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트러짐이 없이 주를 섬기라!(고전7:25-35)
갈등
1.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항상 저자가 살았던 시대로 가보아야 합니다. 성경을 기록하던 당시 상황-context를 먼저 알고 본문을 읽을 때 이해가 됩니다. 오늘 본문도 그런 이야기 가운데 하나에요. 사도 바울이 어떤 상황에서 오늘 본문에서 처녀와 과부들이 이렇게 처신하도록 했는지 봅니다. 바울은 먼저 처녀의 결혼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25절, 내가 주께 받은 계명은 없다고 전제합니다. 바울은 자기 의견임을 밝히고 이야기를 했어요.
26절,“내 생각에는 이것이 좋으니 곧 임박한 환난으로 말미암아 사람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사도 바울은 본인도 결혼을 하지 않았고, 당시 미혼자들도 결혼하지 말고 혼자 지내는 것이 좋다고 권했어요. 예나 지금이나 결혼을 하든지 하지 않든지 그것은 개인의 선택입니다. 바울은 금혼령을 말하지는 않았습니다. 결혼하는 것을 죄라고도 여기지 않았어요. 28절,“그러나 장가가도 죄 짓는 것이 아니요 처녀가 시집가도 죄 짓는 것이 아니로되 이런 이들은 육신에 고난이 있으리니 나는 너희를 아끼노라.”
2. 예수님도 금혼령을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잘 알았고, 금혼령에 대해 주께 받은 계명이 없다고 말했어요. 바울은 주님께서 금한 것은 아니지만, 자신의 개인적인 입장은 가급적 결혼을 하지 말고 지내라고 줄곧 주장했습니다. 바울은 결혼 문제만 아니라, 다섯 가지를 연달아 권면했습니다. 29-30절,“이 후부터 1)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같이 하며, 2)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같이 하며, 3)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같이 하며, 4)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같이 하며, 5)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같이 하라.”바울이 결혼을 비롯해서 이런 권면들을 고린도교회에 하게 된 원인이 무엇이었을까요?
갈등 심화
3. 사도 바울은 결혼을 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비교해서 말했습니다. 32-33절,“장가 가지 않은 자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주를 기쁘시게 할까 하되, 장가간 자는 세상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아내를 기쁘게 할까 하여.”두 사람의 마음이 갈라집니다. 미혼 남자는 주의 일을 염려하고 기혼남성은 세상일을 염려해요. 상반되죠. 미혼 남자는 세상일을 염려하지 않고 기혼남성은 주의 일을 염려하지 않습니다. 우선순위를 말합니다. 주의 일과 세상일 사이에서요. 미혼 여성과 기혼 여성도 마찬가지입니다. 미혼녀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몸과 영을 다 거룩하게 하지만, 기혼녀는 세상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남편을 기쁘게 할까 하느니라. 매우 지당한-상식적인 이야기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이렇게 말하는 이유를 35절,“내가 이것을 말함은 너희의 유익을 위함이요 너희에게 올무를 놓으려 함이 아니니 오직 너희로 하여금 이치에 합당하게 하여 흐트러짐이 없이 주를 섬기게 하려 함이라.”바울은 자신이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유익을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 결혼하지 않고 지내며, 절제하며 사는 것이 어떻게 그들에게 유익이라는 것일까요?
실마리
4. 사도 바울은 결혼을 만류하며 26절, 임박한 환난을 이야기했습니다. 29절에는 그때가 단축하여졌다고 말했어요.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편지를 보낼 때(오늘 본문)의 종말론 상황이 묻어났습니다. 이때가 주후 55년경이었습니다. 이때 로마 제국은 네로 황제가 통치했습니다. 네로는 주후 54년-68년까지 통치하며 기독교를 크게 박해했습니다. 네로는 주후 81-96년에 통치했던 도미티안 황제와 더불어 가장 심하게 기독교를 박해했어요. 종말론 신앙과 당시 상황에 따라 사람이 사는 자세는 크게 달라집니다. 바울이 결혼을 가급적 금하고 독신생활을 하도록 권장한 형편입니다.
환난과 핍박이 있을 때 가족이 있으면 더욱 곤란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염두에 두고 말한 것이에요. 28절, 나는 너희를 아낀다고 바울은 밝혔습니다. 결혼은 예수님이 금하신 것이 아니지만, 내가 사견으로 말한다고 전제하면서, 이것이 지금 우리 교회 형편에서는 나은 것이라고 대안을 제시했어요. 바울은 이 후부터-임박한 종말을 사는 상황에서 다섯 가지를 권했습니다. 아내 있는 자들, 우는 자들, 기쁜 자들, 매매하는 자들, 세상 물건을 쓰는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권면이었어요. 이것을 문자적으로 이해하면 곤란합니다. 성경 해석을 이상하게 만드는 것 중의 하나가 문자적 해석입니다. 문자적인 해석을 하면, 실제 말한 사람(화자-speaker)의 입장을
5. 전혀 고려하지 못하고 말아요. 사도 바울이 말한 다섯 가지는 궁극적으로 이 땅에 가치를 두지 말고 살 것을 당부한 것입니다. 종말 신앙으로 사는 자들이 경계할 것은 땅의 가치관입니다. 하늘에 가치를 두고 사는 것과 땅에만 가치를 두고 사는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어요. 말 그대로 하늘과 땅 사이만큼의 차이가 납니다. 결혼은 땅에서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의 기쁘고 슬픈 감정도 땅의 상황-조건에 따라 희비가 오갑니다. 물건을 매매하고 쓰는 것도 마찬가지에요. 바울은 종말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세상 것에 매여서 살지 말고 하늘의 가치를 따라 살 것을 당부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 그의 삶은 오직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며 교회를 세우고, 일군을 세우면 그에게 위임하고 또 다른 지역으로 가서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우는 삶입니다. 1, 2, 3차 세계 전도 여행이 그의 인생 전부였어요. 그의 인생 순례길이었습니다. 바울은 다메섹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후 변화되었습니다. 세상 가치관을 다 내려놓고 하나님의 가치관으로 철저하게 무장했어요. 그는 임박한 종말 속에서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어떻게 사는 것이 지혜로운지 누구보다 잘 알았습니다.
6. 사도 바울의 삶이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를 위했다는 것은 곧 그리스도인들의 유익을 위해서 살았음을 의미합니다. 35절에서 바울은 자신이 이 편지에 쓰는 것은 바로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유익을 위함이라고 밝혔어요. 나는 너희에게 올무를 놓으려고 하지 않는다고까지 말했습니다. 올무를 놓는 것은 사탄이 하는 일입니다. 성령과 성령의 사람은 결코 이런 일을 하지 않아요. 오늘 본문에서 바울의 결론은 35절,“오직 너희로 이치에 합당하게 하여 흐트러짐이 없이 주를 섬기게 하려 함이라.”바울의 관심이 여기에 보입니다.
사도 바울이 당시 교회를 향한 기대감이기도 했습니다. 이치에 합당하고 흐트러짐이 없이 주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흐트러짐이 없이-개역성경 번역에는 분요함이 없이. 공동번역-딴 생각 없이, 새번역-마음에 헛갈림이 없이. 어느 주석가는 마르다와 마리아를 비교해서 이 말씀을 풀어주었습니다. 마르다처럼 본질보다 다른 것을 우선하여 분주한 것-흐트러짐, 마리아처럼 주님 곁에서 떨어지지 않고 말씀을 집중해서 듣고 순종하는 것-흐트러지지 않는 것이다. 일리가 있지요!
복음 제시
7. 사도 바울이 이렇게 하나님의 나라와 복음을 위해 평생 올인하며 달려갈 수 있게 한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그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였습니다. 어제와 오늘 새벽 기도회에서 로마서 8장을 나누었지만, 바울 자신이 복음을 철저하게 경험했어요. 바울은,“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자유 대헌장을 선언했어요.(2절)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로 자유를 얻은 사람은 육신을 따르지 않고 영을 따라 행한다. 육신 대로 살지 않고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며 산다.(강한 절제, 13절) 장차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누릴 우리는 그와 함께 고난도 받아야 한다.(17절) 이런 사람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선언했어요.(39절) 이러한 사도 바울의 실제 복음 경험과 선포가 오늘 본문과 같은 권면을 하게 했습니다.
기대
8. 사도 바울의 인생 여정은 남다른 면이 많습니다. 오늘 본문과 같은 권면은 아무나 하지 못해요. 본인이 결혼을 마다하고 살고, 철저하게 자신의 육신을 죽이는 삶을 경주하지 않는다면 조금도 흉내 낼 수 없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때로 바울을 우상화하기도 하고, 우리와는 전혀 다른 비교 불가의 인물로 보기도 해요. 사람을 상대 비교하면 이런 자세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을 높이 평가하시면서,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마11:11) 예수님의 이 말씀은 세례 요한 이후, 주님을 만나고 변화된 사람들에게 도전을 주었습니다. 누구를 우상화할 필요 없고, 우리 중에 누구라도 하나님이 이끄시는 대로 바울처럼 순종하여 살아가면 그 사람이 세례 요한보다 사도 바울보다도 클 것입니다. 역사상 우리가 모르는 이런 위대한 신앙인들이 많습니다.
9. 세상에는 역사에 기록되지 않고 묻힌 이들이 많아요. 우리는 조선 시대 앞의 왕조였던 고려의 역사조차도 모릅니다. 요즘 강감찬의 생애를 그린 드라마 고려거란전쟁을 보면서 사람들이 그동안 잘 몰랐던 위대한 장수들의 이름을 듣습니다. 강감찬만큼 탁월하고 자기 몸을 기꺼이 희생했던 군인들-양규, 김숙홍, 김훈, 지채문... 드라마가 아니었다면 저도 이 위대한 장수들을 알지 못했습니다. 오늘 본문을 읽고 나누며, 이 시간 기도합니다. 우리도 사도 바울처럼 땅의 가치관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 가치관으로 살게 하옵소서! 우리가 변화되며, 우리도 바울처럼 귀하게 쓰임받는 생애가 되도록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