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고, 쓰고
계시록 10: 10
10. 내가 천사의 손에서 작은 책을 갖다 먹어버리니 내 입에는 꿀 같이 다나 먹은 후에 내 배에서는 쓰게 되더라 겔3:3
요절 : 내가 천사의 손에서 작은 책을 갖다 먹어 버리니 내 입에는 꿀같이 다나 먹은 후에 내 배에서는 쓰게 되더라(계10: 10)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계1:3)"
AD95년경 사도 요한은 기독교 박해로 인하여 밧모섬으로 유배되었습니다. 이때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가 그에게 임하였고, 그는 본대로, 들은 대로 기록하여 전해야 하는 중차대한 사명을 받았습니다. 본문 말씀은 사도 요한이 밧모섬에서 받은 많은 계시 가운데 하나입니다.
요한에게 하늘에서 "네가 가서 바다와 땅을 밟고 섰는 천사의 손에 펴 놓인 책을 가지라(8절)"는 큰 소리가 들렸습니다.
요한은 천사에게 가서 작은 책을 달라 했고, 천사는 "갖다 먹어 버리라 네 배에는 쓰나 네 입에는 꿀 같이 달리라(9절)"고 합니다.
요한이 천사의 손에서 작은 책을 갖다 먹으니, 입에서는 꿀같이 다나 배에서는 쓰게 됩니다.
'바다와 땅을 밟고 있는 천사“란 하나님께서 온 우주를 지배하심을 의미하고,
'작은 책을 갖다 먹어 버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은 단순히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소화되어야 함을 교훈 하심입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흔히 성경을 가지고 있거나 대표적인 성구들을 암송하는 것 정도로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것으로 만든 줄 압니다.
하지만 아닙니다. 착각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마음에 새겨야 함은 물론(신6:6), 새겨진 말씀이 실천되어질 때 비로소 하나님의 말씀을 소유했다고 말 할 수 있습니다.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약2:26)"
'입에는 꿀같이 달고, 배에는 쓰다' 라는 말씀에 대해 성서학자들간에 여러 해석들이 있습니다.
그 중 두 해석은 '요한이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받을 때는 기쁨으로 받았으나 대환난과 최후심판등의 계시내용 때문에 근심으로 고통스러웠다'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쉬우나 행하는 것은 어렵다' 라는 견해입니다.
모두 타당성이 있습니다만, 분명한 것은 복음은 달고 쓰고, 쓰고 달다는 것입니다.
첫째 : 입에는 ‘달고’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6)" '복음'은 '복된 소리', 영어로는 'good news' 곧 기쁜 소식이며, 헬라어로는 'euangelion', 이 또한 '복된 소식'이요 '기쁜 소식'이라는 말입니다. 복음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 은혜의 소식이기에 받는자들에게 기쁨을 줍니다. 그래서 복음은 답니다. 하나님의 사랑, 속죄, 구원, 영생, 회복, 치료, 평강, 특권, 승리, 약속, 기업, 상급, 보장, 소망...죄인인 인간들 때문에 주님이 이 땅에 오셨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내 죄를 대속해 주셨으며, 죄사함을 받은 나는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로 인침 받았으며, 하나님 자녀의 특권을 가진 나는 사단과의 싸움에 있어 승리가 보장되어 있고, 영생에 이르게 된다는 소식은 죄인이며 유한한 인간에게 있어 가장 좋은 소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밧모섬의 요한에게 주신 7교회의 결론입니다.
* 에베소 교회 :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
* 서머나 교회 :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 버가모 교회 :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흰돌을 줄 것인데 흰돌 위에 새긴 이름은 받는 자 외에는 알 자가 없으리라.
* 두아디라 교회 :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고 새벽 별을 주리라
* 사데 교회 : 흰옷을 입을 것이요 생명책에 기록된 그 이름을 시인하리라.
* 빌라델비아 교회 : 하나님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라.
* 라오디게아 교회 :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해주리라.
향락, 부정한 치부, 꽃잎처럼 떨어질 명예, 불타 버릴 재산... 사람에게는 세상적인 것들이 단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단 것은 참 행복을 주는 진정한 단 것이 아닙니다. 복음의 단 것 만이 인간이 가장 필요로 하고 소원하는 것을 이루게 하고 견고케 하는 참 단것입니다. 복음은 사람이 누려야할 최상의 단것입니다. 인간은 즐거움과 기쁨이 무엇인지 압니다. 허나 썩어질 단 것인가, 영원한 단 것인가의 분별력은 부족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영원한 단 것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황해도 풍천지방에 한석준이라는 집사가 있었답니다. 그는 아주 가난한 농부였기에 매일매일 죽기 살기로 일을 했습니다. 그럼에도 가족들의 배를 제대로 채워 줄 수가 없었지요.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득병하여 자리에 눕게 되었답니다. 하지만 교인들은 물론이려니와 목사님, 전도사님... 아무도 들여다 보지 않더랍니다. 그는 "믿는 사람들도 다 소용없구나, 내가 가난하니까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거야. 그래도 믿는 사람들은 다른 줄 알았는데... 다 필요 없어, 이제 교회도 가지 말자" 라는 생각이 들었고, 실망에 절망까지 되었지요 헌데 왠지 성경이 보고 싶어지더랍니다. 성경을 편 것이 누가복음 16장의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였습니다. 세상에서 호의호식한 부자는 죽어 음부에 떨어졌으나 개들이 헌데를 핥고,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 불리려 하던 거지 나사로는 죽어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다는 말씀에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에게 소망이 생겼고, 새힘이 와졌으며, 병이 치료되는 역사가 일어났답니다. 그는 말씀 안에서 신실히 일을 했고, 소문이나 많은 농사 일거리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결국 그는 해마다 재산이 늘어 부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복음은 영육의 구원이요, 소망이며, 생명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한없이 달고도 단 영원한 기쁨입니다. 세상락은 고난의 씨이나 복음의 락은 즐거움의 즐거움입니다.
둘째 : “배에는 쓰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에 입에서는 달지만 단 말씀을 실천, 준행하며 살고자 함에는 괴롭고, 힘들고, 아프고, 고통이 따릅니다. 허나 진리의 말씀이 온전히 내 것이 되려면 말씀이 내 속에서 쓴 과정을 거쳐야만 합니다. 세상에서 겪는 고통이나 형벌은 그 자체로 끝나는 것이지 즐거움으로 가는 과정의 씀이 아닙니다. 세상의 고통은 당하는 씀이요 복음의 고통은 취해야할 씀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십자가의 삶입니다. 십자가의 삶은 씀입니다. 이 씀은 그리스도인 들이 소화해야만 하는 고통입니다. 완전하고 온전한 단 것을 소유하려면 십자가 삶으로인한 씀의 시간을 거침은 필수 과정입니다. 복음 안에서의 씀은 참 단 것을 견고케 하는 뿌리입니다.
1527년 어느날, 존 칼빈(J, Calvin)이 어느 거리를 지나 가고 있는데 많은 신부들이 모여 몇 명의 신교도들을 불에 태워 죽이고 있었습니다. 헌데 화형 당하는 신도들이 평안하고, 담대하며, 기쁘게 죽음에 임했습니다. 사람을 불에 태워 죽이는 신부들, 죽음 앞에서도 비굴 하지 아니한 신교도들의 당당용기, 이에 큰 충격을 받은 칼빈은 성경을 읽기 시작, 십자가의 수난을 당하신 예수님과 만났습니다.
그는 로마교회를 떠났고, 종교개혁을 일으켰으며, 장로교의 창시자가 되었습니다.
"복음을 실천하는 신앙의 생활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가를 느꼈다"
당시 칼빈의 고백입니다.
기독교인은 쓰더라도 하나님의 시간에 내 시간을 맞추고, 하나님의 방법에 내 방법을 버리며, 하나님의 뜻에 내 뜻을 포기해야 합니다. 씀의 아픔을 통과만하면 내가 생각지 못했던 단 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말씀대로 실천함이 견디기 어렵고, 힘들고, 억제하기 괴로워도 이겨내야 참 복의 대열에서 떨어져 나가지 아니합니다. 복음의 씀에 회의적인 자는 행복한 생을 누릴 수 없습니다. 복음의 소화를 위한 아픔은 아파야 합니다. 아플때는 아파야 하고, 할 것은 아파야 됩니다. 이 아픔이 치료약은 아픔입니다. 복음 때문에 아프십시오. 쓰디쓴 고통을 맛보십시오 그리스도인의 가야할 길입니다. 복음의 실천에서 와진 씀은 이유와 목적이 확실하고 분명합니다. 세상인의 씀은 해답이 없는 끝없는 고통이나 그리스도인의 씀은 해답이 나와 있는 아픔입니다. 영적생활로 인한 씀은 값진 아픔이요 귀한 축복입니다.
'바보가 아니라면' 그리스도인으로서 씀의 과정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통과해야만 합니다. 이 씀의 용광로에서 단련되지 아니하면 입의 단 것이 아무런 의미도 주지 못합니다. 복음으로 인한 씀의 고통은 새로운 인생 건설의 기초요, 참진리를 알게 하는 고초입니다. 진리 안에서 살고자 함에 와지는 아픔에는 동정은 금물입니다. 잔인하리 만큼 냉혹해야 합니다. 결코 죽지 않습니다. 망하지 않습니다. 나의 아름답고 위대한 삶을 위하여 신앙인으로서의 쓴 고초는 받아들여야 합니다. 기독교는 십자가의 삶입니다. 십자가의 아픔은 부활의 환희를 가져옵니다. 십자가의 씀은 새로운 창조를 일으킴입니다. 십자가를 지는 아픔은 하나님께서 이미 알고 계시는 씀이요 이를 견딤은 하나님의 마음을 감동케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쓰디쓴 고통을 감당하는 자에게 사랑과 은혜, 능력으로 함께 하십니다.
2세기경, 소아시아에 '포뤼카르포스'라는 유명한 주교가 있었습니다.
어느날 그의 제자 한 사람이 그리스도인들이 박해 때문에 신앙을 잃는 것을 보고 비관, 떡갈 나무에 기대어 울고 있었습니다. 이를 본 포뒤카드포스의 말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지금 자네가 기대고 있는 떡갈 나무처럼 성장하는데 오랜 세월이 필요하네. 처음에는 주위의 잡초와 가시에 시달리고, 그것을 참고 조금 자라면, 폭풍우에 얻어 맞고, 또 얻어맞고... 시련에 시련을 거쳐서 비로소 이렇듯 큰 나무가 된 것일세 그러므로 이 고난을 참고 견뎌야 하네"
복음 = 달고 쓰고, 쓰고 달고 그리스도인의 삶=달고 쓰고, 쓰고 달고. 참 그리스도인은 복음의 달고 씀의 양면성을 바로 받아 들여, 성령 안에서 자기 건설에 승리하는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