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2025.3.8. 재의 예식 다음 토요일 이사58,9ㄷ-14 루카5,27ㄴ-32
더불어(together) 추종의 여정
“부르심과 응답”
“내 마음이 당신을 향하여 있사오니,
주여, 이 종의 영혼에게 기쁨을 주소서.”(시편86,4)
레위와 예수님과의 만남이 극적입니다. 세관에 앉아있던 레위가 뜻밖에 주님의 부름을 받습니다. 분명 레위의 내적 갈망을 알아채신 주님의 부르심입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선행하는 레위의 주님을 찾는 내적 갈망입니다. 만일 이런 내적 갈망이 없었다면 주님은 그를 부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나를 따라라.”
영원한 현재성을 지니는 말씀입니다. 삶의 방향을, 삶의 길을, 삶의 희망을 찾지 못해, 또는 잃어버려 방황이요 혼란이자 불안이요 두려움입니다. 바로 레위가 주님을 만남은 그대로 구원이었으니 삶의 방향을, 길을, 희망을 찾았기 때문입니다. 정말 삶에서 중요한 것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입니다. ‘주님은 나를 믿어라’, ‘나를 사랑하라’ 하시지 않고 ‘나를 따라라’ 하십니다.
예나 이제나 주님은 우리에게 ‘나를 따라라’ 하십니다. 제대로 주님을 따라갈 때 제대로의 참삶입니다. 한두번 따름이 아니라, 평생 날마다 살아있는 그날까지, 버리고 비우고 주님을 따라야하는 “추종의 여정”입니다. 주님은 날마다 이 거룩한 미사전례중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는 이에 응답하여 오늘 복음의 레위처럼 주님을 따라 나섭니다. 다음 대목이 상징성이 깊습니다.
‘그러자 레위는 모든 것을 버려둔 채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
그대로 레위의 내적 갈망이 얼마나 컸던지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새삼 ‘넘어지는 것이 죄가 아니라 절망의 자포자기로 일어나지 않는 것이 죄’라는 제 지론이 생각납니다. 넘어지면 즉시 일어나 새롭게 주님을 따라 나서는 파스카의 삶, 이래야 비로소 영적탄력 좋은 삶입니다.
삶은 주님을 따르는 추종의 여정입니다. 레위는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베풀었고, 부르심을 받은 레위는 주님의 제자들 공동체에 합류합니다. 이제 레위는 혼자가 아니라 제자들과 함께 주님을 따르는 공동체에 합류한 것입니다. 그대로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 수도공동체에 합류한 우리를 방불케 하는 공동식탁입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의 주님의 제자들을 향한 항의성 질문과 이에 대한 주님의 답변이 오늘 복음의 절정입니다.
“당신들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이오?”
사람 눈에 세리와 죄인들이지 주님 눈에는 모두가 평등한 형제임을 몰랐던 편견에 눈이 멀었던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입니다. 예수님의 즉각적인 통쾌한 답변이 평생 묵상자료가 됩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왔다.”
예수님께서는 “죄인”을 치료받아야 하는 “병자”로 여기시고, 당신 자신을 “의사”에 비유하십니다. 회개와 더불어 최고의 명의이신 주님으로부터의 치유의 용서가 이뤄짐을 봅니다. 치유받은 병자들의 공동체이자 용서받는 죄인들의 공동체가 바로 주님을 따르는 우리 제자들의 공동체요, 날마다 용서받고 치유받아 새롭게 추종의 여정에 오르게 하는 미사은총임을 깨닫습니다.
사실 천주교는 힐링의 종교요 총체적 힐링에 미사전례은총을 능가하는 것은 없습니다. 도대체 세상에 용서를 필요로 하지 않는 의인들은, 치유를 필요로하지 않는 건강한 이들은 몇이나 될까요?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정도나 양상의 차이일뿐 모두가 주님의 부르심을, 용서와 치유를 필요로 하는 죄인이요 병자라는 엄연한 사실이 우리를 참으로 겸허하게 합니다.
어제에 이어지는 오늘 이사야서 말씀도 사순시기 주님의 제자들인 우리 공동체에 주시는 말씀입니다. 참된 단식의 정신이자 회개로 용서받아 새롭게 주님을 따라나선 우리를 고무하고 축복하는 말씀입니다. 교회내 제자들 공동체에만 국한된 것이 아닌 우리 시야를 전 인류 가족인 사회 전반을 살펴보게합니다.
“네가 네 가운데에서 멍에와, 삿대질과 나쁜 말을 치워버린다면, 굶주린 이에게 네 양식을 내어 주고, 고생하는 이의 넋을 흡족하게 해 준다면, 네 빛이 솟아 오르고. 암흑이 대낮처럼 되리라. 주님께서 늘 너를 이끌어 주시고, 메마른 곳에서도 네 넋을 흡족하게 하시며, 네 뼈마디를 튼튼하게 하시리라. 그러면 너는 물이 풍부한 정원처럼, 물이 끊이지 않는 샘터처럼 되리라.”
삶은 이론이 아니라 실천입니다. 사랑의 실천, 회개의 실천입니다. 이사야가 제시하는 이상이 참으로 영감이 넘치고 아름답고 현실적입니다. 은총의 사순시기 이런 우리를 격려하시는 주님입니다.
“너는 오래된 폐허를 재건하고, 대대로 버려졌던 기초를 세워일으키리라.
너는 갈라지 성벽을 고쳐 쌓는 이,
사람이 살도록 거리를 복구하는 이라 일컬어 지리라.”(이사55,12)
이어지는 안식일에 대한 말씀도 우리의 무지를 일깨우며 주일에 대한 우리 자각을 새롭게 합니다. ‘안식일’을 ‘주일’로 바꿔 읽어봅나다. 이렇게 주일을 보내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청정욕淸淨慾도 듭니다.
“네가 삼가 주일을 짓밟지 말고,
나의 거룩한 날에 네 일을 벌이지 않는 다면,
네가 주일을 ‘기쁨’이라 부르고,
주님의 거룩한 날을 ‘존귀한 날’이라 부른다면,
네가 길을 떠나는 것과 네 일만 찾는 것을 삼가며,
말하는 것을 삼가고, 주일을 존중한다면,
너는 주님 안에서 기쁨을 얻고,
나는 네가 세상 높은 곳 위를 달리게 하며,
네 조상 상속 재산으로 먹게 해 주리라.”
너무 아름답고 고무적이라 안식일을 주일로 바꿔 읽어보며 욕심을 내어 써 봤습니다. 비단 주일뿐 아니라 이 은총의 사순시기 이런 하느님 중심의 관상적 삶이 일상으로 확장되었으면 참 좋겠다 싶습니다. 너무 지치고 피폐해진 영혼들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이런 관상적 삶에 참 좋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주님, 제게 당신의 길을 가르치소서.
제가 당신의 진리 안에서 걸으오리다.”(시편86,11ㄱㄴ).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