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오늘 정오로 예정돼 있었던 필리이의 사절파견 임무 상 출발 시간은 뜻하지 않은 해프닝으로 갑자기 지연되고 있는 중이다. 비록 원로현자회의와 공화국 기사단 내에서도 상당수의 인종 차별주의자들이 득세하고 있는 현실이었지마는 원로회의의 종무원장과 대신관 그리고 기사단의 군단장에게까지 너무나 중요한 인물인 루안 저우룬파 제7기병단장이 일개 하프엘프의 수행기사로써 임한다는 것은 외관상으로나 내용상으로나 용납하기 힘든 문제였기 때문이었다.
“루안 단장, 지금 제 정신이신가? 국가의 존망위기가 일촉즉발의 사태에 직면해 있는 지금, 코앞에 닥쳐 있는 저 야만스러운 바바리안 들과 그 떨거지들을 뻔히 보고서도 수도방위의 최정예 기병단의 단장이 가능성도 희박한 사절 중재 따위의 자리에나 따라 나서겠다는 겐가?”
“종무원장, 어찌 그리도 저잣거리의 시정잡배들 마냥 천박하기 그지없는 표현으로 말씀을 이루시는 것입니까? 뭐,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니 건 그렇다 치고. 루안 단장, 교단의 주류적인 입장도 단장의 결정이 심히 성급하고 경솔한 판단이었다는 것이 중론이니 다시금 재고하시어 결정을 철회해 주시기를 당부 드리는 바네”
“뭣이? 대신관 당신, 지금 나보고 감히 그런 비유를 했단 말이오? 교단이 일이 마치 당신의 가부여하에 따라서 좌지우지 될 거라는 터무니없는 망상을 가지고 있으니 내가 행여 그대의 휘하나 되는 것으로 엉뚱한 착각을 하고 있는 게요?”
“지금 뭐라는 겁니까? 문제의 본질은 전혀 다른 데 있는데 또 쓸데없는 딴지나 걸자는 겁니까? 도대체 종무과는 교단에서 어떤 정체성을 갖는 존재들입니까? 신관들의 비방이나 하고 교단의 일에 반대를 일삼는 것이 종무과의 책무랍디까?”
“이런 빌어먹을. 대신관 당신, 말 나오는 대로 막 하는 거요?”
공화국 기사단 군단장은 너무나 짜증이 나는 나머지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물론 룬공국은 왕정이 아니므로 계층상 군단장이 종무원장이나 대신관보다 하위계층이 아니다. 아니 정확히 표현하자면 계층이라는 개념자체가 없다. 그러나 룬공국은 다른 어느 세력보다도 베다(Veda)교의 교권이 압도적으로 강한 종교의 색채가 강한 국가였다. 좀더 세세하게 묘사하자면 공국에서 가장 발언권이 강한 권력집단은 군사집단이 아니라 종교세력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의 정점에 서있는 양대 인물이 대신관과 종무원장인 것이다. 그런 두 사람이 전쟁이라는 국가의 존폐 자체를 위협하는 최악의 위기에 직면한 지금도, 공국의 뿌리 깊고 오래 묵은 폐단인 정쟁을 이 상황에서도 일삼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암묵적 서열상 자신이 감히 그들을 저지할 수는 없었으므로 군단장은 미봉책으로 루안 기병단장에게 목소리를 높여 질문하여 주위를 환기시키는 방법을 택했다.
“루안 제 7기병대 단장, 똑똑히 듣도록. 지금부터 내가 하달하는 것은 사견이 아니라 자네의 지휘자로서 군명에 해당한다. 자네의 중재사절단 파견 수행기사직 임면 요청은 지금 이 시간 부로 기각된다. 자네는 자네의 본연 임무에 충실하여 수도방위의 일선에 그대로 임무 유지할 것을 명한다.”
군단장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그의 미봉책은 그런대로 주효했는지 대신관과 종무원장의 소모적이고 비생산적인 언쟁을 그치게 만들었으며 좌불안석의 심정으로 불편한 심기를 감추고 있었던 각료, 신관, 종무수행자, 군 지휘관 등의 일단의 책임자들에게 가슴 답답한 짐을 덜어주는 명쾌한 일갈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군단장님…”
이때껏 침묵을 지키던 제 7기병단장은 특유의 서글서글한 웃음을 지으며 말을 꺼내놓는 것이었다. 자리에 참석하고 있던 수많은 책임자들은 일말의 불안감이 엄습해 오는 것을 느꼈다. 루안 저우룬파, 그가 누구인가? 사관학도 시절부터 너무나도 많은 말썽들을 일으켜서 벌써 십수차례나 퇴교 조치에 처분 당할 지경에 처했었지만 역으로 수많은 혁혁한 공을 세워서 암암리에 그를 비호하게 되는 일군의 세력을 형성시킨 트러블 메이커이자 우등생인 이율배반의 풍운아 아니던가.
“어떠한 감상적인 낙관도 배제하고 따져보면 불칸의 군사력은 우리의 힘으로 감당하기 매우 어려운, 아니 좀 더 솔직히 말해서 견뎌낼 가능성이 매우 희박한 대규모의 세력입니다. 거기다 오랜 기간동안 평화로운 환경에 놓여져 있었던 우리의 사정에 비하여 저쪽은 최근까지도 연방통일전쟁을 치뤄왔던만큼 만반의 준비가 돼있다 하겠지요. 숫자만으로 짐작해 보십시오. 물론 주력인 바바리안을 제외한 갖은 종족과 몬스터들이 이합집산된 어중이떠중이 군대라는 비아냥거림도 있지만 300만을 넘어서는 군대입니다. 우리 룬공국이 이런 엄청난 규모의 군대와 과연 몇 번이나 부딪혀 보았는지 궁금할 따름이군요.”
정말이지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벌레 씹은 표정이 되어 있었다. 루안의 말 그대로다. 룬의 정규병력은 백만에도 못 미치는 상태, 이건 비관적이어도 너무 비관적인 상황이었다.
“제 자랑스러운 친우 필리이 독트림 주신관이 바바리안과의 중재에 나서는 것도 어차피 어떻게든 전면전을 피해보기 위함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실상 제게 더 중요한 임무는 제 7기병단을 이끄는 것보다 수행기사로서 대동하는 것 아닙니까?”
당연한 수순이겠지만 루안의 이야기가 끝나자 마자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자리는 순식간에 난장판이 돼버렸다. 정신이 나갈 정도로 시끄럽고 혼탁해진 이 회의자리를 성질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엎어버리고 싶은 게 군단장의 현재 심정이었다.
“제 말이 덜 끝났습니다…”
약속이나 한 듯이 사람들이 조용해진다. 사람들의 반응이 군단장 자신이 말할 때 보다 루안이 말할 때 더 경청하는 분위기가 되는 것이 군단장은 은근히 짜증이 났다.
“군단장님, 대신관님, 종무원장님… 정말 죄송한 말씀이지만 전 수행기사로서의 서약을 대 루나스 국립사관학교 졸업 인식표에 대고 맹세해 버렸습니다.”
이것은 또 무슨 어처구니없는 소리인가? 루나스 사관학교의 맹세라니… 이것의 의미는 룬에서 그토록 중하게 여기는 신성불가침의 원리와도 맞먹을 만큼 비중이 크고 절대 번복할 수 없는 서약이라는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루나스 사관학교를 수료한 모든 졸업자들이 가장 명예롭게 여기는 룬 최고 엘리트 집단이며 소수 정예화된 그들 최고의 특권이기 때문이다. 룬의 국민이라면 그 누구도 이들 특수집단의 졸업 인식표에 대한 맹세를 깨뜨릴 수가 없다. 그것은 누구보다도 루안의 사관학교 졸업 선배이기도 한 군단장이 더 잘 알고 있었다. 군단장은 생각했다. 이런 빌어먹을 자식… 하지만 어쩔 것인가.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귀관이 그렇게까지 강한 결심을 하였다면 어쩔 수는 없는 일이지. 하지만 루안 제 7기병단장… 이번 일은 나중에라도 반드시 그 책임을 다시 물을 것이다. 각오하고 있어야 할 것이야.”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군단장을 제외하고 자리에 있던 모든 종단 및 군 관계자들, 관료들은 아연실색한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다만 연륜이 깊은 대신관만이 깊은 사색에 잠겨 있더니 느릿한 음성으로 말을 꺼냈다.
“친애하는 루안 저우룬파 공국 제 7기병대 기병단장…”
대신관의 음성에는 정말 루안을 아끼고 있다는 감정이 실려 있었다. 역시나 어느 면을 보더라도 루안은 자신의 인종적 불리함을 극복한 최고의 인재임이 분명하였다.
“나로선 기병단장의 결정이 그다지 탐탁치는 않네만 어차피 바바리안과의 중재라는 것도 현재의 위기를 타파할 수 있는 또 다른 가능성… 그렇다면 그것을 수행하는 일 또한 아주 중요한 임무일 터… 내 그대를 믿겠네…”
허연 수염과 백발이 성성한 칠순을 넘은 고령의 나이에도 일선의 업무를 놓지 않고 있는 대신관은 그윽하고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 부드러운 표정에도 불구하고 그 언어에는 범접하기 힘든 위엄이 서려 있었다.
“창조와 대지, 마법의 주신 레쟈 브리트마(Reyja Brituma)의 자비로운 이름으로, 나 파라토 아인 헤르탈로치(Parato eine Herrtalrozzi), 존엄한 베다교의 대신관의 지위로서 루나스 기병단 제 7기병단장 루안 저우룬파에게 주신관 필리이 독트림의 중재 사절 파견 임무에의 수행기사로서 그 책임을 이룰 것을 엄숙히 하달하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