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통신 167/200517]“열피붙이지정화悅血肉之情話”
‘날마다 신선놀음’을 하고 산다고 떠벌리지만, 오늘같은 날은 두려운 게 사실이다. 이제 아침만 먹으면 아내와 여동생네가 다 떠날 것이기 때문이다. 외로움과 쓸쓸함이 한꺼번에 몰려올 것이기 때문이다. 지난 목요일 저녁부터 북적거렸고, 어제는 마치 ‘소 잡은 날’처럼 집안이 떠들썩했다. 말씀을 잘 안하시는 아버지도 내심 흐뭇하셨을 것은 여쭤보나마나. 당신의 총생叢生들이 모여 즐겁게 노는 모습을 보는 것처럼, 말년에 더 좋은 일이 있을까. 나 역시 마찬가지이다. 귀거래사의 구절 중 가장 좋아하는 구절이 ‘열친척지정화悅親戚之情話’였다. 피붙이(혈육)를 비롯해 일가친척들이 한자리에 모여 함께 놀고, 함께 밥 먹고, 함께 얘기꽃을 피우는 일만큼 재밌는 일이 또 어디 있을까. 물론 주방을 책임지는 여성들의 노고가 늘 문제이긴 하지만 말이다.
그제는 제법 비가 내리는 가운데, 아버지를 모시고 임실 옥정호 근처 맛집인 ‘옥정호산장’을 찾았다. 붕어찜 1인 17000원. 재난지원금은 이런 데 쓰는 게 제격이라는 동갑내기 둘째매제의 강권에 따른 것이다. 일제강점기 옥정호 둑을 막는데 ‘보국대원’으로 차출되어 강제노동을 했던 아버지로서는 감회가 무척 새로웠을 것이다. ‘붕어섬’에는 손바닥보다 더 큰 붕어만 사는 걸까. 실가리를 몽땅 넣고 조린 붕어찜은 별미 중의 별미였다. 상전벽해桑田碧海, ‘소비가 미덕’이라는 이렇게 좋은 세상에 건강하게 오래 살라는 게 요즘 아버지의 ‘18번’ 말씀이다. 아무리 백세시대라 하지만,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으신 당신이야 당연한 말씀이 아니겠는가.
어제는 급히 내려온 아내와 논산 막내동생 부부, 세 쌍이 지리산 바래봉을 올랐다. 철쭉이 절정이라해서 진즉 계획했는데, 산자락의 철쭉은 이미 다 이울었고, 정상부근의 철쭉은 만개滿開가 되지 않아 유감이었지만, 모처럼 세 쌍 산행에 일행은 즐거울 수밖에 없었다. 저질체력을 염려한 둘째동생은 2시간(운봉 용산마을에서 4.8km)만에 정상 인증샷을 찍고는 “산이 약해” “꽃이 약해”라 하여 일동을 웃게 만들었다. 준비해간 도시락으로 꽃밭 사이에서 먹는 점심, 술이라면 한방울도 먹지말라는 우격다짐의 아내도 정상주頂上酒를 허락해주어 나를 더욱 기쁘게 했다.
나나 우리 동생들과 매제들, 얼마나 부지런한 ‘촌넘과 촌뇬’인지 보시라(여기서 ‘차도녀’격인 아내는 열외다). 새벽 6시 뒷산에 올라 고사리와 산취를 2시간 동안 채취했다. 그뿐인가. 등산을 하고 돌아온 즉시, 또 산에 올라 1시간여 산취, 고사리, 머위대를 푸대 가득 뜯어온 것이 아닌가. 나는 ‘영원한 시다바리’ LPG 가스통 버너에 네 종류를 삶아내기에 바빴다. ‘나홀로 신선놀음’보다 몇 배 더 좋고 기분이 짱짱짱, 살맛이 난다. 순간순간, 내일 아침이면 모두 떠날텐데, 생각에 약간씩 우울해지기도 했지만, 그것은 나중의 일. ‘열친척지정화’가 아니고 ‘열피붙이정화悅血肉之情話’이니 더욱 그렇지 않겠는가? 형제자매는 ‘2촌’으로 친척이 아닌 ‘피붙이’가 아닌가. 이렇게 서로 아껴주고 배려하며 같이 곱게 늙어간다면,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을까? 그렇게 안될 하등의 이유가 없거늘 무슨 걱정이랴. 일년에 서너 번 모이기만 하면 금세 열 명이 넘고, 웃음꽃과 얘기꽃이 차고 넘치는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은 나의 오래된 꿈이자 로망이 아니었던가.
오전 9시. 모두 일제히 떠나고, 지금은 오전 11시. 아버지는 땅콩밭에 아직 올라오지 않은 것들은 곯아서 그렇다며 뗌방에 나섰다. 못본 체 청소를 하고 컴퓨터책상에 앉아 오늘의 일기를 이어서 쓰고 있다. 초여름 날씨, 햇볕이 따갑다. 저녁때쯤 되면, 이틀간의 북적거림이 생각나 틀림없이 나는 눈물을 지을 것이다. 그러잖아도 눈물이 많은지라, 나는 주말드라마 등을 보지 못한다. 엊그제 광주민주화항쟁 ‘나는 보았다’ MBC 특집도 차마 보지 못했다. 나이를 먹어가는 징조이리라. 허나, 일주일이 가고 이주일이 가면 아내는 또 이것저것 챙겨주라 내려올 것이고, 동생들도 덩달아 찾을 터이니 무슨 걱정이랴. 열심히, 고맙게 살 일만 남았을 뿐이다. 모두 잘 올라가시라. 내년 바래봉철쭉제때는 팔령치쪽으로 올라 군락지에서 즐거운 시간을 갖자구나. 사랑한다. 내 누이들이여! 매제들이여! 나의 아내여!
첫댓글 나의 누이 나의 매제마냥
내 기분이 더 좋아진다
우리 형제들은 서울.부천. 전주에 뿔뿔이 흩어져 살아서
사이좋게 놀 틈이 없어
64내가 막내 큰형은 82이라 ㆍㆍ
친구의 만남이 부럽기만 하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