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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세기 말末 파리로 초대, ‘이건희컬렉션’ 해외미술품 전展 ▒
«MMCA 이건희컬렉션 특별전: 모네와 피카소, 파리의 아름다운 순간들»은 2021년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된 이건희컬렉션에 포함된 마르크 샤갈, 살바도르 달리, 카미유 피사로, 클로드 모네, 폴 고갱,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호안 미로의 회화 7점과 파블로 피카소의 도자 90점을 소개하는 전시이다. 이들은 미술 중심지였던 파리에서 스승과 제자, 선배와 후배, 혹은 동료로 만나 서로의 성장을 응원해 주며 20세기 서양 현대미술사의 흐름을 함께 만들어간 거장들이다. 이번 전시는 여덟 명의 거장이 파리에서 맺었던 다양한 관계에 초점을 맞추어 이들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도록 구성했다. 회화 간 관계성뿐만 아니라 피카소의 도자와 다른 거장들의 회화가 어떻게 연관하는지도 살펴보고자 한다. «MMCA 이건희컬렉션 특별전: 모네와 피카소, 파리의 아름다운 순간들»을 통해 거장들이 서로에게 표현한 우정과 존경의 감정으로 충만했던 파리의 아름다운 순간들을 경험할 수 있다.
이 전시는 고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기증한 해외미술작품 중 피카소의 도자 22점을 제외한 모든 작품이 다 나왔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진행했던 ‘어느 수집가의 초대-고 이건희 회장 기증 1주년 기념전’에 출품됐던 모네의 ‘수련이 있는 연못’(1917~1920)을 제외하면 모두 첫 공개다.
◦ 기간 : 2022-09-21 ~ 2023-02-26
◦ 주최/후원 : 국립현대미술관 / 신한은행
◦ 장소 : 과천 1층, 1원형전시실
◦ 작가 : 마르크 샤갈, 살바도르 달리, 카미유 피사로, 클로드 모네, 파블로 피카소, 폴 고갱, 피에르-오귀스트 르누아르, 호안 미로
◦ 작품수 : 회화 및 도자 97
◦ 관람료 : 0
▒ 모네부터 피카소까지…서양미술 거장 8인 한자리에 (kbs.co.kr)
‘MMCA 이건희컬렉션 특별전: 모네와 피카소, 파리의 아름다운 순간들’ 전시장 전경,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작가들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던 프랑스 파리의 센강(Seine江)
조르주피에르 쇠라(Georges-Pierre Seurat, 프랑스의 신인상주의 화가), 그랑드 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Un dimanche après-midi à l'Île de la Grande Jatte), 1884-1886, 캔버스 유화(油畵), 207х308cm, 미국 시카고 미술원(Art Institute of Chicago)에 소장 - [이번 전시작품은 아닌 센강. 참고 작품]
피사로와 고갱 : 스승과 제자로 만난 파리의 두 거장 - 파리가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된 건 언제부터였을까? 낡고 오래된 중세식 도시 파리를 현대화하는 사업이 시작된 것은 19세기 중엽이었다. 에펠탑과 센강 변의 다리, 철골과 유리를 사용한 건물, 가로등 같은 전기 조명으로 빛을 밝힌 넓은 도로, 그리고 공원이나 유원지 같은 여가 시설도 모두 이 시기에 만들어졌다. 불과 몇십 년 만에 전례가 없는 현대적인 대도시가 탄생한 것이다. 당시 젊은 미술가들은 파리의 이런 현대적인 모습을 새로운 예술의 주제로 인식하기 시작했고, 그 모습을 포착해낸 이들의 캔버스 위에서 인상주의 미술이 꽃을 피우게 된다.
카미유 피사로는 파리 근교의 퐁투아즈에 체류하며 그곳의 전원 풍경과 대도시 파리의 모습을 즐겨 그렸던 인상주의의 거장이다. 새로운 작가의 발굴과 지원에도 적극적이었던 그는 젊은 화가들에게 스승 같은 존재였는데, 폴 고갱도 그의 제자였다. 고갱은 피사로가 참여했던 1874년의 «제1회 인상주의 미술전»을 접한 뒤 화가로의 전업을 꿈꾸게 되었고, 피사로는 고갱이 이 시기에 그린 초기작을 보고 그의 꿈을 응원해 주었다. 자신을 따라 퐁투아즈로 이주한 고갱이 인상주의 풍경화를 완벽하게 그릴 수 있도록 지도하고, «인상주의 미술전»에도 참여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스승 피사로의 이런 따듯한 응원은 고갱이 무명의 화가에서 현대미술의 거장으로 성장하는 밑거름이 되었니다. 스승과 제자의 인연으로 만나게 된 두 거장의 아름다운 순간을 이들의 작품을 통해 경험해 볼 수 있다.
폴 고갱(Paul Gauguin), 센강 변의 크레인(Crane on the Banks of the Seine),
1875, 캔버스에 유채, 77.2×119.8cm, 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컬렉션
이 그림은 1870년대 중반, 고갱이 본 파리 센강의 모습을 담고 있다. 아이의 손을 잡고 강변을 걷는 어머니의 뒷모습도 보이고, 저 멀리, 공장에서 솟아오르는 연기도 보이지만, 이 그림의 주인은 강변에 설치된 거대한 크레인이다. 이 크레인 주위의 풍경은, 19세기 후반, 현대화되기 시작하던 파리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 그림을 그릴 당시, 고갱은 증권 거래소 직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그림 애호가이자 수집가에 더 가까웠던 고갱은, 인상주의 미술을 접하면서 미술 수업을 본격적으로 받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그가 증권회사를 그만두고 직업 화가의 길로 들어선 건 조금 더 후의 일이었다. 인상주의의 영향을 받았지만, 사실 고갱은 근대화된 대도시 파리의 풍경보다는 파리 근교의 전원 풍경과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을 그리는 것에 더 관심을 가졌다. 그의 이런 성향은 발전하는 서구 문명과 대비되는 또 다른 문화를 향한 관심으로까지 이어진다. 결국 그는 1891년 파리를 떠나 남태평양의 타히티로 이주한 뒤, 그곳에서 이국적인 자연과 인물을 주제로 작품들을 1903년 생을 마감할 때까지 제작하기 시작한다.
전시장 초입에 놓인 피사로와 고갱은 유명한 사제지간이다. 피사로는 고갱의 초기작 ‘센강 변의 크레인’(1875) 등을 접한 뒤 그의 재능을 알아본다. 피사로는 당시 증권 중개인이었던 고갱에게 직접 풍경화를 지도하고 전시회 참가 기회를 주는 등 전업 화가의 길로 이끈다. 파리 근교의 전원 풍경과 아이 손을 잡고 강변을 걷는 어머니의 뒷모습을 포착한 ‘센강 변의 크레인’이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모여들었던 시장 풍경을 그린 피사로의 ‘퐁투아즈 곡물 시장’(1893)과 어쩐지 비슷한 느낌을 풍기는 이유다.
카미유 피사로(Camille Pissarro), 퐁투아즈 곡물 시장(Le Marche Aux Grains Pontoise),
1893, 캔버스에 유채, 46.5×39cm, 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컬렉션
카미유 피사로의 ‹퐁투아즈 곡물 시장›은 피사로는 모네, 르누아르와 더불어 가장 적극적으로 인상주의 미술 운동에 참여했던 작가이다. 마지막 인상주의 전시회가 개최되었던 1886년 즈음부터 4년여간 그는 인상주의의 영향을 받은 젊은 작가들이 이끌었던 신인상주의 미술 운동에 잠시 가담하기도 했다. 이 그룹의 작가들은 점을 찍듯이 채색해 그리는 점묘 기법을 주로 사용했는데, 1893년에 그려진 이 작품에서 이런 기법이 드러난다.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모여드는 시장 풍경은 피사로가 선호하던 주제 중 하나였는데, 그가 그린 퐁투아즈 곡물 시장 풍경의 전면에는 곡물을 팔러 나온 상인들이 앉거나 선 채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그 뒤편으로는 물건을 구경하거나 구입한 물건을 옮기는 손님들이 보인다. 그 너머로 보이는 광장에서는 구경거리라도 생겼는지, 사람들이 둥글게 원을 그린 채 모여들어 있다. 이렇게 사람들로 꽉 찬 풍경이지만, 이 그림은 조금도 혼잡하거나 소란스러워 보이지 않다. 짧은 붓 터치로 표현한 눈부신 반사광 속에서, 윤곽선은 흐릿해지고 인물들은 풍경 속에 섞여들며 평화롭고 나른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이 그림을 그릴 당시, 피사로는 이미 60대에 들어선 나이였지만 젊은 작가들이 주축이 된 신인상주의 미술 운동에 참여했을 뿐 아니라, 고갱, 반 고흐, 앙리 마티스, 폴 세잔 같은 미래의 거장들이 화가로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 준 스승이기도 했다. 이런 이력으로 인해 피사로는 인상주의와 그 이후 세대를 연결하는 가교역할을 했던 작가로 평가된다.
작가들 사이에서도 큰 주축이 되는 작가는 피카소였다. 미로와 달리는 피카소를 만나기 위해 처음 파리를 방문한 작가들이다. 세 사람은 모두 스페인 출신이지만 파리에서 서로를 처음 만나 교류했다. 이는 작품으로 증명된다. 그리스 신화 속 반인반마 종족인 켄타우로스를 주제로 한 달리의 ‘켄타우로스 가족’(1940)과 피카소의 도자 ‘켄타우로스’(1956), 사람과 새와 별이 있는 밤 풍경을 추상적으로 표현한 미로의 ‘회화’(1953)와 피카소의 ‘큰 새와 검은 얼굴’(1951)은 작가들 간의 접점을 보여준다.
호안 미로(Joan Miró, 1893-1983), 회화, 1953, 캔버스에 유채,
96×376cm, 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컬렉션, ⓒ 2022 - Lee yeongil
호안 미로의 ‹회화›는 살바도르 달리와 마찬가지로, 호안 미로도 1920년대 파리에서 초현실주의 미술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하지만 달리와 미로의 그림은 한눈에 보기에도 무척이나 다르다죠. 달리의 초현실주의 작품이 대상을 고전적인 방식으로 그렸다면, 미로는 보다 조형적인 자신만의 초현실주의 작품을 발전시켜 나간다. 1953년에 발표된 이 그림에는, 별과 새, 사람과 깃발 같은 형태들이 마치 도식이나 기호처럼 단순화된 형태로 표현돼 있다. 인물과 동물, 자연과 우주의 시공간이 공존하는 밤의 풍경을 보여주는 이 작품처럼, 미로의 그림은 언뜻 보면 마치 어린아이의 낙서처럼 단순하고 즉흥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미로는 붓을 들기 전, 아이디어를 구상하는데 오랜 시간을 할애하곤 했다. 그리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면, 손이 이끄는 대로 붓을 움직여 선을 그리고 형태를 완성해나갔다. 이렇게 우연성과 즉흥성에 기반한 미로의 초현실주의 작품은, 1920년 처음 파리에 발을 내디뎠던 무명의 화가를 세계적인 거장의 반열에 올려놓게 된다.
피카소의 도자 : 피카소는 파리에 온 첫해였던 1900년, 파리에서 고갱의 도자 작품을 처음 본 뒤 도자예술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다. 하지만 피카소가 직접 도자기를 제작하기 시작한 것은 1940년대 말 남프랑스에 체류하면서부터이다. 발로리스에 위치한 도자 제작소 마두라 공방을 방문한 것을 계기로, 불을 이용해 제작하는 도자예술의 새로움에 매료됐던 건데, 흙을 빚어 형태를 만드는 조각적인 속성과 도기 위에 그림을 그리고 채색하는 회화적 속성이 결합됐다는 점 또한, 피카소가 도자에 관심을 가지게 된 이유 중의 하나였다. 도자기는 판화처럼, 같은 형태의 도기를 여러 점 제작하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에, 피카소는 이런 특성을 이용해 도자 에디션을 제작하기 시작한다. 1947년부터 1971년 사이, 총 633점의 ‘피카소 도자 에디션’이 만들어졌는데,
각각의 에디션들은 적게는 25개에서 많게는 500개까지 제작되었다고 한다. 피카소는 이런 작업을 통해 회화, 조각, 판화 등 장르의 경계를 넘나드는 조형적 실험을 도자에까지 이어나가게 된다. ‘피카소 에디션’을 대표하는 주요 작품들을 소개하는 이번 전시를 통해 그의 도자예술이 지닌 다양성과 그의 예술이 보여주는 확장성을 동시에 경험해 볼 수 있다.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 1881-1973), 큰 새와 검은 얼굴( Big bird black face), 1951, 백토,
화장토 장식, 나이프 각인, 50x47x38cm, 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컬렉션 ⓒ 2022 - Lee yeongil
파블로 피카소의 ‹큰 새와 검은 얼굴› : 피카소는 비둘기와 카나리아를 집에서 키울 정도로 새를 좋아했다. 1946년에는 프랑스의 앙티브 미술관에서 작업하는 동안 미술관 구석에서 상처 입은 올빼미를 발견해 치료해 준 뒤 파리로 데려가 키웠을 정도였다. 올빼미는 지혜의 여신 아테나의 상징이자 용기와 지성의 상징이기도 한데, 그리스 신화에 관심이 많았던 피카소에게 올빼미가 지닌 이런 상징성은 무척 흥미로웠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그의 도자 작품에는 올빼미와 부엉이가 꽤 자주 등장한다. 이 화병 역시 피카소의 손을 거쳐 올빼미를 닮은 새로 탈바꿈했는데, 넓은 원통형의 밑굽은 새의 발이 되었고, 앞쪽으로 살짝 구부러진 입구는 쭉 뻗은 새의 목으로 변신했다. 화병 옆에 붙은 두 개의 손잡이는 두 개의 팔이 되었다. 검은색과 붉은색으로 부리와 눈, 깃털과 날개, 다리를 칠하고 배의 앞쪽에는 검은 마름모꼴을 그린 뒤, 그 안에 눈과 콧대와 입술의 형태를 철사로 긁은 듯이 표현하고 있다. 어린아이가 그린 것 같은 단순한 얼굴은, 미로의 그림에서 볼 수 있는 조형적 형태와도 꽤 닮아있는 것처럼 보인다.
피카소, 미로, 달리 : 파리의 스페인 화가들과 에콜 드 파리 : 피카소와 후안 미로, 그리고 살바도르 달리. 이 세 사람의 공통점은 스페인 출신의 작가들이라는 것이겠다. 그런데 이들이 서로를 만난 곳은, 흥미롭게도 스페인이 아니라 프랑스 파리였다. 1900년, 파리에 정착해 성공한 작가의 반열에 오른 피카소는 미로나 달리에게 일종의 롤모델과도 같은 선배였다. 1920년 미로가 파리를 처음 찾았을 때, 피카소는 미로가 계속 파리에서 활동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준다. 이 만남을 계기로 두 사람은 평생 친구이자 동료로서 관계를 이어나가게 돤다. 6년 뒤인 1926년에는 달리도 피카소를 만나기 위해 파리에 오는데, 이때 달리에게 피카소를 소개해준 사람도 미로였다. 미로는 2년 후 달리에게 초현실주의 작가들과의 만남을 주선해 준다. 어떤 의미에서는 초현실주의 거장, 달리의 등장을 가능케 한 사람이 바로 미로였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스페인 출신의 이 세 화가가 파리에서 서로의 성장을 응원하던 모습은 20세기 초 파리의 상황을 잘 드러내 주는 일화이기도 하다. 국제적인 미술 중심지였던 파리에 외국인 미술가들이 몰려들면서 이들을 지칭하는 ‘에콜 드 파리’라는 명칭이 생길 정도였는데, 이들 외국인 미술가들은 각자의 고유한 문화적 전통과 파리에서 접한 새로운 미술 경향을 결합하면서‘에콜 드 파리’ 스타일까지 등장시켰다. 피카소와 미로, 달리는 각자의 고유한 에콜 드 파리 스타일을 만들어냈지만, 이번 전시에 출품된 세 사람의 작품에서는 몇 가지 공통점도 찾아볼 수 있다. 달리의 ‹켄타우로스 가족›과 피카소의 도자는 신화를 주제로 한 작품들이다. 사람, 새, 별이 있는 밤의 풍경을 추상화한 미로의 ‹회화›는 사람과 새를 주제로 한 피카소의 도자 작품과 비교해 볼 수 있다.
파블로 피카소, 황소, 1955, 백토, 화장토 장식, 나이프 각인, 30x18x22cm, ⓒ 2022 - Lee yeongil
파블로 피카소 ‹투우› 연작 ⓒ 2022 - Lee yeongil
피카소의 ‹투우› 연작은 8점으로 구성된 접시 세트이다. 붉은 흙으로 만든 접시에 피카소가 제작한 틀로 기본적인 투우 장면들을 찍어낸 후 검정색 화장토로 채색해 제작한 작품이다. 투우의 개막식 행렬을 시작으로, 경기가 진행되는 과정과 소를 찌르거나 일격을 가하는 다양한 기술에 이르기까지 투우의 장면들이 도자 위에 생생하게 재현돼 있는데, 투우는 스페인의 국기(國技)라고 할 만큼 스페인을 대표하는 전통 기예다. 입체주의를 필두로 현대미술의 흐름을 주도한 작가였지만 고국의 문화적 전통을 잊지 않았던 피카소는, 도자뿐 아니라 회화, 조각, 판화 등 작품 전반에 있어 투우를 작품의 주요한 주제로 다루었다. 남프랑스에 위치한 마두라 공방에서 작업하는 동안, 그 지역에서 열린 투우 경기를 자주 관람하곤 했던 것도, 피카소의 도자 작품에 투우가 자주 등장하는 이유 중 하나이다.
파블로 피카소, 〈나뭇잎 테두리가 있는 황소〉, 1957, 적토, 화장토 장식,
나이프 각인, 23×23×2.5cm ⓒ 2022 - Lee yeongil
파블로 피카소, 〈얀의 얼굴(1963), 옆모습(1953), 얀의 얼굴(1963)〉, 적토, ⓒ 2022 - Lee yeongil
파블로 피카소, 꽃다발Bunch, 1955, 백토, 화장토 장식, 나이프 각인, 유약 시유,
35×29.5×3.5cm, ⓒ 2022 - Lee yeongil
파블로 피카소, 〈꽃다발이 있는 화병〉, 1956, 백토, 산화 파라핀,
베이지색 파티나 장식, 부분 시약 시유, 25×25×2.5cm ⓒ 2022 - Lee yeongil
파블로 피카소, 사과와 꽃다발Bunch with Apple, 1955, 백토, 산화 파라핀, 유약 시유,
24×24×2cm, ⓒ 2022 - Lee yeongil
르누아르는 피카소가 뒤늦게 매료된 작가다. 피카소는 르누아르의 ‘노란 모자에 빨간 치마를 입은 앙드레(독서)’(1917~1918)를 발견하곤 1919년 존경의 마음을 담아 르누아르의 초상화를 그렸다. 샤갈은 피카소를 1910년부터 피카소를 만나고자 노력했지만 제2차 세계대전 등으로 인해 불발되다 1940년대 말 피카소가 도자를 제작하던 남프랑스에서 처음 조우한다. 연인과 꽃 등을 통해 생의 순간들을 담은 샤갈의 ‘결혼 꽃다발’(1977~1978)은 피카소가 꽃다발이나 비둘기 등을 그려낸 도자와 겹쳐봐도 좋다.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Pierre-Auguste Renoir), 노란 모자에 빨간 치마를 입은 앙드레(독서),
1917-1918, 캔버스에 유채, 46.5×57cm, 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컬렉션 ⓒ 2022 - Lee yeongil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의 ‹노란 모자에 빨간 치마를 입은 앙드레(독서)›는 13살이 되던 해 도자기 그림 공방의 견습생으로 그림을 시작한 르누아르는, 20대 초반, 파리에서 본격적인 미술 수업을 받기 시작하며 화가의 길로 들어선다. 이때 모네나 피사로 같은 동료 작가들을 만나면서 인상주의 미술 운동에 참여하게 되는데, 르누아르는 인상주의 화가들이 즐겨 그리던 야외 풍경보다는 카페나 무도회장, 유원지에서 여가를 즐기는 사람들의 행복한 순간을 포착해내거나 사람들의 옷 위에 어른거리는 햇빛의 묘사를 통해 눈부시게 밝은 야외의 분위기를 묘사하는 데 관심을 가졌다. 이 그림처럼 여성 인물 역시 그가 즐겨 그린 주제였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 그림의 주인공은 앙드레라는 여인이다. 앙드레는 1915년부터 르누아르가 세상을 떠난 1919년까지 그의 작품에 자주 등장했던 모델이다. 르누아르가 사망하기 1년 전에 제작된 이 작품은 여성을 입체적으로 묘사하는 고전적인 기법을 따르고 있다. 하지만 빠르게 대상을 포착해 그린 듯한 자유분방한 필치에서는 여전히 인상주의의 영향이 남아있음을 느낄 수 있다.
클로드 모네(Claude Monet, 1840~1926), <수련이 있는 연못(Les Nymphéas)>, (1917~20). ‘이건희컬렉션
특별전: 모네와 피카소, 파리의 아름다운 순간들’의 대표작. 국립현대미술관 ⓒ 2022 - Lee yeongil
클로드 모네의 ‹수련이 있는 연못› : 인상주의라는 명칭이 ‹인상, 해돋이›라는 모네의 작품에서 유래했을 만큼, 인상주의를 대표하는 작가가 바로 모네이다. 그는, 특정한 대상을 오랫동안 관찰하며 시간과 계절에 따라 달라지는 대상의 형태와 색채를 표현한 연작 시리즈를 여럿 남겼는데요, 이 작품을 포함한 수련 연작도 그중의 하나이다. 모네는 1883년, 파리 근교의 지베르니에 정착한 이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집 정원의 연못과 그 위에 핀 수련을 대상으로, 40여 년 동안 약 250점의 연작을 그렸다. 처음에는 정원과 연못 주변의 모습까지 담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모네는 연못의 수면에만 집중하게 된다. 화폭 안에는 오직, 물과 수련, 그리고 물에 비친 하늘의 모습만 담기게 된다. 1917년에서 1920년 사이에 그려진 이 그림 역시 마찬가지인데, 화폭의 왼쪽에는 수면에 비친 구름이 유유히 흘러간다. 마치 이 구름에서 점점이 떨어져 나온 듯 화면 오른쪽에는 둥근 연잎 위에 흰 수련들이 떠 있고, 그 주변에는 물에 비친 나무 그림자들이 드리워져 있다. 그런데 하늘과 연못, 구름과 수련이 뒤섞인 화면은 마치 하나의 평면처럼 흐릿하게 보이도록 그려져 있다. 당시 모네가 백내장으로 시력을 상실해 가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사실 그는 인상주의 미술을 통해 대상의 평면성에 대한 탐구를 꾸준히 이어갔던 작가이기도 하다. 20세기 초의 현대미술은 인물이나 풍경을 입체적으로 그리는 대신 평면적으로 그리면서 대상을 추상화해 나가려는 시도로부터 시작되었다. 이런 이유로 모네의 수련 연작은 현대회화, 특히 추상미술의 출발점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번 섹션에서는 서로를 향한 우정과 존경으로 맺어진 세 거장, 모네와 르누아르, 피카소를 만날 수 있다. 모네와 르누아르는 인상주의 미술가들 가운데서도 유독 친분이 두터운 사이였다. 파리 근교에서 함께 야외 풍경을 그리는 일도 많았는데, 이 과정에서 자연의 색채와 형태가 빛에 따라 변화하는 것을 관찰하게 된 이들은, 그 순간을 포착해 그리는 것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 특히 모네는 물과 안개, 눈과 바람 같은 유동적이고 변화가 많은 자연 풍경을 반복적으로 그리는 것을 좋아했다. 반면, 카페나 유원지에서 여가를 즐기는 사람들의 행복한 순간을 포착하는 것에 흥미를 느꼈던 르누아르는, 1881년 이탈리아를 여행하며 르네상스 미술에 매료된 이후, 대상을 사실적으로 그리는 고전적인 회화를 주로 그리기 시작한다. 이런 르누아르의 작품들은 당시 이미 젊은 거장의 반열에 올라있던 피카소의 관심을 끌게 되는데, 이탈리아 여행에서 고전주의 미술을 재발견했던 그에게, 고전주의 화풍으로 그려진 르누아르의 작품은 새로운 탐구의 대상이 되었다. 여성을 작품의 주요 주제로 삼았던 점도 피카소가 르누아르에게 관심을 가진 이유 가운데 하나였다. 1919년, 르누아르가 세상을 떠났을 때, 피카소는 거장에게 바치는 존경의 마음을 담아 그의 초상화를 그리기도 했다.
파블로 피카소, ‹이젤 앞의 자클린› . ⓒ 2022 - Lee yeongil
파블로 피카소의 ‹이젤 앞의 자클린› : 1953년 마두라 공방에서 일하던 자클린 로크와 연인 사이가 된 피카소는 1973년 작고하던 해까지 그녀와 여생을 함께했다. 이십 년간, 삶의 동반자였던 자클린의 얼굴을 피카소는 400여 점에 가까운 초상화로 남겼을 뿐 아니라, 보시는 것처럼 도자 작품에도 새겨 넣었다. 도자 속의 자클린은 우아하게 묘사되기도 하고, 얼굴은 옆모습으로, 눈은 정면으로 그려 조합한 입체주의 스타일로 재현되기도 했다.
피카소의 도자 : 피카소는 파리에 온 첫해였던 1900년, 파리에서 고갱의 도자 작품을 처음 본 뒤 도자예술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다. 하지만 피카소가 직접 도자기를 제작하기 시작한 것은 1940년대 말 남프랑스에 체류하면서부터이다. 발로리스에 위치한 도자 제작소 마두라 공방을 방문한 것을 계기로, 불을 이용해 제작하는 도자예술의 새로움에 매료됐던 건데, 흙을 빚어 형태를 만드는 조각적인 속성과 도기 위에 그림을 그리고 채색하는 회화적 속성이 결합됐다는 점 또한, 피카소가 도자에 관심을 가지게 된 이유 중의 하나였다. 도자기는 판화처럼, 같은 형태의 도기를 여러 점 제작하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에, 피카소는 이런 특성을 이용해 도자 에디션을 제작하기 시작한다. 1947년부터 1971년 사이, 총 633점의 ‘피카소 도자 에디션’이 만들어졌는데, 각각의 에디션들은 적게는 25개에서 많게는 500개까지 제작되었다고 한다. 피카소는 이런 작업을 통해 회화, 조각, 판화 등 장르의 경계를 넘나드는 조형적 실험을 도자에까지 이어나가게 된다. ‘피카소 에디션’을 대표하는 주요 작품들을 소개하는 이번 전시를 통해 그의 도자예술이 지닌 다양성과 그의 예술이 보여주는 확장성을 동시에 경험해 볼 수 있다.
피카소의 노년기 도자 작품, <검은 얼굴>, 1948. 화장토 장식. ⓒ 2022 - Lee yeongil
파블로 피카소의 ‹검은 얼굴›은 피카소는 유년 시절부터 말년까지, 방대한 양의 작품을 남겼다. 이 가운데 가장 많이 제작한 작품은 초상화였다. 그에게 가장 흥미로운 탐구의 대상이 바로 인물이었기 때문인데, 그의 도자 작품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 역시 사람의 얼굴이다. 동일한 모티프를 여러 장르와 작품에 반복해서 그리는 작업은, 그에게는 하나의 대상을 다양하게 확장해 가는 실험의 과정이기도 했다. 도자 작품 속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얼굴도 재료와 기법에 따라 무한하게 확장됐는데, 석고 틀 위에 백토를 올린 뒤 찍어서 완성하기도 했고 이 작품처럼, 백토 위에 검은 화장토를 채색한 뒤 나이프로 얼굴선을 새기고 그 위에 유약을 칠하는 기법을 사용해 만들기도 했다.
피카소와 샤갈 : 삶의 아름다운 순간을 포착해 낸 거장들 : 마르크 샤갈은 1910년, 고향 러시아를 떠나 미술의 중심지였던 파리의 몽마르트르 언덕에 작은 작업실을 마련했다. 이 시기는, 파리에서는 입체주의 미술의 영향력이 절정을 구가하던 시기였다. 고향의 풍경과 사람들을 꾸준히 그려온 샤갈 역시 입체주의 미술의 영향을 받아들여 화면을 기하학적인 형태로 분할하는 구성법을 시도했다. 입체주의 운동을 주도했던 피카소를 직접 만나고 싶어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들의 만남은 쉽게 성사되지 못했다. 1914년 러시아로 돌아간 샤갈은, 피카소를 만나지 못한 채 파리를 떠나게 된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피카소를 생각하며›라는 작품을 그리기까지 했다. 이후, 나치의 박해를 피해 미국에 체류하던 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샤갈은 피카소에게 편지를 보내고, 이 편지 덕에 전쟁이 끝난 1940년대 말, 두 거장은 드디어 조우하게 된다. 30년이나 기다려온 만남이었던 셈이다. 이들이 조우한 장소는, 피카소가 도자기를 제작하던 남프랑스의 발로리스였는데, 이 시기, 피카소는 도자기 제작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었기 때문에 샤갈이 직접 발로리스를 방문했다고 한다. 두 사람은 마두라 공방에서 함께 도자기를 만들기도 한다. 샤갈의 회화에는 염소나 물고기 같은 동물들, 꽃과 정물, 악기를 연주하고 춤을 추는 사람들이 뒤섞여 만들어내는 몽환적인 풍경들이 가득한데, 이런 주제들을 피카소의 도자에서도 찾아낼 수 있다. 인간과 동물, 자연이 함께하는 삶의 아름다운 순간들이야말로 피카소와 샤갈이 궁극적으로 보여주고자 했던 가치였기 때문일 것이다.
파블로 피카소, 〈네모난 눈의 얼굴〉, 1959, 백토, 화장토, 세라믹 파스텔 크레용,
적색 파티나 장식, 부분 유약 시유, 25×25×2cm ⓒ 2022 - Lee yeongil
파블로 피카소, 〈굵은 양각의 얼굴〉, 1963, 백토, 26.5×26.5×4cm ⓒ 2022 - Lee yeongil
파블로 피카소, 〈기하학적 얼굴〉, 1956, 백토, 32×38×3cm ⓒ 2022 - Lee yeongil
파블로 피카소, 〈사각형의 얼굴〉, 1956, 백토, 41×41×4cm ⓒ 2022 - Lee yeongil
파블로 피카소, 〈선으로 표현한 얼굴〉, 1956, 백토, 40×40×4.5cm ⓒ 2022 - Lee yeongil
파블로 피카소, 〈얼굴 111번〉, 1963, 백토, 화장토, 에나멜 장식, 유약 시유,
25×25×2.3cm ⓒ 2022 - Lee yeongil
파블로 피카소, 〈얼굴 157번〉, 1963, 백토, 화장토, 에나멜 장식, 유약 시유,
25×25×3cm ⓒ 2022 - Lee yeongil
파블로 피카소, 〈얼굴 197번〉, 1963, 백토, 화장토, 에나멜 장식, 유약 시유,
25.5×25.5×2.8cm ⓒ 2022 - Lee yeongil
파블로 피카소, 〈얼룩덜룩한 물고기〉, 1952, 백토, 화장토 장식, 부분 유약 사용,
34×41×4cm ⓒ 2022 - Lee yeongil
파블로 피카소, 〈물고기와 손〉, 1953, 적토, 화장토 장식, 부분 유약 시유, 30×30×6cm ⓒ 2022 - Lee yeongil
마르크 샤갈(Marc Chagall, 1887-1985)의 말년 작, <결혼 꽃다발>, (1977~78). ⓒ 2022 - Lee yeongil
마르크 샤갈의 ‹결혼 꽃다발› : 파란빛이 감도는 화면의 정중앙에, 붉은 꽃다발이 한 아름 담긴 꽃병이 놓여있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 누군가의 결혼을 축하하는 꽃다발이겠다. 꽃병 오른쪽에는 결혼 피로연에 사용된 듯한 와인병과 과일 바구니도 보인다. 왼쪽에는 이 결혼의 주인공인 한 쌍의 연인이 서로에게 기댄 채 흐릿하게 보이는 마을을 배경으로 서있다. 꽃과 연인이라는 주제가 샤갈의 그림에서 처음으로 등장한 시점은, 아내이자 첫사랑이었던 벨라와 결혼하던 1915년이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벨라에게 꽃을 받았던 가난한 화가, 샤갈에게 꽃은 행복하게 빛나는 삶을 의미했다. 하지만 사랑과 꿈, 환상의 세계를 다루었던 샤갈의 인생은 그다지 평탄치 못했다. 1차 세계대전과 러시아 혁명을 겪어야 했고, 2차 세계대전 때는 나치의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피신까지 해야 했다. 게다가 1944년에는 그의 부인이자 뮤즈였던 벨라마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전쟁이 끝난 후 파리로 돌아온 샤갈은 이런 수많은 고난을 뒤로한 채 다시 몽환적이고 아름다운 삶의 순간을 노래하는 작품들을 제작하기 시작한다. 특히, 프랑스 남부 니스 근처의 생폴 드 방스 지역에 정착한 뒤로는, 점점 더 크고 화려한 꽃들을 화면에 담아낸다. 눈부신 남프랑스의 햇살 아래 빛나고 있는 이 결혼 꽃다발은 말년에 되찾은 새로운 사랑과 행복의 순간을 담아낸 샤갈의 대표작이다.
파블로 피카소, 〈검은 바탕 위의 투우〉, 1953, 백토, 화장토 장식,
나이프 각인, 유약 시유, 31×38×4.5cm ⓒ 2022 - Lee yeongil
파블로 피카소, 〈투우Corrida〉, 1953, 백토, 산화 파라핀, 백색 에나멜 장식, 41×43×4cm ⓒ 2022 - Lee yeongil
파블로 피카소,〈트램펄린 위의 세 사람〉, 1956, 백토, 흑색 파티나 장식, 유약 시유,
19×19×2.5cm ⓒ 2022 - Lee yeongil
파블로 피카소,〈네 명의 춤추는 사람들〉, 1956, 백토, 흑색 파티나 장식, 유약 시유,
24×24×1cm ⓒ 2022 - Lee yeongil
파블로 피카소, 〈풍경〉, 1953, 백토, 화장토 장식, 나이프 각인, 유약 시유, 41×41×4.5cm ⓒ 2022 - Lee yeongil
파블로 피카소, 〈투우와 사람들〉, 1950 백토, 화장토 장식, 유약 시유, 38.5×38.5×5cm ⓒ 2022 - Lee yeongil
파블로 피카소, 〈빛나는 부엉이〉 ⓒ 2022 - Lee yeongil
파블로 피카소, 염소 머리, 1950-1953, 백토, 산화 파라핀 장식, 유약 시유, 26×26×3cm, ⓒ 2022 - Lee yeongil
파블로 피카소 ‹염소 머리› : 염소는 피카소에게 매우 특별한 동물이었다. 그의 그림에 염소가 처음 등장한 건 파리로 건너오기 전이었던 1890년대 말이었는데, 당시 피카소는 친구의 집 방목장에 있던 비쩍 마른 염소를 마치 해부하듯 자세히 데생했다. 이후 1950년대부터 회화와 조각, 도자 작품에 다시 염소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본래는 야생에서 살았지만 점차 가축화되면서 인간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는 점에서, 피카소는 염소를 선사시대부터 시작된 인간과 동물의 관계를 상징하는 동물로 여기기도 했는데, 발로리스에 머물렀던 1950년에는 등신대 크기의 염소 조각을 제작했으며, 1952년에는 자신의 도자 전시회 포스터를 염소 이미지로 장식하기도 했다. 덕분에 염소는 점차 피카소를 상징하는 동물이 되어간다. 그래서였을까요. 1956년 말, 아내였던 자클린은 피카소에게 꼬마 염소 한 마리를 선물한다. 피카소는 이 염소에 에스메랄다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직접 정성을 들여 키웠다고 한다.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i, 1904-1989), 켄타우로스 가족(Family of Marsupial Centaurs),
1940, 캔버스에 유채, 35.8×31cm. ⓒ 2022 - Lee yeongil
살바도르 달리 ‹켄타우로스 가족› : 상반신은 사람, 하반신은 말의 모양을 한 켄타우로스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상상의 종족이다. 달리는 이 그림에서 켄타우로스를 캥거루처럼 아기를 넣는 주머니, 즉 육아낭을 가진 종족으로 설정했다. 켄타우로스는 이 구멍을 통해 아이를 자유롭게 넣었다 뺄 수 있는 종족으로 그려지고 있다. 달리의 고향인 스페인 카탈루냐 해변가를 배경으로 한 이 그림에는, 세 명의 성인 켄타우로스와 세 아이가 등장하는데, 힘차게 뻗은 팔과 다리, 휘어진 허리 같은 이들의 역동적인 움직임은 화면의 네 모서리를 사선으로 분할한 듯한 선명한 대각선 구도를 만들어낸다. 어머니의 배에서 나오는 두 아이의 모습을 비교해보면, 우선, 화면 아래쪽의 아이는 주머니에서 나오는 순간에도 어머니를 향해 손을 뻗고 있다. 반면, 화면 위쪽의 아이는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어머니의 뱃속에서 나오고 있다. 위로 뻗친 아이의 두 팔은 아버지에게 안기는 것 같기도 하고, 아버지의 머리를 밀어내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어머니가 두 팔로 안아 들고 있는 또 한 명의 아이는, 마치 자궁 속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듯, 어머니의 입으로 손을 뻗고 있다. 잘 알려져 있는 것처럼, 달리는 어린 시절부터 자신을 괴롭혀 온 강박증과 성적 환상에 대한 해답을 정신분석학 이론에서 찾아냈는데, 당시 그는, 인간은 어머니의 자궁에서 분리되는 순간 최초의 정신적 고통을 겪게 된다는 정신분석학 이론에 심취해 있었다. 이 때문에 그는 자궁과 유사하면서도 언제든지 그 안으로 다시 들어갈 수 있는 육아낭을 가진 켄타우로스 종족을 부러워했다. 이 그림은 꿈과 무의식, 때로는 정신 착란의 상태에서 본 기이한 풍경들을 마치 실재하는 것처럼 사실적으로 그려내는 달리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파블로 피카소, 사각형 속의 춤추는 사람들 A, 1971, 적토, 15×15×1cm, ⓒ 2022 - Lee yeongil
파블로 피카소, 사각헝 속의 춤추는 사람들 B, 1971, 적토, 15×14.5×1cm, ⓒ 2022 - Lee yeongil
파블로 피카소, 사각형 속의 춤추는 여인, 1971, 적토, 15×15×1cm, ⓒ 2022 - Lee yeongil
파블로 피카소 ‹네 명의 춤추는 사람들› : 1909년, 파리에서는 러시아 출신의 천재적인 예술감독, 디아길레프가 발레 뤼스라는 발레단을 창단한다. 파리에 모여든 예술가들은 20세기 최고의 발레단으로 불렸던 발레 뤼스에 매료되는데요, 피카소 역시 마찬가지였다. 발레와 춤의 세계에 깊이 매료된 그는, 에릭 사티, 장 콕도 등과 함께 발레 뤼스의 공연을 위한 무대 디자인에 참여하기도 했고, 발레단의 해외 공연에 동행까지 하게 된다. 이를 계기로 무용수들을 그린 작품들도 제작하기 시작한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부터는 손을 맞잡고 원형으로 회전하며 군무를 추는 사람들의 모습이 평화의 상징처럼 그의 작품에 등장한다. 이러한 춤의 형태는 피카소의 도자 작품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파블로 피카소,〈물고기〉, 1952, 적토, 화장토 장식, 13×20.5×9cm ⓒ 2022 - Lee yeongil
파블로 피카소,〈물고기〉, 1952, 적토, 화장토 장식, 16×22×8cm ⓒ 2022 - Lee yeongil
작가들 간 관계성이 전시 기획의 착점이 됐지만, 작품은 개별로 관람하기에 더 적절하게 꾸려졌다. 원형 전시장은 3개의 레이어로 나뉘어 외벽에는 회화 작품을, 가운데에는 피카소의 도자를, 가장 안쪽에는 카페처럼 공간을 구성했다. 이번 전시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피카소의 도자들은 1948~1971년에 제작된 ‘피카소 도자 에디션’을 대표하는 작품들로, 피카소의 도자에는 그가 회화, 조각, 판화작품에서 활용했던 다양한 주제와 기법들이 응축돼있어 피카소 예술세계 전반을 살펴볼 기회다. 내년 2월 26일까지. 무료.
출처: 문화재청 국립현대미술관 〈모네부터 피카소까지…서양미술 거장 8인 한자리에〉 전시 정보/ 동아일보 2022년 09월 20일(화) 문화(김태언기자)/ KBS1 NEWS 2022년 09월 20일(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