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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여론조사 통계를 보니 우리나라 국민의 60%가 ‘이 나라는 불공정하다’라고 생각한다는 설문조사 결과가 나왔다고 합니다. 물론 지금 이 사회는 과거에 비하면 정말 많이 공정해졌습니다. 과거에는 관공서에 가서 증명서를 신청할 때 한참을 줄서서 기다리는데 어떤 사람이 와서 지폐 한 장을 본인의 신청서위에 올려 내밀면서 “수고많으십니다” 한 마디에 서류 순서가 바뀌었습니다. 철도역이나 공항에 가서도 줄서서 기다리는 것보다 지폐 한 장 올려서 직원에게 내밀면 순서가 바뀌었습니다. 초중고등학교 각급 학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학부모가 학교 상담을 하는데 돈봉투를 들고가서 내밀면 학생에 대한 처우가 달라졌습니다. 그렇게 촌지를 내미는 것이 상식이고 일반적인 시대가 있었습니다. 어떤 일이든 뇌물을 찔러넣어야 대우가 달라지는 것이 기본인 사회였던 적이 있었습니다. 차를 몰고 가다가 교통단속에 걸리면 단속 경찰에게 오천원짜리 지폐, 혹은 만원짜리 지폐 한 장 내밀면 과태료 딱지를 받지 않을 수 있었던 때도 있었습니다. 우리나라가 불과 20년전까지만 하더라고 그런 사회였습니다. 이렇게 사회가 불합리하고 부조리가 난무하고 비리와 불법이 기본적인 사회였어도 사람들은 큰 항의도 없이 그런가보다 하며 살았던 나라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보는 본문의 아모스가 사역하던 시대가 이스라엘에게 있어 그런 사회였습니다. 이 당시의 통치자는 여로보암왕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북 이스라엘의 왕이 여로보암이었는데 정확히 말하며 북 이스라엘의 13대왕 여로보암 2세입니다. 북 이스라엘은 1대왕 여로보암이 있었고 오늘 본문에 나오는 여로보암 즉 여로보암2세가 있었습니다. 이 여로보암2세는 주전 793년부터 주전 753년까지 41년동안 북 이스라엘을 다스린 왕입니다. 여로보암 2세는 수 많은 정복전쟁을 치뤘고 이 전쟁을 통해 다윗 왕 이래로 가장 큰 영토를 차지한 왕으로 일컬어지는 왕입니다. 그는 정치적 안정과 경제적으로 부강한 나라를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삶은 전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인생이 아니었습니다. 열왕기하 14장 23절과 24절에 여로보암 2세에 대한 평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열왕기하 14장 23,24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유다의 왕 요아스의 아들 아마샤 제십오년에 이스라엘의 왕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이 사마리아에서 왕이 되어 사십일 년간 다스렸으며 /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이스라엘에게 범죄하게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모든 죄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더라”
우리는 아모스 앞부분에서 이 당시 이스라엘의 타락이 얼마나 극심했는 지 살펴보았고 특히 종교적인 패역이 얼마나 컸었는 지를 보았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이런 종교적 패역과 사회적 타락을 통해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것을 아모스 선지자가 외치고 있습니다. 아모스는 여로보암왕고 이스라엘백성들이 회개하지 않으면 왕이 죽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로잡혀 갈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오늘 살펴보는 아모스 7장 10절이하의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7장 이전의 앞부분에서도 그러했지만 여전히 아모스는 이스라엘땅에서 환영받지 못하고 있으며 예언하는 사역에 방해받고 있습니다. 아모스는 북쪽 이스라엘의 제사장 아마샤와 북쪽 이스라엘왕국의 왕 여로보암으로부터 위협을 받으며 하나님의 예언하는 일을 금지받는 상황입니다. 이런 힘든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명자 아모스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감당합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의 쓰임을 받은 하나님의 사명자로써 살아갈 때 어떤 마음가짐으로 살아가야 할지 아모스의 상황을 보며 발견하고 우리도 정말 하나님의 쓰시는 귀한 하나님의 사역자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택함받은 사명자는 생계를 걱정하지 않습니다. 생계를 내려놓습니다.
아모스 7장 12절입니다.
“아마샤가 또 아모스에게 이르되 선견자야 너는 유다 땅으로 도망하여 가서 거기에서나 떡을 먹으며 거기에서나 예언하고”
북쪽 이스라엘에 와서 하나님의 뜻을 전하며 예언을 선포하던 아모스가 곤경에 빠지게 됩니다. 일단 선지자 아모스는 사람들의 모함을 받았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북 이스라엘의 제사장인 아마샤가 아모스를 왕권에 대항하는 반역자라고 고소합니다. 오늘 본문 아모스 7장 10절을 보십시오.
아모스 7장 10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때에 벧엘의 제사장 아마샤가 이스라엘의 왕 여로보암에게 보내어 이르되 이스라엘 족속 중에 아모스가 왕을 모반하나니 그 모든 말을 이 땅이 견딜 수 없나이다”
당시 벧엘에서 제사장의 일을 담당하던 아마샤가 선지자 아모스를 여로보암왕을 모반한다는 죄목으로 고소한 것입니다. 여기 ‘모반하나니’라는 단어로 번역된 히브리어의 뜻은 ‘묶다’라는 의미를 가진 단어입니다. 이 단어가 뜻하는 바는 ‘아모스가 무리와 힘을 합쳐서 음모를 꾸미고 있다’라는 뜻으로 아마샤는 아모스를 여로보암 왕에게 반역자라고 고발하는 것입니다. 왜 아마샤가 이렇게 왕에게 사람을 보내어 아모스를 고발하는 것인가? 아모스가 여로보암왕의 죽음과 이스라엘의 멸망을 예언했던 내용에 대해 이것이 이스라엘의 왕권을 비판한 것이라고 주장한 것입니다. 아모스는 하나님께서 전하라고 하신 말씀을 전했을 뿐인데 아마샤가 듣기에 거북한 내용, 여로보암이 듣기에 화가날 내용이 포함된 예언이었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이 듣기 싫은 내용, 자신들을 책망하는 내용이였기 때문에 북 이스라엘의 왕과 제자상은 아모스가 배반하는 행위를 했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반역자라고 매도하는 것입니다. 아모스가 예언은 선포했지만 어떤 군사적인 행동도 안 했고 사람들을 모아 어떤 계획을 준비한 것도 아닌데 제사장 아마샤는 선포된 내용만을 가지고 아모스가 반역행위를 했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일제강점기에 목회활동하다 순교당했던 주기철목사님은 일본에 대항하는 어떤 독립운동을 하시지 않았습니다. 어떤 무장독립활동에 참여하지도 않았고 독립을 위한 무력투쟁을 선동하지도 않았습니다. 주기철목사님은 순수하게 목회적인 차원에서 순수한 신앙을 강조하며 바른 신앙을 선포했습니다. 강대상에서 복음을 전하시며 일제침략으로 인해 사역에 제약을 당하고 종교탄압을 자행하는 일본정부의 활동에 대해 비판을 했지만 그것은 종교의 자유와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한 말씀선포였습니다. 일제가 한국인들에게도 자신들이 국교화해놓은 신도를 믿도록 하고 신사에 참배하게 했을 때 이것은 종교적 탄압이라는 사실만 외쳤습니다. 그런데 일본제국주의 정부는 이것이 자신들에 대한 반역, 자신들에 대한 항거라고 생각하며 엄청난 고문과 협박을 자행했고 주기철목사님께서는 결국 순교의 제물로 드려지게 되었습니다.
오늘 아마샤가 아모스를 보면서 반역자라고 주장하는 것도 마치 일본이 주기철목사님의 사역이 반역과 같은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과 비슷한 모습인 것을 보게 됩니다. 아모스가 실제로 반란을 계획하거나 진행시킨 것도 아니어서 고소할 사안이 아니었지만 아모스의 예언 내용만 가지고도 왕권에 대한 도전, 종교적인 위협으로 느껴 결국 반역죄로 고소하게 된 것입니다. 제사장 아마샤는 북쪽 이스라엘에서 우상숭배를 통해 온갖 재물을 획득하고 각종 권력을 통해 왕과 결탁하여 자신의 재력과 명에를 키워나가던 인물이었던 것입니다. 그는 종교인이었지만 큰 권력과 큰 재력을 가지고 온갖 부귀영화를 누리며 살았습니다.
그러니 오늘 본문에서 권면이랍시고 이런 말을 아모스에게 하지 않습니까?
아모스 7장 12절 말씀입니다.
“아마샤가 또 아모스에게 이르되 선견자야 너는 유다 땅으로 도망하여 가서 거기에서나 떡을 먹으며 거기에서나 예언하고”
이 말의 뜻이 무엇입니까? 일단 아마샤는 아모스에 대해 ‘선견자야’라고 부릅니다. ‘선견자’라고 번역된 단어 히브리어 ‘호제’는 ‘선지자’와 똑같은 의미의 단어입니다. 먼저 아는 것이나 먼저 보는 것이나 똑같은 의미입니다. 미래의 일을 먼저 깨달은 사람은 미래의 일을 눈앞에 보는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호제’라는 단어는 히브리어 ‘나비’ 즉 랍비 선생이라는 단어의 구약식 표현입니다. 시대에 따라 ‘선견자’ ‘선지자’ ‘랍비’ 등으로 불려져 왔던 정말 영적인 식견을 가진 사람들에 대한 호칭입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서 사실 아모스에 대해 ‘선견자야’라고 부를 때 뉘앙스만 따져보자면 아마샤가 아모스를 비아냥거리며 조롱하고 있습니다. 아마샤는 아모스의 권위를 손상시키고 아모스의 활동에 대해 비난할 목적으로 이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조롱에도 아마샤가 아모스를 ‘선견자’ ‘선지자’라고 불렸다는 사실에 집중해보십시오. 어쩌면 아모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환상을 보는 ‘선견자’라는 호칭이 정확한 표현일 수 있습니다. 비록 아마샤가 놀리기 위해 그 단어를 썼다고 할지라도 어쩌면 영광의 호칭, 기쁨의 호칭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요즘에도 종종 세상 사람들이 믿는 자들을 욕보일 목적으로 쓰는 단어들이지만 이것이 우리의 존재를 표현하는 아름다운 단어로 느낄 수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종종 불신자들이 우리에게 ‘예수쟁이’ 혹은 ‘교회에 미친 놈’과 같은 말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저와 여러분은 이 말을 들으면서 화부터 내십니까? 저는 오히려 그 말을 들으면 정말 영광스럽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예수쟁이’로 봐주는 구나, 사람들이 나를 ‘신앙에 대해 미쳐 살아가는’ 존재로 봐주는구나.. 하나님만을 위해 헌신한 사람으로 봐주는구나... 저와 여러분이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조롱하여도 그 단어가 하나님에게 온 마음과 온 몸을 바친 신앙인으로 상징되는 말이라면 기꺼이 감사함으로 받을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아마샤의 경고를 보십시오. 그 뒤에 나오는 아마샤의 경고를 보십시오. 이 말을 통해 우리는 아마샤의 생각수준, 아마샤의 사역에 대한 가치관을 엿볼 수 있습니다.
아모스 7장 12절 후반부에 “너는 유다 땅으로 도망하여 가서 거기에서나 떡을 먹으며 거기에서나 예언하고”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마샤는 자신이 제사장으로 일할 때 얻게 되는 떡을 위해 자신의 사역을 하고 있음을 느끼게 만들어주지 않습니까? 그래서 아마샤는 아모스가 예언하려면 남쪽에 가서 하면 그 곳에서 사역을 통해 먹을 것을 얻고 생활을 편안히 할 수 있을텐데 ‘왜 여기 와서 이러느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속에 우리는 아모스에 대해 매우 모욕적인 의도로 비난하고 있는 것을 우리는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표현을 보면 아마샤는 아모스도 자신의 생각을 기준으로 생계를 위해 선지자 일을 하는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아마샤는 자신이 먹고 살기 위해 제사장일을 하고 있는 사실을 이 말을 통해 다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 말을 통해 아마샤는 아모스가 생계를 위해 북 이스라엘에 와서 선지자로서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매도하고 있습니다. 사실 그 시대 수 많은 종교인들이 그렇게 살았을 것입니다. 아마샤와 같은 북 이스라엘의 제사장들, 그리고 북 이스라엘의 수많은 선지자라고 불렸던 사람들은 모두 어쩌면 생계를 위해 이 일을 했을런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아모스는 절대 자신의 생계를 생각하면 이런 사역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마샤의 말처럼 ‘내 말이 잘 먹히는 곳, 내가 가면 인정받을 곳을 찾아가서 편안하게 듣기 좋은 말만 하면 잘 먹고 잘 살 수 있을텐데’라는 생각이었으면 아모스는 절대 북 이스라엘을 찾아와서 선지자로 사역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단지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북 이스라엘을 찾아왔고 그 곳에서 선지자로서의 삶을 살았습니다.
마태복음 6장 33절입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지난 주 노회에 갔더니 어느 목사님께서 자기가 노회와 총회에 한 가지 청원을 올릴텐데 그 청원서류에 제 이름과 싸인을 기록하여 동의해달라고 했습니다. 그 서류의 이름이 일명 “목회자 최저 생계비 지원을 위한 대책 마련 청원”이었습니다. 저는 그 서류에 이름을 적고 싸인하는 것을 거절했습니다. 노회자리에서 목사와 장로 회원중 25명 이상의 싸인을 받으면 그 안건을 토론할 수 있도록 안건이 채택됩니다. 저는 끝까지 동의싸인을 하지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25명이상의 싸인을 받아서 그 안건이 올라가서 통과가 되어 총회에 최저 생계비지원대책을 마련해달라는 안건이 총회로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안건이 통과되었지만 아직 올 가을에 총회에서 이 안건이 다뤄질 수 있는 지는 미지수입니다. 그런데, 저는 과연 이 안건이 저같은 미자립교회 목회자들에게 영적으로나 육적으로나 도움이 될 만한 내용인 지 의구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독일교회도 목회자의 생계를 나라에서 책임지면서 독일교회는 문을 닫았습니다. 영국교회도 교단에서 목회자의 생계를 책임지게 되면서 교회들의 활동이 위축되고 수 많은 교회들이 문을 닫았습니다. 사실 우리는 대부분 목회자가 ‘재정적인 안정감이 있으면 목회하기 좋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최소한 저에게 있어서는 이런 생각이 있습니다. “과연 재정적인 안정감이 나에게 찾아오면 내가 더 하나님을 간절히 찾을 수 있을까?” “재정이나 인간관계나 여러 힘든 사역이나 어려운 상황이 없어지면 사역을 더 잘하게 될까?”라는 의구심이 있습니다. 오히려 “생활이 좀 더 편해지고 좀 더 안정적인 재정상황 되어질 때 하나님을 찾는 간절함이 줄어들거나 아예 사라지지나 않을까?”라는 생각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아모스가 과연 생계를 위해 사역하려고 생각했다면 굳이 북 이스라엘을 찾아왔을까요? 오늘 본문의 아마샤 제사장은 명예과 재력, 권력을 위해 북 이스라엘의 제사장이 되었기에 아마샤가 아모스에 대해 이런 평가를 하는 지 모르겠지만 최소한 아모스는 자신이 북 이스라엘을 찾아와 선지자로서의 삶을 사는 단 하나의 이유는 하나님의 뜻밖에 없었습니다. 아모스는 자신의 생계와 상관없이, 자신이 가질 명예와 권력은 전혀 생각지도 않고 어떤 상황에 상관없이 하나님의 명령, 하나님의 사명만을 쫓아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신 예언을 선포하기 위해 북 이스라엘을 찾아온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책임지는 것임을 저와 여러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빌립보서 4장 19절입니다.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저와 여러분에게 이런 믿음이 있으시기를 소망합니다. 내가 나의 필요를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지 않고 내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나의 삶을 드리면 나의 모든 필요와 나의 모든 삶을 하나님께서 책임져주십니다.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일만 한다면 하나님께서 나의 생계를 책임져주십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뭘 하기를 원하시는 지 나의 삶속에서 생각하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대로 살아가기만 한다면 하나님께서 인도하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의 아모스도 세상의 어떤 다른 것을 신경쓰지 않고 오로지 하나님의 부르심, 하나님의 사명만을 따라 맡기신 일을 묵묵히 해나갔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 그를 위대한 선지자,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사명자로 쓰셨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정말 세상의 필요는 내려놓고 하나님만 따라가는 하나님의 귀한 종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택함받은 사명자는 둘째로 세상의 권력에 비굴하게 무릎꿇는 사람이 아닙니다.
아모스 7장 13절입니다.
“다시는 벧엘에서 예언하지 말라 이는 왕의 성소요 나라의 궁궐임이니라”
이 본문에서 제사장 아마샤의 표현을 보면 아모스가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이 곳 ‘벧엘’이 ‘왕의 성소’ ‘나라의 궁궐’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북쪽 이스라엘은 지금 왕인 여로보암 2세의 권력, 여로보암 2세의 통치영역 안에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말속에는 이 나라는 왕이 주인이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또한 왕의 신임을 받는 자신만이 이 나라에서 영적인 권위를 가졌다고 사실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제사장 아마샤가 “왕의 성소가 있는 왕의 영역에서는 설교하지 말라”며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부여한 권위를 세상의 권위로 막으려고 합니다. 이런 일이 있을 때 정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명자는 답답할 것입니다. 분명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외치고 하나님의 진노를 가르치라고 하는데 세상에서 권력자들이 외치지 말라고 할 때 정말 답답합니다. 요즘은 길거리에서 커피전도를 하기 위해 테이블 설치해놓은 것, 혹은 찬양전도하기 위해 스피커를 설치해서 기타치고 찬양부르며 전도지를 나눠주는 것 등을 못하게 합니다. 찬양전도에 대해서는 경찰이나 공무원이 찾아와서 시끄럽다는 민원이 들어와서 할 수 없다고 하고 커피전도에 대해서는 커피를 무료로 나눠주는 것이 주변의 커피판매점 영업을 방해하는 것이라며 못하게 합니다. 아무튼 이런 저런 이유로 노방전도의 문이 막혀 있습니다. 저는 저희 애들 학교에 태워주고 학교에서 태워오고 하면서 향남에 나갈 때마다 목사님인지 집사님인지 알 수 없지만 어느 분이 빨간 색 큰 글씨로 ‘예수천당 불신지옥’이라고 승용차에 붙여놓고 승용차 지붕에는 스피커를 설치해서 엄청나게 큰 소리로 예수믿으라고 외치며 다니는 것을 종종 봅니다. 교회다니라는 내용과 예수님 믿고 천국가자는 내용을 큰 소리로 외치며 다닙니다. 저는 저런 사역으로 전도될까? 과연 이게 무슨 효과가 있을까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하지만 저는 한 편으로는 오죽 답답하면 저렇게 하시겠나? 본인이 직접 누군가를 찾아가서 복음을 제시하기 힘드니 그냥 듣던 안 듣던 저렇게 외치는 사역이라도 해야되겠다는 생각으로 저렇게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이런 방법도 하지 마라 저런 방법도 하지 마라고 사람들이 말하니 그냥 막무가내로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을 방법 그냥 쌩 지나가면서 “시선집중시키는 전도라도 해봐야겠다”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라는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사람들이 복음을 전하는 일에 대해 이래라 저래라 할 때 우리는 분명히 결단해야 합니다. 세상의 눈치, 사람들의 이목을 신경쓸 것이 아니라 우리는 하나님의 눈치를 보며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는 일은 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아모스는 아마샤의 협박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외치라고 하신 말씀을 외치며 선지자 역할을 합니다.
디모데후서 4장 2절입니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하나님께서 사명을 주시며 외치라고 하신 말씀을 그대로 외치는 것뿐이었습니다. 결국 어떤 상황이든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한다면 결국은 하나님께서 책임지실 것이라는 확신이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는 세상의 권력에 따라 우리의 존재가 변화되는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는 세상의 권력의 눈치를 보며 우리의 삶을 결정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아모스는 사람들의 눈치를 보며 자신의 사명대로 살았다가 살지 않았다가 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아모스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이 곳에 보내셨으니 이 곳의 왕이 누구든 이 곳의 제사장이 누구든 자신이 믿고 따르는 하나님, 절대권력자이시며 절대주권을 가지시고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며 담대하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저와 여러분도 우리의 삶을 살아갈 때 주변 사람의 힘, 권력, 재력, 그가 가진 인사권 등등을 따져서 그들에게 굽신거리며 살지 않고 나의 부르심이 무엇인지, 내가 해야할 일이 어떤 것인지를 분명히 발견하여 부르심대로 담대히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택함받은 사명자는 마지막 셋째로 하나님께서 시키신 일만 하는 사람입니다.
아모스 7장 14절입니다.
“아모스가 아마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선지자가 아니며 선지자의 아들도 아니라 나는 목자요 뽕나무를 재배하는 자로서”
아마샤의 협박과 여로보암 왕에 대한 두려움이 앞에 놓여 있는 아모스이지만 오늘 본문에서 아모스는 자신이 왜 이 일을 하는 지에 대해 분명히 고백하고 있습니다. “나는 선지자가 아니며 선지자의 아들도 아니라”라고 고백합니다. 아모스는 훈련된 선지자가 아닙니다. 지식적 준비가 된 선지자가 아닙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선지자가 되기로 이미 정해진 선지자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특별한 부르심으로 어느 순간 선지자가 된 사람입니다. 그래서 아모스는 이 말을 하면서 자신이 아마샤처럼 직업적인 종교인이 아닌 것을 명확히 합니다. 돈벌이를 위해 하나님의 일이라고 불리는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는 돈벌이를 위해 선지자가 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아모스는 오히려 돈벌이를 따진다면 생계에 큰 도움이 될 일을 따진다면 그가 잘 할 수 있는 일이 있음을 분명히 합니다. 그가 전문적으로 일을 해서 돈을 벌려면 목자의 일이나 뽕나무 농사일을 하면 되는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아모스 7장 14절에서 “나는 목자요 뽕나무를 재배하는 자로서”라고 과거 자신이 했던 일을 밝힙니다. 그는 양을 키우는 일, 뽕나무를 키우는 일을 했다면 잘 먹고 잘 살 수 있었을 것입니다. 생계를 위한 직업을 따지면 그냥 양을 키우고 뽕나무로 농사지으면서 살면되었다는 사실을 밝힙니다. 큰 돈을 벌 수 있는 전문적인 기술을 가진 아모스이지만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선지자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아모스 7장 15절입니다.
“양 떼를 따를 때에 여호와께서 나를 데려다가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기를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예언하라 하셨나니”
아모스는 자신의 생각이나 의도와는 상관없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에 의해 선지자가 되었습니다. 아모스는 하나님의 소명에 이끌리어 예언자로서의 삶을 살게 되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남쪽 유다에서 살던 사람이지만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부르셔서 북쪽 이스라엘까지 와서 예언하는 일을 하며 살게 되었습니다. 아모스에게 남쪽으로 돌아가서 직업적인 선지자로 살아갈 것을 요구하며 생계를 위한 삶으로 선지자 직책을 이용하고 있다고 매도하는 아마샤에게 아모스는 여호와의 부르심을 근거로 이야기하며 여호와의 권위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음을 선포합니다. 아모스는 아마샤에게 하나님의 예언을 들을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제대로된 하나님의 부르심의 합당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요구하신 것이 무엇인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앞에 나의 마음을 알려드리고 하나님께서 내 마음을 들으시면서 그 분께서 원하시는 뜻인 무엇인지를 우리가 깨달을 때 그리고 우리가 깨달은 대로 그 분께 우리의 삶을 맡길 때 우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인생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잠언 16장 3절입니다.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네가 경영하는 것이 이루어지리라”
잠언 16장 9절입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정말 내가 하고 싶은대로 살아가지 말고 하나님께서 나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항상 물으면서 하나님의 뜻앞에 우리의 인생을 드릴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잘되는 길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제대로 살아가는 길입니다. 그게 바로 내가 인생에서 평안한 삶을 살아갈 길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은혜속에서 살아가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내 생각대로 살지 않고 사람들의 눈치를 보며 살지 않고 내 속의 마음이나 세상의 흐름, 세상의 유행에 따라 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이 어디 있는 지 항상 물으며 하나님께서 나에게 어떤 일을 하기를 원하시는 지를 분명히 알고 하나님의 눈치를 보며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을 맺을까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확신하기 위해 “하나님! 삶속에서 내가 받아들여야 할 것은 받아들일 수 있는 평안을 주시고 변화시켜야 할 것은 변화시키는 용기를 주십시오. 그리고 이 둘의 차이를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십시오”라고 기도해야할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우리가 하나님의 쓰임을 받기 위해 영적인 훈련과 육적인 훈련을 열심히 받아야 쓰임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진정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부르심,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확신이 중요합니다. 삶속에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항상 민감하고 하나님의 뜻을 찾아가는 인생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부르심을 확신하게 된 때에는 정말 세상의 눈치를 보지 않고 세상의 상황에 휩쓸리지 않고 하나님만 바라보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실 우리가 하나님의 쓰임을 제대로 받지 못한 이유는 사명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 사명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철저하게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루도 하나님께서 나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할 때 우리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깨닫지 못한 사람보다 그 깨달은대로 순종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지 못하는 사람이 되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정말 하나님께서 우리를 쓰시도록 나의 생각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기 위해 부지런히 기도하며 하나님께서 내가 하기를 원하시는 하루하루의 일들을 깨닫게 될 때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나님께 우리의 삶을 맡기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잘 감당하여 하나님께서 쓰시는 귀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