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독
정철훈
54년 말띠 사내의 얼굴 살이 내리고 있다
며칠 안 본 사이 눈은 퀭하고 피부는 축 처져 있다
IMF 위기 때 환율 폭탄을 맞아 사업은 망하고
아파트를 급매로 내놓은 지 십여 년
요즘 강남에선 강북을 북한이라고 부른다고 분통을 터트리는 사내
재정부장관의 사진을 칼로 그어버리고 싶다는 사내
국가의 그늘이 사람을 잡아먹는 걸 빤히 바라보고 있다
베이비붐 세대의 제1열에서 죽을 둥 살 둥 앞만 보고 달려온 사내
윤기 자르르한 경주마에서 하루아침에 수레도 끌지 못하는 비루먹은 신세
밤마다 치가 떨려 아침이면 아구가 뻐근하다는 사내
가을은 가을이어서 막걸리집 앞 노랑은행잎이 아름답지 않냐고 했더니
썩은 오줌 냄새만 나는 헛것이라고 독기를 뿜어대는 사내
지난 대선 때 찍은 투표용지를 돈이라도 주고 되칮아오고 싶다며 울분을 삭히느라 살이 내리고 있다
뼈가 녹고 형체 없는 마음도 녹아내린다는 사내의 말에 티끌만큼의 과장도 섞여 있지 않았다
며칠 전 찾아간 직업소개소에서 완도 어디쯤 가두리 양식장 잡부밖에 써줄 데가 없다는 말을 듣고 키가 한 뼘이나 줄어든 사내
은행나무 위로 눈이라도 쏟아질 듯 하늘은 잔뜩 흐려져 있고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지루하게 흘러가는 4분의 4박자 애국가를 바꿔서라도 이 슬픈 사내를 춤추게 할 곡조는 없는가
걸을 때마다 말굽 모양의 증오를 찍어대는 사내의 울분을 삭힐 노래는 없는가
이용악의 하늘은 새하얀 눈송이를 낳은 뒤 은어의 향수처럼 푸르렀다는데
애초에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어쩌고 하는 애국가의 첫 소절에서부터 무슨 전조가 있었던 것은 아닌가라고 시비를 걸어보고 싶은 날이다
—월간 웹진《공정한 시인의 사회》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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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철훈 / 1959년 전남 광주 출생. 1997년 《창작과비평》에 「백야」 등 6편의 시를 발표하며 작품활동 시작. 시집『살고 싶은 아침』『내 졸음에도 사랑은 떠도느냐』『개 같은 신념』『뻬쩨르부르그로 가는 마지막 열차』『빛나는 단도』. 장편소설『카인의 정원』『소설 알렉산드라』『모든 복은 소년에게』, 산문집『소련은 살아 있다』『김알렉산드라 평전』『옐찐과 21세기 러시아』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