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란 무엇인가
구약에서 “예배”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하는 곳은 창22:5이다.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예배”의 히브리어는 샤하(שָׁחָה)다. 그 뜻은 “엎드리다”이다. 삼상1:3을 보자.
“만군의 여호와께 예배하며 제사를 드렸는데”
예배는 샤하(שָׁחָה 엎드리다)이고, 제사에는 자바흐(זָבַח 희생하다)다. 구약시대부터 “예배”와 “제사”는 구별되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예배를 어떻게 이해하고 계셨을까? 요4:21을 보자.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여기서 예수님은 “예배”에 프로스큐네오(προσκυνέω)라는 단어를 사용했는데 그 뜻은 “무릎을 꿇고 엎드리다”이다. 요4:21의 히브리어 譯을 보면 역시 샤하(שָׁחָה 엎드리다)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예수님조차 예배란 “무릎을 꿇고 엎드리는 것”으로 정의를 내리셨다.
마2:2을 보자.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이 말은 동방박사들이 헤롯 왕에게 한 말이다. 여기서 “경배”라는 단어도 프로스큐네오(προσκυνέω 무릎을 꿇고 엎드리다)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무당은 天地神明께 엎드려 절(경배)한다. 승려나 佛子는 부처상 앞에 엎드려 경배한다. 유교를 믿는 사람들도 제사상 앞에 엎드려 경배한다.
“예배”란 자신이 믿는 神에게 엎드려 경배하는 것이다. 현재 이것을 제일 잘하는 종교인들은 이슬람인들이다.
혹자는 형식이 뭐 그리 중요하냐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과일이나 씨앗의 알맹이를 보존하는 것은 껍질이다. 껍질은 아무 쓸모 짝없는 것이지만 알맹이를 보존하기 위해서는 없어서는 안 될 존재다.
“엎드려 경배하는 것”은 신앙생활에서 형식(껍데기)에 불과하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데 없어서는 안 될 형식(껍데기)이다. 그것이 하나님을 믿는 보호막 역할을 해주기 때문이다.
종교개혁자들의 가장 큰 실수는 신앙생활의 “형식”을 무시했다는 것이다. 오늘날 예배를 보면 찬양도 있고, 사도신경 고백도 있고, 기도도 있고, 설교도 있고, 헌금도 있고, 광고도 있다. 그야말로 짬뽕이다. 그런데 정작 있어야 할 “엎드려 경배하는 것(예배)”은 없다.
“엎드려 경배”하는 무당도, 불교도, 유교도, 이슬람도 인류가 존재하는 한 함께 존재할 것으로 본다. 그러나 하나님께 경배하는 것이 빠진 개신교는 사멸의 길을 갈 것이라고 본다.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겠지만...
신학자들이 “경배”를 무시한 결과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