룬공국은 그 사회, 정치, 문화 전반이 역사적으로 베다교를 빼고 설명할 수 없을 만큼 베다교에 기반된 국가이다. 그런 공국의 상징적인 우두머리가 - 엄밀히 말하자면 정치적인 의결권은 원로회의에 있다 - 선언한 만큼 이 결정은 이제 확고부동해 진 것이다. 자리에 있던 수많은 사람들의 얼굴엔 저마다의 복잡다단한 표정이 서렸다.
게중 가장 기분이 불쾌해 진 사람은 다름 아닌 종무원장이었다. 기실 종무원장의 감정이 심히 불편해진 까닭에는 우선은 모든 면에서 자신과 사사건건 부딪히는 대신관과 여하간의 이유로 그다지 탐탁지 않게 여기고 있는 공국 기병단 제 7 기병단장, 게다가 심지어 공화국 기사단 군단장에 이르기까지 이들이 전부 루나스 사관학교 출신이라는 점과 자신은 그렇지 못하다는 점이 열등감으로 작용한 때문이었다. 뿐만 아니라 이번의 문제에 얽혀 있는 다른 당사자가 다름 아닌 하프엘프라는 점이 아주 못마땅하였다. 종무원장은 룬공국의 극우파라고 볼 수 있는 일련의 세력 중 중요인물에 속하는 사람이었고 이른바 ‘순수 유레신 혈통주의’를 강력하게 신봉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가 보기에 천한 혈통인 아세리안 족 출신인 루안이 주제넘게 기병단장의 자리에 올라와 있는 것이나 - 유레신 족의 혈통적 특징인 은발 머리를 따라 하는 것도 꼴 보기 싫었다 - 심지어 하프엘프 따위가 주신관이 되었다든지 마침내는 국가의 중대사를 결정하는 현장에 파견되는 등의 어처구니없는 연이은 사건들이 그를 분노하게 만들기엔 충분하였다. 그러나 그는 외관상 언제나 침착함을 잃지 않는 온유한 인상의 소유자였으며 그만큼이나 침착하고 노련한 성품의 소유자였다.
어쨌거나 필리이를 중재 자리에 내보내자는 것은 최초에 수도원장의 생각이었다. 더구나 그 의견을 그다지 바람직하지 않다고 보았던 종무원장은 - 필리이가 공식적인 자리의 인사로 차출된다는 것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 종국에는 수도원장에게 설득 당하지 않았었던가. 당시의 생각으론 그런 위험천만한 일은 인간과 엘프의 잡종이나 수행할 만한 즉 잘못되어 그 자리에서 바바리안들 에게 해코지를 당하더라도 무방할 그런 유의 사건이라고 생각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의 상황은 도리어 일개 하프엘프 따위가 룬의 존망이 걸린 초 중대사를 떠맡은 폭풍의 눈의 역할을 맡게 된 것이다. 이게 어찌 그가 원하던 일이었으리란 말인가. 내심 그는 끓어오르는 노여움을 참을 수가 없었으나 섣불리 그 감정을 내색하는 바보짓을 하지는 않았다. 이 무서운 노련함이 교내에 있는 대부분의 수도사나 신관들로 하여금 그를 존경하게 하는 원동력이었다. 이런 연유로 베다교의 헤게모니를 쥔 양대 주역들이 대신관과 수도원장이 아니라 대신관과 종무원장 이게끔 된 것이다. 표면적으로는 수도원장이 서열이 높지만 대신관을 추종하는 세력만큼이나 종무원장을 후원하고 따르는 사람들도 많았다. 물론 ‘유레신 순수 혈통주의’를 주창하는 일군의 보수파들을 포함해서.
그러나 한가지 기억해야 할 일은 이 사실을 어렴풋이 나마 루안이 짐작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루안을 평가하는 것과는 달리 그가 전술 참모나 전략가의 수준 정도의 비상한 머리는 아닐 지라고, 단지 보이는 것처럼 아무 생각 없이 움직이는 그런 무력에만 의존하는 단순하고 전형적인 군인은 아니었던 것이다.
차제에 그가 실행한 서약이 군단장에게 뿐만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종무원장의 문제제기에 걸려들 것임을 루안은 짐작하고 있었고, 이미 그와 같은 부정적인 상황에 대하여 일련의 준비를 하고 있는 그였다. 이 사실을 까마득히 모르고 있는 종무원장은 차후에 이 문제를 가지고 루안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주리라고 생각하며 화난 표정을 감추기 위해 입술을 지긋이 깨물며 여전히 인자하게 웃고 있었다. 그런 그를 마주보며 여전히 멍청해 보이는 헤픈 웃음을 짓고 있는 루안이 이후에 그의 난적이 되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그가 경멸해 마지않는 미천한 하프엘프와 더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