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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 불교의 학문적 형성과 전개(I) / 이민용
1. 발견된 불교
우리 동양인에게는 자명한 문화 전통이고 역사적 사실인 불교이지만, 유럽인들에게 불교는 근세에 이르러서야 발견되고 지적 호기심의 대상으로 떠오른 종교였다. 빗대어 말하면, 어느 한 서양 탐험가가 미지의 땅인 동양의 오지를 여행하며 탐색하다 오래된 사원에서 이상한 조상(造像)과 희한한 문헌 꾸러미를 발견한 것이나 진배없다. 아니면 야만에 가까운 현지인들이 이 탐험가를 이끌어 어느 폐허의 사원으로 인도하고 벽장 속에서 문서 꾸러미를 꺼내 펼쳐 보인다. 그도 아니라면 일단의 토착민들이 모여 문서 쪼가리를 펼쳐 놓고 웅성거리며 이상한 주문을 외우는 장면을 목도하는 것이다. 전후 사건의 맥락에 얼마간의 차이는 있겠지만 흔히 미지의 동양 개척을 줄거리로 하는 영화에나 나올 법한 장면들이다. 서양에서의 불교는 거의 정확하게 이런 과정을 통해 ‘발견’돠고 연구되어 ‘학문의 대상’으로 떠오른 것이라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서양이 동양을 개척하는(실제로는 침략과 약탈이 주요한 과정이었다) 과정에서 오히려 거꾸로 서양이 자기 인식을 하며 또 하나의 르네상스기를 맞이하게 되는 역설적 상황에 부닥뜨리게 되었다. 그것을 특징지어 ‘동양적 르네상스(Oriental Renaissance, 1680~ 1880)’의 발흥이라고도 부른다. 인도의 재발견과 맞물린 유럽의 자기 발견이 동양적 르네상스를 초래했고, F. 슐레겔은 그런 현상을 두고 이렇게 표현했다. “모든 것, 그렇다, [유럽의] 모든 것은 예외 없이 인도에 시원을 두고 있다.”라고. 유럽의 언어들과 신화 전설들은 한결같이 인도와 연결됨을 인지하는 말로 ‘인도-유럽(Indo-European)’이라는 어휘와 개념이 도입된 것도 이 시기이다. 한마디로 동양적 르네상스에서 인도학이 차지하는 열풍은 대단했다.
이런 분위기가 한바탕 휩쓸고 지나간 후 영국이 인도를 석권하면서 식민지 영국 관료들에 의해 점차 불교 문헌들이 발견되고 문헌자료 속에서 불교의 모습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유럽 지성인들 사이에서 불교가 발견되어 주목의 대상으로 떠오른 것은 이 동양적 르네상스의 발흥 시기보다도 뒤늦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인도 열풍이 불러온 일종의 후풍과 같은 작은 유행이 불교에 대한 관심의 대두였다.
불교의 발견을 선도하는 일련의 작업들은 이미 진행되고 있었다. 1784년에 찰스 윌킨스(Charles Wilkins, 1749~1836)에 의해 《바가바드기타(Bhagavad-gita)》가 영역되었고, 최초의 프랑스 인도학자인 앙크틸 두페롱(Anquetil-Duperron, 1731~1805)에 의해 《우파니샤드(Oupnek’hat)》가 페르시아어 중역으로 번역되고 있었다. 특히 찰스 윌킨스는 영국에서 인도학 전반에 걸친 개척자라 할 윌리엄 존스 경(Sir William Jones, 1746~1794)의 영향을 받으며 그의 지원 아래 《바가바드기타》를 번역했다. 따라서 존스 경이야말로 유럽의 동양적 르네상스에 큰 기여를 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이미 1784년에 벵골아시아학회(Asiatic Society of Bengal)를 창립하여 인도학 전반에 걸친 관심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다. 따라서 그 역시 불교를 인지하며 불교의 존재를 확인하는 일에도 관여했다.
이 같은 사실들을 종합해보면, 불교에 대한 관심은 인도에 대한 열풍, 곧 인도의 지혜가 전승된 《라마야나(Ramayana)》 《마하바라타(Mahabharata)》 《우파니샤드》 《바가바드기타》 같은 문헌들이 유럽에 널리 알려지고 난 이후였다. 그뿐 아니라, 그리스적인 것과 이집트학(Egyptology)의 유행도 이미 지난 19세기 중반에 이르러서야 관심을 불러일으키기 시작했다.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당시 불교는 이미 인도에서 사라진 지 오래되었다. 우연한 기회에 인도 각지에서 활동하던 언어학적 소양을 지닌 영국 식민 행정관료들에 의해 불교 문헌이 ‘발견’된 것이 불교에 대한 학문적 접근의 시작이었다. 곧 인도의 전승 문헌들의 중요성을 인지하여 인도 고전어에 대한 지식을 지니고 있던 이들은 고문헌들을 수집하였고 그 과정에서 의외의 소득이 발생했다. 그것이 불교 문헌의 발견이었다. 즉 불교는 우연한 기회에 ‘문헌’ 수집을 통해 ‘발견’된 것이었다. 따라서 서구에서 불교의 존재는 문헌 속에만 존재하는 기이한 형태의 종교로 부활한 것이었다.
2. 서구 불교학의 발주자들
유럽이 불교를 직접 접하고 그에 대한 기록을 남긴 역사는 오래되었다. 유럽인들이 불교를 접했음을 알려주는 최초의 문헌으로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츠(Clement of Alexandria, 150~215년경)의 “인도인들 가운데 부처님(Boutta)의 계율을 따르는 사람들이 그의 특출난 고귀한 행위 때문에 그를 신으로 존경했다”라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후 천 년이 지나 마르코 폴로(1254~1324)는 석가모니 부처님(Sagamoni Borcan)에 대한 매우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서술로 불교를 유럽에 알렸다. 16세기에는 불교에 대한 매우 부정적인 설명이 일본에 파견된 선교사 프란시스 자비에르(St. Francis Xavier, 1506~1552)와 중국에 건너온 이탈리아 선교사 마테오 리치(Matteo Ricci, 1552~1610)에 의해 본국으로 보고되었다. 또한 종교적인 편향과 단편적 관찰로 인해 불교의 현장은 왜곡되고, 기이한 발상에 근거한 이해들과 근거 없는 소문들에 의거한 불교의 모습이 서술되기도 했다. 한편 이탈리아 예수회 신부인 이폴리토 데시데리(Ippo-lito Desideri, 1684~1733)는 최초로 티베트에 들어가 티베트어와 그 문화를 연구하고 당시의 티베트가 몽골의 영향 아래에 있었기에 몽골에 대한 전반적 지식까지 전달하기도 했다.
불교를 접촉한 경로와 그에 대한 서술 방식이 다양했던 만큼이나, 서구에서의 불교에 대한 접근이나 이해의 틀 역시 쉽게 길을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앙리 드 뤼박(Henri de Lubac, 1896~1991)은 “과학적인 불교의 발견(la decouverte scientifique)”은 19세기 초까지 일어나지 않았고, 외젠 뷔르누프(Eugene Burnouf, 1801~1852)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학문의 틀을 갖춘 불교학이 시작되었다고 증언한다. 학문적 입장에서의 불교에 대한 접근과 불교 이해가 가능하게 된 것은 뷔르누프의 업적이었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뷔르누프는 또한 “근대 불교에 대한 과학적 연구의 기초를 닦은 불교학 개창의 아버지”로 불리기도 한다. 이 말은 J. 실크(Jonathan Silk)의 언표이지만 현대 서구 불교학자들의 공감을 폭넓게 얻고 있다. 오늘날 불교를 학문의 대상으로 삼는 동서양의 학자들이라면 누구나 한결같이 불교를 ‘객관적인 학문 대상’으로서 기초를 다진 학자로 그를 지명하는 데 주저함이 없다.
그러나 근대적 불교학의 개창주로 그 혼자만을 거론하는 일은 단순치 않다. 무엇보다도 불교학은 다양한 언어로 표기된 방대한 문헌을 근거로 하며, 인종과 지역을 달리한 많은 장소를 통해 오랜 역사에 걸쳐 각기 나름의 특징을 지니고 발전되어 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 인물에게 그 공을 돌리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 또 불교학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불교학의 내용이 다변화될 수밖에 없는 것도 하나의 이유이다.
종교학을 위시한 근대 여러 학문 분야의 개창주로 알려진 막스 뮐러(Max Müller, 1823~1900)는 “진정한 의미의 불교 교설에 대한 역사적 비판적 연구의 시작은 1824년부터 시작되었다”고 지적한다. 이 해에 불경의 원전들이 네팔 사원들에 산스끄리뜨어로 보존되어 왔다는 사실이 알려졌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을 최초로 알린 사람은 브라이언 호지슨(Brian Houghton Hodgson, 1800~1894)이다.
산스끄리뜨 불전(佛典) 문헌의 발견 없이는 서구 불교학의 발단을 생각할 수 없는데, 이 발견의 결정적 계기를 만든 것이 바로 호지슨이었다. 그는 인류학자로서 이미 페르시아어와 산스끄리뜨어에 소양을 지녔고, 약관의 18세에 동인도회사에 취직한 후 20세부터 네팔 주재 상무관으로 근무하며 카트만두에 장기간 거주했다. 네팔어와 네와리어를 자유롭게 구사하게 되면서 그는 산스끄리뜨 불전들을 수집했다. 그리고 이 자료들을 통해 불교의 모습들을 밝혀내기 시작했다. 그는 수집된 방대한 양의 산스끄리뜨 불전을 축적 분류하며 그 사본들을 인도의 아시아학회(Asiatic Society)와 영국왕립아시아학회(Royal Asiatic Society of Great Britain and Ireland)에 발송했으며, 당대 산스끄리뜨어의 대가인 프랑스의 외젠 뷔르누프에게도 보냈다. 문헌의 발견, 수집, 분석이라는 단순화된 경로가 앞서 언급한 서구 불교학의 발생에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이다.
우리가 관행적으로 따르는 서구의 불교학 발생과 형성에 대한 논의는 내면에 깔려 있는 좀 더 복잡한 사연과 배경들을 간과하는 것이다. 더욱이 뷔르누프를 ‘개창의 아버지(the founding father)’라고 표현했는데, 젠더 이슈가 개입되면 왜 ‘개창의 아버지’만을 따지며 ‘개창의 어머니’는 배제하느냐는 질문이 자연스레 제기된다. 불교학 발주에는 남성들만이 아닌 여성의 공적도 포함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공감을 얻고 있다.
대표적인 초기 여성 불교학자로 캐롤라인 리즈 데이비스(C.A.F. Rhys Davids, 1857~1942)와 호너(I.B. Horner, 1896~1981) 여사를 들 수 있으며, 티베트불교 연구의 독보적 여성 학자인 마르셀 라로우(Marcelle Lalou, 1890~1967)는 드용(J.W. de Jong, 1921~2000)과 롤프 아 스타인(Rolf A Stein, 1911~1999) 등의 걸출한 불교학자를 배출했다. 거의 전설적인 인물이 된 알렉산더 데이비드 닐(Ale-xandra David Neel, 1868~1969)과 독일 언어학자이며 사학자로 중앙아시아 불교 연구에 공헌한 아네마리 폰 가바인(Annemarie von Gabain, 1901~1993)도 여성 불교학자이다.
서구에서 불교학의 형성과 전개는 단순히 역사적 사례를 나열하는 것 이상의 의미가 담긴, 서양의 근대적 사유의 형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대한 논의는 동양 근대의 형성 등 소위 오리엔탈리즘이 제기하는 전반적 문제들을 함께 고려할 수밖에 없는 무척 도발적인 질문이 되기에 답변 역시 여러 갈래로 제시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필자의 한계 때문에 일정한 방향으로 서술할 수밖에 없음을 고백하며 문제점을 제기하는 일로 그치려 한다.
오늘날 서구 불교학자들의 불교 원전 연구의 효시를 이루는 것은 뷔르누프의 《법화경 역주(Le Lotus de la bonne loi, traduit du san-scrit accompagne d’uncommentaire et de vingt et un memoi-res relatifs au buddhisme》(Paris, 1852)와 그 서설 격인 《인도불교사 입문(Introduction a l’histoire du Bouddhisme indien》(1844)이다. 이 책에는 《법화경》 원문에 대한 충직한 번역과 함께 주목할 만한 어휘, 개념에 대한 상세한 주석, 그리고 현대인들의 이해를 위한 철학적, 종교학적, 문화론적인 해석들이 경전 번역과 함께 수록되었다. 이런 경전 연구 패턴이 서구 불교학자들의 학위논문이나 불교 연구 논술의 전형을 이룬다는 점에서도 그는 앞서 언급한 대로 현대 불교학의 아버지라 불릴 만하다. 이런 유형의 학술논문 형태는 좀처럼 틀을 바꾸지 못하고 있다. 그만큼 불전의 양이 방대하고 아직도 주석적 번역이 요청되고 있다는 학계의 현실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서구 불교학의 개창의 아버지로 뷔르누프의 업적만을 유일한 예증으로 삼아야 하는지, 또 다른 관점에서 불교에 대한 학문적 접근 가능성은 없었는지, 비판적 질문을 제기할 수 있지 않을까? 우선 시대적으로도 브라이언 호지슨에 의해 산스끄리뜨 원전 수집이 이루어진 것과 거의 같은 시기에 초마 드 코로스(Csoma de Koros, 1784~1848)에 의해 티베트 불전이 발견되고 경전 체계가 경률론(經律論)인 칸쥴과 탄쥴로 구성됐음을 밝혀낸 경우도 간과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빠알리 텍스트 발견과 그에 대한 여러 학자의 업적은 어떻게 평가해야 할는지? 무엇보다도 이 산스끄리뜨 불전 발견과 그에 대한 일차적 정리 이후 발송해준 브라이언 호지슨의 학문적 입지, 초마 드 코로스의 불전 접근과 그것을 파악해 가는 연구 태도도 충분히 설명되어야 할 듯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서구에서 북방 대승 불교권을 접근하면서 인도 원전의 불교와 동북아시아에서 살아 움직이는 현행 종교가 같은 것임을 비로소 인지하였다. 그렇다면 한문권 대승불교를 연구의 발단으로 삼는 경우는 어떻게 평가할 것인지? 소위 시원(始原)이라는 문제는 간단치 않은데다, 그로 인해 빚어질 연구 방향의 선입관이 개입된 편견도 고려의 대상으로 삼아야 하지 않을까?
앞서 잠깐 언급했지만 서구에서 불교의 발견이라는 문제는 그 전사(前史)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오늘날 불교학의 위상이 보다 명확히 파악될 수 있을 것 같다.
3. 전이해(前理解)의 역사와 오해의 과정
서구의 불교에 대한 인식은 올바른 이해에 앞서 잘못된 오해와 시행착오적인 판단이 지배적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주도한 인물들이 바로 불교학의 계기를 마련한 인물들이었다는 점도 아이러니일 수밖에 없다. 인도학을 발주시켰고 벵골아시아학회를 창립한 동양학자인 윌리엄 존스 경이 그 대표적 인물이다. 그가 산스끄리뜨라는 언어의 가치를 인지하고 상찬한 동양학자라는 점에서는 이의가 없다. 그는 산스끄리뜨에 대한 지식 없이는 인도 종교에 대한 만족할 만한 이해를 얻거나 문헌들을 연구해 나갈 수 없다고 말하며 “산스끄리뜨는 놀라운 구조를 지닌 언어이다. 희랍어보다 더 완벽하고 라틴어보다 더 많은 기록을 품고 있을 뿐 아니라 두 언어보다 절대적으로 순수하고 이 두 언어에 가장 근접한 친연성을 지니고 있다.”고 찬양했다.7) 공부를 시작한 지 채 10년이 되지 않은 시기에 산스끄리뜨의 특성을 간파하고 이런 발설을 한 것이다.
그는 소위 비교언어학을 태동시켰으며 언어 분류에서 ‘인도-유럽어(Indo-European Language)’라는 어휘를 만들기도 했다. 또한 유럽문화는 절대적으로 인도의 영향을 받았다는 점을 지적했다. 희랍어와 라틴어와 함께, 동독일의 고틱어(Gothic)와 페르시아어도 산스끄리뜨어의 영향을 받은 사실도 밝혀냈다. 실로 그는 언어의 천재로서 인도학이 동양적 르네상스의 관건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을 일찍이 간파했다.
그와 동시대의 철학자 쇼펜하우어(Artur Schopenhauer, 1788~ 1860)는 그의 인도에 관한 저술들을 읽고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Die Welt als wille und Vorstellung)》라는 저술을 냈는데, 내용의 골격을 이루는 “이 세계의 모든 것은 주관과 연관 속에서의 대상일 뿐이다. 지각하는 자의 인식이란 한마디로 표상(드러난 것)일 뿐이다”라는 명제를 탄생시켰다. 쇼펜하우어는 베단타 철학의 기본적인 특색을 존스 경의 소개를 통해 알게 되었으며 이 근본적인 진리가 인도의 현자들에 의해 일찍이 알려진 것도 역시 존스에 의해서였다고 그의 권위를 전폭적으로 지지하였다.
비교언어학에만 국한되지 않은 존스의 인도학 전반에 걸친 지식과 영향력은 이토록 대단한 것이었지만, 불교에 대한 이해는 매우 제한적이었다. 지금 보면 거의 우화 수준의 인식이었다. 불상에 나타난 나발(螺髮)이나 두터운 입술의 특징을 이집트의 신상에서 유래했다고 생각했고, 심지어는 불교가 에티오피아에서 시원한 것으로 추정했을 정도였다.
그와 함께 산스끄리뜨 연구의 제일인자로 알려졌으며, 인도 고전인 베다 및 힌두 법전들을 깊이 연구한 토마스 콜부르크(Henry Thomas Colebrooke, 1765~1837)는 불교의 어휘와 개념들에 한층 더 친숙해 있었다. 이러한 그의 전문성 때문에 불교학 연구에서 콜부르크를 존스 이전 단계의 불교학자로 간주하기도 한다. 앙리 드 뤼박은 이들을 이렇게 평가했다. “1820년과 1830년 사이 불교에 대한 역사적 연구에 필수적인 2개의 언어가 유럽에 알려졌다. 그러나 극소수의 학자들만이 성취할 수 있었다. 더욱 불교 자체에 대해서는 이 학자들마저 무지했거나 아는 바가 극히 제한적이었다.” 당시의 두 산스끄리뜨의 대가의 입지를 적절히 지적한 말일 수 있다.
특히 콜부르크는 산스끄리뜨 연구에 대한 기여도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였는데, 1801년에 이미 콜카타의 포트윌리엄대학(Fort William college)의 산스끄리뜨와 힌두법 교수로 재직하며 인도위원회(Council of Greater India) 위원으로 임명되었다. 1817년 영국으로 돌아온 후 인도의 언어, 법, 철학, 문학에 대한 수많은 논문을 남겼다. 그의 학문적 업적에 대해 레이몽 슈왑은 다음과 같이 유례없는 찬사를 보냈다. “정확성과 인내심, 집중력과 균형감을 지닌 그의 장점은 하나의 작업을 두고 한 세기를 넘도록 끊이지 않는 찬양의 대상이 되는 예외적인 경우를 보였다. 《힌두철학 에세이집(Essays on the philosophy of the Hindoos)》이 그것인데, 그가 식민지 관료로 임명된 첫해부터 배우기 시작한 주제로 30년간 성숙된 연구의 결실이다.”라고.
그의 힌두철학 논서는 유럽의 문화인 사회에 결정적 영향을 끼쳤다. 그는 앙케틸을 잇고 있으며 영국의 가장 뛰어난 학풍을 대변하고 있다. 그리고 이 저술은 프랑스 동양학의 본산이며 후에 뷔르누프가 소속되는 콜레주 드 프랑스의 인도철학 강의 교재로도 사용된다. 따라서 그의 인도학 학풍은 그대로 뷔르누프에게도 전승되는 셈이다. 1827년 런던의 왕립아시아학회(Royal Asiatic Socieety)의 대중강연에서 발표한 글 〈인도철학에 대하여(On the Philosophy of the Hindus)〉에서 콜부르크는 이렇게 말했다.
“지금 이 논문에서 나는 이단적인 체계인 자이나(Jaina)와 부처님의 체계를 다루려 한다. ……다른 인도의 학파들, 어떤 것은 상키야(Samkhya)와 흡사하고 혹은 카필라(Kapila)나 파탄잘리(Patanjali)의 추종자와도 유사한 점을 드러내는 그런 이단적 학파들에도 주목하려 한다.”
콜부르크는 인도 정통 사상에 관심을 갖고 그 사상적 특징을 연구 소개했을 뿐 아니라 자이나교를 비롯한 인도의 모든 학파를 소개하는 가운데 불교도 포함시키고 있다. 자이나교와 불교는 ‘본래 인도(Hindu)’에서 발생됐음을 명확히 지적했다. 불교의 기원에 대한 논의가 콜부르크로부터 시원된다는 것은 이미 에르네스트 르낭(Ernest Renan, 1823~1892) 같은 근대기의 학자와 앙리 뒤 뤼박에 의해 확인되고 있다.
이렇게 되면 불교를 객관적 학문의 대상으로 삼은 효시로 뷔르누프만을 첫머리에 올리는 일은 분명히 다시 검토해야 할 수밖에 없다. 물론 그럼에도 아직도 그를 추대하는 현대의 학문적 관점의 타당성을 그의 저술을 통해 다시 검증할 필요가 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추후 그의 ‘입문’ 분석에서 다시 언급될 것이다. 콜부르크는 열반에 대해 성현들의 ‘열락의 상태’이며 동시에 ‘절대적 절멸(絶滅)’로 이해한다. 오늘날 우리의 열반에 대한 이해와 별로 차이가 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열락의 상태는 불교뿐 아니라 자이나교에서도 공통되며 인도의 모든 학파와도 공유된 면모임을 밝혔다. 이와 함께 모크샤(Moksa)를 해탈, 풀려남, 해소함으로, 무크티(Mukti)는 그런 목표를 얻은 상태임을 가리키는 어휘로 이해하였다. 열반과 더불어 amrita(甘露), apavarga(解脫), shreyah(最勝)과 같은 전문 어휘에 대한 정확한 내용을 파악하고 있었으니, 오늘날의 어휘 분석을 통한 단계적 불교 연구와도 전혀 다르지 않다.
지금까지 살핀 것처럼 서구에서 불교학의 발단은 광범위한 의미의 인도학 전반의 학문적 진전을 통해 진행되었음을 알게 된다면, 불전 발견과 불교 경전에 대한 주석적 연구만이 불교학의 정통이라고 간주하는 일도 지양하게 된다. 오늘의 시각에서 콜부르크의 불교에 대한 이해는 여러 면에서 미숙함이 발견되기도 한다. 하지만, 2권으로 된 각각 500페이지에 달하는 그의 저술 《논문 집록(Miscellaneous essays II》(London, Allen and Co, 1837)을 통해 방대한 체계의 인도 사상에 대한 논문들을 접하면, 인도 사상과의 비교론적 관점에서 불교는 오히려 신선한 사상으로 부각된다. 그는 불교를 자이나교와 함께 인도 전통의 6파 철학 밖의 외도로 설정하여 정통 인도 사상과 대비시키는 혜안을 발휘한 것이다. 인도에서 불교의 위상을 확정 짓는, 불교가 불교이게끔 하는 학문적 자리매김의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다.
4. 서구 불교학 개창의 시기
이러한 콜부르크의 전통을 이은 학자가 바로 앞에서 소개한 브라이언 호지슨(Brian Houghton Hodgson)이다. 인도 주재 관료로서 불교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고 그것을 읽어낸 ‘진정한 의미’의 불교를 학문적으로 기틀을 닦은 학자로 평가된다. 초기 대부분의 인도학 연구와 불교 연구를 진행한 학자들이 영국의 동인도회사 소속의 관료들이었듯 브라이언 호지슨도 예외가 아니다. 그러나 현지인들과 연관된 정치적 활동을 폭넓게 한 그의 조류학과 인류학 부문의 실적들은 불행하게도 후대 학자들이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불교 자료 수집과 불교학을 일으키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한 그의 업적도 함께 잊히고 말았다.
”불교에 대한 학술적 연구의 시작을 어느 시점으로 잡을 것이냐 하는 질문에 대해 자신 있게 대답을 내놓은 학자들은 소수이다. 호지슨이란 사람이 누구라고 정확히 파악해낸 학자들은 훨씬 더 드물다.” 이렇게 말한 도널드 로페즈 주니어(Donald Lopez Jr.)는 극히 소수의 사람만이 그가 불교학에 대한 기여한 활동을 알고 있기에, “이 호지슨이란 사람이 누구지?”라고 질문하는 것이 서구 불교학계의 현실이라고 자탄했다. 그래서 그는 최근 호지슨에 대한 재평가를 시도하면서 특히 그가 불교학의 기초를 다졌던 면모를 다시 조명하고 있다. 과연 누구에 의해 서구에서 불교학은 발주되는 것인가 하며.
호지슨과 동시대를 살며 그를 추모하는 평전을 쓴 윌리엄 헌터 경(Sir William Wilson Hunter, 1840~1900)의 평전은 이 점에서 주목을 끌기에 충분하다. 헌터는 호지슨의 평전뿐만 아니라, 티베트불교 문헌과 티베트어 사전을 편찬하여 서양에 티베트불교에 대한 학술적 가치를 제고한 초마 드 코로스 산도르에 대해서도 상당한 양의 평전을 집필했다. 헌터는 영국의 인도 경영을 위한 인도 현지의 각 분야에 걸친 통계와 자료를 수집한 관보 격인 《왕립인도관보(Imperial Gazetter of India)》(1881)를 발행한 인물이다. 곧 인도에 대한 고전 문헌을 수집 편찬한 선구자적 인물들에 대한 사황은 헌터 경의 관심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고 그는 이런 활동을 예의 주시했다. 따라서 그의 관찰과 평가는 당시의 인도학과 불교학의 상황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그는 호지슨의 불교에 대한 기여를 이렇게 요약했다. “호지슨은 수집에 대한 열정을 지니고 있었다. 드문 행운의 기회였지만 유럽의 학문적인 서클과는 단절된 아시아의 오지에 거주하며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은 수집을 시도했다. 1824년 네팔로 되돌아온 후 수개월 동안 일련의 문헌들, 표본들, 온갖 종류의 고품(古品)들이 이 젊은 카트만두 주재 상무관에 의해 콜카타의 아시아학회로 흘려들어 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의 업적을 다음 3가지로 지목했다. 첫 번째는 당시까지 아시아나 유럽에서 수집된 것보다 방대한 불교 원본 자료를 수집 취합한 점, 둘째는 이 많은 자료를 직접 신중히 연구함으로써 여러 편의 가치 있는 논문들을 출판한 실적, 그리고 세 번째는 수많은 자료를 학술기관에 증여함으로써 여러 학자들이 그 내용을 연구할 수 있게 한 점이다. 무엇보다도 몇 편의 불교 관계 논문은 문헌수집과 관련하여 그의 불교에 대한 이해를 파악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기도 하다. 그리고 뷔르누프 자신이 오히려 호지슨을 불교학의 발주자라고 높이 평가하며 수집된 자료를 선뜩 보내준 사실에 대해 감사하는 편지를 보냈다.
이렇게 되면 서구에서 불교가 학문의 대상으로 떠오른 것은 불교 문헌의 발견이 관건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우리는 서구 불교는 문헌 속의 불교라는 기이한 존재 양식에 주목하게 되는 것이다. 지금까지 문헌적 존재로서 불교학에 관여한 몇몇 학자들에 대해 검토한 대로 윌리엄 존스, 토마스 콜부르크, 브라이언 호지슨 등은 한결같이 문헌을 통해 불교를 언급하고 나름의 학문적 논의를 펼친 인물들이다.
잠깐 언급되었지만 티베트 원전에 의한 불교학 연구는 절대적으로 초마의 노력에 힘입고 있어 그 역시 초기의 학자로 언급되어야 한다. 그러나 외젠 뷔르누푸를 근대 서구 불교학의 창시자로 지목한 근거는 무엇인지, 그리고 그런 주장을 함으로써 우리가 얻는 장점이거나 혹은 한계는 무엇이 될지 검토할 필요를 느낀다. 결국 그의 《인도불교사 입문》(1844)과 《법화경 역주》(1852)를 다시 음미할 필요를 느낀다.
5. 고전어에 따른 서구 불교학의 갈래
이제껏 불교에 관한 기록들은 주로 산스끄리뜨 원전의 발견과 그 해독에 관한 과정들임을 이야기했다. 주지의 사실이지만, 불전의 기록물들은 각기 다른 고전 언어로 구성되어 있다. 따라서 원전인 산스끄리뜨 문헌을 위주로 한 연구 방향과 티베트어 문헌을 중심으로 삼는 연구 그리고 빠알리어 원전을 주 텍스트로 삼는 연구의 갈래들을 생각할 수 있다. 물론 동북아시아의 경우 한문 불전을 중심으로 한 연구가 진척되고 있지만, 편의상 이 경우는 제외하기로 한다.
대체로 불교 원전의 큰 주류이자 완전한 부처님의 생애에 관한 기록들은 빨리어 불전에 의거한다. 또한 최근 위빠사나 수행에 대한 관심 확대로 빨리어 불전의 역사는 우리 학계에도 익히 알려져 있다. 초기불교의 순수성 면모를 밝힌 T. W. 리즈 데이비스(Thom-as Williams Rhys Davids, 1843~1922)의 공적, 또한 그가 창립한 빨리경전협회(The Pali Text Society, 1881년 설립) 활동을 통한 빨리 불전의 번역이 불교학발전에 미친 영향은 막대하다.
그러나 이에 앞서 이미 영국 식민지의 한 부분으로 편입되어 있던 스리랑카(당시는 실론)에서 역시 식민지 행정관료이자 학자인 조지 투르누르(George Turnour, 1799~1843)에 의해 스리랑카의 역사인 《마하방사(Mahavamsa, 大史)》가 번역되면서 그것이 스리랑카의 역사와 함께 불교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음을 알아내었다. 부처님의 치아가 이 섬으로 전해지면서 불교의 역사와 스리랑카의 역사가 함께 묶여 기술된 거의 2,500년에 걸친 연대기가 《마하방사》이다. 이 연대기가 불교 유입에 대한 기록일 뿐만 아니라 불교 자체의 역사 기록임을 알게 된 투르누르는 그 중요성을 간파하여 1826년에 최초로 영어로 번역하기 시작했다.
거의 같은 시기인 1823년에 브라이언 호지슨이 네팔에서 산스끄리뜨 불전을 세계 각지 연구소와 뷔르누프에게 발송한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곧 빨리어로 된 불교의 역사와 산스끄리뜨 불전들의 내용이 드러나기 시작하는 것이 거의 비슷한 시기이다. 빨리어는 이미 산스끄리뜨어와 함께 유럽의 대학에서 강의가 이루어지고 있었고, 1826년에 빨리어 문법서가 뷔르누프와 독일 본대학 학자인 크리스천 라센(Christian Lassen, 1800~1876)에 의해 출간되었다. 이 빨리어 연구 전통은 리즈 데이비스에게 전수되면서 빨리어 불전에 대한 학문적 연구가 영국에서 꽃을 피우게 되었다.
리즈 데이비스는 이미 영국에서 스텐즐러(A.F. Stenzler) 밑에서 산스끄리뜨어를 배웠고, 당시의 다른 학자들처럼 영국 식민지 스리랑카에서 행정관료로 복무하면서 실무적인 빨리어를 공부하고 고고학적 발굴에도 참가했다. 빨리어 명문(銘文)들과 문헌들을 수집하며 불교 교리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게 되자, 1870년부터는 왕립아시아학회(Royal Asiatic Society) 스리랑카 지부에 논문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또한 그곳의 지역 언어를 접하고, 현지 불교인들과도 접촉하게 되었다.
인도 고전어와 현지어를 구사하고 불교인들과의 직접적인 교류를 통해 현장의 불교를 이해해 간 그는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된 셈이다. 물론 호지슨이나 초마의 경우도 현지의 전문가나 수행자들을 통해 산스끄리뜨어와 티베트어를 배우고 자료를 수집한 것은 사실이지만 리즈 데이비즈 경우처럼 현장의 불교를 접한 것은 아니었다. 소위 텍스트와 현지 불교와의 괴리를 직접 체험하며 서구 불교학자들이 지니는 문헌 중심과 현장의 일탈성 차이를 식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소위 ‘텍스트 속의 원형과 변모/타락한 현장불교’의 양면성을 극명하게 판단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그는 빨리 불전 원전을 절대적 표준으로 삼는 원전 텍스트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빨리 불전에 불교의 원형이 존재하고 그 이외는 타락 변형된 것으로 간주하게 되었다.
1876년에 그가 기술한 《브리태니카 백과사전》의 ‘불교’ 항목에서 현지의 지역화된 부처님에 대한 전기가 서술되고 있지만, 1910년대의 재판에서는 지역적인 내용은 사라진다. 곧 그는 후대의 전승이나 근대의 것은 고대의 것보다 못하고, 지역적인 현지의 것은 전통의 고전적인 것만 못하다는 문헌 중심의 시각을 갖게 된다. 따라서 고대의 것, 고전적인 것은 원형에 가깝고 순수 완전한 것이라는 가치 판단이 작동하는 것이다. 소위 ‘원형불교(Original Buddhism)’ ‘원시불교(Primitive Buddhism)’ ‘초기불교(Early Buddhism)’란 개념이 창안되며 테라와다불교(Theravada Buddhism)는 이런 ‘본래의 불교’를 대변하는 것으로, 북방의 변형된 대승불교와는 대비되는 것으로 주장된다. 영국 학계가 주도한 이러한 특징의 빨리 불교는 그 학문적 경향이 꾸준히 전수되었으며, 에드워드 토마스(Ed-ward J. Thomas, 1869~1958)와 R. 곰부리치(Richard Gombrich, 1937~ )에게까지 이르게 된다.
리즈 데이비즈는 막스 뮐러의 《동방성서(Sacred Books of the East)》 출간 프로젝트에도 참여했으며, 1904년에 런던대학 빨리어 교수로 부임하고 다음 해에는 맨체스터대학의 비교종교학과장으로 취임했다. 그는 소위 테라와다불교와 빨리어 원전에 근거한 빨리 불교학의 창설자로 추대되어야 하는 학자임이 틀림없다.
동시에 그의 부인 캐롤라인 데이비스(Caroline Augusta Foley Rhys Davids, 1857~1942)도 함께 기억되어야만 한다. 앞에서도 잠깐 언급하였지만 ‘개창의 아버지’만 존재한 것이 아니라 ‘창설의 어머니’도 기억되어야 하기 때문이고 그런 여성 학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바로 캐롤라인 데이비스이기 때문이다. 빨리경전협회는 리즈 데이비스에 의해 창설되었지만 그녀는 1907년에 이 학회의 명예 사무총장을 역임하며 1923년부터 1942년 사망 때까지 20년 가까이 회장직을 역임했다. 따라서 이곳에서 출간된 모든 불교 경전과 학술 활동에 관여한 인물이 바로 캐롤라인이었다.
남편인 리즈 데이비스에 의해 가려진 측면이 많으나 경제학자로 출발한 그녀는 적지 않은 논문을 남겼다. 남편의 권유를 받아 본격적으로 불교를 연구하고 불교 심리학과 불교에서 여성의 위치를 주제로 다루었다. ‘불교와 여성’이라는 주제를 학문적 영역으로 떠올린 최초의 불교학자인 셈이다. 특히 비구들의 오도송을 모은 《장로게(長老偈, Theragāthā)》에 대응하여, 비구니들의 수행담과 출가 동기 등을 게송으로 읊은 《장로니게(長老尼偈, Therīgāthā)》를 영역하여 《비구니 자매들의 시편(Psalms of the Sisters》(1909)이라는 제목으로 출간하기도 했다.
또한 맨체스터대학에서 인도철학을 강의했으며, 1918년부터 1933년까지는 오늘날 동양학 연구의 본산인 ‘동양-아프리카학 연구대학(School of Oriental and African Studies)’의 전신인 동양학연구대학(School of Oriental Studies)에서 불교사를 강의했다. 무엇보다도 그의 제자로 I.B. 호너(Isaline Blew Horner, 1896~1981), 쿠마라스와미(Ananda Kenyish Coomaraswamy, 1877~1947) 같은 여성 불교학자들이 탄생하였다.
특히 영국에서 출생, 케임브리지 대학을 졸업한 호너는 일찍이 여성불교에 대한 저술 《초기불교에서의 여성(Women Under Primitve Buddhism》(1930)을 펴냈다. 또한 빨리 텍스트의 《율장(Vinaya pitaka)》의 첫 권(1938년 완역) 번역을 시작으로(마지막 권은 1966년 완간) 불교학의 소재를 여러 방향으로 다변화시키는 데 많은 역할을 했다. 캐롤라인 데이비스 사망 이후에는 그 뒤를 이어 사무총장을 지냈고, 1959년에 빨리경전협회 회장직에 오른 이후 1981년 사망할 때까지 회장직을 수행했다. 빨리 문헌 연구에서 그가 남긴 업적을 보면 여성 불교학자로서 근대 서구 불교학의 한 영역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쳤는지 느끼게 한다.
결국 빨리 불교 경전이 오늘날 서구에서 불교학 연구의 중심이 되도록 한 계기는 결정적으로 리즈 데이비스의 영향과 그를 잇는 영국 불교학계의 활동 아래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다음 호에 계속) ■
이민용 minyonglee@gmail.com
동국대, 하버드대 박사과정 수료(인도불교사상, 동아시아지성사 전공). 동국대 · 영남대 교수, 한국불교연구원장 등 역임. 주요 논저로 《학문의 이종교배-왜 불교신학인가?》 《서구불교학의 창안과 오리엔탈리즘》 《미국의 일본 불교 수용의 굴절-헨리 올콧트, 폴 카루스, 釋宗演, D.T 스즈키의 경우》 등이 있다. 현재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