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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일국 훈독경 제12권 1일
인생길을 가는 우리
날짜 : 1959. 9. 6(일)
장소 : 한국 전본부교회
동기와 목적을 모르는 인생
사람들은 흔히 말하기를, 인간은 왔다가 간다고 합니다. 자고이래로 아무리 훌륭한 성현군자도 왔다가 갔습니다. 이런 역사의 움직임, 이런 천륜의 움직임은 이 순간 나에게도 연속되고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생각해야 될 것입니다. 왔다가 가야 할 우리 자신들입니다. 무슨 인연과 무슨 관계인지는 모르지만 이 땅에 와서 이 만상 혹은 어떠한 이념적인 형태 속에서 뒤넘이치다가 가는 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 인간은 무엇을 위해 왔으며 무슨 목적을 위하여 가는가? 이것을 수많은 철인들 혹은 종교인들이 심혈을 기울여 해결지으려고 했으나 해결짓지 못한 채 인류역사는 그로 인한 서러움과 더불어 지금까지 움직여 나왔습니다. 또, 지금도 계속 움직여 나가고 있습니다.
이런 긴장된 순간에 있는 우리입니다. 아니 가려야 아니 갈 수 없는 인생행로를 걷고 있는 우리임을 부정하지 못할 것입니다. 부모의 혈통을 통하여 태어나고 보니 생각지도 않았던 세계에서 살고 있습니다. 또, 살다가 보면 노쇠해서 가야 할 운명에 놓이게 됩니다.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꽃다운 청춘시절이 지나가 버리는 것을 막을 수 없는 것이요, 자기 모습이 노쇠하는 것을 방비하고자 하되 방비할 수 없는 서글픈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생각하면 안타깝고, 생각하면 클클하고, 생각하면 무엇인지 모르게 사방을 휘저어 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어남을 여러분은 생애노정에서 몇 번씩 느꼈을 것입니다. 내가 왜 왔으며, 내가 왜 살아야 하며, 어디로 가야 하느냐? 태어난 것을 여러분 스스로 태어난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태어나기는 했으되 무슨 동기로 태어났으며 무엇을 위해 태어났는가를 모르고, 나를 낳게 한 동기와 목적을 알지 못하는 우리입니다. 나기는 났으되 내가 나고자 해서 난 것이 아니요, 살기는 살되 내가 살고자 해서 사는 것이 아니요, 죽기는 죽되 내가 죽고자 하여 죽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를 들어 무엇을 자랑할 것이냐? 자기 자신이 나고 싶어 나지 못하고, 자기 자신의 그 무엇을 갖고 살지도 못하고, 죽음 길을 피할 수도 없는 자신을 갖고 무엇을 자랑해 보아야 처량할 뿐입니다. 났으니 살아야 할 운명이요, 또 그렇게 살다 가야 할 운명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살다 가는 목적은 무엇인가? 여러분은 이 문제를 다시 생각해 봐야 합니다. 동기가 나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었으니 목적도 나만의 것이 아님에 틀림없습니다. 사는 데 있어서 행복한 자리를 싫어하는 자가 어디 있으며 호화찬란한 자리에서 살고 싶지 않은 자가 어디 있겠습니까만,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이 나입니다. 그렇지만 또 자신을 자랑하고 싶고, 마음대로 살고 싶고, 마음대로 남아지고 싶은 나입니다. 이런 심정의 교차점을 지닌 나라는 것입니다.
나를 연유하여 나지 않은 내가 보다 큰 무엇을 요구하고, 보다 더 잘살기를 바라고, 더 큰 목적의 가치를 요구하는 것이 나 때문이냐, 그렇지 않으면 어떤 상대적인 목적 때문이냐 하는 것을 여러분 자신은 분명히 알아야 됩니다. 손을 들어 나 때문이라고 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부모의 혈육을 받고 태어날 때 스스로 나고 싶어서 났어요? 부모가 나를 낳기는 했어도 나는 부모가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생명체요, 마음대로 이끌 수 없는 생명체요, 마음대로 죽일 수 없고 살릴 수도 없는 생명체입니다.
그러한 권한을 누가 갖고 있느냐? 그 권한의 소유자를 해명하는 날부터 자기를 중심삼고 즐거워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인간들은 이 기준을 넘지 못하고 허덕이고 있습니다. 이러한 인간이 우리임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마음으로 더 큰 무엇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또, 일생을 통해 사망의 권한을 밀고 나가 실제로 더 큰 놀라운 생명의 세계와 인연을 맺고 싶어합니다. 더 나아가서는 어떠한 정적인 사랑의 심정이 있어서 인간의 정적인 세계를 넘어 영원불변의 정적인 세계와 접하고자 합니다. 해명하고 증명할 수는 없으되 그런 느낌에 내가 수시로 끌려가고 있습니다. 그 무엇이 모순된 세상을 저버리도록 재촉하고 있는 것을 양심이 맑으면 맑을수록 느낄 것입니다. (7-178)
악을 피하고 선을 찾아가는 인생행로
그런 연고로 땅 위에 살고 있는 사람은 어느 누구도 선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나고 보니 선한 종자가 아니라 악한 종자입니다. 나고 보니 재창조의 이념 앞에 설 수 있는 존재, 어떤 가치를 노래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자기의 모습이 불초한 모습, 미비한 모습, 불완전한 모습, 부족한 모습임을 부정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을 기독교에서는 타락한 인간이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본심은 타락세계에서 즐기면서 살고자 하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인간은 6천 년 동안 이 길을 피하고 피해 나왔으나 아직까지 완전히 피했다고 하는 기준을 세우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악을 피하고 선을 지향하면서 그 무슨 목적을 향하여 나가는 것이 왈 인생행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도, 내일도 죽어서라도 악을 제거시키고 선을 붙들어야 할 목적 밑에서 악의 환경을 피해 나가는 노정이 인생행로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의 마음은 공포에 떨고 있습니다. 마음의 본향을 향하여 움직일 때는 그렇지 않지만, 악에 치우치는 자리에 서게 될 때는 그 무엇이 나를 잡고 있는 듯한 두려움을 느낄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죄악사 혹은 사망의 권한, 흑암권세를 향하여 본심을 피해 가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똑똑히 기억해야 되겠습니다. 우리는 도피노정에 있습니다. 하늘이 있다고 할진대 이 도피자들을 어떻게 할 것이냐? 악을 도피해 가야 할 세계 인류를 어떻게 지도할 것이냐? 하늘이 있다면, 그 지도방법이 나와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도피의 노정은 어떠한 노정이냐? 이 땅 위에는 하나의 지도자가 없습니다. 누구의 사정을 봐주고 누구를 붙들고 내 사정을 말할 입장이 못됩니다. 수많은 인류가 왔다 갔으나 인류는 지금까지 도피해야 할 운명에 걸려 있습니다. 자기의 갈 길을 가기에 바쁘다는 것입니다. 도피자의 운명이 그런 것입니다.
여러분! 어떤 범죄자가 철창에 갇혔다가 도피한다고 할진대, 그 앞에 보이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자기가 살길, 자유의 세계, 자기가 그리는 어떠한 세계일 것임에 틀림없을 것입니다. 자유의 세계와 자기가 그리워하는 세계에 대한 느낌이 강하면 강할수록 처한 환경에서 도피하여 달음질칠 것입니다.
그런데 인류는 도피자의 운명에 있으면서도 갈구하는 동산이 어디인지, 자기가 소망하는 곳이 어디인지를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 역사는 돌고 있습니다. 목적도, 방향도, 처지도 알지 못하는 입장에서 자위하면서 살아온 인간이었음을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우리 인간이 타락하여 하늘 앞에 범죄했으므로 공의의 신과 불의의 신이 대치하고 있음을 우리는 압니다. 나라는 존재는 불의한 사탄의 구속으로부터 도망치고 있으니까 이 세계의 도주병입니다. 도피자예요. 구원성이 어디고, 천국이 어디냐? 이 세상은 도피해야 할 성입니다.
그렇게 도피하는 데는 자기 혼자서만 살아서는 안되겠으니까 가정적으로 도피할 수 있는 방법, 민족적으로 도피할 수 있는 방법, 세계적으로 도피할 수 있는 방법, 천주적으로 도피할 수 있는 방법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 방법을 제시하여 가르쳐 주지 못한다고 할진대, 하나님을 대해서 사랑이니 창조주니 무슨 이념의 절대자라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하늘이 인간을 대하여 도피의 방법을 가르쳐 주고 지시할 수 있는 표준은 어디 있느냐? 어떠한 학설이 아닙니다. 천상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마음에 있습니다. (7-180)
하늘이 도피의 방향을 지시할 수 있는 터전
마음은 자연의 이치에 부합되는 것입니다. 선을 향해 무한히 움직이고자 합니다. 그것은 자석이 남과 북을 가리키는 것과 같습니다. 자연의 이치는 방향을 잃거나 선을 피해 가는 법이 없습니다. 그런 현상이 없습니다. 인간의 마음도 역시 어떤 목적을 향하여 움직이고자 합니다. 생명을 향하여 움직이는 마음, 심정을 통하여 움직이는 마음, 진리를 분별하는 마음, 전체와 화합하고 싶은 마음, 전체의 어떤 이념에 화하여 살고 싶은 이 마음이 하늘이 도피의 방향을 지시할 수 있는 터전이라는 것을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러한 도피자의 입장에 있는 우리가 천성을 향하게 하는 이 마음을 지켜 나가려면 싸워야 됩니다. 싸움을 해야 됩니다. 이 싸움을 거쳐 도피의 목적을 달성하느냐, 실패하느냐의 여하에 따라서 구원을 얻느냐, 못 얻느냐가 결정된다는 것을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과정을 거쳐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우리는 어떠한 모습으로 달려야 하느냐?
여러분, 잘 생각해 보십시오! 이 싸움의 과정을 거쳐 나가는 데는 하늘이 바라는 모습과 작전법으로 하늘이 바라는 그곳까지 가야 합니다. 주체자의 프로그램에 응하여 상대적인 가치를 세워 나가야 하는 것은 불가피한 일입니다.
여러분, 여기에서 다시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 자신의 모습이 어떤가를 말이에요. 어떠한 목적세계에서 움직이고 있고, 또 그 세계에 사로잡혀서 오늘도 살고 있는 자신임을 부정하지 못할진대 그 자신의 모습이 인생의 도피행로에 있어서 어떤 처지에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원수들이 앞길을 첩첩이 가로막고 있는데, 눈도 뜰 줄 모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자리에 놓여 있는데 꿈이나 꾸고 있습니다. 자기가 깊은 잠에 빠져 있는 줄도 모르고 있습니다. 혹은, 달음질쳐야 할 행로에서 피로하여 쓰러진 자들도 있습니다. 그 모양은 천태만상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을 되찾아야 되겠습니다. 오늘 여기에 참석한 여러분은 어떠한 처지에서 어떠한 모습을 갖고 있는지 마음의 기준을 잡아서 자신을 분석해야 되겠습니다. 마음은 자꾸 재촉하는데 무엇인지 모르게 클클하고, 무엇인지 모르게 공포의 위압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므로 내가 이런 자리에 있어 가지고는 안되겠다는 것이 자연적인 현상으로도 느껴져 들어올 뿐만 아니라, 보여지는 모든 물상들을 통해서도 작용되어 들어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은 이런 것을 통해서라도 자신이 어떠한 모습으로 어떠한 처지에 놓여 있는가를 알아야 될 것입니다. 만일 어쩌다가 여러분이 영의 눈이 열려서 보게 되면, 수천 년 전에 왔다 갔던 수많은 도인들이 만인 앞에 외치고 있음을 알 것입니다. 오늘날 여러분 옆에는 많은 영인들이 달음질쳐 가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야, 같이 가자! 원수가 온다”고 하며 깨우쳐 주려 하고 있지만 여러분의 귀는 그런 소리를 들을 줄 모르고, 눈은 볼 줄 모르며, 몸은 감각할 줄 모르는 처량한 모습입니다. 탄식하자면 이 이상 탄식할 일이 없습니다. 이것은 자기 일신만의 탄식할 일이 아닙니다. 이러한 것은 존재의 가치를 전체의 이념세계와 연결시키려는 천륜 앞에 용납할 수 없는 죄가 되는 것입니다. (7-182)
마음의 세계
사람이 도의 길을 가는 데는 달음질만 쳐서 되지 않습니다. 목적을 이루기 위한 구비조건과 목적하는 내용을 성사할 수 있는 마음 바탕을 갖추어 가지고 그 목적을 향해 달음질쳐야 된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진리를 잃어버렸고, 마음의 본향을 잃어버렸고, 생명의 본체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사랑의 실체를 잃어버렸습니다. 이 네 가지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면 도피하는 자의 마음에 사무친 것은 무엇이냐? 본향에 가는 것입니다. 그 나라에 등록할 수 있는 국민이 되려면 무엇을 갖추어야 될 것이냐? 진리를 터득해야 합니다. 사탄이 갖고 있는 악한 세계의 모든 비밀을 알아야 되고, 타락한 이 땅의 모든 문제를 해명할 수 있는 진리를 가져야 합니다. 그래 가지고 달음질쳐야 됩니다.
오늘날의 사탄 주권을 하늘의 주권으로 연결시키기 위한 목표 밑에서 인간은 진리의 본향, 양심의 본향, 생명의 본향, 사랑의 본향을 그리워하면서 그 곳을 향하여 달려야 할 운명에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의 인류역사 6천 년은 진리를 찾는 노정이었습니다. 달음질치는 데 있어서 인간이 갖추어야 할 필수적인 조건이 되는 진리를 찾고 해명하지 않으면 아무리 달음질쳐 봤댔자 소용없습니다.
내가 진리에 입각한 목적관을 가지고 나타날 때는 모든 가치를 타진할 것이며, 진리가 해명되지 않으면 모든 것은 무가치하다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인류는 지금 마음의 방향과 더불어 진리의 방향을 더듬는 단계에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역사노정에는 진리의 왕이요, 진리의 근본이라고 할 수 있는 그 무엇이 나와 있지 않습니다. 그런 연고로 이 세계의 인류는 사조나 주의에 휩쓸려 들어가고 있습니다.
진리는 둘이 있을 수 없습니다. 유일이요, 영원이요, 불변입니다. 그렇지만 이 하나의 진리, 만인류가 화할 수 있는 내용을 갖춘 진리가 없습니다. 그러면 오늘날 인륜도덕 혹은 사회질서를 세워 나오면서 제시된 것이 무엇이냐? 양심기준에 응할 수 있는 진리의 표준을 찾아 나왔고, 그것만으로 모든 것을 해결지을 수 있으리라고 알고 있지만 아닙니다.
인간이 아무리 그것을 해결했다고 할지라도 자기 앞에 다가오는 생사의 문제를 어떻게 할 것이냐 하는 문제에 걸리는 것입니다. 이 생명문제를 어떻게 할 것이냐? 인간의 마음은 무한의 세계와 인연을 맺으려고 하는데, 이 심적인 작용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목적관이 없이 움직이는 것은 우주만상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더 나아가서, 목적을 중심한 가치적 인연을 벗어나서 작용하는 존재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부인할 수 없는 절대적인 어떤 기준에 대한 절대적인 신념을 갖고 내외적으로 침범해 오는 모든 악의 조건을 방비하라고 강력히 주장하는 마음의 작용에는 반드시 그 목적지가 있을 것이며, 그 목적지에서는 어떤 인연적인 가치를 천상 앞에 나타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때에는 마음의 움직임에 의해서, 마음이 지시하는 대로 살면 됩니다. 전체목적은 모를지라도 생활적인 가치의 인연을 세우기 위하여 그렇게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마음을 붙들고 본향이 어디냐고 물어 보았습니까? 보십시오! 역사는 발전해 나왔으며 문화도 발전해 나왔습니다. 문화 혹은 인지(人智)에 따라서 모든 외적인 환경도 어느 정도까지 변화 발전해 나왔습니다. 그러나 마음의 세계는 변하지 않았습니다. 이 마음의 세계에는 혁명도 없고 발전도 없고 그냥 그대로 영원이요, 불변인 것입니다.
마음에 어떤 목적관이 있어서 뚜렷한 목표를 설정하면 무한대로 달려 나갑니다. 남과 북을 향하는 지남철이 방향만 잡히면 그 당기는 힘 이상의 힘이 없는 한 방향은 돌이킬 수 없듯이, 양심세계는 어떠한 외래적인 힘으로 움직여내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움직여낼 수 없는 마음의 작용은 절대적인 이념권 내에 있는 것입니다. 이 마음의 뚜렷한 목적관이 해명되면 모든 세포나 감정까지도 휩쓸려 들어가는 작용을 일으킬 수 있음에 틀림없습니다. (7-183)
상대성을 지닌 존재
그러면 문제는 간단합니다. 제 아무리 훌륭한 양심작용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 사람이 갖춘 정도 이상의 작용은 못 합니다. 자기가 갖춘 정도 이상의 작용은 못 해요. 물론 주체적인 입장에 있지만 몇 천만배 이상은 못 한다는 것입니다. 마음은 육신을 수습해야 할 상대적인 입장에 있기 때문에 상대적인 관계를 벗어나서는 작용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양심에도 차이가 벌어집니다. 천태만상의 차이가 있지만, 그 양심은 무엇인지 모르게 본질을 향한 방향성을 갖추고 있습니다. 이러한 양심의 방향을 확정짓기 위하여 관(觀)이라는 것이 나옵니다. 인생관이니 우주관이라고 하는 것, 또 무슨 주의나 주장 혹은 진리의 표상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상대성을 지닌 존재입니다. 천상에 영원 불변한 주체가 있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은 그 주체 앞에 상대기준을 조성하기 위하여 오늘도, 내일도 노력해 나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무턱대고 인간의 마음기준을 옮겨 놓으려야 옮겨 놓으실 수 없습니다. 몸과 박자를 맞추어서 옮겨 놓아야 하시기 때문입니다. 먼저 몸을 다스려서 그 몸을 어떤 환경에 몰아넣은 다음에 그 심정의 방향을 자연적인 법도와 맞추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진리의 법도가 세워지기를 하나님은 원하십니다.
만약에 세계를 통할 수 있고 하늘의 원칙과 부합될 수 있는 진리가 나온다고 할진대, 이 양심은 무한대로 뻗어 활동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연고로 인간들은 진리를 찾아 나옵니다. 그러나 오늘날 20세기 문명을 자랑하는 문명세계에서 있어서 인간의 마음이 솟구쳐서 찾고자 하는 무한대의 절대자 앞에 자연적인 상대기준을 조성할 수 있는 모습이 되도록 재촉할 수 있는 진리는 지상에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런 연고로 인간은 타락의 한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인간에게 이 모양으로 가르쳐 주고 저 모양으로 뒤넘이쳐 나오시면서, 하나의 목적에 연결시키기 위한 서글픈 역사를 하고 계신다는 것을 여러분이 생각해야 됩니다. 오늘날 내가 인생행로를 걸고 진리의 방향을 찾아 나가는 도피 행로에 있어서 하나님은 얼마나 수고하셨겠어요!
오늘날까지 인간 역사의 모든 서글픈 심정과 인간 역사의 비참한 사정을 논의하게 될 때, 여러분은 무시무시한 역사였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 역사를 진행시켜 나오는 주체자측에는 더 무시무시한 투쟁이 지금도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그런 투쟁이 없다면, 여러분이 편히 눈을 감고 자거나 쉴 수 없는 비참사가 벌어질 것입니다.
마음은 시작과 끝이요, 실존적인 본체와 연할 수 있는 것이기에 그런 슬픔이 사라질 때까지, 그런 슬픔을 영원히 벗어나 해결지을 때까지 그것과 똑같은 자극적인 슬픔이 작용한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느껴야 되겠습니다. 그런 슬픔을 재촉한 것이 인간이요, 그런 슬픔을 연결시키고 연장시켜 나온 것이 인간이니까 이러한 인간을 대해 심판하는 것은 타당한 처사일 것입니다. (7-183)
마음의 차원을 높여야
이제 인간은 진리를 갖추어 가지고 본향을 향하여 달음질쳐야 되겠습니다. 그 다음에는 생명을 찾아야 됩니다. 내 생명의 주체는 어디 있느냐? 영원불변한 생명의 주체는 어디 있느냐? 더 나아가서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했고 예수님도 사랑이라고 했는데, 그 사랑의 주체는 어디 있느냐? 그 주체와 상봉하여 “네가 갖고 있는 양심의 기준이 이것이다. 내가 갖춘 사랑의 기준은 이것이다” 하는 결정을 받아서 가는 곳이 영계입니다. 영계에는 지극히 선한 천상세계가 있는가 하면 그 반대되는 사탄세계, 악한 지옥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가졌습니까? 이제 우리는 찾아야만 되겠습니다. 마음의 현상을 보아 내 마음이 이런 관계에 있다는 것을 알았으니, 이제 내 마음을 무한히 솟구치게 하는 본체 앞에 자연적인 작용으로서 음적인 마이너스 입장, 혹은 양적인 주체 앞에 대상적인 입장에 설 수 있는 역사적이요, 시대적이요, 미래적인 진리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진리를 찾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슨 주의를 찾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진리를 찾아 헤매던 선조들을 비웃을 수 있는 위대한 용자가 나와야 되겠습니다. 역대의 성현 현철들을 대하여 대관절 뭘 했느냐고 항의할 수 있는 용자, 수많은 도를 세운 도주들을 대하여 무엇을 했느냐고 항의할 수 있는 하나의 용자가 땅 위에 나타나기를 나는 고대합니다. 그래야 될 것 아니에요?
그것이 도피하는 생활을 하는 인간에게 있어서 필연적인 조건이요, 구비해야 할 절대적인 조건임에 틀림없다면 오늘날 인간은 어떻게 할 수 없는 운명에 놓여 있습니다. 스스로 이런 환경에 나고 싶어서 태어난 인간이 아니요,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원인적인 내용을 갖고 있는 인간도 아니기 때문에 언제나 상대적인 입장에서 가치적인 관계는 갖고 싶어하되 가치적인 인연을 맺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인생행로에 있어서 자기의 가치를 자랑하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꺾여 넘어가나 안 꺾여 넘어가나 보라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되지 않은 꼴을 해 가지고 으스대면, 그 주위 환경의 만물들까지도 “이 녀석…” 합니다. 이것이 우리 양심을 가진 사람의 본연적인 현상입니다. 돼먹지도 않은 자가 끄떡거리면, 여러분 어때요? “어, 너 잘한다” 하면서 추켜 주고 싶어요? 아닙니다. “이 녀석…” 하고 한대 치고 싶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나쁜 마음이 아닙니다. 본연의 현상입니다.
이런 입장에 있는 여러분은 이것을 똑똑히 명심하여 자기의 가치를 주장하고 나서는 자들의 모습을 한번 보십시오! 양심세계에는 주의도 없고 관도 없습니다. 그런 것들을 중심삼고 따로 떨어져나가 가지고 해명할 수 없는 세계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우리의 가치는 얼마나 자랑할 수 있느냐? “나는 무슨 주의를 갖고 있으며, 나는 어떠한 존재다” 하는 것은 어리석은 놀음일 뿐입니다.
그러니까 관의 내용을 중심한 진리, 천리적인 내용을 내포한 어떠한 마음 혹은 생명, 사랑의 심정 앞에 자신의 모습이 부끄럽지 않은가를 여러분이 판별해 보십시오! 거기서부터 자기를 찾는 일이 벌어질 것입니다. (7-186)
우리는 이러한 운명에 처해 있으니까 아니 가려야 아니 갈 수 없습니다. 필연적이요, 절대적입니다. 진리의 본향에서 더불어 즐길 수 있는 마음, 진리와 마음이 합해서 움직일 수 있는 생명, 진리와 마음과 생명이 접하여 천정을 일으킬 수 있는 사랑이 인생이 바라는 최고의 것입니다.
오늘날 여러분은 어떠한 입장에 있습니까? 엄연히 사지백체를 갖고 있고 감정을 갖고 있다고 할진대, 여러분의 시선은 무엇을 바라보고 있고, 머리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으며, 여러분의 사지는 무엇을 향하여 움직이고 있는가 하는 문제에 걸릴 것입니다. “손아, 너는 진리를 그리워하고 진리를 찾기에 얼마나 수고했느냐? 몸아, 너는 진리의 본체를 향하여 수시로 달리고 있는 마음 앞에 얼마나 협조했느냐” 하고 반문해 봐야 됩니다.
그런데 “오늘도, 내일도 될대로 되라! 한술 먹었으니 그만, 한잠 잤으니 그만이다” 하면서 “그만, 그만…” 하다 보면, 인생은 다 지나가고 사망의 절벽에 코를 쥐어박고 가야 할 운명에 놓이게 됩니다. 여러분, 인간은 그렇게 무가치한 존재가 아닙니다. 그렇게 무질서하고 무목적적인 입장에서 살라고 대우주의 주인이 우리의 생명을 땅 위에 내놓지 않았습니다.
원인과 목적을 기반으로 한 관계의 현상세계를 통하여 변함없이 그 목적을 추진시키려는 어떠한 인연이 있는 것을 무시 못할진대, 그 인연을 종합하여 관계와 가치를 논해야 할 인간이 그렇게 시시해서야 되겠습니까? 여러분은 그런 인간이 아닙니다. 여기에 똑똑한 사람들이 왔을는지 모르지만 “나는 뭐 인텔리인데…” 하면서 어디 가도 도피하려고 하는 사람들은 한번 이 방면을 노크해 보라는 것입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마음의 차원을 높여야 되겠습니다. 마음의 세계를 높여야 되겠습니다. 땅을 바라볼 것이 아니라 높은 곳을 바라보아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세계만이 아닙니다. 하늘을 보아야 되겠습니다. 하늘을 높이 바라보아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마음세계는 땅의 생명으로서 만족하지 않습니다. 땅의 어떤 목적과 이 세계의 양심작용은 거기에서 머무르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일생동안 어떠한 만족에 취할 수 있는 생명력을 지니거나 내 심정이 무한대로 뻗어갈 수 있는 영원한 관계를 맺고자 한다는 것을 여러분이 부정하지 못할진대, 역사의 종말을 비웃고 넘어설 수 있는 진리의 모습은 어디 있느냐? 그러한 마음의 모습, 생명의 모습, 사랑의 모습은 어디 있는가를 찾아봐야 되겠습니다. (7-188)
우리가 개척해야 할 것
만일 이 땅에 어떠한 구세주가 나왔다고 할진대, 그는 그러한 내용을 실천할 수 있는 목적관과 실천적인 가치의 내용을 갖고 인간과 하나님을 연결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을 생활과정에서 증거할 수 있어야 됩니다. 그러지 못한다면 메시아도 아니요, 구세주도 아닙니다.
인류역사가 출발한 이래 지금까지 만민 앞에 새로운 각도와 새로운 방향에서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무엇인지 모르게 공헌해 나오고 있는 것이 있으니, 그것이 종교입니다. 종교 중에서도 기독교가 세계의 문화 창조에 위대한 공헌을 해 왔습니다.
그러면 이 기독교의 내용이 무엇이냐? 그 내용은 예수님을 중심삼은 것입니다. 믿는 자들은 예수님을 구세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구세주는 어떠한 모습여야 되느냐? 그는 진리의 본체요, 마음의 본체요, 생명의 본체요, 사랑의 본체이어야 됩니다. 마음의 본체가 못 된다면, 그는 절대자의 본체 앞에 상대적인 상대체라도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경지에서 우리가 하늘의 섭리를 돌이켜보면 역사노정에서 예수님처럼 통쾌한 말을 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독생자다” 한 그 한마디만 봐도 멋지고 사나이다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구세주라는 명사를 빼놓고도 사나이다웠다는 거예요. 역사이래 그렇게 통쾌하고 멋진 표현을 한 사람을 봤어요? 가상적이라도 좋습니다. 내용은 없다고 하더라도 그런 멋진 말을 들어 봤느냐는 말입니다.
또, “너희들은 누구보다도 나를 더 사랑하라” 했습니다. 아무리 정적인 마음을 가진 호남자가 있다고 할지라도 이 이상 통쾌하게 한 말을 들어 봤어요? 남자로서 최고의 감성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또,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한복음 14:6) 했습니다. 그런 논리 밑에서 예수님의 말씀이 해명되고 모든 조건에 부합되니, 나는 그분을 메시아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예수님은 인류를 죄의 굴레에서 도피시켜 주기 위한 왕자로서 우리의 인생행로를 개척하러 왔던 선봉자였습니다. 천상천하에 홀로 나타난 도피의 왕자였다는 말입니다. 후대에 남아 있는 전 인류도 죄의 굴레에서 도피해야 할 사람들인데, 그들의 왕자로서 이 땅 위에 왔던 분이 예수님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이라는 것을 느낀다면 역사적인 진리를 해명받아야 됩니다. 이 예수님을 붙들 때 본연의 양심기준이 뚜렷하게 서야 됩니다. 예수님을 볼 때, 생명의 영원성이 뚜렷하게 박혀야 됩니다. 이 예수님을 볼 때, 절대적인 사랑의 감정이 들어야 됩니다. 그렇지 못하면 완전한 신부가 될 수 없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억천만상을 다 지으신 하나님의 독생자였습니다. 독생자는 하나님의 황태자였습니다. 하늘왕국에 영원무궁토록 계실 독생자 황태자였습니다. 이런 목적을 바라보고 세워진 분이기 때문에 우리가 바라는 목적의 날이 그분을 다시 만날 수 있는 재림의 날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인간들은 아직까지 절대적이요, 영원한 생명의 인연을 못 맺었습니다. 암만 예수님을 잘 믿어도 언젠가는 떨어집니다. 암만 예수님을 신랑이요, 무엇이라고 하더라도 배반할 수 있고 떨어져 나갈 수 있습니다. 진리니 뭐니 주장하는 기독교가 있지만, 인간이 나아갈 마음의 방향도 완전히 잡아 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다시 와야 됩니다.
오늘날 우리가 개척해야 할 것은 무엇이냐? 예수님을 잘 믿는 것보다도 성경에 감추어진 진리를 찾아야 됩니다. 인생행로에 있어서 비운의 곡절을 일으킨 역사적인 모든 내용을 알고, 어떻게 해서 현실과 미래의 세계가 연결되는가를 알기 위해서 안팎의 검은 장벽을 헤치고 들어가야 되겠고, 또 그것을 헤치고 나아가기 위해서 싸워 이길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자격자들이 나와야만 진리의 세계가 개척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노정에 섰던 선봉자들, 혹은 진리에 가까이 있던 그 시대의 선봉자들은 어디를 찾아 헤매었느냐? 광명의 새 아침을 찾아 헤매지 않았습니다. 그 마음으로는 영광스러운 느낌을 가졌지만 생활 면에서는 지옥의 뒷골목을 헤매었습니다. (7-189)
하나님을 중심삼은 사랑의 인연을 맺어야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그런 생활을 해야 됩니다. 호화찬란한 문화의 첨단에서 새 시대의 꿈을 노래하며 거기에서 만족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할진대, 그들은 역사로부터 규탄받을 것이며 이 세상 말단의 심판대 위에 밀어 넣어질 것입니다. 반면에 “너희들은 다 가라. 내가 이 곳을 지켜 주마” 하면서 사망의 구렁텅이를 자신들의 피눈물로 메워서 평지로 만들고자 하는 모임이 있다고 할진대, 하나님은 그 모임을 통하여 운행하실 것입니다.
역사는 새로운 이념과 모양으로 이루어지는데, 그것은 좋은 자리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나쁜 자리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죄가 있는 곳에 은사가 많다는 것입니다. 이제 가야 할 우리는 마음을 헤치고서 “하나님이여! 예수님은 왔다 갔으되 내 마음이 무한히 솟구쳐 절대자 앞에 늠름히 나설 수 있는 상대적인 가치를 노래할 수 있는 심적인 기준을 갖지 못했으니, 저는 어이합니까” 하고 항의할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예수님을 붙들고 항의해야 되겠습니다. 성경을 붙들고 항의해야 되겠습니다. 남의 말만을 믿다가는 망합니다. 한국 백성들은 남들의 말을 듣다가 예속국가가 된 비운의 역사를 가졌습니다. 이제 우리는 말 못 하는 입장에서 인류를 찾아 나오시는 하나님 앞에 있어서 남의 말을 무조건 백 퍼센트 믿을 수 없습니다. 본질적으로 틀린 내용이 있기에 가라지와 곡식을 비유했습니다. 믿을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의 터전과 진리의 터전이 내 심정에 어떻게 하라는 말을 했지만, 그 말한 내용이 결과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을 때는 항의를 해야 됩니다. 항의를 하려면 나는 이러 이러한 사람이라고 변증을 해야 됩니다. “아버지, 이러 이러한 내용은 이러 이렇게 되었기 때문에 이렇게 되어야 할 텐테, 왜 그렇게 안 되었습니까” 하면, 하나님은 대번에 “오냐” 하신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에서는 주님이 재림한다고 합니다. 불교에서는 미륵불이 이 땅에 오고, 유교에서는 진인이 이 땅에 나타날 것을 말합니다. 각 종교가 주님의 재현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의 말씀을 그대로 재현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분은 성경의 말씀을 재현하는 주인공, 어떠한 도의 말씀을 재차 하는 주인공이 아닙니다. 고차적인 내용의 새 말씀을 가지고 재현하는 주인공을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는 하늘이 있다고 할진대, 그 하늘로부터 대답이 나올 때까지 항의해야 됩니다. “예수님이 진짜 그래? 하나님이 진짜 그래” 하며 항의해야 될 때가 왔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역사가 발전할 것입니다. 오늘날까지 도를 믿던 도인들이 도주를 숭상하고 역사적인 어떠한 방향성을 갖추어 나왔으나, 그 생활적인 면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도주의 상투 끝에 올라가서 하나님을 붙들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경서에 나타난 것으로는 모든 것이 해명되지 않으니, 그 꼭대기를 밟고 올라가서 하나님한테 항의를 해야 됩니다. 도주를 대하여 항의를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목적이 뭐예요? 믿고 뭐 할 것입니까? 신부가 되겠다구요? 신부가 되어서는 뭘 할 것이냐? 잘 살아요? 살면, 뭘 할 것이냐? 주고받고 하는 거지요. 그런데 그렇게 안 됐으면 항의도 해야 될 것 아니에요?
우리가 신랑이신 예수님을 만나자는 것인데, 예수님의 사랑을 받아 봤어요? 난 그렇게 안 믿습니다. 예수님이야 사랑하겠으면 하고 말겠으면 말고 상관할 것 없이 나는 예수님을 넘어 하나님의 사랑을 받겠습니다. 예수님은 조건입니다. 그를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 위한 조건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신부를 맞이하여 하나님의 축복을 받지 못하면 천상의 대 위업을 인계받지 못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알아야 됩니다. 여러분도 하나님을 중심삼은 사랑의 인연을 맺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이러한 내용을 갖추기 위해서 마음 문을 열고 진리의 물결이 파도치는 감촉을 느껴 보았습니까? 지극히 맑은 양심을 재촉해 봤습니까? 혹은, 양심에 속삭여 들어오는 생명의 흔적을 붙들고 노래해 봤습니까? 무한한 세계와 인연을 맺어 생명의 폭발력으로 나타나는 심정적인 그 무엇을 느껴 봤습니까, 못 느껴 봤습니까? (7-197)
하나님의 창조이상
오늘날 도피성을 향하여 달리고 있는 인생행로에 있어서 나의 모습은 어떠하냐? 하늘은 무엇을 바라고 있는가? 우리 인간이 진리의 원동력이 될 수 있는 실체가 되기를 고대하며 6천 년 동안 하나님은 허덕이셨다는 것을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한 경지에서 들어가게 될 때 그리스도가 그런 것처럼 “나는 하나님 안에 있고, 하나님도 내 안에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한 동기적인 느낌을 가지고 이 사망의 길을 멋지게 가려는 도피의 왕자는 붙들 자가 없습니다. 그는 진리와 더불어 움직이고, 우리의 마음세계와 화하고, 생명 원칙과 인연을 맺어 무한히 운동하고, 심정세계와 더불어 무한한 창조의 묘미를 나타내는 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하늘이 절대 보호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경지에서 자기의 가치를 논의하고 자기를 중심삼고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를 논의할 수 있게 된다면, 그 모습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은 얼마나 기쁘시겠어요! 여러분, 보십시오. 내가 만일 어떤 책을 써서 “거기의 아무개 아무개는 이렇다”고 했을 때, 그 사람이 “야, 이놈아! 너 기분 나쁘게 왜 그러느냐” 할 것 같아요? 어때요? “그대가 말하지 않아도 그대의 마음이 이렇지 않습니까” 하며 좋은 곡조로 노래를 불러 주면 어떻겠어요? 여러분 같으면 어떨 것 같아요?
하나님의 창조이상은 자기의 심성에 내재해 있던 모든 자극적인 감성을 우리 인간에게 드러내 가지고 그 가치를 보고 기뻐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자기를 중심삼고 사는 사람은 결국 자기가 없어지고 망합니다. 자기의 가치를 백 퍼센트 노래한 자들은 죽음과 더불어 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가정의 효자, 열녀, 혹은 일개 종족으로 이루어진 국가의 충신들도 그 국가가 세계적인 사조에 휩쓸리고 융합되거나 망하게 될 때는 함께 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도피성을 향해 달리는 데 있어서는 어떠한 개인적인 것과 자기 중심적인 감정은 모두 끊어 버리고 가야 합니다. 6천 년 역사이래 그런 사람이 나온다면, 하나님이 그를 축복해 주시지 않을 수 있겠어요? 그런 사람이 안 나와서 한탄하시는 하나님입니다. 만일에 한국에 그러한 청년이 나온다면, 하나님을 이 한국에 모셔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망언이 아닙니다.
인간은 지금까지 자신을 붙들고 자탄했고, 나 하나에 국한된 가치를 논의하며 슬퍼했습니다. 처량합니다. 일개 가정, 일개 국가, 세계의 주의나 사상에 자기의 목을 걸고 허덕이는 인간들의 무가치한 모습을 바라보고 “야, 이놈들아! 비켜” 하고 소리칠 수 있는 권한을 갖고 오는 용자가 메시아입니다. (7-199)
문제는 자신에게 있다
관념적인 역사관은 쉬 지나갑니다. 인식적으로 이 우주를 해명하지 못하면 역사는 이대로 계속될 것입니다. 역사는 우리의 모든 기준과 기반을 닦아 주지 못하고 해결해 주지 못했으니, 이러한 근본적인 문제부터 해명해야 됩니다. 외적으로는 역사의 흐름과 내적으로는 마음이 움직이는 방향에 박자를 맞추어 가며 멋지게 뒤넘이칠 수 있는 회전지점에서 하늘 앞에 선다면, 하나님은 “오냐, 승리의 왕자다” 하고 인을 쳐주실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누구의 말을 들을 때는 지나갔습니다. 어떤 진리보다도, 천만 배 훌륭한 스승의 말보다도 내 마음의 말을 듣고, 들어도 또 듣고 싶어 그 마음을 찾아가야 합니다. 그러면 나도 알 수 없는 무한대의 무엇이 나옵니다. 그것이 창조의 내용입니다.
어떤 위대한 과학자가 어떤 고분자 공식을 풀어 들어갈 때, 거기에 비례될 수 있는 상대적인 기준을 못 잡아서 허덕이는 때가 있습니다. 그러다가 어떤 상대적인 기준만 딱 잡으면, 그 모든 것이 해명되는 수가 있습니다. 그 기준을 잡기 위해서는 잠을 잊어버리고, 먹을 것을 잊어버리고, 자기의 생활적인 감정을 잊어버리고, 지금까지 자기의 오관으로 느끼던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몰두해야 됩니다. 그렇게 허덕일 때 어떠한 내적인 체계로부터 외적이요, 실증적인 공식이 문화의 궤도로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이러한 작용을 하는 중간적인 기관밖에 못 됩니다. 그러한 인간인 오늘날 우리들은 어떠한 입장에 있느냐? 원인적인 세계에 있는 것이 아니요, 목적의 세계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관계의 세계에서 허덕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관계의 세계는 지나가고 있습니다. 수학문제를 풀 때 어떤 공식에 갖가지 수를 대입시켜서 답이 나오면, 그 답 이외의 나머지 것은 필요 없습니다.
관계의 세계가 비참하니까 이 관계세계의 비참사를 해명하여 내정된 하나님의 뜻과 심정을 연결시킬 수 있는 사람이 있다고 할진대, 그는 반드시 영생합니다. 역사와 더불어 심판받지 않습니다. 끝날과 더불어 망하지 않는다는 것을 여러분이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문제는 자신에게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이 먹을 것을 먹지 못하고, 입을 것을 입지 못하고, 밤잠을 개의치 않고 기도한 원인은 무엇이었느냐? 인생길이 바빠서였습니다. 자신의 길도 해결해야 되었고, 민족의 길도 해결해야 되었고, 세계의 길도 해결해야 되었기에 몇 백배의 노력을 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아십시오!
그리하여 인생행로를 가는 데 있어서 얼마만큼 수고하고 노력하면서 이 길을 개척해야 할 것인가를 각자가 생각해 보십시오! 인생행로의 낙오자가 되지 말고, 이 인생행로를 달리는 활주로에서 떨어지는 추락자가 되지 말고 멋지게 대공을 나는 제트기처럼 날아갈 수 있는 용자들의 모습이 되어 주기를 바랍니다. (7-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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