렘에서 전파된 복음을 각기 자기 나라 말로 들었으며, 그때부터 복음이 만방에 전해지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사실상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복음의 빚진 자들이며, 이스라엘이라는 원 올리브나무에 접붙혀져 그 진액을 먹고 성장한 자들이다.(로마11,17.24)
본문에서 이사야는 이 일이 이루어지기 700 여년 이전에 이미 하느님의 계시로 이런 일을 내다보며 이것을 예언하고 있다.
이것은 하느님의 구원사가 우연이나 계획없이 아무렇게나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철저한 계획과 작정에 따라 한치의 오차도 없이 진행되어 나아감을 선명하게 보여주는 단적인 예이다.
[연중 제30주일(전교주일]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라.
(마태28,16-20)
16 *열한 제자는 갈릴래아로 떠나 예수님께서 *분부하신 산으로 갔다.
= 예수님께서 배반의 죄를 짓고 끝내 돌아오지 않고 죽은 유다가 빠진 열한 제자인 것, 후에 마티아가 뽑혔지만(사도1,26) 성경은 그의 행적에 대해서 아무 말씀이 없다. 그것은 내가, 우리가 그 열두번째 제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갈릴레아~ 예수께서 돌아가시기전 분부하셨던 곳으로 살인자들의 도피성이 있었던 곳 중 하나이며(여호수아21,32) 또한 그곳은 이민족의 갈릴레아로 첫 제자들을 뽑으신 곳이다.(마태4,15-18)
먼저 도피성을 보면,~
(여호20,6-7) 6 그 살인자는 재판을 받기 위하여 공동체 앞에 설 때까지, 그리고 그때의 *대사제가 죽을 때까지 그 성읍에서 살아야 한다. 그런 다음에야 자기의 성읍, 곧 자기가 도망쳐 나온 성읍, 자기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 7 그리하여 그들은 납탈리 산악 지방에서는 갈릴래아의 케데스를, 에프라임 산악 지방에서는 스켐을, 유다 산악 지방에서는 키르얏 아르바 곧 헤브론을 성별하였다.
= 죽어야할 죄인(살인자)이 대사제의 죽음으로 풀려나기를 기다리는 곳이 도피성, 그 도피성 갈릴레아에 대 사제이신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셨기에 이민족들에게, 그리고 죄인들에게 자유를 주시려 가시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일에 제자들을 동참시키려 부르신 것이다. 그런데 그곳에서 제자들을 뽑으셨다는 것은, 그 제자들이 자유를 받아야 할 죄인이었다는 것이다. 우리의 모습을 보라 하시는 것, 이 세상이 구원자를 기다리는 갈릴레아인 것이다.
신앙의 시작은 이민족으로 죄인의 자리에서 시작하는 것, 아브라함도 이민족으로 우상을 팔아 살았던 그 죄인이었을 때, 부르심을 받았쟎은가~ 우리의 본래의 자리가 그 죄인들의 갈릴레아라는 것이다.
17 그들은 예수님을 뵙고 엎드려 경배하였다. 그러나 더러는 *의심하였다.
= 삼년 반을 밤낮으로 함께했던 그 예수님께서 죽으셨다 부활하셨는데~ 제자들이 그분을 뵙고도 의심했다는 것은 그분에 대해서 몰랐다는 것이다.
인간의 생각으로 기적의 肉을 입은 예수님을 따랐고, 자유를 주시는 하느님이신 그리스도를 몰랐다는 것이다.(필리2,6-8참조)
18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다가가 이르셨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 하늘의 용서, 자유의 권한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20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 예수님의 말씀을 사람의 규정과 교리, 그 법으로 가르쳐 행위의 신앙으로 지키게 하라는 것이 아니라, 대 사제의 죽음으로 받는 하늘의 용서, 자유 곧 십자가의 죽음, 그 예수님의 대속, 그 길을 진리로 가르쳐 하늘의 자유를 얻어 하늘의 생명을 지키게 하라는 말씀이신 것이다.
그 진리의 말씀을 마음에 간직하는 것, 그것이 지키는 실행인 것이다.
(야고1,23-25) 23 사실 누가 말씀을 듣기만 하고 실행하지 않으면, 그는 거울에 자기 얼굴 모습을 비추어 보는 사람과 같습니다. 24 자신을 비추어 보고서 물러가면, 어떻게 생겼었는지 곧 잊어버립니다. 25 그러나 완전한 법 곧 *자유의 법을 들여다보고 거기에 *머물면, 듣고서 잊어버리는 사람이 아니라 *실천에 옮겨 *실행하는 사람이 됩니다. 그러한 사람은 자기의 그 실행으로 행복해질 것입니다.
= 그러나 지금 이 세대에는 하느님의 뜻을 지키기가 너무 힘들다. 사람의 마음(뜻)을 현혹시키는, 감동시키는 그럴듯한 헛된 가르침이 난무하기 때문이다.
(2티모4,2-4) 2 말씀을 *선포하십시오.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꾸준히 계속하십시오. 끈기를 다하여 사람들을 *가르치면서, *타이르고 꾸짖고 격려하십시오. 3 사람들이 건전한 가르침을 더 이상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을 때가 올 것입니다. 호기심에 가득 찬 그들은 자기들의 욕망에 따라 교사들을 모아들일 것입니다. 4 그리고 진리에는 더 이상 귀를 기울이지 않고 신화 쪽으로 돌아설 것입니다.
= 참 가르침은 사람의 마음을 만족 시켜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본질(죄)을 깨닫도록 꾸짖는 가르침이다.
그래야 다시 살릴 수 있으니까, 하늘의 참 자유를 줄 수 있으니까~ 예수님도 그런 가르침을 하셨쟎은가(루가12,51)
그러니 사람의 규정과 교리의 그 행위의 어리석은 신앙생활이 아닌, 하느님의 말씀을 구원의 진리로 깨닫는 참 신앙생활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에페5,16-17) 16 시간을 잘 쓰십시오. 지금은 악한 때입니다. 17 그러니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깨달으십시오. ~아멘.
연중 제29주일 복음 (마태28,16-20)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18ㄴ~20)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에 해당하는 '파사 엑수시아 엔 우라노 카이 에피 테스 게스' (pasa eksousia en ourano kai epi tes ges; all authority in heaven and on earth)에서 '하늘과 땅의'로 번역된 '엔 우라노 카이 에피 테스 게스'(en ourano kai tes ges)는 '하늘 안에 그리고 땅 위에'로 직역되는데, '하느님께서 통치하시는 모든 영역'을 말한다.
그리고 '권한'에 해당하는 '엑수시아'(eksousia)는 신약에서 '권세', '권능', '권리', '힘', '자유함'을 뜻하는데, 여기서는 '중보자(중재자)로서의 권한'이 강조된다.
또한 '나는 ~받았다'에 해당하는 '에도테 모이'(edothe moi; was given to me)에서 '에도테'(edothe)는 '주다'는 뜻을 지닌 '디도미'(didomi) 동사의 직설법 부정과거 수동태 3인칭 단수로서 '그것이 주어졌다'는 뜻이다.
여기서 이 동사가 수동태로 쓰인 것은 성부 하느님에 의해 주어진 것임을 가리킨다.
그리고 이 동사가 부정(不定) 과거형으로 쓰인 것은 예수님께서 받은 권한이 단번에 받은 것임을 나타낸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육화(강생) 이전에도 성자로서 성부 하느님과 마찬가지로 구원과 심판의 권한을 가지셨다. 그리고 이 땅에서도 죽은 자를 살리시고 병자를 고치시며, 자연계와 영계를 제어하는 권한을 나타내보이기도 하셨다.
그러나 그 권한은 신성(神性)을 지니신 그리스도께서 근본적으로 지니셨던 권한에 비하면 제한적이셨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마침내 십자가상 구속(대속) 사업을 완수하시고 죽음에서 부활하셔서, 잠시 성부 하느님께 맡겨 드렸던 본래의 권한을 다시 받아 회복하신 것이다.
그래서 구속 사업과 부활 이후에는 성부 하느님께서 오직 구속 사업을 완수하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구원과 심판의 권한을 행사하기로 하셨다(요한5,20~22.30).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에게 주어진 그 권한을 가지고, 마태오 복음 28장 19절에서 제자들에게 선교 명령을 하시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통치하실 영역인 하느님의 나라는 선교를 통하지 않고서는 확장되고 완성될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너희는 가서'로 번역된 '포류텐테스'(poreuthentes; go)는 복수 2인칭 명령 분사이며, '너희'는 직접적으로 승천 직전에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제자들을 지칭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주님을 따르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지칭한다(사도1,8참조).
그리고 제자로 삼아야 할 대상은 '모든 민족'이다. 여기서 '민족'으로 번역된 '에트네'(ethne)는 '에트노스'(ethnos; nations)의 목적격 복수로서 제자를 삼는 대상이다.
또한 '제자로 삼아'에 해당하는 '마테튜사테'(matheteusate; make disciples; teach)는 '마테튜오'(matheteuo)의 복수 2인칭 명령형 동사이다.
이 동사는 '너희는 가서'에 해당하는 '포류텐테스'(poreuthentes), '세례를 주고'에 해당하는 '밥티존테스'(baptizontes), '가르쳐'에 해당하는 '디다스콘테스'(didaskontes)의 세 개의 분사에 둘러싸여 있다.
원문의 뜻은 '제자로 삼는 일'이 '가는 것'과 '세례를 주는 것'과 '가르치는 것'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말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지상 명령의 궁극적인 핵심을 보여 주는데, '제자로 삼는 일'이 가장 중요한 중심 주제이며, 나머지는 이에 수반되는 것임을 드러내고 있다.
특히 '세례를 주고'에 해당하는 '밥티존테스'(baptizontes; baptizing)는 현재 분사인데, 현재형이라는 점에서 세례가 계속적으로 행해져야 함을 가리킨다.
이것은 한 개인에게 반복적으로 주어진다는 뜻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계속적으로 행해져야 할 것임을 말하고 있는데, 세례가 바로 제자로 삼는 수단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한편, '밥티존테스'(baptizontes)의 기본형인 '밥티조'(baptizo)는 본래 '담그다'는 뜻을 지닌 '밥토'(bapto)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 동사가 '세례를 받다'(사도1,5)는 세례 의식을 가리키는 용어로 쓰일 때에는 '담그다'와 '씻다'(루카11,38참조)는 두 가지 의미가 다 들어가 있다.
먼저 이 동사를 '담그다'는 의미로 볼 때, '세례'는 몸을 물에 담그는 의식을 나타내며, 영적으로 믿는 이들이 세례 성사를 통해 예수님의 죽으심과 묻히심과 부활하심에 함께 참여한다는 뜻이 강조된다(루카12,50; 로마6,3).
또한 이 동사를 '씻다'는 뜻으로 보면, '세례'는 '죄의 씻음', '죄의 용서'라는 의미가 강조된다고 볼 수 있다(사도2,38; 22,16).
실제로 세례 성사는 그리스도와 일치하는 뜻과 더불어 죄사함의 이중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또한 이 세례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 곧 삼위일체 하느님의 이름으로 이루어져야 함이 분명하게 계시되고 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이 삼위일체 하느님 가운데 한 분이심을 명확하게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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