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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에게도 도가 있나이까?
莊子의 南華經
예수 뒤에 바울이, 플라톤 뒤에 아리스토텔레스, 공자 뒤에 맹자, 노자 뒤에 장자가 있다.
인류의 8성현 중에 노자, 장자는 도교(道敎)의 창시자로 꼽힌다.
장자는 '인간은 인간의 작은 지혜에 집착해서 위대한 자연의 도를 거역하지말고 순리로 살 것'을 강조한다. '남화경'은 소요유(逍遙遊), 제물론(齊物論), 양생주(養生主) 등 내편(內篇)과, 병무(騈拇) 등 외편(外篇), 경상초(庚桑楚) 등 잡편(雜篇) 전 33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문장은 대체로 노자의 '도덕경' 보다 더 분명하고 이해하기 쉽다. 33편 가운데 장자가 쓴 것은 내편 7편이고, 외편과 잡편은 후세 사람이 썼다는 것이 통설이다. 최근 제물론(齊物論)은 수학과 과학의 천재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와 비슷하다는 학자도 있다.
장자는 기원 전 290년 춘추전국 시대 송나라 사람이다. 이름은 주(周)다. 일개 말단 아전이었으나, 초나라 위왕(威王)이 그 이름을 듣고 사자를 보내어 재상을 시키려 하자, 코웃음 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렇다. 천금은 큰 이득이다. 재상은 훌륭한 지위다. 그러나 생각해보라. 그대는 제사에 희생되는 소를 보았는가? 수년간 잘 먹이지만 결국 태묘(太廟)에 끌려가지 않을 수 없고, 그 때 가서는 소 같은 큰 짐승보다 살아있는 돼지라도 되었으면 하고 소원해도 쓸데없다. 그대가 나를 초빙함은 이와 같으니 빨리 가라. 일생을 속박되지 않고 벼슬 없이 살련다.'
'소요유(逍遙遊)'의 '대붕도남(大鵬圖南)' 편.
북녘 바다에 곤(鯤)이라는 물고기가 살고 있는데, 그 크기가 몇천 리가 되는지 알 수 없다. 이 물고기가 변해서 붕(鵬)이라는 새가 된다. 그 등 넓이는 몇천 리가 되는지 알 수 없고, 힘차게 날아오르면 날개는 하늘을 덮는 검은 구름 같다. 이 새는 바다에 큰 바람이 이는 계절이 오면 천지(天池)라는 남쪽 바다로 날아간다.
물이 깊지 않으면 배를 띄울 수 없다. 한 잔의 물이 마루에 괴면 작은 풀잎은 배처럼 뜰 수 있다. 그러나 거기에 잔을 올려놓으면 바닥에 닿고 만다. 물은 얕은데 배는 크기 때문이다.
하늘을 나는 것도 이와 같다. 바람이 두껍게 쌓이지 않으면 날개를 띄워 올릴 힘을 얻을 수 없다. 9만 리 높은 하늘에 올라야만 붕의 날개가 바람의 힘을 받을 수 있다. 이렇게 붕은 바람을 타고 날아올라 푸른 하늘을 등지고 자유롭게 남쪽으로 날아가는 것이다.
매미와 비둘기가 붕을 비웃으며 말한다. '우리는 공중으로 날라 갈대밭을 빙빙 돌다가 내릴 줄 안다. 이만하면 날 만큼 나는 것이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9만 리 먼 하늘까지 올라가 남쪽으로 가려 하는가?'
교외로 소풍을 나가면 하루 세 끼만 있으면 충분하지만, 백 리 길을 가려면 하룻밤 곡식을 찧어야 하고, 천 리 길을 가려면 세 달 동안 식량을 모아야 한다. 조그만 날짐승이 대붕의 비상을 어찌 알랴.
작은 지혜는 큰 지혜에 미치지 못하고, 짧은 수명은 긴 수명에 미치지 못한다. 아침에 피었다가 저녂에 지는 조균(朝菌)이라는 버섯은 밤과 새벽을 모르고, 매미는 봄과 가을을 모른다. 둘 다 살아있는 기간이 짧기 때문이다.
'제물론(齊物論)'의 '조삼모사(朝三暮四)' 편.
장자의 '제물론'은 만물을 고르게 하는 논리라는 뜻이다. 모든 것은 상대성을 지닌다. 시시비비를 초월하여 모든 사물을 평등하게 바라보라는 뜻 이다. 유일 절대의 도의 입장에서 현실 세계의 갖가지 현상, 시비 선악, 미추, 정사, 화복, 길흉, 생사등을 명확히 구분하는 상대적 가치 판단이 얼마나 어리석고 무의미한가를 밝히고 있다.
사물은 저것 아닌것이 없고, 또 이것 아닌것도 없다. 이쪽에서 보면 모두가 저것, 저쪽에서 보면 모두가 이것이다. 삶이 있으면 반드시 죽음이 있고, 죽음이 있으면 반드시 삶이 있다. 한쪽에서의 분산은 다른쪽에서의 완성이며, 한쪽에서의 완성은 다른 쪽에서의 파괴이다. 사물은 완성이건 파괴건 다같이 하나이다. 이처럼 세상 일은 모두 상대적이므로, 성인은 그런 방법에 의하지 않고, 그것을 절대적인 자연의 조명에 비추어 본다. 커다란 긍정의 세계에 의존한다.
천지는 하나의 손가락에 불과하다. 내 손가락으로 저 사람의 손가락이 내 손가락이 아니라고 하는 것과, 저 사람 손가락으로 내 손가락이 자기 손가락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무엇이 다른가. 이것이 저 것이고 저것 또한 이것이다, 저것과 이것, 그 대립을 없애버린 경지를 '도추(道樞)'라고 한다.
조련사가 어느 날 원숭이에게 도토리를 주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제부터 아침에는 3개, 저녁에는 4개를 주겠다.' 그러자 원숭이가 화를 내며 길길이 날뛰었다. 그래서 말을 바꾸었다. '미안, 그러면 아침에 4개, 저녁에는 3개를 주지.' 하자 원숭이는 좋아했다. 실제는 아무 차이가 없는데도 노여움과 기쁨이 일어난다. 이것은 마음이 시비에 얽매여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인은 시비의 구별을 세우지 않고, 모든 것을 ‘천균(天鈞)’(자연 평등의 이치)에 맡긴다. 이것을 ‘양행(兩行)’(사물과 내가 서로 어울림)이라 한다.
'양생주(養生主)'의 '포정해우(庖丁解牛)' 편.
유명한 요리사 포정(庖丁)이 위(魏)나라 혜왕(惠王) 앞에서 소 한 마리를 잡았다. 포정이 소를 손으로 잡고, 어깨에 힘을 넣어 발의 위치를 잡으며 무릎으로 소를 누르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고기와 뼈가 깨끗이 발라졌다. 리듬을 탄 칼질 소리는 마치 ‘상림무(桑林舞)’(은나라 탕왕이 즐기던 무곡)나 ‘경수회(經首會)’(요임금이 즐기던 무곡)처럼 들렸다. '참으로 신기하도다!' 혜왕은 자신도 모르게 감탄사를 발했다. 포정은 그 말을 듣고 혜왕을 바라보며 말했다. '황공하오나 이것은 기술이 아닙니다. 기술이 극에 이르면 도가 되는 것입니다. 제가 처음 소를 잡을 때는 눈에 보이는 것이란 모두 소뿐이었으나, 3년이 지나자 소의 모습이 눈에 보이지 않기에 이르렀습니다. 요즘 저는 눈이 아니라 마음으로 소를 대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감각이 멈추고 마음만 자유롭게 움직입니다.
자연의 섭리에 따를 뿐입니다. 소의 몸에 자연스레 나 있는 틈을 따라 칼질을 하므로 커다란 뼈는 물론이고 근육이나 살이 마구 얽힌 부분이라도 하나 흐트러짐 없이 발라낼 수 있습니다.
보통 요리사는 한 달에 한 번 칼을 바꾸고, 솜씨 있는 요리사는 1년에 한 번 칼을 바꿉니다. 칼날은 오래 사용하면 뼈에 부딪쳐 날이 빠지거나 무디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칼은 19년이나 사용하여 벌써 수천 마리 소를 발랐지만 방금 숫돌에 간 것 같지 않습니까?
저는 근육과 뼈가 얽힌 어려운 부분에 이르러, 눈을 한 점에 집중하면, 동작은 자연스럽게 느려지고, 칼이 움직이는지 안 움직이는지 모를 지경에 이릅니다. 이윽고 ‘툭’ 하는 소리와 함께 살점이 흙덩어리처럼 뼈에서 떨어집니다. 이 말을 듣고 혜왕은 감동하여 말했다. '정말 훌륭하구나. 포정은 양생(養生)의 이치를 터득했다.'
'인간세(人間世)'의 '무용(無用)의 용(用)' 편.
목수 석(石)이 제나라를 여행하다가 곡원(曲轅)이라는 곳에 이르러 토지신을 모신 사당 앞에 서 있는 거대한 상수리나무를 보았다. 그 크기는 수천 마리의 소를 가릴 수 있을 만큼 크고, 굵기는 백 아름이나 되며, 그 높이는 산을 내려다볼 정도였다.
배를 만들 수 있을 정도로 큰 가지만 해도 수십 개가 되었다. 그 주위에 구경꾼이 구름처럼 모여 있었으나 목수 석은 본 척도 하지 않고 그 자리를 그냥 지나쳐 버렸다. 그러자 제자가 스승 석에게 물었다. '제가 도끼를 들고 선생님을 따라다닌 이래로 이렇게 훌륭한 나무는 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거들떠보지도 않으시니 어찌 된 일입니까?' 석이 대답했다. '저 나무는 아무 쓸모가 없다. 배를 만들면 그냥 가라앉을 테고, 널을 짜면 금방 썩을 것이고, 그릇을 만들면 곧 망가질 것이고, 문을 만들면 진이 흐를 테고, 기둥을 만들면 좀이 슬 게야. 그러니 저건 재목으로 쓸데가 없어. 아무 소용이 없으니 저렇게 오래 살 수 있는 게야.' 목수가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뒤에 그 상수리나무가 꿈에 나타나 이렇게 말했다. '너는 도대체 나를 어디다 비교해서 쓸모없는 나무라 하느냐? 필시 인간에게 유용한 나무에 비교했을 테지. 하기야 배, 귤, 유자 같은 나무는 열매가 익으면 사람들이 따 먹고, 그러다 보면 가지도 부러질 테지. 큰 가지는 꺾이고, 작은 가지는 찢어질 것이야. 결국 그 나무는 맛있는 열매를 맺을 수 있는 능력 때문에 삶이 괴롭고, 그러니 천명을 다하지 못하고 도중에 죽어 버리지. 스스로 세속의 괴롭힘을 당할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야. 그러나 나는 그렇지 않다. 나는 오늘날까지 오로지 아무 소용이 없는 존재이기를 바라며 살아왔고, 이제 천수를 마감하려는 때에 이르러 마침내 아무 쓸모 없는 나무가 되었다. 너희들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 내게는 정말 소중한 것이니, 만일 내가 쓸모 있는 나무였다면 벌써 베어졌을 것이야. 너와 나는 자연계의 사소한 현상에 지나지 않아. 한 물건이 다른 물건의 가치를 정해서 대체 뭘 하겠다는 건가? 너처럼 쓸모 있는 존재이고 싶어 스스로의 생명을 갉아먹는 자야말로 실제로는 아무 쓸모 없는 인간이야. 그런 쓸모없는 인간이 나처럼 쓸모없는 나무의 진가를 알아볼 리 없지.'
'대종사(大宗師)'의 '좌망(坐忘)' 편.
안회가 공자에게 말했다. '저도 이제 많이 알게 된 것 같습니다. 저는 인의를 잊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잘된 일이구나. 하지만 아직 모자란다.'
며칠이 지난 뒤, 안회는 다시 공자에게 말했다. '제가 더 발전한 것 같습니다. 저는 예악(禮樂)을 잊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잘했다. 하지만 아직도 모자란다.' 며칠 뒤, 안회는 다시 공자에게 말했다. '제가 더욱 발전한 것 같습니다. 좌망하게 되었습니다.' '좌망이 무엇이냐?' 공자는 태도를 바꾸어 다시 물었다. '손발과 몸을 잊고, 모든 감각에서 벗어나 몸도 마음도 텅 비어 ‘도’와 하나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에 공자가 말했다. '도와 하나가 되면 선악의 구별이 없어지고, 도와 함께 변화하면 무한한 자유를 얻게 된다. 너는 정말 훌륭하구나. 나도 네 뒤를 따라야겠다.'
지식의 상대성도 논하고 있다.
'사람이 무엇에 대해서 안다고 하지만, 소위 내가 안다는 것은 참으로 아는 것인가? 사람은 생명에 한도가 있으니, 한도가 없는 것을 한도가 있는 생명으로 쫒아감은 위태로우며, 무엇을 참으로 안다고 생각하는 것은 위태로운 것이다.
사람은 습한 곳에서 자면 요통이 생겨 죽는다. 그러나 미꾸라지는 어떤가? 사람은 나무 위에 살면 불안하고 신경이 고통스럽다. 그러나 원숭이는 어떤가? 사람, 미꾸라지, 원숭이의 거처 중에서 어느 것이 절대적으로 옳은가? 사람은 고기를 먹고, 사슴은 풀을 먹고, 올빼미와 까마귀는 쥐를 먹는다. 어느 것이 절대적으로 옳은 구미를 가졌는가? 사람은 미인을 사모하는데, 물고기는 미인을 보면 물 속 깊이 도망가고, 새는 공중으로 날라가고, 사슴은 도망간다. 어떤 것이 올바른 미의 표준이라고 하겠는가?
나는 꿈에 나비가 되어 이리저리 날라다니니 어디로 보나 나비였다. 나는 내가 나비인 줄로 알고 기뻐했고, 장자인 것을 알지 못했다. 곧 나는 깨어났고, 다시 장자가 되었다. 지금 나는 사람으로써 나비 꿈을 꾸었는지, 나비인데 사람이라고 꿈을 꾸는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사람과 나비 사이엔 반드시 구별이 있다.
도둑이 상자를 열고 꿰짝의 재물을 훔치려는것을 막으려면, 상자를 노끈으로 단단히 묶고 자물쇠를 잠그면 된다. 그러나 강한 도둑은 돈 궤와 상자를 몽땅 어깨에 메고 도망한다. 도둑은 동여맨 노끈이 약해서 끊어질까 염려할 뿐 이다. 그러니 세상의 지식이라는 것은, 강한 도둑이 들고 가기 좋게 한 것 밖에 더 되는가? 도둑에게 편의를 보아준 것이라고 나는 단언한다.
도척(盜跖)의 제자가 '도둑에게도 도가 있습니까?' 하고 물으니, '무엇에나 도가 없을 것인가? 방 안에 감춰둔 물건을 알아맞히는 것은 성이요, 먼저 들어가는 것은 용기요, 뒤에 나오는 것은 의리다. 성공할 것을 예상함은 지요, 장물을 고루 나누는 것은 인 이다. 이 다섯가지를 갖추지 않고 능히 큰 도둑이 된 자는 천하에 없었다. 하였다.
활이나 그물에 대한 지식이 늘면 공중의 새들이 괴롭고, 낚시와 그물에 대한 지식이 늘면 물 속의 고기들이 불안하다. 함정과 덫에 대한 지식이 늘면 들짐승이 괴롭고, 교활과 거짓 말솜씨가 늘면 세상이 어지러워 진다. 임금이 지식을 갈망하면 어떻게 되는가? 그 나라는 혼란에 빠진다.
그래서 노자는 '큰 재주는 오히려 졸(拙)해 보인다' 하였다. 단순하고 덤덤한 것을 제쳐놓고, 보기 좋고 간사한 것을 좋아하면 세상이 혼란에 빠지는 것이다.
욕심이라는 것이 두렵다.
장자는 언젠가 조릉(彫陵)이라는 곳에서, 이상한 까치가 자기 이마를 스칠 정도로 낮게 날아서 밤나무 숲으로 가는 것을 보고, 활로 그 까치를 잡으려고 급히 따라갔다.
그런데 가서보니, 그 까치는 장자가 자기를 잡으려고 하는 줄 모르고 숲속의 버마재비를 잡으려고 정신없이 날라간 것인데, 막상 버마재비는 까치가 자기를 잡으려고 하는 줄 모르고, 나무 그늘에 쉬고있는 매미를 잡으려고 집중하여 자신을 잊고 있었다.
장자는 이를 보고 깜짝 놀랬다. '모든 것은 이와 해 두가지를 서로 부르고 있으니, 욕심이라는 것이 두렵다.' 하고 활을 버리고 달아났다.
그런데 이때 숲의 밤나무를 지키던 사내는, 장자가 밤을 따러 온 도둑으로 오해하여 따라오며 욕을 한다. 집에 돌아온 장자는 자기도 까치를 잡으려는 욕심에 집착하여 밤 지키는 사내가 쫒아오는 걸 몰랐음을 뉘우쳐, 3개월간 뜰에도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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