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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주님 만날 준비 돼 있습니까?
성경: 마태복음 3:1-12절
서론>
나에게 소중하고 귀한 사람일수록 우리는 만날 준비에 신경을 씁니다. 몸을 깨끗이 씻습니다. 만나기 전에 머리도 손질합니다. 오늘 만남을 위해 이 옷 저 옷을 번갈아 가며 입어 봅니다. 메이크업도 합니다. 이렇게 준비하는 시간이 더 길어지면 길수록 만날 사람이 자기에게 특별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세상의 모든 만남에는 정한 약속 시간이 있습니다. 물론 혼자서 상대를 짝사랑하는 사람은 만남에 대한 약속 시간이 따로 정해져 있지 않을 것입니다. 상상 속에서 자기 혼자 일방적으로 만든 약속 시간만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상상이 아니라 곧 다시 오시겠다는 약속을 한 후 떠나버렸다면, 언제까지 기다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와 여러분은 주님 만나기를 기다렸던 세례 요한과 그 당시 유대 백성들처럼 주님 만날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어떻게 해야 다시 오실 주님 맞을 준비를 하는 것일까요? 우리는 이것을 세례 요한이 외친 말씀을 통해서 깨달을 수 있습니다.
첫째로, 주님 만나려면 죄를 자복하고 회개하여야 합니다(1-4절).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라는 세례 요한의 선포는 천국이 이미 왔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가까이 왔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세례 요한만의 생각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 곧 천국의 왕이신 예수님께서도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마태복음 4장 17절 말씀입니다. “이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 아멘.
그런데 유대 광야에서 세례 요한의 천국 복음을 듣고 있는 이 사람들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 아닙니다. 물론 이들 중에는 이방인도 섞여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는 유대 백성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들이 하나님 나라를 몰랐을까요? 하나님 나라가 임하리라는 것을 듣지 못했을까요? 메시아를 대망하지 않았을까요? 이들은 유대인들이었고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복음서 기자 마태는 선지자 이사야가 말한 광야의 외치는 소리가 바로 세례 요한이라고 말씀합니다. 3절 말씀입니다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가 오실 길을 곧게 하라 하셨느니라.”
세례 요한은 너희가 그토록 기다리던 메시아가 내 뒤에 오신다는 것입니다. 너희가 주님을 만나려면 어떻게 해야 한다고 말씀합니까?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것입니다. 회개는 죄 사함으로 말미암은 구원이 있다는 것, 복된 소식, 기쁜 소식 곧 천국 복음을 듣고서 거기에 반응하는 것입니다.
눅 1장 76절, 77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 아이여 네가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선지자라 일컬음을 받고 주 앞에 앞서가서 그 길을 준비하리라. 77절 말씀입니다. “주의 백성에게 그 죄 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알게 하리니.” 아멘.
따라서 회개는 자기 행위를 돌아보며, 죄를 죄로 여기지 않던 내가, 죄를 지었음을 하나님 앞에 자복하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다시 오실 주님 만남을 기다리고 있는 저와 여러분은 한 번 회개했고 또 이전에도 회개했으니 더는 회개할 필요가 없습니까?
구원파는 그렇게 가르칩니다. 이미 목욕한 사람은 다시 목욕할 필요가 없다고 하는 말씀에서 이미 구원받은 사람은 더는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 회개할 필요가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죄 사함 거듭남의 비밀이라고 해서 많은 사람을 속이고 미혹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도 예수님께서도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하셨지, 회개하라 천국이 너희 것이라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세례에 대한 세례 요한의 말에서 확증할 수 있습니다. 세례 요한이 사람들에게 물로 세례를 준 목적이 무엇입니까? 11절에 보시면, 나는 너희로 회개하기 위해 물로 세례를 베푼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세례 요한이 물로 세례를 베푸는 것은 그들에게 회개를 가르치고 또 실제로 회개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들이 자기 뒤에 곧 주님이 오시는데도 죄를 회개하지 않으니, 세례를 통해서 곧 죄를 씻는 의식을 통해서, 죄 사함으로 말미암은 구원이 있음을 알게 해 주고자 한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받으려면 주님께 죄 사함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다시 오실 주님을 맞을 준비 하는 우리도 회개해야 하느냐? 라고 묻는다면, 회개해야 한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고린도후서 7장 10절은,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보낸 서신입니다.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신 후 이제 다시 오실 주님을 만날 준비하는 성도들에게 보내진 편지입니다. 사도 바울은 세상 근심과 주님 안에서 하는 근심의 차이를 이렇게 말씀합니다.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왜 이런 차이가 발생할까요? 성도가 주님 안에서 하는 근심은 누가 그렇게 탄식하고 근심하도록 이끄신다는 것입니까? 바로 성령 하나님께서 신자 안에서 탄식하시고 근심하십니다. 어떨 때요? 죄를 지을 때마다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근심은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룬다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회개는 구원의 완성이 아니라 구원으로 가는 문을 연 것입니다. 아직 완성되지 아니했고, 도착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다시 오실 주님 맞을 준비하는 우리에게 베드로는 후서 3장 9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다시 말씀드리면, 사도 베드로는 주님이 이렇게 2천 년이 넘는 기간 동안 아직 우리에게 오지 않으신 것은 때가 이르기 전에 회개할 기회를 주시기 위함입니다.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회개하시기 바랍니다. 천국이 가까이 왔습니다.
둘째로, 회개한 것으로 끝내지 말고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5-10절).
회개했으면 되었지, 회개의 합당한 열매는 무엇일까요? 왜 세례 요한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에게 이 말씀을 한 것일까요?
이 말씀에 대답하기 전에 먼저 여러분에게 질문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은 회개할 때 구체적으로 아주 세미한 것까지 다 하나님께 자복합니까? 아니면 두리뭉실하게 추상적으로 회개하십니까?
그렇다면, 세례 요한은 회개를 어떻게 가르쳤을까요? 마태복음에는 이 부분이 구체적으로 명시돼 있지 않지만, 같은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누가복음에는 구체적으로 기록돼 있습니다. “독사의 자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이 말씀은 마태복음에는 요한이 세례 베푸는 데 오는 것을 보러 온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에게 한 말씀으로 기록돼 있지만, 누가복음 3장 7절에는 이 말씀을 무리에게 한 것으로 기록돼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말씀을 왜 했느냐? 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요한이 그들이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회개하도록 이끌기 위해서 그렇게 말씀한 것입니다. 죄 사함으로 말미암은 구원이 있음을 알게 해 주려고 선포한 것입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유대인들이 자기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자랑하지만, 그래서 아브라함이 받은 의롭다 함을 받은 것처럼, 자기들도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에 의롭다고, 의인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가르친 사람의 대표가 바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과 같은 유대인의 선생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하나님이 이 돌들로도 능히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리라고 합니다.
요한의 말은 누가 참된 아브라함의 자손이냐? 라고 할 때, 혈통이 아니라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사람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참된 아브라함의 자손은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의 행위는 본받지 않으면서, 아브라함의 신앙은 없으면서, 혈통으로 났다는 이유로 아브라함의 믿음과 행위를 마치 자기들이 그렇게 믿고 행한 것처럼 여기고 살아 온 것입니다.
예수께서도 이 부분에 대해서 그들을 책망하셨습니다. 요한복음 8장 39절,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 아버지는 아브라함이라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이 행한 일들을 할 것이거늘”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아브라함의 자손을 새롭게 정의하셨습니다. 천국 복음을 듣고 회개하고 그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자를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정의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9장 19절에 보시면, 뽕나무 위에 걸터앉아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던 삭개오를 보시고 예수님은 삭개오에게 속히 내려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네 집에 머무르겠다고 하시니 삭개오가 급히 내려와서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이를 지켜본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향해서 수군거렸습니다. 저가 죄인의 집에 있으러 들어갔도다. 하더라.
그런데 삭개오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후 결단합니다. 주여 보십시오.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습니다.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습니다. 예수님은 삭개오의 말씀을 들으시고,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고 하신 후 아브라함의 자손을 새롭게 정의를 내리셨습니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아멘. 그렇습니다. 혈통으로, 신분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났다고 해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는 것이 아니라 회개한 후 거기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자가 아브라함의 자손입니다.
따라서 회개는 구체적이어야 하며, 회개한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세례 요한이 무리에게 독사의 자식들아, 라며, 그들을 향해 외칠 때 누가복음 3장 10절에 보시면, 무리가 물어 이르되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회개는 구체적인 행동이 반드시 뒤따릅니다. 행위가 없는 채 생각 속에서만, 마음속에서만 머문 회개는 회개한 것으로 끝났을 뿐, 회개의 합당한 열매로 나아간 것이 압니다.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 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 세리들도 세례를 받고자 하여 선생이여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이르되 부과된 것 외에는 거두지 말라, 군인들도 물어 이르되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이르되 사람에게서 강탈하지 말며 거짓으로 고발하지 말고 받는 급료를 족한 줄로 알라” 아멘.
이것이 회개입니다. 이것이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말로만, 생각으로만, 마음속으로만 회개한 것으로 끝나지 말라는 것입니다. 당시 부자의 기준은 워낙 가난한 사람이 대부분이어서 옷이 두 벌 있는 자입니다. 먹을 것도 자기 식구들 말고도 다른 사람을 먹일 수 있는 자가 부자의 기준이었습니다. 오늘 우리 부자의 기준으로 볼 때는 그 사람은 극빈자에 속할 것입니다.
따라서 회개는 성령님이 이것은 내가 하나님께 범죄라고 가르쳐 주실 때, 죄를 생각나게 하실 때, 단지 잘못했습니다.가 아니라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데로 가야, 회개가 회개한 것으로 끝나지 않고 회개의 열매를 맺는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된다고 말씀합니까?
본문 10절 말씀입니다.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 아멘. 하나님 나라에는 누가 들어갑니까?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들어가는 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마 21:43절 “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 아멘.
그러므로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고 있습니까? 주님 만날 준비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까? 회개한 것으로 끝나지 말고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으시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으려면 성령과 불로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11-12절).
왜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합니까? 본문 12절 말씀을 보시면, 회개의 합당한 열매 맺는 사람은 알곡 신자가 되겠지만,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람은 쭉정이 신자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버린다고 하셨습니다. 알곡은 천국으로 들여보내시겠지만, 쭉정이는 천국이 아니라 꺼지지 않는 영원한 불에 태워버리신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초림의 주님이 오실 때는 알곡이 될 수 있는 기회가 있지만, 이제 주님 다시 오실 때는 알곡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릴 것입니다.
문제는 내가 생각해 보아도, 나는 알곡인 것 같지 않아 보인다는 것입니다. 알곡보다는 쭉정이가 아니겠냐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생각합니까? 내가 하는 회개가 구체적이지 않고 추상적이기 때문입니다. 회개는 했고, 하나님께 죄지은 것을 자복했지만, 그러한 죄와 단절하려는 내 행위가 동반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례 요한 시대에는 다 같이 가난하니 빈익빈 부익부 시대가 아니니, 요한이 낙타 털옷을 입고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며 지냈더라도 비록 모든 것이 자연에서 나온 것이긴 해도 그렇게 입을 옷이 있고, 먹을 메뚜기와 석청이라도 있지만, 그것도 없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 영양실조에 걸린 사람들, 그렇게 가난과 배고픔으로 고통받고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떻습니까? 빈익빈 부익부 시대가 뚜렷합니다. 내가 다른 사람보다 가지지 못한 것이, 너무나 분명히 차이가 납니다. 내게 없는 것이, 내가 누리지 못하는 것이, 다른 사람은 있어도 너무 많고, 누려도 너무 풍족하게 누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달 번 돈을 약값에, 병원비에, 아이들 학원비, 대출금 갚는데 써버리면 한 달 생활비도 모자란대, 누구는 자녀에게 용돈을 1억씩이나 주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부모 잘 만나서 입시 특혜받고, 명품 가방을 걸치고 다니니 이건 세상이 너무 불공평해 보이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한 달 내내 뼈 빠지게 고생하고 일해서 겨우 입에 풀칠하는데, 어떤 사람은 구의원, 시의원이 돼서 자기 직장 가지고 있으면서 세비 꼬박꼬박 받고 해외여행 다니는 데 그런 이야기 들으면, 피가 거꾸로 솟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 소식을 듣고 내 일처럼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전문성이 있어서 장관 자리에 앉는 것이 아니라 권력을 가진 사람에게 잘 보여서 권력을 나눠 가지기 위해서 그 자리에 앉아있다면, 내 일처럼 좋아할 수 있을까요? 이런 마음을 가진 우리가 과연 알곡 신자가 될 수 있을까요? 이런 마음을 품은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 죄를 지었음을 고백한 후 또다시 그런 장면을 보면, 똑같은 마음을 품고 죄를 짓지 않을까요?
이것은 비단 이런 죄만 해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 때문에 세례 요한은 그 당시 백성에게 자기는 회개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베풀지만, 자기 뒤에 오시는 분은, 그분의 신을 드는 것조차도 감당못할 정도로 능력에 있어서 부족하지만, 그는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풀 것이라고 하십니다.
따라서 세례를 받았다고 해서 죄가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듯이, 죄을 짓고자 하는 본성이 남아 있듯이, 회개했다고 해서 완전히 죄를 안 짓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래서 회개한 것으로 끝내지 말고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려면, 이렇게 비비 꼬인 마음, 좁은 마음, 교만한 마음, 자기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투덜대며, 남이 잘되는 꼴을 보면 배가 아픈 우리 마음을, 우리 전인격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성령과 불로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를 알곡 신자가 되는 데 필수입니다. 알곡은 천국 곡간에 들인다고 한 것처럼, 천국에 들어가는 데 성령과 불로 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성령과 불로 세례를 받는다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성령 받지 아니하면 그리고 물세례가 죄를 씻는 의식이라면, 불세례는 나의 옛사람이 죽고 새 사람으로 거듭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로 이러한 일을 예수께서 보내주시는 성령으로 하시게 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쭉정이라고 여겼던 자도 예수님을 믿고 그가 주시는 성령을 받으면, 이렇게 알곡 신자로 변화될 수 있음을 말씀한 것입니다. 따라서 거룩하신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나를 변화시켜 가시는 것입니다. 마치 오순절 날 제자들이 성령 충만을 받고 그들이 다른 사람으로 변화된 것처럼, 변화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성령과 불로라는 말씀은 성령께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불세례라고 해서 방언을 받거나, 예언하거나 병을 고치는 것을 두고서 불세례라고 하지 않습니다. 방언하고 예언해도, 병을 고치는 신유의 은사가 있어도 변화되지 않은 사람도 있습니다.
따라서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으려면 성령과 불로 세례를 받아야 할 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대림절 네 번째 주일입니다. 우리는 성탄의 주님을 기다리면서 또한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무런 준비 없이 맞으러 나가면 미련한 다섯 처녀처럼 됩니다. 주님 만날 준비합시다. 날마다 회개하십니다. 또 회개한 것으로 끝나지 말고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읍시다. 성령께서 우리를 알곡 신자가 되도록 불로 연단 하며 단근질하실 것입니다. 기도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