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N0iZGMXpquQ?si=72IFzA4-p04ZxhxT
Shostakovich - Symphony No 15 in A major, Op 141 - Haitink
그의 마지막 교향곡
15번 교향곡은 음악적 형식으로 본다면 전형적인 교향곡의 스타일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다시 1번 교향곡의 뉘앙스를 풍기면서 두 교향곡이 서로 맞물고 있는 특이한 형태를 차지하고 있다. 즉 절대 음악적 성격을 띄고 있으며 이는 음악적 퇴행의 길을 걷는 것이 아니라 그 기나긴 교향곡의 길에 마지막 이정표를 세우고 영원한 음악적 순환의 굴레로 만들었다. 15번 교향곡의 이런 작품적 특징은 그의 마지막 작곡의 시기에 위치해서, 작품 내면 못지 않게 시기적으로도 매우 아이러니컬한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15번 교향곡이 쇼스타코비치 전체 교향곡에서 차지하는 역할은 바로 그의 모든 교향곡에 대한 결론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곡을 작곡함으로써 그는 교향곡 장르에 대한 새로운 진보에 대한 시도를 다시 처음 상태로 되돌려 놓았다. 쇼스타코비치는 작곡가의 철학이 깃든 교향곡이란 장르는 무조라는 현대의 음악적 언어로 펼치기보다는 오히려 고전적 언어가 더 효율적이다라는 것을 피력하고 있다. 즉 현대음악은 새로운 형식을 통해서 재탄생 될 것임을 확신하고 있으며 교향곡의 존재 영역에 대한 정의를 내리고 있다. 15번 교향곡에서 우리가 엿볼 수 있는 것도 바로 이러한 우화적인 면과 아울러 따뜻하고 쾌활한 분위기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작곡자들의 마지막 작품에서 풍기는 삶에 대한 영원성, 종교성, 경건함과는 달리 매우 긍정적 생각과 실내악적인 경향을 풍기고 있다.
곡의 초연은 1972년 모스크바에서 아들인 Maxime Shostakovich의 지휘와 USSR Radio Symphony Orchestra의 연주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1악장 Allegretto
매우 유쾌한 분위기를 이끌고 다니며 롯시니의 "월리엄 텔 서곡"의 마지막 부분에서의 금관의 선율을 모방하고 있다. 이를 통해서 쇼스타코비치는 오케스트라의 움직임을 매우 선명하고 경쾌하게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시도는 곡 전체의 구성은 고전적이지만 세부적인 형태는 소나타 형식에 구애되기보다는 자유로운 형식 표현을 갈구하고 있다. 그러면 이러한 자유로운 형식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그것은 자유로운 형식을 통해서 자유로운 생각을 상상할 수 있으며 이 생각은 쇼스타코비치의 과거 회상으로 연결된다. 이러한 모든 역할의 결정적인 도구가 바로 롯시니로부터 모방한 금관의 선율인 것이다. 어릴 적 그가 깊은 인상을 받은 선율이며 이를 통해서 과거로 날아가는 것이다. 이 선율은 5회에 걸쳐서 반복되고 있으며 매우 다양한 인상을 남기면서 전체 악장을 이끈다.
2악장 Adagio-Largo
2악장은 장송 행진곡 풍으로 진행된다. 특히 전통적인 장송행진곡과는 달리 그만의 독특한 분위기를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장송행진곡은 1번 교향곡의 3악장, 4번 교향곡의 마지막 악장인 3악장, 11번 교향곡의 3악장"추억"에서도 쓰인 바 있는 형식이다.
3악장 Allegretto
바순으로부터 시작되는 목관의 도입부와 현을 중심으로 하는 재현부, 그리고 바이올린 솔로로 시작되는 중간부, 타악기로 마무리 짓는 피날레는 상당히 그로테스크한 면을 증폭시킨다. 실로폰, 캐스터네츠 등의 타악기가 끝맺는 부분은 그렇게 음량이 크지 않다. 여러 가지 악기가 다양한 얼굴을 가지고 등장하지만 실제적으로 나타나는 효과는 그리 과장되지 않은 모습을 내포하고 있다. 이러한 부분은 마지막 악장에도 포함하고 있다.
4악장 Adagio-Allegetto
이 악장은 표면적으로는 두 가지 특징을 지니고 있다. 수많은 타악기를 이용하고 있다는 것과 유명한 바그너의 음악을 그 소재로 삼고 있다는 것이다. 바그너의 "니벨룽의 반지" 중에서 운명의 동기나 지그프리드의 장송행진곡, "트리스탄과 이졸데" 등에서 음을 인용하고 있다. 타악기는 3악장에서도 얼굴을 내비치지만 4악장에서는 팀파니를 포함해서 무려 14종의 타악기가 등장한다. 그렇지만 타악기 특유의 강렬하다거나 투박한 면을 강조하기보다는 산뜻하고 명료한 음색이 울려 퍼진다. 1악장의 롯시니 선율이 5회에 걸쳐 나타나듯이 바그너의 이 금관과 어울어진 선율은 8차례나 반복된다. 그러면 왜 윌리엄 텔이나 지그프리드가 등장하는가? 이들은 바로 영웅들이다. 쇼스타코비치는 이러한 영웅들을 끄집어내서 음악적 소재로 사용한 것은 20세기는 영웅의 시대가 아님을 말한다. 또한 저 영웅들은 고전적인 교향곡이라고도 비유할 수 있다. 마치 영웅은 영웅의 시대에서 빛나듯, 교향곡도 마찬가지의 개념을 가지고 있다고 해석한다. 쇼스타코비치는 분명 이 4악장을 통해서 더 이상의 교향곡과의 교감은 접어두고 새로운 형체를 찾아 나서고 있음을 분명히 나타낸다.
쇼스타코비치가 심장 질환으로 세상을 떠나기 불과 4년 전, 2개월이라는 초단기에 완성된 작품입니다. 이전 번호의 교향곡에서 보여주었던 사회주의적 주제가 숨겨진, 그래서 순음악의 체취가 배어있는 그런 곡입니다.
늘 머리속에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은 주제가 뚜렷하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은 난해하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겠지만 1번을 한번 떠올려 보십시요. 그러면 이 15번을 이해하시는데 조금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글출처: 고전음악감상회>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세기 최대의 정치 사건이었던 러시아 혁명 후 구소련은 체제의 확립과 유지, 그리고 그 정당성을 지켜내고자 예술인들을 “사회주의의 리얼리즘”의 도구로 쓰는데 혁명 예술의 이끄는 표본으로 쇼스타코비치가 등장하게 됩니다. 이미 9살 때 어머니에게서 피아노 레슨으로 시작된 그의 음악가로서의 인생행로는 13세때 페테스부르크 음악학교에 입학하면서 두각을 드러내고 졸업작품으로 교향곡 1번을 만들어 냄으로써 뛰어난 음악가의 자질을 만방에 알리게 되지요. 러시아 혁명과 2차 세계대전 그리고 스탈린, 후르시초프 그리고 브레지네프로 이어지는 러시아의 격동기를 살면서 늘 감시와 비판을 받고 때로는 칭송을, 또 한편으로는 인민재판까지 받아가며 비난을 받는, 거장 쇼스타코비치는 세월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렇게 그의 작품을 만들어냈던 것입니다.
그의 사후에도 여전히 그의 노선에 대한 엇갈린 반응이 계속되는데 비록 정부의 압박으로 작품을 만들어 냈건 아니면 그 반대였든, 그는 그 당시 사회주의 예술흐름을 이끈 장본인이므로 “솔로몬볼코프”가 “증언”에서 변명을 하고 서방으로 망명한 그의 아들 막심마저 거들지라도 이미 그의 색깔은 변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20세기 피의 역사로 물든 러시아인의 영혼을 달래고 우울하고 끝이 보이지 않는 비관의 상황의 한복판에서 한편으로는 러시아 공산당의 대변자로서 또 다른 한편에서는 “인간” 쇼스타코비치로서 예술과 이데올로기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했던 그의 발자취를, 그가 남긴 위대한 작품들을 통해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는 다시 되새겨 보고 진정 그가 보여주고자 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고민하게 만듭니다. 다시 그와 같은 거장이 현세기에 등장한다면 굳이 글이나 말로써 직설적인 표현을 해내지 않더라도 그 답을 유추해 볼 수도 있겠는데 아직 이른 감은 있지만 또 다른 현시대의 거장의 출현을 기대해 봅니다.
https://youtu.be/wfBsISu3OYE?si=Fd8jbmNbhj55KO60
Symphony No. 15 in A Major, Op. 141 (1971) · Moscow Philharmonic Orchestra & Kyril Kondrashin
Kirill Kondrashin
콘드라신은 1914년 3월 6일 모스크바에서 태어났다. 비올라를 하는 아버지와 바이올린을 하는 어머니를 부모로 둔 음악가 집안에서 6세 때 피아노로 음악 공부를 시작했지만 크게 흥미를 못 느꼈다. 그러던중 14세 때 오케스트라에 큰 관심을 갖게 되면서 다시 음악 공부에 전념하게 되었다. 콘드라신은 1931년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당시 음악계의 대가인 Boris Khaikin에게 사사받는다. 이후 1936-1943년 레닌그라드의 Maly 가극장의 감독을 맡게 되면서 음악활동을 시작하였다. 1943년 스승인 Khaikin의 영향과 쇼스타코비치의 추천으로 볼쇼이 가각장의 종신 지휘자를 맡게 되었다.
콘드라신은 1956년 오페라 지휘를 그만 둘 결심을 하게 되었으며 이후 관심을 관현악곡으로 바꾸게 되었다. 1960년 모스크바 필하모닉 지휘자로 취임하여 1975년까지 이 악단을 이끌었다. 한편 1958년 미국인으로는 최초로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에서 우승한 반 클라이번과 함께 미국에 성공적으로 데뷔하였고, 소련인 음악가로서는 최초로 당시 아이젠하워 대통령에 의하여 백악관에 초대되는 기록을 세우게 된다.
콘드라신은 소련 음악을 서방에 알리는데도 힘을 썼으며 쇼스타코비치와 의 친분으로 그의 교향곡 4, 12, 13번 초연을 맡기도 하였다.
1978년 정치적 신념 하에 네덜란드로 망명하여 1968년 이래로 같이 활동을 한 콘서트헤보 오케스트라의 종신 수석 지휘자를 하이팅크와 같이 맡게 되었다.
1981년 3월 7일 자신의 생일날 함부르크의 NDR 심포니기 암스테르담 순회 연주시 이 악단과 말러 교향곡 1번을 지휘하였는데 그 연주회가 끝내고 밤에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다. 이때의 3월 7일 연주는 당시 청중들에게는 잊지 못할 감동의 연주회였다고 하는데 일본에서는 이날의 연주가 음반으로 이미 발매된 바 있다.
글출처: 고 클래식
https://youtu.be/_UVrFkeiU14?si=xORZeiiuPlJH6rwj
Vinyl: Shostakovich - Symphony No. 15 (Rozhdestvensky) 지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