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7일 부활 제6주간 화요일
사람들이 책 추천을 해 달라고 해서 요즘 인상 깊게 읽은 책 한 권을 권했습니다. 그런데 책의 두께에 깜짝 놀랍니다. 그리고 이렇게 두꺼운 책은 도저히 읽지 못한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사실 이분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거의 모든 분이 두꺼운 책 읽기를 꺼리십니다. 그래서일까요? 성경책도 두꺼운 책의 분류에 들어가는지 성경을 도저히 못 읽는 책으로 생각하시는 분도 계십니다. 하긴 얼마 전 통계청에서 발표한 2023년 우리나라 평균 독서량은 7.2 권이라고 하더군요. 1년간 단 한 권도 읽지 않은 성인도 50%에 달한다고 하니, 두꺼운 책을 읽기란 두려울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인터넷과 소셜 미디어 시대인지라 긴 문장에 대해서는 난독증이 걸린 것처럼 그냥 지나치고 맙니다. 또한 해시 태그만을 쫓고, 짧은 글과 짧은 영상으로 지식을 대신하고 있습니다. 이런 지식이 진실일 가능성은 줄어듭니다. 진실은 복잡한 경우가 많고, 따라서 복잡하고 길게 설명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이런 설명 자체를 거부하는 요즘입니다. 그래서 가짜 뉴스가 판을 치고, 말도 안 되는 흑백 논리로 서로 적으로 여기는 것이 아닐까요?
하버트 조지 웰시의 ‘눈먼 자들의 나라’에서 눈뜬 청년이 눈먼 부족에게 ‘본다’라는 개념을 설명합니다. 하지만 눈먼 부족은 눈뜬 청년을 조롱하고 배척하지요. 자기들의 생각으로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이런 세상은 아닐까요? 예수님도 사람들의 알지 않으려는 마음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히셨지요. 이처럼 나는 옳고 너는 틀리다는 그 생각이 오히려 큰 잘못으로 나아갈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이제 하늘에 다시 오를 시간이 가까워졌습니다. 그래서 “이제 나는 나를 보내신 분께 간다.”라고 하시지요. 이 말씀에 제자들은 모두 근심이 가득 찹니다. 아마 십자가 죽음을 통한 이별의 아픔을 떠올렸는지 모릅니다. 예수님 없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기들의 무능함을 걱정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모든 말씀과 행적은 모두 우리를 위함 때문이었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이롭다.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 그러나 내가 가면 그분을 너희에게 보내겠다.”(요한 16,7)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것이 단순히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에 그쳐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 어떤 상황에서도 가장 좋은 것을 우리에게 주신다는 믿음을 가지고서 주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때 주님과 늘 함께할 수 있습니다.
오늘의 명언: 평범할 때 하는 백 번 감사보다, 힘들 때 한 번의 감사가 더 값지다(성 아빌라 데레사).
사진설명: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