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복음말씀의 향기♣ No2778
6월1일 [연중 제9주간 화요일]
--------------------------------
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
**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z9z0R1XTmqs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불행을 겪을수록 더욱 하느님께 의지했던 토빗>
토빗기는 파란만장한 몇몇 인간의 생애가 흥미진진하게 펼쳐지는 아주 재미있는 성경입니다. 하느님과 동료 인간들에게 충실했지만 눈이 머는 고초를 겪은 토빗과 그의 아들 토비아, 7번이나 결혼했지만 첫날밤에 남편과 사별해야 했던 사라의 이야기입니다.
불행을 겪을수록 더욱 주님께 의지하고 간청했던 그들의 기도를 그분께서 나 몰라라하지 않으셨습니다. 라파엘 천사를 보내시어 기적적으로 토빗의 아들 토비아와 사라의 결혼을 성사시키십니다. 뿐만 아니라 눈먼 토빗에게는 치유의 은총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이 세상 살아가는 동안 의인들이 겪어야하는 고통은 크겠지만, 주님께서는 적당한 순간에 개입하시어, 그들의 노고에 대한 응답으로 풍성한 축복을 내리신다는 것이 토빗기의 주제입니다.
주님께서는 고통에 몸부림치는 한 인간의 간절한 기도를 절대로 그냥 흘려듣지 않으시고, 고달픈 인생 여정에 늘 가까이 동행해 주신다는 것, 그러니 언젠가 실현될 귀향의 날을 희망하며, 지금 그리고 여기서 의롭게 살고, 자선을 베풀며 기쁘게 살아가야 한다고 토빗기는 외치고 있습니다.
토빗의 인간 됨됨이는 참으로 대단했던 것 같습니다. 그는 법 없이도 살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남이 불행한 꼴을 결코 못 보지 못했습니다. 그가 얼마나 의인이었던지는 본인 스스로가 당당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나 토빗은 평생토록 진리와 선행의 길을 걸어왔다. 나와 함께 아시리아인들의 땅 니네베로 유배 온 친척들과 내 민족에게 많은 자선을 베풀었다.”(토빗 1장 3절)
비록 유배지 생활이었지만 토빗은 가산이 넉넉한 부자로 살았습니다. 그는 얼마나 인정이 많았던지 잔치를 벌일 때 식솔들끼리만 즐기는 법이 없었습니다. 유배지에서 죽을 고생을 하고 있던 동포들 가운데 제일 가난한 사람들을 늘 잔치 상에 앉게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동포들의 불행을 늘 자신의 불행으로 여겼습니다. 율법까지 어겨가면서 타향에서 객사한 동포들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발 벗고 나섰습니다.
그토록 주님과 동료 인간들에게 충실했던 의인 토빗이었지만 그에게도 불행의 그림자가 덮쳤습니다. 오순절 밤, 죽은 동포를 매장하고 나서 피곤에 지친 그가 마당에서 잠을 자던 중 이었습니다. 하필이면 뜨거운 참새 똥이 그의 두 눈에 명중하고 맙니다. 그 길로 그는 시력을 잃고 4년여 동안 암흑 속에 살아가야만 했습니다. 그로 인해 아내 안나가 생활 전선에 뛰어들어야만했습니다. 주로 할 수 있었던 일은 품팔이, 남의 집 가사일, 허드렛일이었습니다. 그렇게 죽을 고생을 하며 앞 못 보는 남편을 봉양했습니다.
그런 토빗의 모습에 주변 사람들은 크게 비웃었습니다. “하느님께 충실해도 뭐 특별한 것 없구먼! 그렇게 자선을 베풀었는데, 결국 돌아온 것은 저 모양이군!” 뿐만 아니라 밖에서는 성인군자, 안에서는 무능한 남편인 토빗을 향해 아내 안나도 드디어 분노가 폭발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의 그 자선들로 얻은 게 뭐죠? 당신의 그 선행들로 얻은 게 뭐죠? 그것으로 당신이 무엇을 얻었는지 다들 알고 있어요.”
당시 토빗이 느꼈을 참담했던 심정이 손에 잡힐 듯이 느껴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토빗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극도의 가난 속에서도 정직하게 살려고 발버둥 쳤습니다. 삶이 힘겹다고 절대로 부정을 저지르지도 않았습니다. 언제나 그랬듯이 하느님만 생각하며 정도(正道)를 걸어갔습니다. 이런 토빗의 충실함을 눈여겨보신 하느님께서 마침내 백배, 천배로 갚아주셨습니다. 치유의 은총을 선물로 주셨고, 대대손손 큰 축복을 내려주셨습니다.
하느님의 개입과 축복을 이끌어내기 위한 가장 필요한 인간 측의 노력은 흔들림 없는 신앙과 간절한 기도, 사심 없는 자선임을 토빗기는 밝히고 있습니다. 변덕쟁이이고 불충실하며 이웃들의 고통에 별 관심도 없는 오늘 우리들에게 토빗의 삶은 큰 귀감으로 다가옵니다.
=====================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복음묵상 동영상)
https://youtu.be/vlGgsmNqscI
++++++++++++++++++
<자발적 결핍이 주는 선물 : 경탄과 감사의 삶>
오늘 복음은 그 유명한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라고 하신 말씀이 나오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사실 믿는 이에겐 돈도 하느님의 것이고 황제도 하느님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돈과 황제는 하느님과 상반되는 무엇으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모두가 다 하느님의 것이지만 하느님은 당신께 합당한 것만 챙기십니다.
‘세금’은 무엇일까요? 나라의 보호, 나라의 복지와 모든 공공시설을 이용할 수 있는 자격을 얻는 방법입니다. 만약 탈세하는 사람이 외국에 나간다고 여권을 달라면 나라에서 만들어줄까요? 주지 않습니다. 세금을 내지 않으면 정부가 자신의 국민으로 인정해주지 않는 것입니다. 세금은 이렇듯 내가 어느 나라에 속해있는지를 알려줍니다. 나라가 없으면 난민이 됩니다. 그러니 나라 덕분으로 버는 것의 일정 부분을 나라의 유지를 위해 내는 것은 당연합니다. 세금은 내가 그 나라에 속해있고 나라가 없다면 나는 아무것도 아님을 고백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느님 나라도 세금을 낼까요? 당연히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황제에게 세금을 내듯이 하느님께도 세금을 내야 한다는 뜻입니다. 에덴동산은 하느님 나라의 상징입니다. 그 나라에서 바쳐야 했던 세금은 선악과였습니다. 세금을 바치지 않자 그 나라에 살 자격을 박탈당하게 된 것입니다. 선악과는 그 나라가 아니면 우리는 살 곳이 없음을 고백하는 세금과 같습니다. 그런데 왜 탈세가 이어지고 주님께 십일조의 세금도 내지 못할까요? 문제는 자신이 받는 것이 당연한 줄 아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 바로 전 이야기가 ‘못된 소작인의 비유’입니다. 못된 소작인들은 세금도 내지 않기 위해 세금을 받으러 온 왕의 외아들을 죽입니다.
리지외의 아기예수의 성녀 소화데레사의 평전, 『빈손』에 타고르의 우화가 있습니다. 한 거지가 왕중의 왕이 황금마차를 타고 자신에게 오는 것을 봅니다. 그는 무슨 큰 보화를 주겠거니 마차 앞에 엎드립니다. 그런데 임금은 내려서 오히려 거지에게 손을 내밉니다. 거지는 농담하는 줄 알고 자신이 주운 낟알 한 개를 왕의 손바닥 위에 올려놓습니다. 그런데 왕은 그냥 떠나버립니다. 집에 돌아와 바랑을 쏟아보니 한 알이 황금으로 바뀌어 있었습니다. 그때 그는 애타게 울며 이렇게 통곡합니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임께 바칠 용기가 있었더라면!”
거지는 자신이 사는 세계에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자신만 가난하다고 한탄했습니다. 그러나 왕이 그 땅에 살며 낟알을 주워 먹게 한 것만 해도 큰 은혜입니다. 나라 없이 떠돌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거지는 요구만 합니다. 나라를 잃어봐야 나라의 소중함을 알 것이고, 하느님 나라를 잃어봐야 십일조는 아무것도 아니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것에 감사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잃어보는 것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절제’가 중요한 것입니다. 절제를 통해 더 봉헌하게 되고, 더 봉헌하면 또 절제할 수밖에 없습니다.
코기 족 인디오는 안데스 산맥 북쪽 끝, 콜롬비아 시에라네바다 데 산타마르타 산 해발 5,900미터 높이에 살고 있습니다. 유럽인들을 피해 오랜 세월 동안 외부 세계와 접촉을 거부하고 살아온 이들에게는 독특한 전통이 있습니다. ‘마마’라고 불리는 코기 족 사제들은 신점을 쳐서 장차 사제가 될 운명을 지닌 존재가 태어날 시기를 알아냅니다. 선택된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산 위쪽의 동굴로 옮겨집니다. 젖먹이 때는 어머니가 동굴 옆에 머물면서 젖을 먹이고 보살피지만, 이후에 아이는 사제들에 의해 양육됩니다.
사제에게 선택된 아이는 9년 동안 일절 동굴 밖으로 나갈 수 없으며, 해와 달조차 볼 수 없습니다. 낮에 자고 밤에 깨며 버섯, 호박, 콩 등 소박한 음식만 먹습니다. 사제들은 세상을 창조한 ‘위대한 어머니’인 알루나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신화와 종교의식을 아이에게 가르칩니다. 이 기간이 끝나면 아이는 인간의 마을로 내려갈지, 동굴에 남아 배움을 계속할지 선택할 수 있습니다. 후자를 택하면 다시 9년의 교육이 동굴에서 이어집니다.
희미한 빛밖에 없는 동굴 안에서 아이는 자기 내면의 영성과 대화하는 법, 하늘과 땅의 비밀, 인간 세상의 특별함과 아름다움을 배웁니다. 그러면서 나무와 산이 어떤 모습이고, 하늘을 나는 동물들이 어떻게 생겼으며, 바닷물이 몸에 닿을 때 어떤 느낌일지 궁금해합니다. 그리고 어둠 속을 보는 데 익숙해졌기 때문에 마음이 지어내는 환상을 꿰뚫어 보는 투시력이 생겨납니다.
마침내 18년의 혹독한 수련이 끝나는 날, 아이는 사제의 손에 이끌려 시에라 산맥의 새벽빛 속으로 나옵니다. 그때까지 관념과 상상 속에서만 존재해 온 세상과 만나는 것입니다. 그때의 충격! 놀라움과 경이로움! 나뭇잎들의 초록색 수런거림, 바위에 자라는 이끼, 골짜기를 나는 새, 최초로 살에 와 닿는 햇빛, 온갖 종류의 나무와 꽃들! 경외감에 압도되어 아이는 무릎을 꿇고 위대한 어머니 알루나에게 절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그리하여 아이는 대지에 깃든 신성을 평생 마음에 간직하게 되고 부족의 사제로 탄생합니다. 그리고 부족 사람들에게 그 신성을 일깨우는 일을 하고, 이 세계와 영적 세계를 연결하는 고리 역할을 합니다.
사제는 신자들에게 우리가 당연히 가지고 있는 것들이 당연하지 않음을 일깨우고 모든 것의 창조주께 당연한 감사의 표현을 하도록 이끄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모두 이를 실천하기 위해 세상에 파견된 사제들입니다. 사제들에게 감사가 없으면 그 사람을 만나는 사람들은 더 감사할 수 없습니다. 해와 달과 바람과 나무와 꽃들에게 감사할 수 없는 사람이라면 누가 그 사제를 통해 감사의 제물을 주님께 드릴 수 있겠습니까? 사제는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의 것이라는 인장을 발견해야 합니다.
어떤 실험에서 한 그룹은 대자연의 아름다움을 바라보게 하고 한 그룹은 뒤쪽에 있는 학교 건물을 바라보게 합니다. 그리고 한 사람이 지나가다가 물건을 흘립니다. 어느 쪽이 더 물건을 흘리고 넘어진 사람에게 도움을 주었을까요? 당연히 대자연에 경탄하던 사람들입니다.
주님께서 주신 모든 것에 경탄할 수 있는 마음이 내어줄 수 있는 마음을 북돋아 줍니다. 이 경탄은 약간의 절제에서 옵니다. 약간의 절제는 물에 대한 감사, 음식에 대한 감사, 가족에 대한 감사, 친구에 대한 감사 등 모든 것에 대한 감사로 이어지게 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나약해서 절제하지 않으면 더 많이 받지 않은 것에 불평하게 됩니다. 경탄하기 위해 절제합시다. 그래야 선악과를 감사히 봉헌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웃사랑도 실천할 수 있습니다.
=====================
[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12,13-17 :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문제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헤로데 당원 몇 사람이 예수님께 교묘한 질문을 던진다. 이 질문에는 역사적인 배경을 가지고 예수님께 로마 제국과 이스라엘 민족 사이에 어느 편을 들것이냐는 함정이 있다.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합당합니까, 합당하지 않습니까? 바쳐야 합니까, 바치지 말아야 합니까?”(14절) 그들은 그분을 거슬러 교묘하게 음모를 꾸미고 있다.
예수님은 로마의 돈인 “데나리온 한 닢을 가져다 보여 다오.”(15절) 하신다. 예수님께서 받으신 돈 앞면에는 ‘아우구스토의 아들, 신성한 아우구스토 티베리오 황제’, 뒷면에는 ‘최고 성직자의 화폐’라고 적혀있었다. 이것을 보시고 예수께서 “이 초상과 글자가 누구의 것이냐?” 하고 물으셨다. 그들이 “황제의 것입니다” 하자,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드려라.” 그들은 예수님께 매우 감탄하였다.(16-17절) 이 답은 신학적으로 매우 깊은 의미가 있다.
우선 예수님의 대답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디베리오 황제의 화폐를 사용한다는 것은 이스라엘 안에서 그의 정치적 권력을 인정하는 것이다. 비록 그 화폐를 달리 생각한다 하여도 그 화폐에는 그의 초상과 그의 문장이 새겨져 있으므로 그의 것이다. 그러므로 황제에게 세금을 바친다는 것은 황제 자신의 것을 바치는 것이므로 그것은 황제에게 바쳐라!”는 뜻이다.
그리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라”는 말씀은 ‘인간’은 하느님께 속한 것이므로 하느님께 바쳐야 한다는 말씀이다. 사람은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되었으니 하느님께 속하므로 우리 모든 인간의 삶은 하느님께 바쳐야 한다는 것이다. 즉 하느님의 초상은 우리 인간에게 새겨져 있으니 우리 인간은 모두 하느님의 것이고, 그러기에 하느님께 바쳐져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하느님의 모습이며, 우리는 하느님의 금고에서 잃어버린 하느님의 은화이다. 우리 안에 새겨주신 당신의 초상을 찾아 주시려고 사람이 되셨으니, 우리는 우리 자신을 하느님께 되돌려 드려야 한다. 그러기 때문에 황제도 하느님의 모상을 가진, 즉 하느님의 초상이니 하느님께 속한다는 말씀을 하신 것이다. 이 말씀을 들은 군중들은 그 깊은 뜻을 알아듣고 그 함정을 없애버리시는 주님의 지혜에 대하여 경탄하였던 것이다.
동전에는 통치자의 흐리멍덩한 육체적 모습이 새겨져 있지만, 구원받은 우리는 살아계신 하느님의 생명력 넘치는 모습을 담고 있다. 우리 인간은 우리 안에 새겨진 하느님의 모습을 완성하도록 노력하며 하느님께 분명히 돌려 드려야 한다. 그것은 우리의 모든 것이 하느님께 속하는 것이고 올바로 되돌려 드릴 수 있을 때 될 수 있다. 그러한 우리 자신을 하느님께 참된 예물로 이 제단에 봉헌할 수 있도록 지혜와 용기를 청하자.
=====================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인천교구 박형순 바오로 신부님(인천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오늘 우리가 듣게 되는 복음의 내용은 예수님을 향한 부정의 감정을 드러내는 ‘올무’에서 시작하여 ‘감탄’이라는 긍정적인 장면으로 전환되는 움직임을 보여 줍니다. 주목할 점은, 올무가 감탄으로 바뀌는 그 자리에 바로 하느님께서 계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향한 모함을 마주하는 가운데, 어떤 화려한 언변이 아닌 하느님을 통해서 대답하십니다.
그러하기에 오늘의 복음은 두 가지를 함께 생각하게 해 줍니다.
첫째, 우리가 마주하게 되는 신앙의 의문들, 신앙과 삶의 질문들은 우리의 생각과 판단을 통해서 답을 찾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사고를 바탕으로 우리가 지닌 신앙에 대하여 우리 자신에게 ‘올무’를 씌우려 합니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다양한 상황 속에서, 신앙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는 가운데, 우리는 ‘합당한가, 합당하지 않은가?’, ‘해야 하나, 하지 말아야 하나?’라는 올무를 마주하게 되고, 결국 올무에 걸리고 맙니다. 결과적으로 우리가 마주하고, 우리가 던지는 신앙의 의문에 대한 답은 하느님 안에서만 해결됨을 오늘 복음은 알려 줍니다.
둘째, 예수님의 대답처럼,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황제에게 세금은 바칠 줄 알면서, 하느님께 하느님의 것을 돌려드릴 줄은 모릅니다. ‘성공’과 ‘부’(富)라는 이 시대의 황제에게 우리는 많은 세금을 바치면서 살아갑니다. 부귀영화가 우리를 보호해 줄 것이라고 굳게 믿으면서 아까워하지 않고 당연하게 세금을 바칩니다. 반면에 하느님께 속한 것은 어떠한가요? 주님께 속한 것이 무엇인지 찾으려 하지도 않고, 자연스레 하느님께 드릴 생각을 하지 않고 지냅니다. 그런 우리에게 시편의 저자는 소리 높여 외칩니다. “주님 것이라네, 세상과 그 안에 가득 찬 것들”(시편 24[23],1). 세상과 세상을 채우는 모든 것이 하느님의 것입니다. 그것을 알아볼 수 있는 눈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
[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하느님의 것>
“그 뒤에 그들은 예수님께 말로 올무를 씌우려고, 바리사이들과 헤로데 당원 몇 사람을 보냈다. 그들이 와서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저희는 스승님께서 진실하시고 아무도 꺼리지 않으시는 분이라는 것을 압니다. 과연 스승님은 사람을 그 신분에 따라 판단하지 않으시고, 하느님의 길을 참되게 가르치십니다. 그런데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합당합니까, 합당하지 않습니까? 바쳐야 합니까, 바치지 말아야 합니까?’"(마르 12,13-14)
여기서 ‘예수님께 말로 올무를 씌우려고’라는 말은,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을 해서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려고 했다는 뜻입니다. 만일에 예수님께서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합당하다고 대답하시면, 바리사이들과 헤로데 당원들은 “예수는 민족의 반역자”라고 선전했을 것입니다. 반대로 예수님께서 세금을 내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고 대답하시면, 그들은 반란죄로 예수님을 로마 당국에 고발했을 것입니다.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것은 그의 통치권을 인정하는 것이고, 로마제국의 식민 지배를 인정하는 것이 됩니다. 그 당시에 하느님만이 유일한 통치자라고 주장하면서 로마 황제의 통치권을 부정하고 납세거부 운동을 일으킨 사람들도 있긴 했는데, 그렇지만 바리사이들과 헤로데 당원들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속으로 무슨 생각을 했든지 간에 세금을 내고 있었습니다. <바리사이들과 헤로데 당원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한 말은, 우리 입장에서는 맞는 말이지만, 여기서는 아무 의미 없는 아첨일 뿐이고, 상대방을 방심하게 만들어서 함정에 빠뜨리는 전술로서 한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위선을 아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데나리온 한 닢을 가져다 보여 다오.’ 그들이 그것을 가져오자 예수님께서, ‘이 초상과 글자가 누구의 것이냐?’ 하고 물으셨다. 그들이 ‘황제의 것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이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 그들은 예수님께 매우 감탄하였다."(마르 12,15-17)
‘그들의 위선’이라는 말은, 그들이 별다른 의식 없이 황제에게 세금을 내고 있으면서도 ‘고민하는 척’ 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또는 이미 세금을 내고 있으면서도, 마치 세금을 낸 적이 없는 것처럼, ‘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라고 고민하는 척 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지시하신 대로 그들이 가져온 데나리온은 어디 다른 곳에서 가져온 것이 아니라, 자기들이 가지고 있던 것입니다. 그들이 데나리온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그것을 사용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로마 화폐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은 로마 제국의 지배를 인정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 점에서도 그들은 위선자들입니다. 예수님께서 데나리온에 새겨져 있는 초상과 글자가 누구의 것이냐고 물으신 것은, 바리사이들과 헤로데 당원들이 로마 화폐를 사용하고 있음을 스스로 실토하게 만들기 위한 것입니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라는 말씀은, 하느님을 믿고 있는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온 세상의 모든 것은 다 ‘하느님의 것’입니다. 하느님은 ‘만물의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황제의 것’도 전부 다 ‘하느님의 것’입니다. 황제의 권력도, 그의 소유물도, 그의 인생과 목숨도 전부 다 ‘하느님의 것’입니다. (‘하느님의 것’과 대등한 위치에서 경쟁하는 ‘황제의 것’은 없습니다.) 따라서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라는 말씀은, “황제가 세금을 걷는 일이 하느님의 뜻에 합당하면 내고, 하느님의 뜻에 합당하지 않으면 내면 안 된다.”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각자의 신앙과 양심에 따라 판단하라는 뜻인데, “너희는 이미 세금을 내고 있지 않으냐? 그것이 하느님의 뜻에 합당하냐? 합당하지 않으냐? 를 나에게 묻지 말고 스스로 자신의 양심에 따라 판단하여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이 말씀에는 “로마 제국이 이스라엘을 식민지로 삼아서 지배하는 일이 선한가, 악한가?”에 관한 판단은 들어 있지 않습니다. 당시에는 로마 황제들이 자신을 신격화하지 않았던 때이고, 로마 제국이 식민지 국가들의 종교 자유를 허용하던 때였습니다. 그래서 아직은 황제가 세금을 걷는 것이 그렇게 악한 일은 아니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위에서 다스리는 권위에 복종해야 합니다. 하느님에게서 나오지 않는 권위란 있을 수 없고, 현재의 권위들도 하느님께서 세우신 것입니다."(로마 13,1) “여러분이 조세를 바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그들은 바로 이러한 일에 정성을 다하는 하느님의 심부름꾼입니다. 여러분은 모든 이에게 자기가 해야 할 의무를 다하십시오. 조세를 내야 할 사람에게는 조세를 내고 관세를 내야 할 사람에게는 관세를 내며, 두려워해야 할 사람은 두려워하고 존경해야 할 사람은 존경하십시오."(로마 13,6-7)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을 생각하여, 모든 인간 제도에 복종하십시오. 임금에게는 주권자이므로 복종하고, 총독들에게는, 악을 저지르는 자들에게 벌을 주고 선을 행하는 이들에게 상을 주도록 임금이 파견한 사람이므로 복종하십시오. 여러분이 선을 행하여 어리석은 자들의 무지한 입을 막는 것이 하느님의 뜻입니다."(1베드 2,13-15) 바오로 사도의 말이나 베드로 사도의 말은 ‘무조건’ 복종하라는 말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합당하다면 복종하라는 말입니다. (만일에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악한 권위나 질서라면 복종하면 안 됩니다. 악을 물리치고 선을 실현하는 것은 모든 신앙인의 본분입니다.)
<나쁜 군사독재 정권에 협력해서 종교 활동을 보장받는 것은 선인가? 악인가? 반대로, 그 악한 독재 정권에 저항하다가 탄압을 받아서 종교 활동을 제대로 못하게 되는 것은 선인가? 악인가?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는 이유로 방역법을 무시하다가 바이러스 확진자가 대량 발생하는 일이 생기도록 만드는 것은 하느님의 뜻에 합당한가? 반대로, 방역법을 지켜야 한다는 이유로 신앙생활을 중단하고 쉬는 것은 하느님의 뜻에 합당한가? 이런 현실에 대해서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모르겠다는 말만 할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해야 하느님의 선(사랑)을 실천할 수 있을까?”를 생각해야 합니다. 세속의 법이 하느님의 선을 거스르는 악법이라면 지키면 안 되지만, 모두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한 법이라면 지키는 것이 맞습니다. 방법만 잘 찾으면, 방역법을 지키면서도 신앙생활을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
[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어머니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한동안 휠체어를 타셨습니다. 어머니를 모시고 아버지가 계신 비봉 추모관엘 갈 때면 휠체어를 트렁크에 넣고 갔습니다. 휠체어는 두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수동 휠체어이고, 다른 하나는 전동 휠체어입니다. 수동 휠체어는 가볍지만 언덕을 오르거나, 멀리 갈 때면 힘이 듭니다. 전동휠체어는 편하게 다닐 수 있지만 무거워서 차에 옮기기가 어렵습니다. 전동휠체어는 가격이 비싸기 때문에 쉽게 구입하기도 어렵습니다. 수동 휠체어에 전동 휠체어의 기능을 넣어서 가볍고, 적당한 가격의 휠체어를 개발한 토도웍스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국내의 휠체어 종류는 150여 가지이고, 세계적으로는 1,000여 가지의 휠체어가 있다고 합니다. 국내에서 파는 장애인 보장구 95%는 수입 제품이라고 합니다. 나머지 5%도 해외 부품으로 만든다고 합니다. 토도웍스의 제품은 100% 국산이기에 가격을 낮출 수 있었다고 합니다.
토도웍스의 시작은 휠체어를 타야하는 딸의 친구와의 인연이었다고 합니다. 딸의 친구가 집에 왔는데 휠체어를 타고 왔습니다. 자주 오라고 하니, 딸의 친구는 수동 휠체어는 힘들어서 자주 못 온다고 하였습니다. 전동 휠체어는 이동이 쉽지만 크고 무거워서 차에 넣을 수 없어서 자주 못 온다고 하였습니다. 아버지는 딸의 친구에게 이동이 편리한 장치를 만들어 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드디어 휠체어에 이동장치를 달았습니다. 가볍고, 이동이 쉬우면서도 차에 넣을 수 있는 휠체어가 탄생하였습니다. 소문을 듣고 부모들이 휠체어를 부탁하였지만 거절하였다고 합니다. 시간도 없고, 다른 일을 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이들이 부탁하면 거절하기 힘들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이들을 위한 휠체어를 만들기 위해서 회사를 만들었는데 그 이름이 토도웍스였습니다. 지금은 아이들의 체형에 맞게 크기를 조절하는 휠체어를 만들었고, 무선으로 조종하는 휠체어도 만들었다고 합니다. 토도웍스의 대표는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어울릴 수 있는 세상, 장애인에 대한 편견을 없애는데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이천 년 전에 예수님께서 꿈꾸었던 세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사야 예언자의 두루마리를 펴서 읽으셨습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이사야 예언자는 예수님의 꿈을 이렇게 표현하였습니다. “그때에 눈먼 이들은 눈이 열리고 귀먹은 이들은 귀가 열리리라. 그때에 다리 저는 이는 사슴처럼 뛰고 말 못하는 이의 혀는 환성을 터뜨리리라. 광야에서는 물이 터져 나오고 사막에서는 냇물이 흐르리라. 구원받은 이들만 그곳을 걸어가고, 끝없는 즐거움이 그들 머리 위에 넘치고 기쁨과 즐거움이 그들과 함께하여 슬픔과 탄식이 사라지리라.”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입니다. 사도들이 세상에 전한 복음의 기쁨입니다. 토도웍스가 꿈꾸는 세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리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드려라!’ 이것이 바로 신앙인들이 살아야 할 삶의 태도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살고 있지만 우리는 하느님께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생명을 주는 것이 아니면 옳은 말이라도 절제할 줄 알아야 합니다.’ 분란이 일어나는 것은 틀린 말을 해서만은 아니었습니다. 옳은 말이지만 그것이 상처를 주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우리는 토빗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는 옳은 일을 했지만 불행한 일을 겪게 됩니다. 그의 아내는 옳은 말을 했습니다. ‘당신의 그 자선들로 얻은 게 뭐죠? 당신의 그 선행들로 얻은 게 뭐죠? 그것으로 당신이 무엇을 얻었는지 다들 알고 있어요.’ 토빗은 지금 자기 앞에 불행에 대해서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께서 또한 자비를 베풀어 주실 것이라는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처럼 ‘모든 일에 감사’할 줄 안다면 우리는 세상에 살면서도 이미 하느님께 속해 있는 것입니다.
=====================
[서울대교구 이기양 요셉 신부님]
<미워하는 사람이 있으십니까?>
미워하는 사람이 있으십니까? 누군가 미워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미움에 끌려 다니게 되지요. 미움이라는 놈이 나를 마구 흔드는 걸림돌이 됩니다.
그 사람이 하는 모든 것이 마음에 들지 않고 잘 되기를 바라기보다는 잘못되었을 때 더 기분 좋아하고 즐기게 되는 것이 평범한 인간의 마음인 것 같습니다.
이러한 마음은 직위가 높거나 나이가 먹었다고 고쳐지는 것도 아니요 신앙인이라고 해서 초월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미움을 털어 버리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지요.
오늘 복음에 보면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 원로들 역시 이러한 마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지요. 이들은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어 무엇인가를 묻게 합니다. 묻는 목적은 새로운 것을 알고 싶어서가 아니라 '말로 올무를 씌우려는 것'(마르12,13)이었지요.
서기 6년 로마의 황제, 즉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는 칙령을 발표하여 제국의 식민지인 이스라엘 백성들도 주민세를 내도록 명하였습니다. 주민세는 어린이와 노인과 노예를 제외한 백성의 인두세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에 갈릴래아 출신 유다라는 사람이 하느님 홀로 이스라엘의 통치자라는 구호 아래 로마에 대한 납세 거부 운동을 일으키고, 헤로데 당을 조직하여 민족 독립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오늘의 논쟁은 유다교의 장상들인 원로들과 수석 사제 및 율법 학자들이 예수님께 올가미를 씌울 작정으로 몇몇의 바리사이들과 헤로데 당원들을 예수님께 보냄으로써 시작됩니다.
예수님 당시에 헤로데 당원들은 세금을 바친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주권과 함께 하느님의 주권을 부인하는 것을 뜻하므로 납세를 거부하였지만, 바리사이들은 속으로는 이스라엘의 해방을 고대하면서도 그들의 종교생활에 지장이 있을까 두려워 겉으로는 세금을 착실히 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합당합니까? 합당하지 않습니까 바쳐야 합니까, 바치지 말아야 합니까?"(마르12,14)라고 묻는 그들의 속셈은 뻔합니다.
예수님께서 세금을 바치지 말라고 하신다면, 바리사이들이 예수를 로마 총독 관헌에 고발할 혐의를 찾게 될 것이고, 세금을 바치라고 하신다면, 헤로데 당원들은 실망할 것이고, 심지어는 군중들을 종용하여 예수와 결별을 선언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참으로 간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초상과 글자가 누구의 것이냐?"(마르12,16)라는 물음을 던지시고, 그들이 "황제의 것"(마르12,17)이라고 대답하자,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마르12,17)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왜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 원로들은 예수님을 미워하고 올가미를 씌우려고 했을까요? 예수님보다 사회적 지위도 경제적 능력도 백성들의 존경도 훨씬 높고 많이 받는 사람들이 왜 예수님을 없애 버리려고 했는지 그 이유가 궁금합니다.
그 이유는, 첫째로 예수님께서 그들이 요구대로 순응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뜻과는 다른 종교적 관습이나 권력자들의 잘못을 들쳐내고 비판하셨지요.
우리가 하듯이 ‘인생이란 다 그런 거야. 알면서 넘어가고 모르면서도 지나는 거지. 너무 따지며 살지마. 너만 피곤해져.’ 하는 투의 무책임한 삶의 태도를 꾸짖으시며 하느님의 정의를 세우려 하셨기에 기득권자들에게 미움을 사게 되신 것입니다.
둘째는 예수님의 권위 있는 말씀에 백성들이 환호하고 그를 따르게 되자 더 이상 두었다가는 그들의 권위가 도전 받을 것 같고, 또한 시기심에 예수님의 언행이 용납되지 않자 트집을 잡아서 치려고 했던 것입니다.
셋째는 예수님께서 집권자들의 잘못을 공개적으로 비판하시자 백성들을 착취하여 부와 권력을 누리던 사람들이 불안을 느끼고 예수님을 없애버리려는 결정을 하게 됩니다.
이러한 감정들에 판단력이 흐려지게 되자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 원로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예수님을 미워하게 되고 잘한 것이든 그렇지 못한 것이든 무조건 비판하기에 이릅니다. 심지어는 하느님의 이름을 써가며 간교한 올가미를 놓게 됩니다.
"스승님, 저희는 스승님께서 진실하시고 아무도 꺼리지 않으시는 분이라는 것을 압니다. 과연 스승님은 사람을 그 신분에 따라 판단하지 않으시고, 하느님의 길을 참되게 가르치십니다.
그런데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합당합니까, 합당하지 않습니까? 바쳐야 합니까, 바치지 말아야 합니까?"(마르12,14)
그렇습니다. 누군가에 대한 미움이 지나치게 되면 판단력이 흐려지고 신앙인이지만 최소한 양심도 지키지 못하는 경우까지로 추락할 수 있습니다. 최악의 경우 마치 유다인들이 하느님의 이름으로 예수를 못 박았던 것처럼 하느님까지도 하느님의 이름으로 단죄할 수가 있습니다.
지나친 미움이 있다면 빨리 털어버리십시오. 미움의 키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의 온 몸을 조정하여 구렁텅이로 빠뜨리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 은총을 구하며 기도하십시오.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께서 새로운 삶과 노력할 수 있는 힘을 주실 것입니다.
=====================
[청주교구 류한영 베드로 신부님]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
이 말씀은 로마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것과 관련된 질문에 대해 예수님께서 하신 대답입니다.
이것을 질문한 사람들은 놀랍게도 이 세상의 질서에 대해 의견을 달리하는 두 부류의 사람이었습니다. 바리사이들은 세상의 다스림보다 하느님의 다스림을 우선시하는 사람들입니다. 이에 반해 헤로데 당원들은 로마 황제에게 충성을 바치는 것을 우선시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두 부류의 사람들은 예수님을 제거하려고 결탁하고 그분을 궁지에 빠지게 할 질문을 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만을 섬기라.’고 하시면 로마 황제에게 반역하는 사람이 되고, ‘황제를 섬기라.’고 하시면 하느님을 거역하는 예언자로 전락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의 질서를 존중하되 하느님을 모든 것 위에 섬기라고 가르치십니다. 정치의 질서와 종교의 질서는 구분되는 것이지만 서로 연결되어 있는 접점이 있습니다.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은 다른 것이나, 속된 것 안에 거룩한 것이 존재하며, 거룩한 것 안에 속된 것이 남아 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섬기지만 이 세상의 삶을 꾸려 나가려면 재물이 필요합니다. 종교가 이 세상의 권력을 추구하지 않지만, 이 세상의 권력이 하느님의 모상인 인간의 존엄성을 위해 봉사할 수 있도록 권고하여야 합니다.
거룩한 질서와 속된 질서가 섞여 있는 이 현세에서 티 없고 흠 없는 사람으로 살아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두 질서의 충돌과 혼란 속에서 우리는 이 세상의 질서를 존중하면서도 하느님을 섬기는 지혜를 가져야 하겠습니다.
=====================
[제주교구 한재호 루카 신부님]
바리사이들과 헤로데 당원 몇 사람이 예수님께,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합당한지, 그렇지 않은지에 관하여 물어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데나리온 한 닢을 보여 주시며 “이 초상과 글자가 누구의 것이냐?” 하고 물으시자, 사람들은 “황제의 것입니다.” 하고 대답합니다.
과연 사람들의 이 대답은 맞는 것이었을까요? 황제는 누가 창조하였습니까? 누가 황제에게 생명을 주었습니까? 세상 모든 것을 관장하시는 하느님 아니십니까? 세상에 어찌 황제의 것, 하느님의 것이 따로 존재할 수 있겠습니까? 황제의 것이라 여기는 모든 것이 사실은 하느님의 것입니다.
이를 바탕으로 예수님께서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드려라.” 하신 말씀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정치적인 것은 정치인들에게 맡기고, 신앙적인 것은 종교인에게 맡겨야 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는 황제의 것으로 여기는 모든 것이 사실은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사용되어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다만 예수님과 논쟁하는 이들이 이를 이해하지 못하였을 뿐입니다.
많은 이들이 교회가 사회 문제에 관여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가톨릭 교회 교리서』는 교회가 복음의 빛을 받아 각 시대와 환경에 따라 발생하는 인간의 기본권과 영혼들의 구원과 관련된 정치 문제에 대하여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2246항 참조)
부조리와 불평등, 억압과 폭력으로 많은 이들이 신음하고 있는데도, 모든 이의 참주인이신 하느님께서 그것이 정치적인 문제라고 선을 긋고 무심하실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분께서 마음을 쓰시는 만큼 교회는 그분의 뜻에 따라 움직여야 합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것을 하느님께 돌려드리는 태도입니다.
=====================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드려라."(마르12,17)
<모든 것은 하느님의 것!>
오늘 복음에서 언급되고 있는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과 원로들은 예수님께서 오셨을 당시 사회의 지도층이자 기득권을 누리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그들이 예수님께 말 장난을 걸어옵니다. 말로써 예수님께 올무를 씌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진퇴양난에 빠트리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그들에게 세금을 바칠 때 사용하는 데나리온 한 닢을 가져다 보여달라고 하시면서, 그들에 말씀하십니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드려라."
하늘 아래에 있는 모든 것들 중에서 하느님의 것이 아닌 것이 어디 있는가?
하느님을 믿는 이들은 모든 것의 주인이 하느님이시며, 지금 나에게 주어지는 모든 것은 주인이신 하느님께서 나에게 주신 은총의 선물이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오늘 독서에서 언급되고 있는 '토빗'처럼, 우리는 자선과 선행을 통해서 하느님의 것을 하느님께 되돌려 드립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성 유스티노 순교자처럼, 나의 목숨까지도 너를 위해 내어 놓는 '순교의 길'을 걸어갑니다.
토빗의 아내는 참새 똥 때문에 네 해 동안 시력을 잃은 채 지낸 토빗에게 이렇게 한탄합니다. "당신의 그 자선들로 얻은 게 뭐죠? 당신의 그 선행들로 얻은 게 뭐죠? 그것으로 당신이 무엇을 얻었는지 다들 알고 있어요."(토빗2,14)
우리는 어떤 댓가를 바라거나, 어떤 조건을 걸고 자선을 베풀거나, 선행을 하지 않습니다. 자선과 선행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하느님께 되돌려 드리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하느님의 것입니다.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돌아가는 '공수래공수거 인생'이 이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많은 것을 넘치도록 주신 하느님께 깊은 감사를 드리고, 자선과 선행을 통해 하느님의 것을 하느님께 돌려드리도록 합시다!
=====================
[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나만큼은 오직 하느님께>
마르코 12,13-17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문제)
그때에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과 원로들은 예수님께 말로 올무를 씌우려고, 바리사이들과 헤로데 당원 몇 사람을 보냈다. 그들이 와서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저희는 스승님께서 진실하시고 아무도 꺼리지 않으시는 분이라는 것을 압니다. 과연 스승님은 사람을 그 신분에 따라 판단하지 않으시고, 하느님의 길을 참되게 가르치십니다. 그런데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합당합니까, 합당하지 않습니까? 바쳐야 합니까, 바치지 말아야 합니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위선을 아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데나리온 한 닢을 가져다 보여 다오.” 그들이 그것을 가져오자 예수님께서, “이 초상과 글자가 누구의 것이냐?” 하고 물으셨다. 그들이 “황제의 것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이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 그들은 예수님께 매우 감탄하였다.
<나만큼은 오직 하느님께>
나의 것은
누군가에게
돌려주더라도
나만큼은
오직 하느님께
돌려드려야지요
나의 것은
누군가를 통해
주었을지라도
나만큼은
하느님께서 몸소
주셨기에
나의 것은
앞서 언젠가
누군가의
것이었을지라도
나만큼은
늘 그렇게
오직 하느님의
것이니까요
=====================
[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기도하지 않는 자신이 너무 밉고 싫다는 분을 만났습니다. 신앙심이 깊은 분께 물어보면 동기부여가 되어야 기도를 잘 할 수 있다고 하는데, 솔직히 자신은 동기부여가 잘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침에 일어나 열심히 기도하면서 오늘 하루 잘 살겠다고 다짐하지만, 저녁에는 기도도 하지 않고 아무 생각 없이 텔레비전만 보고 있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자기 힘으로는 도저히 안 되니, 주님께서 도와주셔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분은 왜 기도하는데 동기부여가 되지 않을까요? 텔레비전을 보고 싶은 동기 수준이 더 높아서입니다. 동기부여가 안 되는 것이 아니라, 동기 수준이 높은 것을 먼저 할 뿐입니다.
저는 다른 어떤 바쁜 일이 있어도 20년 넘게 새벽 묵상 글을 꼭 쓰고 있습니다. 제 동기부여 수준에서 높은 자리를 이 묵상 글이 차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기도와 묵상입니다. 그래서 기도와 묵상이 제 동기부여 수준에서 최고 높은 수준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주님께 나아가는 자신의 동기부여 수준을 높이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동기는 가지는 것이 아니라 부여하는 것입니다. 이 점을 명심하여 주님께 어떤 의미를 두고 있는가를 찾아봐야 합니다.
바리사이와 헤로데 당원이 예수님께 다가옵니다. 바리사이 사람들은 로마에 세금내는 것을 거부했고, 이에 반해 헤로데 당원들은 로마에 세금을 내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서로 반대되는 행동을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서로가 서로를 경멸하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둘이 힘을 모읍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이렇게 곤란한 질문을 던집니다.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합당합니까? 합당하지 않습니까? 바쳐야 합니까, 바치지 말아야 합니까?”
세금을 내라고 하면 민족의 반역자가 될 것이고, 세금을 내지 말라고 하면 로마의 반역자가 되는 진퇴양난의 상황을 만든 것입니다. 서로 경멸하는 사이였지만, 그들은 자기들이 반대하는 예수님을 제거하기 위해서 이렇게 함께 간계를 꾸밉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잘못한 것은 무엇입니까? 아무것도 없습니다. 자신의 부끄러운 부분을 드러낸다는 이유 정도를 말할 수 있겠지요.
그들의 동기부여는 자신을 높이는 삶이었습니다. 자신을 높일 수만 있다면 경멸하는 사람과도 손을 잡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참 진리의 모습으로 다가오시는 주님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나 자신의 동기부여가 주님을 향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 안에서 참 진리의 길을 향해 나아갈 수 있게 됩니다.
++++++++++++++++++
<‘만약’과 ‘다음’>
미국의 어느 심리학자가 심리적 질병과 그 치유 방법을 다룬 책을 출판했습니다. 이 책은 곧바로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았고, 수많은 대학과 기업에서 그를 초대했지요. 그런데 어느 날, 한 대학에서 강연을 시작하면서 자신의 책을 집어 들며 이렇게 말합니다. “이 책은 무려 천 페이지나 됩니다. 3천여 가지의 치료 방법과 1만여 가지의 약이 소개되었지요. 하지만 이 책의 내용을 단 몇 글자로 줄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는 칠판에 ‘만약’과 ‘다음’이라는 글자를 쓰며 말합니다. “많은 사람이 힘들어하는 이유는 '만약' 때문입니다. '만약 내가 이 사람과 결혼하지 않았더라면', '만약 그때 직업을 바꿨더라면' 등을 생각하며 갈등을 키워 가지요.
하지만 이것은 한마디로 바꿀 수 있습니다. '다음'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다음에 기회가 생긴다면 꼭 그렇게 해야지', `다음에는 그 사람을 놓치지 말아야지'처럼요. 사람들은 이런저런 불만 때문에 자신이 불행하다고 여기지만, 상황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면 지금보다 훨씬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돌이킬 수 없는 과거를 돌아보느라 미래를 내다보지 못한다면, 여러분은 영원히 불행에서 벗어나지 못할 겁니다.” 여러분 마음속에는 ‘만약’이 있나요? 아니면 ‘다음’이 있습니까?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우리는 하느님께 속한 사람입니다>
국가경영에 있어서 세금은 중요한 문제입니다. 권력자들은 국민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더 많은 세금을 거둬들여 더 많은 사업을 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세금을 내야 하는 많은 국민은 어떻게 하면 적게 낼 수 있을까를 생각합니다. 사실 어느 사회에서나 세금 문제는 골칫거리입니다. 코로나19로 인한 재난지원금이 많은 사람에게 큰 힘이 되지만 결국 갚아야 할 빚입니다. 보편복지를 외쳐도 실질적으로 재원 마련 대책이 없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한때는 더 내고 덜 받는 연금 문제로 온 나라가 시끄러웠습니다. 눈앞에 것만 보아서도 안 되고 기금을 악용해 먹어도 안 됩니다. 주택문제에 특공이니 뭐니 하는 소리가 서민에게는 상처입니다. 재정건전성은 생각하지 않고 선거를 위한 선심성 재난지원금은 결국 국민의 부담금으로 되돌아올 것이 뻔합니다.
식민지 체제의 유다에서 세금문제는 야훼 하느님만을 유일한 왕으로 인정하는 그들의 신앙과 결부되어 더욱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그들에게 세금은 곧 로마의 법에 복종해야 하는가, 하느님의 법을 좇아야 하는가의 문제였습니다.
극단적인 민족주의자들은 납세를 거부하며 반란을 일으켰으나 유혈 진압되고 말았고 그 후 억지로 세금을 냈습니다. 그러나 각자의 처지나 주장은 아주 달랐습니다. 바리사이들은 납세를 로마의 노예를 드러내는 혐오스런 짓이며 유일하신 이스라엘의 주님이신 야훼 하느님께 불충하는 짓으로 여겼으나 현실적으로 로마의 막강한 군사력 때문에 마지못해 세금을 내야 했습니다. 반면에 로마에 의지하고 있는 헤로데 당원들은 당연히 카이사르에게 세금을 납부하여 로마의 평화와 안정을 누려야 한다는 입장을 취하였습니다. 실로 납세는 민중 정서와 로마권력이라는 양날을 지닌 날카로운 칼이었습니다.
일제강점기를 생각하면, 이해가 쉬울 것 같습니다. 일본과 맞서는 독립군이 있었고 일본의 권력에 빌붙어 사는 친일파가 있었습니다. 독립군에게 있어서 공출을 당하는 것은 치욕적인 일이니, 그에 응할 수 없는 법입니다. 그러나 친일파는 자기의 잇속만을 챙기는 파렴치한 모습으로 민족을 배반하였습니다. 일제의 권력에 세금을 바쳐야 합니까? 거부해야 합니까?
이런 상황에서 바리사이들과 헤로데 당원은 아첨을 하면서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합당합니까? 합당하지 않습니까? 바쳐야 합니까? 바치지 말아야 합니까?”(마르12,14) 하고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이는 어느 쪽을 선택하여도 예수님은 다치게 되어있는 물음이었습니다. “세금을 내라”고 하면 민족주의자들인 군중을 실망케 하고 분노하게 할 것이며 , “내지 말라”고 말한다면 로마 권력에 대한 도전으로 처벌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야말로 진퇴양난의 길입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데라니온 한 닢을 가져오라하여 “이초상과 글자가 누구의 것이냐?” 하고 물으시고, 반대자들이 “황제의 것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마르12,17).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돌려주라는 말은 빚을 갚거나 배상금을 지불한다는 뜻입니다. 결국 국가라는 공동선을 위해 세금을 납부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지만 진짜주인은 누구입니까? 황제가 만든 은화는 그에게 돌려주면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인간이니 우리 안에는 하느님의 초상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의 전 존재를 하느님께 바쳐야 하는 것입니다. 황제에게는 돈만 주면 그만이지만 우리는 자신을 봉헌해야 합니다. 사실, 사람은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되었으니 모든 사람은 다 하느님의 것입니다. 그렇다면 모든 사람은 하느님께 돌려드려야 할 빚을 안고 있는 것입니다.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들과 원로들은 자기 속을 숨긴 채 올가미를 씌우려 했지만 속을 꿰뚫어 보시는 예수님께서는 황제도 결국 하느님의 피조물이므로 하느님께 속한 사람으로 하느님께 충성을 드려야 마땅하다는 것을 확인하셨습니다. 유다의 지도자들이나 로마의 황제도 백성을 억압하고 착취할 권리는 없습니다. 하느님의 백성은 오직 하느님께 속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것을 내 것으로 삼을 수는 없는 법입니다. 우리의 생애에서 물질의 세금보다 하느님께 드려야 할 세금을 제대로 바치고 있는가? 돌아보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기도와 희생의 봉헌, 사랑의 실천을 통해서 그리고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모든 것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기꺼이 돌려드림으로써 기뻐해야 하겠습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하느님께로부터 서로 다른 탈랜트를 받았습니다. 그 모두를 그분을 위해서 사용할 수 있다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요? 우리는 우리 자신을 하느님께 돌려 드려야 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삶(사랑)의 신비, 삶(사랑)의 기적>
-삶은 우연이 아니라 섭리의 신비다-
“주님의 산으로 오를 이 누구인고? 거룩한 그곳에 서 있을이 누구인고?” 그 손은 깨끗하고 마음 정한 이, 헛군데에 정신을 아니 쓰는 이로다. 이웃에게 거짓을 말하지 않는 이로다. 주님이 그에게 복을 내리 시리라. 구원의 하느님께 갚음을 받으리라.”(시편24,3-5).
주님의 산, 불암산 기슭 성전에서 아침 미사를 봉헌하는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오늘 아침성무일도시 마음에 와닿은 시편성구입니다.
하루하루가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하루하루가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하루하루가 하느님의 기적입니다.
하루하루가 신비입니다.
하루하루가 사랑입니다.
우연은 없습니다. 모두가 하느님의 신비로운 사랑의 섭리 안에 펼쳐지는 선물같은 하루입니다. 도대체 너무나 다른 우리들이 이렇게 한 수도가정을 이뤄 살고 있다는 사실도 하느님 신비의 섭리 은총이 아니곤 설명이 불가합니다.
이런 깨달음에서 샘솟는 하느님 찬미와 감사요 행복감입니다. 절로 생각나는 행복기도 두 연입니다. 아무리 인용해도 새롭고 좋은 내용입니다. 많은 분들이 좋아하며 때로는 읽다가 울컥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주님, 눈이 열리니 온통 당신의 선물이옵니다.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
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오늘 지금 여기가 하늘 나라 천국이옵니다.”
-“주님, 당신은 저희의 모두이옵니다. 저희의 사랑, 저희의 생명, 저희의 힘, 저희의 기쁨, 저희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요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하루의 선물이옵니다.”-
선물대신 기적을, 신비를, 은총을, 섭리를 넣어도 그대로 통합니다. 정말 하느님을 믿는 이들이라면 실망, 절망, 원망의 삼망은 있을 수 없고 감사-감동-감탄의 삼감의 삶에, 진실-성실-절실의 삼실의 삶, 유쾌-상쾌-통쾌의 삼쾌의 삶만이 있을 뿐입니다.
끝은 시작입니다. 어제로 기분 좋았던 5월의 성모성월이 끝나자 오늘은 장미꽃 사랑처럼 화사한 6월 예수성심성월의 시작입니다. 성모성월을 아름답게 장식한 어제 5월의 마지막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방문 축일이 저에겐 예사롭지 않았습니다.
특히 어제 하루 많이 묵상한 말마디가 ‘영적도반’이었습니다. 저에게는 주님 안에서 관계 맺고 있는 모든 이들이 영적도반처럼 생각됩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 복음의 예수님은 영원한 영적도반처럼 생각되고 오늘부터 시작되는 제1독서 토빗도 영적도반처럼 생각됩니다.
‘저에게는 매일이 영적도반의 방문 축일입니다’, 바로 어제 강론 제목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어제 따라 면담이나 고백성사차 오전 오후 뜻밖에 방문했던 분들이 아주 많았고 저는 주저없이 ‘오늘은 형제님(자매님)의 수도원 방문 축일입니다’ 라고 기분 좋은 덕담德談을 드렸습니다. 어느 자매와 나눈 문답도 생각납니다.
-“판단과 분별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판단은 미움에서 나온 편벽된 생각입니다. 전체가 아닌 부정적 일부분만 볼 때 판단입니다. 전체와 부분을 동시에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분별입니다. 참으로 있는 그대로 보는 분별의 지혜, 분별의 사랑을 지닌 이들은 결코 차별하지 않고 사람이든 삶이든 있는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사람 눈에 기적奇蹟이지 하느님 눈에는 일상日常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분별의 지혜가, 천상적 지혜가 바로 그러합니다. 인간적 지혜로는 세상적 지혜의 극치인 이들의 함정을 빠져 나갈 수 없습니다.
세금을 내라해도 걸리고 내지 말라 해도 걸립니다. 양자택일이 불가능한 참 대답하기가 막막합니다. 바로 이 절체절명의, 사면초기의 위기의 순간, 기적같은 분별의 지혜가 선물처럼 주어집니다.
참으로 상쾌하고 통쾌하고 유쾌한 장면입니다. 참 놀라운 것은 이런 위기에 순간에도 예수님께는 전혀 두려움이나 불안의 분위기를 느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언제나 깊고 고요한 내적 평화를 지닌 예수님이셨습니다.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합당합니까, 합당하지 않습니까?”
“이 데나리온의 초상과 글자가 누구의 것이냐?”
“황제의 것입니다.”
사실 데나리온의 한쪽에는 황제의 흉상과 ‘티베리우스 황제, 지존한 신의 아들’이란 각명이, 또 다른 쪽에는 황제의 존칭 ‘대제관’이란 각명과 함께 대비 리비아 좌상이 새겨져 있습니다. 이어지는 예수님의 통쾌한 답변에 이들은 크게 감탄했다 합니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 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
적대자들의 상상을 초월한 천상적 기적같은 지혜이지만 하느님의 눈에는, 예수님의 눈에는 일상일뿐입니다. 결코 정교분리 원칙을 천명하는 것이 아닙니다. 황제의 초상이 있는 데나리온은 황제의 것이지만 하느님의 모상이 새겨져 있는 인간은 하느님의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인간이, 인간을 포함한 세상 모두가 하느님의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전체적인 시야를 보는 지혜를 지니고 각자 세금을 낼 것인지 내지 말 것인지는 스스로 판단하라는 것입니다. 저 같으면 조용히 세금을 낼 것입니다. 문득 조선시대 청나라와의 병자호란때 실리를 추구한 주화파(최명길)와 명분을 추구한 척화파(김상헌)의 대결이 생각납니다. 결국 생존이 절박한 절체절명의 순간 인조 임금은 주화파의 손을 들어 줬고 저 또한 같은 생각입니다.
참으로 믿는 이들에게 우연이나 요행은 없습니다. 모두가 하느님 자비의 섭리의 손길 안에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나치에 저항했던 본회퍼의 옥중서간에서 읽은 ‘일어나는 모든 일이 하느님의 뜻은 아니다. 그러나 하느님 허락없이 일어나는 일은 하나도 없다’ 구절도 생각납니다. 오늘 토빗의 사건이 그러합니다. 전개되는 토빗의 고난이 욥과 흡사합니다.
죽은 이를 묻어 준 선행 후 닥친 토빗의 불행이 정말 이해 불가합니다. 뜻밖에 뜨거운 참새똥이 떨어져 잠자던 토빗의 눈을 멀게 했으니 참으로 알 수 없는 하느님입니다. 그러나 전개되는 내용을 보면 이 또한 하느님 섭리 손길 안에서 일어난 일임을 알게 됩니다. 사실 당장은 몰랐지만 삶의 뒤안길에서 회고해 볼 때 굽이굽이 하느님 섭리의 발자취임을 깨닫는 경우는 얼마나 많은지요!
“당신의 그 자선들로 얻은 게 뭐죠? 당신의 그 선행들로 얻은 게 뭐죠? 그것으로 당신이 무엇을 얻었는지 다들 알고 있어요.”
토빗을 향한 아내의 말이 오늘 우리게 화두처럼 주어집니다. 참으로 믿음의 시련이 아닐 수 없습니다. 화답송 시편 후렴이 그대로 토빗의 심중을 대변합니다. “의로운 마음 굳게 주님을 신뢰하네.”(시편12,7ㄴ) 믿음의 어둔 밤을 묵묵부답黙黙不答, 믿음으로 통과해 나가는 토빗의 이야기는 바로 우리의 이야기일 수 있습니다.
오늘 예수 성심 성월 첫날은 성 유스티노 순교자 기념일입니다. 2세기 뛰어난 평신도 신학자이자 호교론자였던 유스티노 역시 ‘신의 한 수’ 같은 교회에 주신 하느님의 선물같은 성인이였습니다. 참으로 평생 가열加熱차게 치열熾熱하게 하느님을 찾았던 구도자의 모범 성 유스티노입니다.
마침내 철학의 한계를 느낌과 동시에 순교자들의 영웅적인 행동에 감동한 유스티노는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교 신자가 됩니다. 이후 로마에서 오래 머물며 설교와 저술로 그리스도교를 수호하다가 165년 다른 6명의 동료들과 함께 참수형으로 순교합니다.
새삼 순교는 사랑의 성체와의 결합임을 깨닫습니다. 주님 사랑의 최고의 표현이 순교요 순교적 삶입니다. 이런 순교자의 삶을 통해 환히 빛나는 예수성심의 사랑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예수성심의 사랑으로 충만한 삶을 살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아멘.
=====================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예수 성심 성월을 여는 오늘 미사의 말씀은 하느님의 것과 세상 것 사이의 질서를 가르쳐 주십니다.
"저희는 스승님께서 진실하시고 아무도 꺼리지 않으시는 분이라는 것을 압니다. 과연 스승님은 사람을 그 신분에 따라 판단하지 않으시고, 하느님의 길을 참되게 가르치십니다."(마르 12,14)
수석 사제들, 율법 학자들, 원로들이 보낸 사람들이 예수님께 와서 장황하게 말문을 엽니다. 얼핏 들으면 예수님의 존재에 대해 잘 알고 있는데다 그분께 호의적이기까지 한 듯 느껴지지요.
하지만 이 지당한 이야기 안에는 올가미가 감추어져 있습니다. 어떤 선택을 해도 예수님은 황제와 식민지 백성인 이스라엘을 동시에 만족시킬 수 없게 되실 테니까요.
아무도 꺼리지 않고 신분에 따라 판단하지 않는 분으로서 황제의 편에서 세금을 독려한다면 식민지 백성의 정서에 반하는 형국이 되겠지요. 반대로 진실하고 하느님의 길을 참되게 가르치심으로써 이방인과 불화한다면 민중 봉기와 반역을 조장하는 역적으로 몰릴 수도 있습니다. 이는 허울 좋은 말로 예수님을 떠보며 그분의 미래를 차단하려는, 세속 정치에서는 아주 흔한 술수일 것입니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 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드려라."(마르 12,17)
예수님께서 우문에 현답을 던지십니다. 그들은 감탄하지만, 데나리온 한 닢에 들어 있는 의미들을 제대로 알아들었는지는 미지수입니다.
하느님은 세상 모든 것의 주인이시지요. 종교 영역만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과 그 안에 존재하는 모든 가치들, 제도들이 다 하느님께 속해 있다는 뜻입니다. 비록 데나리온 한 닢이라는 물체에 새겨진 초상과 글자가 누군가를 표현한다 해도, 그 글자와 사람은 물론 그 가치와 제도까지 오로지 하느님의 것이지요.
제1독서에서는 충실한 유다인의 전형인 토빗이 등장합니다.
"토빗은 죽은 이를 묻어 준 다음"
도입 부분부터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질 듯 느껴집니다. 토빗은 이미 아시리아 임금 산헤립이 죽인 이스라엘 사람들의 주검을 묻어 준 일로 도망다니는 처지가 되었고 모든 재산을 몰수당했었지요.(토빗 1,16-20 참조)
이국땅에 흩어져 사는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비극적으로 목숨을 잃고 주검마저 버려진 이들에게 마지막 예를 갖춰주는 일은 참으로 훌륭한 선행이었습니다. 토빗은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이러한 선행과 자선을 멈추지 않는 의인이고 선인이었지요.
"당신의 그 자선들로 얻은 게 뭐죠? 당신의 그 선행들로 얻은 게 뭐죠? 그것으로 당신이 무엇을 얻었는지 다들 잘 알고 있어요."(토빗 2,14)
사고로 시력을 잃은 토빗과, 그 대신 생계를 꾸리느라 지친 아내 사이에 오해가 생겨, 아내가 토빗에게 반어적으로 질문들을 퍼붓습니다.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사고로 장애를 입은 것이 마치 자선과 선행의 보답이냐고 비아냥대는 듯 들리니, 오죽 답답하고 서러웠으면 저리 따지나 싶어 부부 모두에게 안쓰러운 마음이 들 지경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재산이나 건강, 자손 등을 하느님의 축복으로 보고, 질병과 실패, 후손 없음을 죄로 인한 징벌로 여겼습니다. 그렇다면 가난한 이들과 버려진 동족을 위해 헌신한 토빗이 재산과 시력을 잃은 일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되어버리는 것이죠.
탐욕이 하느님의 것과 황제의 것, 하느님 일과 세상의 일을 혼동하면 할수록, 인간은 자꾸 하느님과 거래를 하고 싶어지는 것 같습니다. 이만큼 할 테니 이렇게 해 달라고요. 그렇다면 고통이나 불행은 설명할 길이 없게 됩니다. 달콤한 건 섭리고 쓴 건 자기 죄가 되어 버리니까요.
사실 자선과 선행을 현실적 보상을 의식하고 행하지는 않지요. 주님의 축복을 끌어내기 위해 무언가 한다면 자칫 거래가 되어 버리니까요. 하지만 주님은 우리와 흥정을 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자선과 선행은 어려운 일을 당한 이웃의 회복과 유익이 목적이기는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베푸는 이 자신을 위한 일이기도 합니다. 자선과 선행은 인간이 하느님 자녀다움, 하느님 모상성을 충만히 발휘하는 하느님의 일이기 때문이지요. 베푸는 이는 베풀수록 모든 것의 주인이시면서도 자기 소유를 주장하지 않고 다 내어 주시는 하느님을 닮아갑니다. 결국 더 행복하게 되는 이는 받는 이보다 주는 쪽입니다.
자선과 선행은 베푸는 그 순간 이미 큰 축복입니다. 줄 수 있고 나눌 수 있는 그 자체가 물질적이고도 영적인 커다란 축복일 터이고, 나누는 이의 비움과 관대함과 자비와 흡족함은 이미 하느님의 마음과 일치하니까요.
사랑하는 벗님! 우리,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리고 세상 것은 세상에 돌리는 지혜를 청합시다. 모든 것의 주인이신 분께서 우리에게 무얼 좀 더 주셨다면 더욱 두려운 마음으로 그분이 원하시는 바를 살피고 경청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분 뜻에 따라 베푼 모든 것에 대해서는 이미 나눔 자체가 보상이고 축복임을 감사하며 주님 마음에 우리 마음을 합하면 그것으로 족하답니다.
예수 성심 성월의 첫 날, '자비와 인정이 넘치는 예수 성심'께 이 한 달을 맡겨 드립시다.
예수 성심,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아멘.
=====================
[광주대교구 김홍언 요한보스코 신부님]
♡김홍언 신부님의 영성의 샘물♡
♥즐거움은 가톨릭 신학에 결코 반가운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즐거움은 삶에 활력을 주는 긍정적 원동력
그리스 철학은 즐거움을 어떤 행위를 하게 만드는 긍정적인 원동력으로 보았다. 플라톤은 추구하는 목적에 따라 즐거움을 여러 형태로 구분했다. 높은 도덕적 가치나 이성적이고 윤리적인 목적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느끼는 즐거움은 사람의 품위에 어울리는 것이다.
이와 달리 순전히 세속적이기만 한 즐거움은 그렇지 않다. 플라톤은 즐거움을 사람의 내적 평정을 되찾아주는 것으로 보았다. 말하자면 즐거움은 내면의 건강에 매우 필요한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즐거움에 대해 다른 견해를 성숙시켰다. 그는 즐거움이 어떤 온전한 행위에 뒤따른다고 보았다. 사람이 어떤 일에 온전히 몰두하여 제대로 할 때 언제나 즐거움을 체험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즐거움은 우리의 행위에 동반하는 존재다. 우리에게 주어진 본성적인 능력을 온전히 발휘할 때 우리는 즐거움을 체험한다 -<사는 것이 즐겁다>중에서
♣즐거움은 가톨릭 신학에 결코 반가운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오랫동안 즐거움을 성적 즐거움과 동일시했습니다. 그래서 즐거움을 사람을 충만케 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위험에 처하게 하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교부들은 즐거움을 찾는 것을 죄로 여겨 타락한 사람들의 특징으로 여겼습니다. 바티칸 제2차 공의회 전에는 금서와 금지 영화 목록이 있었습니다. 심지어 해수욕장에서 노출하는 것도 금지되었고 미스 코리아 대회에 나가 비키니를 입고 노출하는 것도 죄로 취급하여 참가한 여인에게 한 달간 매일 십자가의 길을 하도록 보속을 내린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토마스 아퀴나스는 합당한 성적 즐거움을 ‘인간의 내면에 깊이 자리 잡은 신적 본성, 즉 삼위일체적 본질’의 자취로 보았습니다. 즐거움은 풍성함이고 충만함이며 하느님의 모상입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삼위일체적 본질 안에서 최상의 즐거움을 누리십니다.
---------------------------
*오늘도 그리스도의 향기 됩시다.
=====================
[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NAglFL6Ux2U&feature=youtu.be
=====================
[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1)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드려라."(마르 12, 17)
내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것이다.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끊임없이
내어주시는
하느님이시다.
헤아릴 수 없는
하느님 사랑이다.
하느님께서
도와주시지
않으면
아무 것도
이룰 수 없다.
믿음은
하느님의 것을
하느님께
돌려드리는
우리의
생활이다.
생활의 깊이는
믿음의 깊이이다.
믿음의 향기는
봉헌의 삶이다.
생활 속에
봉헌이 있다.
봉헌은
믿음의
버팀목이다.
하느님께
돌려드리는
생활이
참된 행복이며
참된 자유이다.
생활의 실천이
우리를
거룩함으로
이끄는
첫 발걸음이다.
모든 사랑을
다 주시는
하느님이시다.
새로운 삶이란
하느님의 것을
하느님께
돌려드리는
사랑의 실천이다.
우리는
어떤 사람인가?
++++++++++++++++++
(2)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 (마르 12, 17)
예수님의 삶은
시작도 마침도
봉헌이셨습니다.
예수님의
봉헌을 먹고 사는
우리들 삶입니다.
우리의 봉헌도
매순간 영글어
가야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봉헌을 통해 더욱
뜨거워집니다.
우리 마음을
하느님께 바치는 것이
봉헌이며 회개입니다.
건너뛸 수 없는
봉헌의 이 여정입니다.
봉헌을 통해
이 현실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하느님이 계십니다.
하느님의 길은
봉헌의 길입니다.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는
하느님을 잊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언제나 먼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손을 내미십니다.
봉헌으로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를
성장시키는 봉헌의
매순간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이 마음을
가장 좋으신 하느님께
봉헌합니다.
서로를 살리는
봉헌입니다.
=====================
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이름,본명,지역(본당),축일,연령,연락처]를 문자로 보내주세요.
010-3284-9295 | 카톡ID jijiveve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