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께서 모세에게 일러 말씀하시기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말하여 그들로 돌아서 바알스폰 맞은 편 믹돌과 바다 사이 피하히롯 앞에 진을 치게 하라. 너희는 피하히롯 앞에서 바닷가에 진을 칠지니라. 이는 파라오가 이스라엘 자손에 대하여 말하기를 ‘그들이 그 땅에서 혼란에 빠져 광야에 갇혔도다.’ 할 것임이라. 내가 파라오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리니 그가 그들의 뒤를 좇으리라. 그리하여 내가 파라오와 그의 모든 군대 위에서 영예를 얻으리니 이집트인들로 내가 주인 줄 알게 하리라.”하시니 그들이 그렇게 행하더라. 백성이 도주했음을 이집트 왕이 듣자 파라오와 그의 신하들의 마음이 백성에 대해 변하여 말하기를 “우리가 어찌 이같이 행하여 이스라엘로 우리를 섬김에서 떠나가게 하였는가?” 하고 그가 그의 병거를 갖추고 그이 백성을 그와 함게 데리고 가니, 그가 선별한 육백 대의 병거들과 이집트의 모든 병기들을 거느렸으며 병거마다 대장들이 맡았더라. 주께서 이집트 왕 파라오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시므로 그가 이스라엘 자손들을 뒤쫓으나 이스라엘 자손들이 의기양양하게 나갔더라. 그러나 이집트인들이 그들을 뒤쫓으니, 곧 모든 말들과 파라오의 병거들과 그의 기병들과 그의 군대라. 바알스폰 맞은편 피하히롯 곁 바닷가에 진을 치고 있는 그들에게 다다르니라. 파라오가 가까이 다가올 대 이스라엘 자손이 눈을 드니, 보라, 이집트인들이 그들에게로 진군해 오는지라, 이스라엘 자손들이 심히 두려워하며 주게 부르짖더라.(출애굽기 14:1~10한글킹제임스성경)
출애굽기 14장에서 우리는 굉장한 슬픔 가운데 빠지 이스라엘 사람들이 두려움에 압도되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들이 그 순간만큼은 자신들이 피에 보호아래 있어 온 사실들을 잊어버린 듯이 보입니다.
우리는 이 유대인들이 과연 유월절 어린양의 피의 보호아래 있는 자들이 맞나? 고 의문을 던지게 됩니다.
그들은 유원절 때 어린양의 피로서 이집트의 권세에서 벗어난 자들입니다.
그런데 홍해 앞에서 그들의 비통에 바진 절규는 도대체 무언가요?
과연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보호하지 않을 거라고 의심하고 있는 것일까요?
오늘날 수많은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구원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과 그분의 부활로 받았지만 구원받기 전의 죄들만 용서받았으므로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고 구원을 잃어버리지 않으려면 행함이 있어야 하며 행함이 없다면 처음부터 구원받은 사람도 아니며 구원은 이루어나가야만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홍해 앞에서 절규하는 자화상입니다.
그들이 모세에게 말하기를 “이집트에 무덤이 없어서 네가 우리를 이끌어 내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어지하여 네가 우리를 이집트에서 데리고 나와서 우리에게 이같이 행하느냐/ 우리가 이집트에서 너에게 한 말이 이것이 아니냐? 말하기를 ‘우리를 내버려 두라. 우리가 이집트인을 섬기리라.’ 하지 않았느냐? 우리가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이집트인을 섬기는 것이 더 나았겠노라.”하더라.(출애굽기 14:11~12)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다고 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바로 이렇습니다.
사탄은 하나님을 믿는 자들에게 고소를 합니다.(요한계시록 12;10)
그것은 당신이 구원을 받을 수도, 구원을 유지할 수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자격도 없다고 당신을 비난합니다.
그러면 당신은 구원을 잃어버릴 것이라면 다른 종교와 다를게 무엇이냐면서 기독교도 수많은 종교 중에 하나로서 종교적인 의식, 선행 ,율법이 있어야하며 그리스도의 보혈만으로는 부족하다고 하나님께 비난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죄에 대한 찔림이 아닌(이사야 1;18) 사탄이 주는 죄의식입니다.(요한계시록 12:10)
이것은 자신의 구원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요한일서 5:13)
그러나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거듭난 그리스도인에게 악한 본성에 대해서 어덯게 죽엇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분명 그리스도게서는 구원받기 이전의 죄들에 대하여 죽으셧습니다.(로마서 3:25)
그러나 구원 받은 이후에도 우리는 육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로마서 7:18)죄의 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로마서 7:25) 그러나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러한 연약한우리를 위해 자신의 육체에 죄를 선고하신 것입니다.(로마서 8;3)
이것이 단번속죄의 두가지 측면입니다.(히브리서 9:12~14) 그리스도는 우리의 변호인이십니다.(요한일서 2:1)
그러므로 자신이 죄와 세상과 사탄의 권세에서 완전한 구원을 받았음을 알지 전에는 구속의 노래를 부를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시인함으로서 (요한일서 4;15) 그분 안으로 들어간자들입니다.
그것은 그분의 복음을 듣고 그분을 믿음으로 말이암은 것입니다,(에베소서 1;13)
그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침례를 받은 것을 말하며 그분과 함께 죽었고 그분과 함께 일으켜짐을 말하는 것입니다.(로마서 6:3~4)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이러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이 없다면 결코 자신의 구원을 확신할 수 없습니다.(요한일서 5:13)
주께서 그날에 이스라엘을 이집트인의 손에서 이와 같이 구원하시니 이스라엘이 바닷가에서 이집트인들의 시체를 보더라. 이스라엘이 주께서 이집트인들에게 행하신 위대한 일을 보고 그 백성이 주를 두려워하고 주와 그의 종 모세를 믿더라. 이대에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들이 주게 이 노래를 노래하고 고하여 말씀드리기를 “내가 주게 노래하리니 주께서 영광스럽게 승리하셨음이요, 말과 그 탄자를 바다 속으로 빠뜨리셨음이라.(출애굽기 14:30~15:1)
홍해 바닷가의 장면을 통해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교훈은 무엇일까요?
과연 홍해는 어떤 것의 모형으로 보아야 할까요?
그리고 피를 바른 인방과 갈라진 홍해 바다의 차이점은 무엇일까요?
홍해바다는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모형으로 우리의 모든 영적인 원수인 죄와, 세상과 사탄에게 적용됩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통해서 그리스도인은 온전히 또한 영원토록 죄의 권세로부터 해방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통하여 죄 앞에 대하여 죽었습니다.(로마서 6:6)
죄가 어찌 죽은 사람에게 대하여 힘을 행사하겠습니까?
이 세상에서 가장 경건한 사람은 바로 시체입니다.
왜냐하면 시체는 술을 먹지도 담배를 피지도 간음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로마서 6:7)
우리의 주인은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와 함게 죽었고 그와 함게 사는 자입니다.(로마서 6:8~9)
그러나 수많은 교회다니는 사람들은 우리의 죄들이 사함을 받았다는 것과 (로마서 3:23) 죄의 몸이 멸망을 당했다(고린도전서 5:5) 즉 죄의 통치가 끝났고 죄의 지배가 끝났다의 구별을 못합니다.
한번 생각해봅시다. 링컨의 노예해방으로 흑인은 노예의 신분에서 벗어낫습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백인 농장주에게 고용을 받으면서 노동자로 일하였습니다.
법적으로는 동등하지만 경제적인 차별은 여전히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사탄의 영적인 사망의 통치에서 벗어났지만 이 땅에서 현실적인 죄문제에 직면해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수많은 사람들은 실족하는 것입니다.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는데 하나님에게서 난 자는 죄를 짓지 않는다는 것에서 나는 하나님께 속하였나 마귀에게 속하였나 하면서 자신은 어디에 속했는지 혼동을 하는 것입니다.(요한일서 3:8~9)
그러나 우리의 육신은 죄악된 본성을 가지고 있으나 우리의 신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죄 앞에서 죽은 자입니다.(갈라디아서 5:17) 이러한 두 본성에 대해서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분명 우리의 신분은 죄 앞에서 죽은 자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육신은 이러한 것을 따르지 못합니다.
육신은 내 옛사람이 죽었다는 것을 부인하려 듭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우리는 우리가 죄 앞에서 죽었다고 여겨야 하는 것입니다.(로마서 6:11) 이것은 깨달으라가 아닙니다.
지식적인 인지를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것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란 것을 말합니다.
나의 이성적인 생각으로는 결코 여길 수가 없습니다. 나의 지식으로는 결코 여길수 없습니다.
나의 느낌또한 결코 여길 수 없습니다. 있는 그대로 곧대로 받아들이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또한 상상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사도바울도 이미 이르렀다 함도 아니고 이미 온전해졌다 함도 아닌 것은 자신의 상태는 얼마든지 변할 수 있지만 자신이 죄에 대해 죽은자로 여기라는 말씀에 대한 순종인 것입니다.
다시 생각해봅시다. 거듭난 그리스도의 신분적인 위치는 어디에 있습니까? 천상입니다.(에베소서 2:6)
그러면 우리의 신분적 위치가 땅으로 떨어질 것 같습니까? 아닙니다. (요한복음 10;28)
그러므로 우리는 하늘에 속한 자로서 하늘의 관점에서 땅을 내려다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빌립보서 3:20)
그러므로 만일 내가 내 자신으로부터 이치를 따른다면 그 과정은 어둠 가운데서 헤멜 것이며 내가 내린 결론은 전적으로 거짓말이 될 것입니다.(로마서7:23)
이렇게 우리의 사랑이 온전해 졌나니, 이는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는 것이라. 이는 그분이 그러하심과 같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러하기 때문이니라.(요한일서 4;17)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그 사랑을 온전히 드러내 보이셨습니다.(로마서 5;8)
그리스도의 단번속죄를 통하여 우리의 신분은 거룩하게 되었고 온전하게 되었습니다.(히브리서 10:10~14)
그러나 갈라디아 교회 사람들은 구원받은 이후에 행함으로 온전해지려고 하엿습니다. (갈라디아서 3:3)
사도 바울은 그러한 것에 대한 질책을 하였습니다.
우리는 결코 다시 두려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않는 사람들입니다.(로마서 8:14~16)
그러므로 우리는 마귀의 자녀로 결코 돌아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의 피로서 담대하게 담대하게 지성소에 들어가기 때문입니다.(히브리서 10:19)
우리 자신의 무가치함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지옥의 가장 깊고도 어두운 구덩이에 떨어지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치 있는 것을 주시려고 우리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허물이 문제가 될까요?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을 사하셨습니다.
우리가 거듭난 것은 썩지 않는 씨인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입니다.(베드로전서 1:23)
만약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여전히 죄 가운데 있고 죄의 권세 아래 잇는 것이며 사탄의 손아귀에 있고 죽음에 매여 있고(고린도전서 15:17) 악의 일부로 같은 부류로 남아 있게 되고 기도도 없고 하나님도 없고(에베소서 4:18) 하나님의 진노아래 잇는 것입니다.(에베소서 2:3)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정확한 신분적 위치에 대해서 확신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너희가 믿음 안에 있는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스스로 입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것을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못하면 너희는 버림받은 자들이라. 그러나 내가 바라는 것은 우리가 버림받은 자들이 아닌 것을 너희가 아는 것이라.(고린도전서 13: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