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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5장 37절 종교의 사이비화
“나는 신이다”는 넷플릭스 다큐가 연일 화제입니다. 그런데 사이비 종교는 악마의 얼굴을 하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우리가 이 문제를 한번 정도는 진지하게 집고 넘어가야할 것 같아서 오늘은 이에 대한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일단은 이단과 사이비에 대해서는 제가 누차 말씀을 드렸기 때문에 크게 설명드릴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이단은 다르다는 거죠. 교리가 다르고 가르침이 다르고 주장하는 종교의 핵심이 다릅니다. 그래서 종교간에 사용하는 언어입니다. 우리와 다르다는 의미입니다. 기독교를 대표하여 모든 종교의 소종파는 이단으로 출발합니다. 기독교도 처음에는 이단이었고 개신교도 처음에는 이단이었습니다. 감리교도 영국 성공회에서 새로운 길을 내었을 때 이단 취급을 받았고 우리 교회를 명칭하여 때때로 이단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단과 정통은 크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항상 보면 정통이라는 교단이 타락하면 그것을 개혁하면서 새로운 흐름이 생겨나고 그 단체도 처음에는 이단이었다가 정통이 되고 그 교파가 또 타락하면 또다른 개혁의 흐름이 생겨나게 되고 그 흐름이 처음에는 이단으로 취급받다가 정통이 되고 그렇습니다. 그런의미에서 건강한 이단도 있고 건강하지 못한 정통도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단과 정통의 옳고 그름을 구분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습니다.
문제는 사이비입니다. <나무위키> 사전을 봤더니 “이단은 주류 종교와 배치되는 교리를 가진 종교를 뜻하며(교리가 다른 겁니다. 사이비 종교는 종교의 탈을 쓴 범죄 조직을 말한다”고 나오더라구요. 사이비는 위법과 탈법과 불법을 일삼는 반사회적인 조직입니다. 그래서 사회에서 위험하고 필요악입니다.
여러분들은 사이비 종교를 어떻게 구분하십니까? 사실 사이비가 악마의 탈을 쓰지 않고 대부분 천사의 탈을 쓰고 있거든요. 그래서 겉으로 보면 잘 모릅니다. 넷플릭스에 나오는 종교들이나 이미 언론화되었기 때문에 누가 봐도 사이비인줄 알지만 신천지같은 종교를 보면 겉으로보면 무척이나 천사처럼 보입니다. 한 사람을 신도로 만들기 위해서 그 사람이 등산을 좋아하면 등산팀을 꾸리고, 축구를 좋아하면 축구팀을 꾸리고, 손으로 만드는 걸 좋아하면 공방 팀을 만들고 영어를 배우고 싶으면 영어를 잘 가르치는 사람을 배치해서 동아리를 꾸리고 인간관계가 힘들어 고통스러워하는 청년에겐 상담 카페에서 심리상담도 해주면서 공을 들이기도 합니다. 외롭고 고립되어있는 현대사회에서 매우 달콤한 종교적 접근입니다. 오대양의 박순자씨도 겉으로는 고아원, 양로원 등 사회사업을 하고 공장을 만들어서 일자리 만들어서 사람들 먹여 살리는 것처럼 보였거든요.
연세대 김학철 교수는 사이비 감별법을 크게 세가지로 이야기합니다. 대부분 사람들이 종교를 찾을 때 위기나 불안 두려움 공포와 같은 삶의 요소들을 해결하기 위해 찾는데 사이비성이 강할 수록 “우리 약발이 가장 세고 우리 약발만 듣는다”고 말한다는 거죠. 그리고 우리 안에는 그것을 해결해 주실 만한 특별한 능력자가 있고 그래서 결국은 자신의 모든 것을 그 종교에 올인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약발만 듣는다는 종교, 그리고 우리 교주가 메시야다 예기하는 종교, 일상, 사회, 가족과 분리시키고 종교에 올인하게 만드는 종교는 사이비성을 의심해봐야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실 이렇게 보면 기존의 전통종교안에도 사이비성이 많거든요. 그런 의미에서 개인도 정신 차리지 않으면 언제든지 길을 잃을 수 있는 것처럼 종교도 현대사회의 엄청난 유혹속에서 언제든지 사이비 성에 빠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사이비 성에 빠지지 않기 위해 경계해야할 것들을 생각해보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교인들도 점보러 다니는 사람들이 많은 걸로 알고 있는데 그냥 재미삼아 다니는 분도 있지만 실제로 보면 삶이 불안한거거든요. 그래서 뭔가 확실한 걸 붙잡고 싶은 거예요. 그런데 교회를 와도 목사님이 맨날 어떻게 살아라 어떻게 살아라만 하지 이쪽으로 가라 저쪽으로 가라 하나님이 그러시는데 이번에 집을 사세요. 앞으로 길이 열릴 겁니다. 이번에 동쪽에서 기인이 올텐데 그 기인이 시키는 건 무조건 하세요. 뭐 이런 확실한 걸 주질 않는 거예요. 그러니 교회가 부흥되겠습니까? 근데 여러분 잘 생각해보십시오. 점 보고 오면 맘이 평안하죠. 그 이유가 뭘까요? 그 사람이 신통한 걸까요? 아니면 그 사람의 말을 듣고 평안해진 내 마음 때문일까요? 객관적으로 달라진 것 하나도 없는데 내 마음이 달라졌잖아요. 그러면 그 문제의 해결의 키는 애시당초 내안에 있었던 걸까요? 아니면 그 점쟁이에게 있었던 걸까요? 그래서 저는 점보러 안갑니다. 궁금하지도 않습니다.
사실 잘 보면 불안은 걱정과 근심은 내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데 그걸 외부나 타자를 통해 해결하려고 하고 그런 삶의 방식이 타자를 우상화하고 신격화하고 절대화하고 그러면서 삶의 사이비화되는 것을 가속화시킵니다. 그 절대성과 신격화와 우상화의 권력을 누리는 사람이 독재화되고 권력화되는 순간 절대 건강할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사람들이 이적과 기적, 주술적 삶을 요구했을 때 피해다니셨어요. 그런 능력이 사랑에 쓰이지 않고 자신을 절대화시키는데 사용될때의 위험성을 아셨기 때문에 꼭 필요한 곳에서 정말 고통스러운 이들을 사랑할 때만 쓰셨어요.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끊임없이 변화와 회개를 통해 사랑의 능력을 키워나가실 것만을 강조하셨습니다.
삭개오가 삶의 태도를 바꾸었을 때 오늘 이 집에 구원이 이르렀다고 하셨습니다. 너희에게 보여줄 가장 큰 이적은 요나의 이적이라고 예기하시면서 니느웨로 가지 않고 다시스로 갔다가 삼일동안 물고기 뱃속에 있다가 변화하고 삶을 돌이켰던 요나의 이적이야말로 가장 큰 이적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악마의 유혹을 계속해서 받으셨을때도 돌을 떡으로 만들고 성전 높은 꼭대기에서 뛰어내려보아라 하는 것도 온갖 매직에 대한 유혹이었지만 오히려 주 하나님 만을 사랑하고 그분을 경배하라고 했습니다. 사랑의 능력의 키우라는 거죠.
여러분 친구와 싸웠어요. 그래서 삶이 불안해요. 저 친구가 나를 어떻게 볼까 저 친구와의 관계가 어떻게 바뀔까 불안해요. 이 불확실성을 극복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뭘까요? 점보러 가서 신통한 목사를 찾아가서 “음 저 친구는 오래갈 친구니까 걱정하지마 확답을 얻는 방법일까요?” 지금 이순간 내 불안하고 아집에 갇혀있는 마음을 유연성있게 열어서 밥이라도 사주면서 친구의 이야기를 듣고 소통하고 노력하는데 투자하는 걸까요?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신 삶의 불안성을 극복해 나가는 방법은 나를 키우고 나를 넓혀서 네크워크처럼 연결되어있는 생명의 그물망을 살려가는 겁니다. 불확실성을 여전히 돈과 몸과 모든 것을 갖다 바치면서 여전히 불확실한 것에 투자하지 말고 지금 여기 살아가면서 내 삶의 궁극적인 행복의 에너지를 교환하고 소통할 생명의 에너지, 사랑의 에너지를 최대한 활성화하는 것에 투자하라는 것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모든 불확실성이 극복되는 건 아니지요. 그래서 김학철 교수는 인간은 유한한 존재이기 때문에 그 유한성이 가지고 있는 삶의 모호성 불확실성은 인간이 피할 수 없는 근본적인 조건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잘 보면 그안에는 사실 불안도 존재하지만 기회도 공존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삶의 모호성과 불확실성 피해가려고 하지 말고 타자에게 의존하는 방식으로 회피하려고 하지 말고 그래서 삶을 종교를 사이비화하는데 휘발유를 뿌리지 말고 그 불안함 조건속에서도 최선을 다해 사랑함으로 삶을 기회와 성숙과 보람으로 가꾸어가자고 말씀하십니다. 종교의 사이비화를 막을 수 있는 길입니다.
그리고 세상에 우리만 옳은 건 없습니다. 우리도 옳을 수는 있지만 우리만 옳다고 주장하는 순간 그 자체가 사이비입니다. 누군가를 끊임없이 악마화하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나만 옳을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하나님이 나를 통해서만 역사하십니까? 하나님의 보편은총을 우리 사고 안에 우리 틀안에 가두는 무자비한 종교폭력입니다. 사실 예수님도 하나님을 유대교라는 종교적 틀안에 가두어버려는 삶을 무척이나 경계하셨어요. 그래서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틀밖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 이야기를 끊임없이 담론화하셨습니다. 유대적 사고에서는 하나님의 벌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병자들, 가난한 자들, 이방인들, 여인들, 가난한 과부, 세리 그들 가운데 역사하는 하나님 이야기를 하나님 나라의 이야기안에 적극적으로 등장시키시잖아요.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틀안에 갇혀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이비화 되지 않으려면 우리 안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이야기를 풍요롭게 이야기하되 그 틀 너머에도 항상 겸손히 열려있어야합니다.
마지막으로 오늘의 말씀을 보세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예할 때에는 예라는 말만 하고 아니오 할 때는 아니오라는 말만 하여라. 이보다 지나치는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 이보다 지나치는 상황이 어떤 상황입니까? 예를 해야하는 상황인데 아니오를 하는 상황입니다. 내가 알고 있는 지식, 관념 때문에 받아들이지를 못하는 겁니다. 대학시절에 여자 동기를 만났는데 담배를 피는 겁니다. 담배 피는게 몸에는 않좋지만 뭔가 타락한 것은 아닌데 오랫동안 제 몸에 밴 것이 술먹고 담배피면 탈선했다는 이미지였습니다. 오랜 세월동안 학습되다보니 어느날 그친구가 나에게 아무런 잘못한 것도 없는데 그친구가 누구에게 해코지를 하거나 피해를 준것도 없는데 담배핀 것을 보는 순간 아 제 타락했구나 하는 생각이 자동으로 드는 거예요. 그런 제 모습을 보면서 깜짝놀랬습니다. 의식이 변해도 몸이 변하는 데는 시간이 걸립니다. 분명 예를 해야하는 상황인데 몸이 아니오 아니오하고 있는 겁니다. 불완전한 내 삶에서 나오는 일들입니다. 내가 넘어야할 산이 겁니다.
아니오 해야하는 상황인데 예를 하는 상황도 있습니다. 이렇게 가는 건 사이비화되어가는 건데, 아무리 목사라도 가슴에 손을 넣는 건 아닌 거죠. 신성을 가진 분이라면 남의 몸을 함부로 하겠습니까? 아닌 상황이면 예수님이 여기에 다시오셔도 아닌 거죠. 이게 무너지는 순간이 악이고 사이비화되는 순간입니다. 이건 교인도 그렇고 목사도 마찬가집니다. 분명 아닌 건데 교인눈치보느라 그냥 그렇다그렇다하는 순간 복음의 본질은 타락하는 겁니다. 분명 아닌데 목사님이 하는 말이니까하는 순간 교회는 길을 잃어버리는 겁니다. 이성도 지성도 영성도 다 하나님이 주신 겁니다. 지성과 상식을 무시하는 교회안의 반지성주의는 기독교의 사이비화를 가속화시키는 도구일뿐입니다.
인류의 가장 큰 정신문화유산을 담은 종교조차도 성찰되지 못하고 사랑의 도구가 되지 못하면 사람을 노예화 시키고 병들게 하고 심지어 죽이는 무기가 될 수 있습니다. 거짓된 종교로부터 해방되어 자유와 평화와 사랑에 헌신하는 세상을 위해 당신의 생명을 받친 예수님의 삶을 묵상하는 이 사순절에 그분의 헌신을 헛되이 하지 않는 우리가 되시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