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천평화의집이 8월6일 ‘한국원폭2세 환우 생활 쉼터’ 개원식을 열었다. |
피폭으로 인한 희귀성 유전질환으로 혼자 생활할 수 없는 원폭 피해 2·3세를 위한 공동 생활 시설이 처음 문을 열었다. 24시간 숙식 제공과 치료·재활 등의 지원을 하는 원폭 피해 후손을 위한 쉼터다. 세계 유일의 원폭 피해국 일본에서도 피해 1세가 아닌 2·3세를 위한 24시간 공동 생활 시설은 알려진 바 없다.
비영리 민간단체 합천평화의집(원장 윤여준)은 오늘(8월6일) 경남 합천군 율곡면에서 ‘한국원폭2세 환우 생활 쉼터’ 개원식을 열었다. 시내 외곽에 위치한 2층짜리 주택 1층에 들어선 쉼터는 약 200㎡(약 60평) 규모로 방 네 칸과 부엌, 거실 등을 갖췄다.
쉼터에는 시각장애 1급, 정신지체장애 1급 등 피폭의 후유증으로 기본적인 생활을 하기 힘든 환우 6명이 우선 입소한다. 고령과 노환으로 평균 연령 90세에 달하는 피해 1세의 도움을 받지 못하는 입소자들은 쉼터에서 생활하며 심리치유프로그램 등의 돌봄 서비스를 받는다. 피해 2세이자 한국원폭2세환우회 명예회장인 한정순 씨가 함께 생활하며 이들을 돌본다.
현재 국내에서 원폭 피해자들이 머물 수 있는 시설은 합천원폭피해자복지회관 한 곳 뿐이다. 그러나 국내 거주하는 피해 1세만 2만여 명으로 추정되는데 비해 정원은 110명에 불과하다. 피해 2·3세는 입소 대상에 해당되지도 않는다.
지난 2010년 개원한 합천평화의집은 개원 당시부터 이들을 위한 24시간 케어의 필요성을 제기해왔다. 정부와 사회의 무관심 속에서, 금전적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피해 2·3세가 집과 쉼터를 오가며 상담 및 치유서비스 등의 복지 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돌봄 서비스를 제공해왔고, 지난 5년 동안 이들을 24시간 돌볼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땅 한평 사기 운동’ 등의 모금 활동도 펼쳤다.
그 결과 8000여 만원의 성금이 모연, 쉼터 계약금을 마련할 수 있게 됐다. 그러나 정부의 지원 없이, 사회의 무관심 속에서 모연금만으로 쉼터 운영을 계속하는 것은 여전히 버겁다.
합천평화의집 고문, 위드아시아 이사장 지원스님. |
하창환 합천군수. |
히라오카 다카시 전 히로시마 시장. |
합천평화의집 고문 지원스님은 이날 개원식에서 “피해자들이 원폭의 후유증으로 잦은 질병과 가난에 시달리며 사회의 차별과 국가의 방치 속에 살아가고 있다”며 “쉼터 운영에 여러가지 어려움이 많이 따르겠지만 피해자로 인정받지 못하고 또 소외당하고 있는 환우들을 위해 피해 2세를 위한 쉼터에 관심을 가져주길 바란다”고 했다.
하창환 합천군수는 지자체 차원에서 적극적인 관심과 지원을 약속했다. 하창환 군수는 “지난 5월 원폭 피해자 특별법이 통과됐지만 2세가 포함되지 않은 반쪽짜리 법이었다”며 “합천군은 이제라도 특별법 개정과 쉼터의 안정적인 운영에 지원을 아끼지 않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히라오카 다카시 전 일본 히로시마 시장도 이날 개원식에 참석해 격려의 말을 전했다. 히라오카 다카시 전 시장은 “1세뿐 아니라 2·3세의 고통을 생각해 쉼터를 만든 것은 굉장히 훌륭한 일”이라며 “아무런 지원을 하고 있지 않는 한국 정부가 하루라도 빨리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 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쉼터를 둘러보는 지원스님과 창원 성불사 주지 승지스님. |
히라오카 전 시장은 일본 정부가 지난해 '피폭자 원호법'에 따라 국적 상관없이 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 투하 당시 피폭지역에 거주했던 사람들을 '피폭자'로 인정해 의료비 등을 지급하고 있는 것과 관련해서도 "이는 한국 피폭자들의 호소와 투쟁의 결과로, 전후 70년에 걸쳐 겨우 얻어낸 성과”라고 강조했다.
또 “미국이 원폭 투하 책임을 분명히 하는 것, 일본이 식민지 지배와 원폭 피해에 대해 사죄하는 것, 더불어 이들이 현재까지 후유증으로 고통받고 있는 피폭자에 대한 원조를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합천평화의집은 쉼터에 우선 입주한 피해 2세를 돌보며 인권 보호의 사각지대에 놓여있는 피해자들에 대한 지원을 계속해나갈 계획이다. 유전성 질환을 앓고 있거나 경제적 빈곤과 사회적 박탈감 속에서 자립하기 어려운 환우를 대상으로 치료 및 상담 등의 복지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한편 피해 사실을 알리는 비핵 평화 캠페인과 특별법 개정의 근거 마련을 위한 활동도 계속한다.
이와 함께 ‘땅 한 평사기 운동’ 등 쉼터의 안정적 운영을 위한 홍보 캠페인 등을 펼칠 예정이다. 이남재 합천평화의집 사무총장은 "지난 5월 원폭 피해자 특별법이 우여곡절 끝에 통과됐지만 마찬가지로 피해 2세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며 "정부와 사회의 무관심 속에서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한 채 방치된 피해자들이 하루 빨리 질병과 가난의 고통 속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관심을 가져달라"고 호소했다.
쉼터 공동생활 공간 한 쪽 벽에는 '기부자의 벽'이 마련돼 있다. 조계종 총무원장 자승스님을 비롯, 쉼터 지원을 아끼지 않은 기부자들의 이름이 나뭇잎에 새겨져 있다. |
개원식 이전 피폭 희생자를 위해 추모 묵념하는 사람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