땀과 열정의 삼십 대 이야기
남 도 국
결혼하고 자식을 낳고 아내와 함께 힘을 합하여 가정을 이루어 가는 새로운 환경에 접어들어, 세상 물정을 모르고 목표도 없이 인생을 살아가든 나에게 아내가 힘을 합쳐 험한 세상을 헤쳐갈 길, 예수님께로 나가자고 제의해 왔다. 30대 초, 내 직장 선배가 인도하는 군산 개복동 교회에 나가 등록하고 잘 섬기며 따르고 자녀를 낳아 키우며 열심히 살아왔다.
아침 4시에 일어나 월명산을 오른다. 비가 와도 눈이 와도 땅이 얼어붙어도 30대 초인 나에겐 겁날 것 없다. 눈 위에 첫 발자국을 남겨 놓으며 내 뒤를 따라 올라오는 열심 등산 지기들에게 희망을 주는 일이다. 몸속은 더워서 땀이 흘러도 몸 밖은 얼음과 고드름으로 달라붙는 날 아침
집에 돌아와 따뜻한 물로 샤워한다. 시원하게 갈아입고 간단한 아침, 찐 달걀 하나, 우유 한잔, 사과 한 개면 아침 식사다. 아침 6시 반 아직 어두운 미끄러운 눈 위를 차를 몰고 직장으로 달려가는 마음은 그런대로 유쾌하고 자부심이 짠해 온다.
맨 먼저 사무실에 도착하여 커피에 포드에 물을 올려놓고 창문을 열고 환기를 시킨다. 10분쯤 후 장병들이 굿모닝 인사를 던지며 자리에 와 앉는다. 커피 향 모락모락 실내를 진동한다. 세상에 그 누가 이런 착하고 성실한 직원을 미워하고 싫어하랴? 직장의 모든 동료와 선임자의 사랑을 가득 받아 즐거운 일과를 보낸다. 오후 4시 퇴근하여 두 번째 직 한국 해외개발공사 일을 시작한다. 직원 두 명을 두었지만, 정식 서류 번역작업은 미국대사관에 등록된 내가 직접 해야 한다. 밤 열한 시 전에 잠자리에 들어가 본 적이 없었다.
직장은 안전하고 완고하여,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즐겁고 편안하게 일을 잘 마치고 인증받는다. 금요일과 토요일은 휴가를 내어 제2의 직, 한국 해외개발공사 일하기 위하여 국제결혼 한 여인과 함께 미국대사관으로 비행기로 가 일보고, 한국 외무부, 서울시청, 중구구청, 치안본부, 한국 해외개발공사 본부 등에 가서 일하고 토요일에 돌아온다. 워낙 똑똑하게 일하니 군산시에 거주하는 미군 위안부 아가씨들 사이에 소문이 자자하여 한해 안에 국제결혼 수속, 등록 신고, 여권 비자 업무를 맡기려 나를 찾아온다. 소문도 좋고 수입도 짭짤하여 능력 있는 젊은이로 군산 사회에 널리 알려져 갔다.
직장에서도 미제 물건을 몰래 훔쳐 나오다 발각되거나, 직장 동료들 혹은 미군과
싸우거나, 이런저런 문제를 일으켜 직장에서 경고, 정직, 해고 통지받고 어려움을 당하는 직원들이 속출하였다. 탄원서를 합리적으로 잘 써서 제출하면 구원받아 돌아오는 동료가 많고 인가가 높아지니, 높은 관리직인 나에게 노사가 합의하여 노동조합 수석부 지부장으로 추대하여 8년간 노조의 심한 갈등을 해결하는 일에 큰 몫을 하며 낮고 힘든 직원을 돕는 선한 일꾼의 길을 걸어온다.
아내가 운영하는 시청 뒤 영화동에 있는 미도파 미장원도 손님이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밀려든다. 지역민뿐 아니라 군산을 방문한 외지인들도 소문을 듣고 찾아온다. 끼니를 굶고 아기도 키우며 열심히 지칠 줄도 모르고 열심히 일만 해 간다. 저녁에 일 끝나고 돈궤를 열어보면 차곡차곡 쌓인 때 묻은 돈들이 우리를 즐겁게 하고 희망을 넣어 준다. 고리대금업, 마약 판매, 달러 교환 등 손만 대면 돈들이 쏟아져 내리는 줄 알지만 나와 아내는 그런 불순한 짓은 하지 않기로 약속하며 선한 하나님 말씀만 배우고 실천하며 착하게 살아왔다.
1962년부터 영화동에서 부인을 만나 자리를 잡고 1977년 7월까지 15년 동안 네 딸을 낳고 키우며 애지중지 살아왔지만, 그곳은 미군 바나 카바레 등이 즐비하여 자녀들 교육하기에 안 좋은 곳이란 결론을 내리고, 몇 년만 더 참고 고생해서 좀 더 돈을 모으자는 아내의 제의를 설득하여, 미장원과 그동안 장만한 이층집, 해외개발공사 사무실과 수속 중의 모든 일과 서류들을 처리하고 대체로 조용한 삼학동 274번지로 이사하여 이층은 월세 놓고 편안한 꿈의 생활을 시작한 4개월 만인 1977년 11월 하나님의 도움으로 드디어 첫아들을 득남하여 많은 사람의 축복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