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볼거리 천국이다. 수많은 TV 채널에서, 스마트폰에서, 인터넷에서 우리를 유혹하는 영상이 넘쳐난다. 그래서 우리는 행복해졌는가? 우리의 감각은 더 풍성해졌는가? 그 반대일 것이다. 우리는 피로하고 감각은 쪼그라들고 있다. 영상이 화려하고 자극적으로 달려갈수록, 우리는 그것들에 삶의 중요한 자리를 더 많이 내주고 있다. 삶은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다. 보여주지 않고도 인생을 풍요롭게 할 수 있다. 라디오가 그랬다.
초등학교 시절 라디오는 내게 최고의 장난감이자, 세상의 지식을 얻는 가장 좋은 학습 도구였다. 거기엔 세상의 모든 음악이 있었고,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스포츠가 있었고, 성우들의 목소리만으로 펼쳐지는 천일야화가 있었다. 요즘과 달리 음악 방송은 잡담 없이 진지했고, 모든 동작을 세세하게 설명하는 스포츠 중계는 TV보다 훨씬 더 박진감이 넘쳤다. 라디오 드라마는 보여주지 않는 만큼 더 많은 상상 공간을 선물했다. 나는 그 안에서 자유롭게 떠돌았다.
당시 라디오 드라마의 인기는 요즘 TV 드라마 이상이었다. 역사물에서 하이틴, 그리고 로맨스물까지 종류도 다양했다. 그중 가장 좋아했던 드라마는 '라디오 삼국지'와 김자옥의 '사랑의 계절'이었다. 6공화국 초까지 롱런했던 KBS '특별수사본부'의 인기는 특히 대단했다. 사이렌과 사람들이 뛰어가는 소리, 그리고 헬기 소음과 무전기 소리가 긴박하게 섞여 나오던 드라마의 시그널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그 시그널만 나오면 가슴이 두근댔다.
소리는 영상보다 삶을 넉넉하게 한다. 이미지는 우리를 구속하지만 소리는 우리의 감각을 확장시킨다. 90년대 중반 이후 모든 라디오 방송이 표준 FM으로 전환했고, 그때부터 라디오 드라마가 줄기 시작해 이제는 거의 자취를 감췄다. 아직도 귓전엔 어릴 때 듣던 성우들의 따뜻한 목소리가 맴돌고, 극의 멋진 장면들이 머릿속을 지나간다. 그때는 세상이 라디오에서 나오는 소리들에 싸여 더없이 아늑했다. 그 아늑한 공간이 문득 그립다.
첫댓글 잘 읽 갑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