殘忍한 달 사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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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월은 잔인한 달이라고 어느 시인이 이야기했다. 잔인한 이유를 알수없어 눈을 감고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사월의 하늘아래 피를 뿌린 혁명의 후유증 일수도 있고 아니면 무엇일까. 그 시인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봐야겠다.
20세 전후, 세상 일 모르던 시절, 봄날에 새겨진 말 못할 아픈 추억이 있어 그런가. 봄꽃은 지금도 피고 지고 남풍도 그곳에서 불어오지만 그 시절에 비하면 무언가 완연히 다른 구석이 있다. 풍기는 냄새도 들려오는 소리도 옛날 같지 않다. 그때 보다 잘먹고 잘 살아서 그런 것인가.
나이든 사람들은 이 봄을 春來不似春이라고 이야기한다. 봄이 와도 (옛)봄 같지 않다는 말이다. 옛 봄은 지상에서 맛보는 신비한 평화로움 이였고 창조주님께서 베푼 사랑의 선물이었는데 지금은 왜 그렇까.
동네마다 꽃 잔치 풍성하고 산과 언덕위로 불어오던 훈훈한 바람이 사랑의 묘약을 실어와서는 앳된 처녀총각들의 몸과 마음을 들뜨게 만들어 산과 들로 내 몰았다. 총각들은 봄나물캐는 처녀들을 쫒아 다녔다. 그 곳에 아름다운 사랑도 있었고 슬픈 사랑도 있었을 게다. “잔인하다는 말”은 연인들의 슬픈 사랑만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닐 것이다. 잃어버린 그 시절의 봄이 回想되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回想해보면 가슴을 쓰리도록 아프게 만든다. “연분홍치마가 봄바람에 휘 날리더라, 오늘도 옷고름 씹어가며 봄 제비 넘나드는 성황당 길에”와 같은 환상 속의 봄 날을 다시 맛 볼 수 없을 것 같다. 억만금을 주고도 살 수없는 옛 봄을 잃어버릴 것이라고 미리 노래한 노 시인은 그리움을 못잊어 사월을 잔인하다고 했을까. 필자의 억측일까.
필자생각과 일치한다면 미래를 꿰 뚫어 보는 훌륭한 豫言者이다. 이제 그 아픔을 우리 모두가 느끼며 살아 갈 것이기 때문이다.
얼굴도 모르는 자매님이 정성들여 꾸민 수준높은 카페(cafe.daum.net/atomy)가 있다. 생활의 지혜가 가득차인 곳이다. 그 카페가 좋아 매일 같이 방문하여 올린 글 들을 모아보았다. 300자 내로 올린 글들이다. 한꺼번에 모아서 읽어보니 수정할 부분이 많았다.
금년 봄을 생각하면 미래가 두려워진다. 잔인한 봄의 의미를 더 절실하게 새겨보는 보슬비 내리는 봄이다 /에발도 생각
4/1일
부활절을 맞이하여 성주간 동안 방학인 셈이다. 늙으나 젊으나 학교 안 간다고 하니 신바람이 났다. 할일이 없어도 수업이 없다하니 왜 그리 홀가분하던지. 일 년 동안 일해 준 회사에서 인사치레로 하자던 회식도 오늘 했다. 거나하게 취하여 오래간 만에 전철을 탔다. 들고 간 "지금 이 순간을 사랑하며"란 책을 읽으며 종착역까지 왔다. 이 책을 쓴 구엔반 투안주교님은 월남 분이시다. 그는 월남이 공산화 되자 이유 없는 감옥살이를 13년간 하신 분이다. 왜 예수님을 믿게 되었는가라는 질문에 예수님의 약점을 사랑하기 때문이란다. 예수님은 기억력이 좋지 않으시고, 수학과 논리학 그리고 재정과 경제학을 모르시고 마지막으로 모험가시란다. 상세한 내용은 뒷날 하나씩 설명하리다.
4/2일
생각나누기에 올려져있는"가슴 따뜻한 이야기"를 퍼 다가 내가 쓴 글처럼 사방에 올렸지요. 반응이 너무 너무 좋아요. 어떤 곳에서는 부활절에 이런 따뜻한 글을 올려 주셔서 감사하다는 댓글도 있고, 삭막해져가는 우리사회에도 이런 훈훈한 이웃 정이 넘쳤으면 좋겠다는 댓글도 있었지요. 필자도 글을 자주 쓰는 편인데 반응이 시원찮을 때가 있습니다. 여동생에게 물어본 즉, 요사이 사람들은 짧은 글 아니면 잘 읽지를 않는다고 했습니다. 이해 할 수는 없었지만 단 한사람이라도 끝까지 읽어보는 착한 사람도 있을 것이라는 희망으로 계속 글을 씁니다.(글 내용을 보시려면 호반의 벤치-cafe.daum.net/buhwa0- 삶의 이야기 방에 오시면 훈훈한 단편소설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4/3일
어제는 종일토록 비가 내려 걷지 못했다. 봄비가 무진장 지루하게 내렸다. 금요일 오후, 모처럼 따스한 햇볕을 만나 훈훈한 강바람과 함께 걸었다. 비를 흠뻑 맞아서 그런지 기다리던 벗 꽃이 입술을 열기 시작했다. 백목련과 진달래는 벌써 한창 이였다. 봄이 오면 주님께서 말 안 듣는 미운 인간들에게 이처럼 아름다운 꽃들을 왜 피워주실까 생각하니 주님의 끝이 없는 사랑 때문이리라. 한겨울 추위에 떨며 지내온 유약한 인간들에게 꽃을 피워 서 생기를 불어 넣어주시려는가 보다. 눈송이처럼 깨끗하고 정직하게 살라고 벗 꽃을 피워주시고, 정을 베풀며 서로 사랑하라고 소담스런 목련을 피워주시고 열심히 꿋꿋하게 살라고 연분홍 진달래를 피워 주신 것 같다
4/4일
2시간동안의 부활절미사가 조금 전에 끝났다. 신부님께서는 "예수님의 부활은 육신의 부활이 아니고 영적인 부활이며 믿음의 부활이요 체험의 부활"이라고 하셨다. 우주에는 11차원까지 존재한다는 영국의 호킹스 박사의 주장을 예를 들었다. 우리는 일차원 세계에 살고 있어 2차원 3차원세계는 육안으로 볼 수가 없다. 예수님의 부활은 1차원 세계를 벗어나 다른 차원의 세상으로 옮겨간 것으로 봐야한다. 2차 대전 때 영국 잠수함이 북극에서 얼음을 깨고 올라와 정찰하는 중에 초원에 노니는 양떼들을 보았다는 영국해군의 무전기록이 있다고 전해진다. 본부에서는 헛소리로 예단해 버렸다. 이처럼 1차원 세상에서도 시간과 공간이 묘하게 교차하는 지점이있다. 그곳이 차원이 다른 세상이다.가끔 그런 현상을 보았다는 사람들이 있다. 보지 못한 사람들은 몸이 허할때 보이는 환시라고 단정해 버린다. 어린시절 추운 어느 겨울 달밤에 갑옷을 입고 칼을 찬 군사들의 한무리가 말을 타고 우리집 마당을 뚜벅 뚜벅 지나가는 모습을 본적이있다.부모님께 말슴드렸더니 역시 환시라고 하셨다.그분의 뜻만 있으면 북극에서 초원이 보이듯이 언제든지 세상에 모습을 보일지도 모른다. 아니 지금 우리들 앞에서 우리들의 서글픈 모습을 보고 계실지도 모른다
4/7일
날씨가 너무 포근하다. 포근해도 걱정이 앞선다. 그 많은 옷들, 사철 골라가면서 입었던 옷들, 뉴질랜드에 다두고 왔기 때문이다. 작년 일 년 동안은 회사에서 지급한 작업복을 입고 별 불편 없이 지냈는데, 이제부터가 걱정이다. 가방 속에 넣어온 옷들도 오래 입다 보니 헐어져 손 볼 것이 많다. 마음이 불편 할 때는 옷 걱정 안하고 지냈지만 봄바람이 살랑 살랑 불어오니 왠지 모를 설레 임이 일기 시작한다. 젊은이도 아닌데 바람이 들었나 보다. 학교에 나가보니 다들 멋쟁이들이다. 입학식 날 같은 본당에 다니는 대학교수인 후배가 "형님, 이제부터 학생입니다. 고집부리지 말고 깔끔하게 하고 다니라"고했다. 다음 주에 여동생 불러 맛있는 점심도 사먹고 봄옷을 몇 벌 사서 멋 좀 부려 볼까한다.
4/8일
사랑은 예수님의 계명이다. 그러므로 사랑하며 살아야 계명을 지키는 것이 된다. 그런 사람은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이다. 그 사람 가슴 속에는 하느님의 성령이 가득 차 머무르고 있다. 하지만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 자도 있다. 삶을 바꾸지 않으면 주님 반대편에서서 알게 모르게 죄를 짓게 된다. 주님의 사랑은 사람들이 흉내 낼 수없는 완벽하고 무한한 사랑이다. 오른뺨을 맞으면 왼뺨까지 내주어야하고, 남을 위해서 죽음까지 불사해야 되고, 서울역에서 자기는 부산까지 걸어가고 남의차비를 대납해주는 사랑, 등등, 너무 힘들다. 이렇게 살려면 속을 완전히 도려내고 바보가 되어야겠다. 그러면 성령의 도움으로 또 다른 신비한 세상을 경험하게 될까.
4/10일
오늘 영성신학 강의시간에 신부교수님께서 색다른 말씀을 하시였다. "지상의 부자들은 이미 받을 복을 다 받고도 그것이 부족하여 천국까지 가려한다. 참 욕심도 많지요. 천국은 잘 먹고 잘살기 위해서 가는 곳이 아닙니다. 아무나 갈 수 있는 곳도 아니지요. 인격과 자질을 갖춘 사람들만 가는 곳입니다. 엉뚱한 사람이가면 분위기 다 버립니다. 하느님을 경외 하고,이웃을 사랑하는 사람, 평화의 천국으로 만들 수 있는 사람, 하느님 뜻과 일치를 이루는 사람, 하느님과 심오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사람이라야 한다." 천국가기도 힘든데 가서 살아가기가 더 힘들 것 같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하느님까지 속일 수 있어 재미있는 곳인데 말입니다
4/11일
함께 근무하다 그만둔 직원(신자임)을 다른 회사에 취직을 시켜주었다(선행은 숨겨 두어야 하는 것인데...) 그만두기 얼마 전부터 수심에 잠겨있던 모습이 내내 마음이 걸렸다. 여기가 물어보고 저기가 알아보던 끝에 보름 만에 자리를 얻게 되었다. 사람을 소개시켜주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취직은 함께 일하는 동안 그가 보여주었던 부지런함과 노력의 대가였다. 최선을 다해 일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사람이었기에 가능했다.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면 발 벗고 나서지도 않았을 것이다. 취직이 되었다고 통보하였을 때 60밑자리 깐 그의 웃음소리가 천진스럽게 들렸다. 그 기쁨을 함께 나누려고 오늘 학교도 빼먹었다. 가족과 함께 즐거워 할 모습을 생각하니 한잔마신 기분은 날아갈 것 만 같다. 오늘은 기분 좋은 날이다
4/13일
벚 꽃 축제가 열리는데 늦은 밤 또 봄비가 내린다. 창밖에는 보슬비가 내리는 것 같다. 살고 있는 아파트에는 해마다 3일간 씩 벗 꽃 축제가 열린다. 어디에서 다 모였는지 차가 빠져나 갈수 없을 정도로 인산인해였다. 현란한 야외조명아래 벗 꽃은 낮에 보는 것 보다 훨씬 화사하게 보였다. 주차장마다 토속음식을 파는 천막들이 즐비했다. 벗 꽃구경이 아니라 먹고 마시러 온 사람들이 대부분 이였다. 추운 겨울을 이겨내고 일 년 만에 피운 벗 꽃을 맞이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어떤가 보고 싶었다. 가족, 연인들이 오손 도손 벤치에 앉아 차를 마시며 자연을 이야기하고 시를 읊고 음악을 듣는 자리였으면 좋았을 텐데, 돗떼기 시장 같은 분위기였다. 유별난 나만의 생각이었나.
4/14일
잔인한 달 사월도 중순이다. 날씨가 춥고 바람이 무섭게 분다. 추위 속에 핀 벗 꽃들이 다 피지도 못하고 눈송이처럼 날아다닌다. 기후변화가 심상치 않다. 대학 다닐 때 숙꽃처럼 예쁜 여대생과 진해 벗 꽃 축제에 간적이 있다. 훈훈한 바람 불어 고운 꽃잎 하늘거리고 햇살에 비친 화장기 없는 얼굴이 해맑아 보였는데. 오늘 그녀가 몹시 그립다. 지금은 어디서 무얼 하고 있을까. 흰머리 성성한 할머니 생각을 하니 생각이 멈추어버린다. 어쩌다가 봄 날씨가 이처럼 변했을까. 지금 남극의 보물 같은 얼음이 녹아내린다고 한다.
화석연료사용으로 생겨나는 탄산가스의 영향으로 온난화가 가속된다. 남북극 얼음이 다 녹으면 수면이 4-50메타 상승 한다하니 높은 산들만 남게 되겠지 그래도 문제는 있다. 바닷물은 끓고 하늘은 요동칠 것이다. 그날이 언제 올지도 모르는데 아직 흥청망청 살아가는 우리네들이 너무 한심하다.
4/16일
우리 몸에는 수백 가지의 병원균들이 잠자고 있다. 건강할 때는 잠만 자다가 면역체계가 무너질 때쯤 잠에서 깨어나 몸을 병들게 한다. 우리가 마음에 상처를 입고 갈팡질팡 할 때 마음의 면역체계가 무너지게 된다. 靈肉이 병드는 이치가 같은 것이다. 이때 더러운 악령의 무리들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사랑은 증오로, 용서는 원한으로 증폭시킨다. 결국 자신만을 죽이게 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일까. 마음의 면역체계가 무너질까하는 것이다. 면역체계에 적신호등이 켜지더라도 하느님과 함께 하면 회복이 된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믿음에 대한 은총이다. 이 은총 속에 산다면 어떤 고통이 찾아오더라도 주님은 우리를 지켜주시리라 믿는다.
4/17일
아시아에서 제일 영어를 잘하는 민족이 필리핀이고 못하는 나라가 일본이다. 일본인은 영어를 못해도 불편한 일이 없단다. 우리처럼 달라를 수 조원씩 낭비하면서까지 연수하러가지 않는다 .필리핀은 못살고 일본은 왜 잘사는가. 우리는 영어회화보다 더 중요한 것을 놓치고 살아간다. 바로 인성교육이다. 그들은 올 바른 가정교육과 학교교육으로 정직성과 근면성이 몸에 녹아 흐른다. 외국투자자들은 일본사람들의 정직성을 믿는다. 매일 매일 잔돈까지 헤아려서 장부를 작성한다. 해마다 정직한 결산 내용과 이윤을 챙겨 보내주기에 감독하러 갈 필요가 없단다. 한국인처럼 어학연수를 가지 않아도 그들은 세계화에 뒤지지 않는다. 상품수출해서 번 달러를 낭비하는 이 나라 교육정책에 뭔가 이상하다. 혹자는 어학연수도 중요하지만 세상을 배우러 가는 것도 중요하단다.
4/21일
영성신학에 망덕(希望)이라는 단어가 나온다. 삶의 필수적인 요소가 희망이다. 버려진 사람들이 겪는 고통은 사랑해주는 사람이 없는 외로움이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몸이 살아 있어도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본능적으로 내일의 희망을 바라보며 살아간다. 희망도 일종의 욕망이지만 善에 대한 慾望이다. 희망은 구원의 완성을 의미하며 하느님과 완전한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얻어진다. 현대의 구원은 개인적인 색채가 너무 강하여 개인구원의 인상을 받을 수 있다. 그리스도교의 희망은 현세에서 시작하여 천국에서 완성되어진다. 구원을 희망하지만 가는 길이 너무 너무 힘드는 일이다.
4/23일
남극에 불어오는 뜨거운 열기로 거대한 빙산이 떨어져 나와 항해를 시작한다. 빙산의 90%는 물에 잠기고 10%만 고개 내밀고 망망대해를 향해 떠내려 간다.신앙인들의 마음은 빙산과 같다. 기도, 미사, 봉사, 전교등 외적인 면에서 열심인 반면에 내적 신앙 태도 면에서 속마음은 여전히 물에 잠겨있다. 하느님께 청원만 함으로써 하느님과 장사하는 신앙인들로 변해 버렸다고 한다. 신앙생활, 아무리 열성적으로 하드래도 속마음이 변하지 않는 한. 하느님은 외면한다. 천이백만 기독교 신자가 있는 나라, 왜 평화가 없는가. 자신의 청원만 거래하는 종교로 변모했기 때문이다. 신앙인들이 가야할 희망의 길을 인도하는 참된 목자들은 다 어디로 갔는가.
4/24일
세상이 창조될 때 하느님께서 창조 질서의 주인이셨다. 하느님. 인간 그리고 물질(소비) 순 이였다. 지금은 어떤가. 하느님과 물질의 자리가 뒤 바뀐 것 같다. 창조질서가 왜곡되어 버렸다. 사도요한이 광야에서 부르짖던 복음 말씀이 생각난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 이제야 그 뜻을 알 것만 같다. 이 시대 신앙인들, 하느님을 진실로 사랑하고 경외하는가. 하느님을 찾아 경배하면서도 하느님께서 물질에 밀려난 것도 모르고 살아가고 있다고 교수님께서 강의하셨다. 물질 숭배사상 자리에서 밀려난 하느님께선 얼마나 슬퍼하실지. 신앙인 만 이라도 하느님을 제자리에 모시도록 노력하는 일이 바로 회개하는 일이 아닐까
4/26일
온 종일 하늘만 바라보다 하루가 저문다. 옛날에 비가 많이 내리면 하느님이 무심하다고 했다. 세상이 창조된 때부터 하느님은 보이지 않는 본성이 있다고 로마서1장에 이야기한다. 눈비 내려 마실 물주시지. 숨 쉬는 공기를 만들어 주시지 만물이 소생하라고 따사한 햇볕까지 내리시니 부족한 것 하나도 없다. 하느님은 먼 하늘나라에 계신분이 아니고 그분의 무한한 힘을 직접 피부로 느끼게 하는 바로 내 앞에 계신다. 인간들이 그분이 만드신 세상을 함부로 갉아먹어 황폐화 시킨다면 남은 것은 파멸뿐이다. 이 세상은 창조주 하느님의 것이지 잠시 머물다 가는 우리들 것이 아니다. 의지가 약한 인간은 그분의 능력과 힘을 믿는 것이다. 머무는 동안 그분의 깨끗한 옷을 실수로 더렵혀 놓았으니 우리가 깨끗하게 세탁해 드리고 떠나야한다. 그것이 창조주에 대한 우리의 예의이자 이 시대 신앙인들의 소명이라고 생각된다. 이제 우리가 믿는 믿음의 방향을 맹목적인 이상주의에서 탈피하여 자신 구원대신 세상구원을 위해 나서야한다. 그리고 병들어 가는 그분의 신음소리를 귀담아 들어야 한다. 그 분의 몸이 병들면 인류가 함께 병들기 때문이다. 그분이 만든 세상을 지키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면 믿음도 천국도 없다
사월의노래 / 백남옥
목련꽃 그늘 아래서 베르테르의 편지 읽노라 구름꽃 피는 언덕에서 피리를 부노라
아- 멀리 떠나와 이름 없는 항구에서 배를 타노라 돌아온 사월은 생명의 등불을 밝혀 든다 빛나는 꿈의 계절아 눈물 어린 무지개 계절아
목련꽃 그늘 아래서 긴사연의 편질 쓰노라 클러버 피는 언덕에서 휘파람 부노라 아- 멀리 떠나와 깊은 산골 나무 아래서 별을 보노라
돌아온 사월은 생명의 등불을 밝혀 든다 빛나는 꿈의 계절아 눈물 어린 무지개 계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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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그러게요. 봄의 부재.. 오늘은 여름이 성큼 다가온 듯 초여름 날씨네요. 슬퍼요. 자연의 병들어 가는 모습에.. 초목에 싱그러운 물오름![~](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28.gif)
저는 그 연두빛을 너무 사랑하거든요. 오랜만에 인사올립니다. 건강하시죠![?](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59.gif)
행복한 나날 되십시오.![~](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28.gi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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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짝스럽게 찾아온 여름밤같은 날씨군요. 간만에 웃도리 훌쩍벗고 창문을 열어재치고 더워진 밤공기를 마셔가며 인사드립니다. 학교에 나가면서부터 고민한 내용이 있는데 하느님을 어떻게 만나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느님은 멀리 있는 분이아니라는 것을 서서히 알게 된것 같습니다.세상만물을 창조하시고 다스리는 분임을 깨딷고 부터 사마니즘같은 구원에서 해방되는 즐거움을 맛보려는 순간입니다.창조주님은 바로 내앞에 계신다. 흐르는 강물도 부는 봄바람도 다 그분의 숨결이라고 생각하니 어찌 그분을 경외하지 않으리오, 자신의 옷은 뒤에 빨래하드라도 우리들이 더렵혀 놓은 그분의 옷자락을 말끔이 씻어드리고 싶습니다.
이 세상을 하느님께서 만드신 것은 맞습니다. 성서에도 그렇게 나오고요. 하느님께서 세상을 만들때 인간의 속성을 미리알고 이대로 갈수밖에 없음을 예측한 것 아닐가요.인간탐욕이 결국 하느님까지 병들게 만들었군요. 좋은 글 읽었습니다
아무 희망도 생각도 없이 혼자서 살아간다.혼자 살아도 고뇌는 늘 있다. 그럴때마다 미사에 참여하여 주님을 불러본다.천갈래 만갈래로 찢어지고 흩어진 고뇌가 주님보다 먼저 달려와 주님과의 만남을 방해한다. 이럴 때 산을 오른다. 오르는 가뿐 숨결에 고뇌는 멈춘다. 숲속에 앉아 흐른 땀을 훔칠때 어디선가 아름다운 새 울음소리 들려온다.그분의 말씀은 성서에도 있지만 자연속에서도 주님의 목소리가 들린다..새 울음소리는 그 분이 나를 부르는 소리이고, 흐르는 물소리는 내맘을 달래주는 주님의 은총이다. 자연에서 그 분의 음성을 듣고 숨결을 느끼면 성서말씀은 진한 사랑의 향기가 되어 더 가까이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