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rkXQXAvMICs?si=KMkdnr-ndOoTWITk
Shostakovich Jazz Suite No.2
쇼스타코비치 [Dmitrii Dmitrievich Shostakovich, 1906.9.25~1975.8.9]
페테르부르크 출생. 여러서부터 페테르부르크음악원 출신의 피아니스트인 어머니에게 피아노의 기초를 배우고, 11세 때 글랴세르의 음악학교에 들어가 정규의 작곡공부를 시작하였다. 러시아혁명 후인 1919년에는 페트로그라드음악원에 입학, L.니콜라이에프에게 피아노를, M.시타인베르크와 A.K.글라주노프에게 작곡을 배우고 25년에 졸업하였다. 졸업작품인 《제1교향곡》은 소련뿐 아니라 세계 악단에 그의 이름을 떨치게 하였다.
당시 페테르부르크에는 유럽의 새로운 경향의 음악, 즉 I.F.스트라빈스키의 원시주의, A.베르크의 표현주의 작품들이 한창 연주되었으므로, 그도 그들의 작품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이 시기의 작품에 《제2교향곡》(27) 《제3교향곡》(29), 그리고 《피아노·트럼펫과 오케스트라의 협주곡》(33) 《피아노전주곡집》, N.V.고골리에 의한 오페라 《코》(30), 발레 《황금시대》(30) 등이 있다.
한편 이 무렵부터 예술에서 이른바 사회주의 리얼리즘운동이 전개되었는데, 그가 34년에 발표한 《므첸스크의 맥베스부인》이 공산당의 예술운동에 역행한다는 이유로 비난을 받았다. 창작에 대한 이러한 간섭은 당연히 문제가 되었으나, 그는 이 비판을 견디어 내고 작풍을 전환하여 37년의 《제5교향곡》으로 명예를 회복하고, 40년 《피아노5중주곡》으로 제1회 스탈린상을 받았다.
제2차 세계대전 때는 페테르부르크에서 방공감시원으로 종군하였고, 1942년 《제7교향곡》으로 다시 스탈린상을 받았다. 그러나 대전 후인 1945년에 발표한 《제9교향곡》은 그 경묘한 내용과 신고전적 작풍 때문에 “타락한 유럽 부르주아지의 형식주의에의 추종”이라는 공격을 받았다. 즉 ‘지다노프 비판’이다. 그러나 49년의 오라토리오 《숲의 노래》와 51년의 합창모음곡 《10의 시(詩)》로 인기를 회복하고 또다시 스탈린상을 받았다. 그는 뛰어난 피아니스트이기도 하여 1927년 쇼팽 국제콩쿠르에서 2위를 차지하였다.
1937∼1941년에는 페테르부르크 음악원의, 1943∼1948년에는 모스크바음악원의 작곡교수를 지냈다. 작품에 15곡의 교향곡 외에 현악4중주곡을 비롯, 기악곡·오페라·오라토리오·발레음악·영화음악 등 많은 걸작을 남겼다.
양친이 모두 시베리아 출신으로 아버지는 폴란드계였다. 9세 때 어머니로부터 처음으로 피아노를 배웠다. 13세 때 페테스부르크 음악학교에 입학하여 피아노와 작곡(특히 막시밀리안 스타인베르크 Maximilian Steinberg에게서)을 공부했다. 당시 이 음악원의 원장은 알렉산드르 글라주노프였다. 그가 초기의 작품을 작곡한 것은 이 시기였고 그 작품으로는 피아노곡 환상적 춤(1922)이나 이후에도 정기적으로 연주하게 되는 교향곡 제1번(1925) 등이 있다.
이 음악원의 악기법의 교수(1937)와 이어서 작곡과 교수(1939)에 임명되었으며, 1943년에는 모스크바로 거처를 옮겨 그곳 음악원에서 가르치는 한편 중요한 창작활동을 계속했다. 그는 외국으로 나간 적이 없고 그의 생애에 대해서는 그다지 알려진 것이 없지만, 그의 공적인 활동을 엄하게 비판하는 소리가 서방측에서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창작 능력은 전혀 쇠퇴하지 않았으나 몇 차례의 심장 발작으로 인해 사망했다. 그것은 비올라 소나타 op. 147을 완성한 직후였다.
1927년 이래 정부는 그에게 10월혁명을 기념하는 교향곡 제2번의 작곡을 요청했다. 그것이 〈체제파〉 작곡가로서의 기묘한 인생의 출발이었으며 그것은 놀라운 봉사와 징계의 되풀이에 의해서 특징지워지게 된다. 수년간의 성공 후에 오페라 므첸스크의 맥베드 부인은 1936년 1월 26일 프라프다지에 의해서 음악이 아니라 엉터리이다라는 격렬한 비난을 받았다. 이 작품은 니콜라이 레스코프 Nicolai Leskov의 동명의 러시아의 위대한 고전 작품(1865)에서 착상을 얻은 것이다. 그는 교향곡 제5번에 의해서 명예를 회복하였고 피아노5중주곡(1940)과 히틀러의 침공에 대한 레닌그라드의 시민을 찬양한 교향곡 제7번(1941)에 의하여 계속해서 스탈린 상을 획득했다.
그러나 1948년에 즈다노프 비판에 의한 〈사회주의 리얼리즘〉 미학의 정의는 또다시 쇼스타코비치와 그의 1945년작 교향곡 제9번에 타격을 주었다. 숲의 노래(1949)에 의해서 다시 인정을 받았으며, 1962년 에프투셴코 E. A. Evtushenko의 시를 사용한 교향곡 제13번으로 스탈린 지배하의 러시아 사회주의가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던 재난반유대주의, 억압, 일상의 불안, 출세주의를 공격하였고 그의 작품은 공연 금지가 되었다. 이 교향곡은 가사의 일부를 수정한 후에 러시아에서도 재상연이 가능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쇼스타코비치는 보다 자유롭게 작곡할 수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쇼스타코비치의 예술은 러시아인의 영혼을 그 미묘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표현하려고 애썼다. 불안한 건강 상태와 분명히 비관주의적인 성격의 쇼스타코비치는 보통은 극적이고 장엄하지만 가끔 삐걱거리는 해학적 감흥에 몸을 맡겼다(수많은 스케르쪼, 발레음악 황금시대[1929~30]). 초기부터 서양의 전위음악, 특히 베르크, 스트라빈스키, 그리고 힌데미트에게 관심을 가져 오페라 코와 같은 대담한 작품도 나왔지만 1920년대 말부터 영원한 러시아의 음성에만 귀를 기울이겠다는 결심을 한 것처럼 보였다.
그는 대체로 조성 체계에 충실하면서 지극히 개인적인 어법을, 그리고 〈기법〉에 대해서는 시대의 밖에 있으면서 현대적 감성에 지극히 가까운 어법을 조금씩 만들어 나갔다. 이렇게 본다면 만년의 작품은 절정에 달했고 약간 고르지 못한 이전의 작품을 상회하고 있다. 그러나 쇼스타코비치는 남다른 힘을 가진 음악가이며 웅장한 지평과 서사적 사건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인간의 영혼 속에 깊게 들어가서 해학적 감흥을 보일 수 있는 음악가이다.
그의 서법이 상대적으로 전통적이기는 했지만 그는 위대했고, 상당히 빈번하게 무소르크스키(그가 평생 연구한)의 환시적 깊이와 교향곡의 영역(특히 교향곡 제4번)에서는 그가 직접적 계승자인 말러의 음악을 합체시키기에 이르렀다. 또 그가 현악4중주곡이나 교향곡 등 확립한 형식으로 본령을 발휘했다는 사실과 매우 신고전주의적인 몇 작품(피아노를 위한 전주곡과 푸가 op. 87[1950~51])도 착상이 풍부한 그의 성공작의 하나로 간주된다는 사실은 놀랄 것이 없다.
주요 작품으로는 15곡의 교향곡(쇼스타코비치는 24곡의 교향곡을 작곡할 작정이었다)과 15곡의 현악4중주곡(마찬가지로 24곡을 작곡하려고 했다), 6개의 협주곡(바이올린협주곡 2곡, 첼로협주곡 2곡, 피아노협주곡 2곡, 그 중 1곡은 트럼펫을 수반한다), 3편의 오페라(고골리 원작의 코[1928], 레스코프 원작 므첸스크의 맥베드 부인 또는 카테리나 이즈마일로바[1932, 초연 1934. 1. 22 레닌그라드 개작 1962], 고골리 원작 도박자[1941, 미완]), 한 편의 오페레타(모스크바의 체리용[1958]), 3곡의 발레음악(황금시대[1929~30], 볼트[1930~31], 밝게 빛나는 시냇물[1934~35]), 수많은 오케스트라와 소편성을 위한 작품, 매우 많은 부수음악(말할 것도 없이 마야코프스키를 위한 것과 셰익스피어의 햄릿을 위한)과 영화음악(황금의 산맥[1931]), 총잡이[1938], 한 편의 오라토리오(숲의 노래[1949]), 칸타타(스테판 라지나의 처형[1964, 작사 E. A. 에프투셴코])와 피아노곡(두 곡의 소나타, 24개의 전주곡과 푸가)이 있다. 또한 쇼스타코비치는 무소르그스키의 보리스 고두노프를 림스키 크르사코프보다 더욱 원곡에 가까운 형태로 오케스트레이션(1940)을 했고 동시에 같은 무소르그스키의 호반시치나의 복원과 오케스트레이션을 다시 했다.
쇼스타코비치 말년의 작곡생활의 특징은 성악곡에의 회귀이다. 사샤 초르니 Sacha Chorny의 시에 의한 5곡의 연작가곡 풍자(1960)는 빈정거림이 넘쳐 있지만 뒤이은 교향곡 제13번은 결코 특이한 작품이 아니었다. 이어서 작곡한 교향곡 제14번(1969)은 악상의 풍성함과 정서적인 성격에 의해서 한 시대를 구획한 작품으로 가르시아 로르카, 아폴리네르, 퀴헬베커 Küchelbecker, 릴케의 시라는 사려 깊은 선택에 의해서 생의 의미와 인간과 예술가의 고독, 그리고 죽음에 대한 그의 의문을 나누고 있다.
이 철학적 연대 속에서 가끔 나타나는 테마의 하나는 전제적 군주에 의해서 창작자인 예술가가 짓눌린다는 테마이며, 연작 가곡으로는 이밖에 비약과 순수성의 걸작인 블로크에 의한 7편의 시(1967), 츠베타예바의 6편의 시(1974), 미켈란젤로의 시에 의한 모음곡(1974), 도스토예프스키에 의한 레뱌드킨 대위의 4편의 시(1975)를 들 수 있다. 최후의 교향곡 제15번(1971)은 순수하게 기악적이고 운명을 앞에 놓고 조용하고 침착하게 있지만 자연 그 자체와 생명의 항상성(恒常性)에 대한 확신에서 작품의 본질을 얻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마지막으로 작곡가의 사후 수년이 지나서 출판된 뜻밖의 저서 증언,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의 추억을 들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러시아의 음악사가인 솔로몬 볼코프 Solomon Volkov에 의해서 편집된 것이다(앙드레 리슈크 André Lischke의 프랑스어 역Témoignage, les Mémoires de Dimitri Chostakovitch[1980]). 새롭고 파란만장한 교향곡처럼 이 저서는 작곡가가 걸어온 위험에 가득찬 생애를 통해서 그가 맛본 고뇌를 반영하고 있다. 반증을 들어 공적으로 인정받는 인물이라는 전설을 설명하면서 비평가이고 예술가였던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이 예고하고 있는 수많은 요소를 입증하고 있다.
하나의 체제가 모범적 테마의 추구를 아무리 촉진하더라도 그에게는 자기의 악상을 자신의 본질적인 시각에 따라 진행시키지 않기란 매우 곤란했다. 이 이중성에 의해서 그는 가령 하나의 현악4중주곡을 작곡하는 데 〈저항하기 어려운〉 제목을 가진 어떤 큰 주제를 탐구한다고 하면서 실은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 있었다. 추억의 몇몇 부분에서는 쇼스타코비치 자신에 의해서 실제로 작곡한 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도 생겼었지만 거기에는 쇼스타코비치의 것으로 생각되는 리얼리즘과 유머, 그리고 통렬하게 빈정거리는 정신 등이 분명하게 확인된다.
스탈린의 초상을 방불케 하는, 예술가와의 관계에 적용된 전제적 원칙의 상기는 하나의 선집 속에 그리기에 합당한 것이었다. 더욱이 작곡가들의 음악작품에서 수많이 볼 수 있는 우울한 성격은 이 저서 속에서 정당화되고 있다. 왜냐하면 그 작품들은 많은 희생자들유명하든 그렇지 않든 러시아의 역사상 가장 어두운 시대에 희생된 자들을 위한 레퀴엠이었다는 사실을 그 자신이 분명히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런 종류의 몇 가지 표현 이외에 이 참고문헌 속에는 쇼스타코비치의 음악 또는 그에 대한 전체적인 설명은 없다. 그 대신 선인과 악인을 불문하고 역사를 다시 기록한 나라에서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잊혀질 운명에 놓인 인물의 일화에 주안점을 두었던 것이다.
자료출처: 웹사이트
https://youtu.be/RGyQkm0fFnY?si=g3Cf8lRSI0p9OKnM
SHOSTAKOVICH Symph No 11 'The Year 1905' in G min op 103 Dir Valery Gergiev Orq Mariinsky theat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