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사태와 관련하여 보병 전투부대 20사단은 한 많은 사단이다. 20사단 병사들은 광주사태 때 단 한번 도 진압봉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오히려 여러 명의 병사들이 민간인들이 5월 21일 아침 휘두르는 낫에 여기 저기 찢겨 만신창이가 되었을 뿐이다.
영화 ‘화려한 휴가’에서 시위대가 공수부대더러 12시가 되기 전에 떠나라고 최후통첩을 보내는 장면이 나오는데, 며칠 동안 제대로 자지도 못하고 식사도 못했던 공수부대가 그때 즉시 떠날 수 없었던 이유는 도청 경비를 대신 맡기로 한 20사단 병력이 오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20사는 광주로 오는 도중 낫을 든 괴한들의 기습을 받아 인솔대가 궤멸당하고 모두 도망갔다. 1개 사단이 50명의 민간인의 습격을 받아 피투성이가 된 부상병들을 내버려둔 채로 도망가야 했던 것도 부끄러운데, 설상 가상으로 수십 년 동안 한미외교의 입방아감이 되었었다. 20사는 한미연합 사령관의 승인 없이 이동할 수 있는 부대였음에도5·18측은 늘 이 점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며 미국을 공격하여 왔었던 것이다.
쉽게 말해 때린 놈이 맞은 이에게 “너 미국이 승인해 주어 출동했던 것이지?”라고 질타하며 누명을 뒤집어씌웠던 것이다. 그간 여론에서는 미국이 사전 승인했다는 주장만 강조했었으나, 그 내막은1개 사단이 50여명의 낫을 든 민간인들에게 기습을 당하여 얻어 터지고 사단장 지휘차량 등 지휘차량용 지프 14대를 모두 빼앗기고 걸음마 나 살려라 도망간 사건이다. 5월 21일 오전 8시에 발생한 이 희얀한 사건을 김영택 동아일보 광주 주재기자가 보도한다:
오전 8시쯤 고속도로를 통해 밤을 새워 광주에 온 20사단의 일부 병력이 광주 공단입구에서 무장한 시위대와 충돌했다.
이 병력은 전방에 있던 보병부대로 27일 단행되는 진압작전의 주력부대가 된다. 이 부대의 공식적인 이동 승인은 22일 받게 되는데 이날 미리 도착한 것은 사전의 승낙을 받고 출발한 것인지, 작전지휘권자인 존 위컴 한미연합 사령관이 결국 승인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고 판단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어찌됐건 공식 승인 이전에 현지에 도착한 것이다.
이들은 전날 전방 주둔지에서 출발하여 밤을 새워 도착한 것인데, 도착하자마자 시위대와 조우하게 되었다
시위대원 50여명은 탈취한 지프차를 앞세우고 광주공업단지 안에 있는 방위산업체인 아세아자동차 광주공장에 들어가 맨 먼저 군용트럭을 탈취했다. 시위대는 나중에 버스, 장갑차, 가스차, 지프차 등 260여 대의 각종 장비를 빼앗아 몰고 다니게 되었는데 항쟁기간 동안 시위대가 이용한 장비 중 아세아자동차 공장에서 탈취한 것이 가장 많고 광주고속버스 등 108대의 버스, 그리고 개인 소유의 승용차와 용달차, 트럭 등이다. 그러니까 단일 회사소유로는 아세아자동차가 가장 많은 셈이다 (김영택 1988, 88).
김영택 기자는 『광주사태의 실상』을 인용해 이 사건을 또 이렇게 약술한다: “20사단 병력은 21일 아침 8시쯤 육로로 광주에 진입하다 ‘폭도’들의 기습을 받아 지프 14대를 탈취당하고 이 자들이 휘두르는 낫, 곡갱이, 삽 등에 의해 3명이 부상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김영택 1996, 147). 그런데, 이것이 말도 안되는 사건이라 김 기자는 이 사건을 보도할 때마다 실소를 금하지 못한다.
당시 20사단 병사로서 광주로 출동했었던 진영환도 처음 그 소식을 들었을 때 어이없고 어안이 벙벙하여 실실 웃기만 하였었음을 그의 수기 “한 많은 20사단”에서 증언한다: “대대장님이 사단 정황을 알려줬다. 우리 사단 60 트럭들이 빈차로 내려오다, 광주 톨게이트 근방에서 10여대가 탈취를 당했다, 게다가 사단장님 찝차까지 빼았겼다. 운전병들은 보리를 베던 낫을 든 폭도들에게 찍혀 중상이고, 다른 운전병들은 실종이라고...... 뭐가 뭔지 얼른 생각이 나지않아 실실 웃기만했다. 이게 진짠지?” (진영환 2007)
20사단을 공격한 50여명은 누구였는가? 광주시민들에게는 전혀 낫을 들고 20사단 선발대를 매복 기습할 이유가 없었다. 그들이 낫으로 무장하고 있었던 사실로 보아 가톨릭농민회가 이들 중에 포함되어 있었거나 이들을 지원하고 있었다. 그리고 가톨릭농민회로부터 낫을 지원받은 50여명 중에 대남공작웡들이 있었다. 만약 50여명 중에 광주시민들이 있었다면 분명 광주시민의 증언이 발견될 수 있을 터인데 여전히 전혀 발견되지 않고 있다. 따라서 5월 21일 아침 8시 낫으로 20사 인솔대를 공격하여 14대의 지프를 탈취한 후 그 지프들을 군용차량 및 무기탈취를 하는데 이용하여 그 날부터 도시 게릴라 전이 시작되게 한 주인공들이 광주의 민간인들이었는지 대남공작원들이었는지에 대하여는 탈북자들의 증언을 참고해 볼 수밖에없다.
5.18광주인민봉기가 차질 없이 무장폭동으로 확대될 수 있었던 전적인 배경은 북조선에서 파견된 대남공작원들의 희생적인 노력이 먼저 있었고 남조선 지하조직들의 꾸준한 협조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남조선에 내 집처럼 수없이 드나들면서 정보, 정찰임무를 수행하였지만 광주인민항쟁처럼 남조선정권에 직접적으로 위협을 준 대형사건에 공개적으로 참가해 보기는 처음 이였다 (전 함경남도 무산군노동자 2009, 132).
북한군 제대군인으로서 전 함경남도 무산군 도시건설사업소 노동자가 전하는 5.18 광주의 영웅 장중한의 자서전 내용은 사실일 수밖에 없다. 그가 문익환 목사에게 김일성의 친서를 전달하였으며, 박현채가 서울대학교 학생회 명의로 차명대필한 성명서 필사본을 북한에 전달하였으며, 문익환과 황석영과 서경원 등 그의 공작 대상이었던 광주사태의 주역들이 정말로 1989년에 김일성의 부름을 받아 평양에 가서 김일성을 만나고 왔다.
1980년 5월 21일 낫을 든 50여명의 민간인들이 광주 톨게이트 근방에서 60 여대의 챠량으로 구성된 20사단 지휘차량 인솔대를 공격하여 단숨에 궤멸시키고 차량과 무기들을 버리고 모두 도망가게 한 사건이 있었는가? 믿거나 말거나 사실이었다. 그러나 광주시 민간인 50명이 모이면 국군 1개사단을 공격하여 단 몇 분만에 궤멸시킬 만큼 강하다는 것은 도무지 사실로 받아들일 수 없으므로 김영택 기자는 이렇게 기록한다: “시위대원 50여 명은 20사단 병력으로부터 14대의 지프를 탈취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막걍한 육군의 전투사단 병력이 오합지졸인 시위대원 50여 명에게 지프를 탈추당했다는 것도 이해할 수 없는 대목이다” (김영택 1996, 97).
국군과의 첫 전투에서 시민군이 전쟁사에 유례 없는 화려한 승리를 거두었다. 이것은 유격전술의 신화적 인물 체 게바라가 울고 갈 만한 화려한 승리였다. 그런데, 어째서 영화 ‘화려한 휴가’에서 이 장면을 보여주지 못하는가? 어째서 5·18 측에서 이 화려한 승리의 이야기를 자랑하지 못하는가? 그것은 이것은 시민군이 승리로되 말도 안되는 승리이기 때문이다. 만약 이 50 여명의 최초의 시민군이 모두 광주시민들이었다고 말하면 거기서부터 거짓말이 들통나기 시작한다. 그러면 무엇이 진실이었는가? 그 50명 중에 북한군이 포함되어 있었다는 네러티브에서 시작해야 진실이 보인다. 낫을 든 민간인들이 군인들을 공격한 사건이 있었다. 사실이다. 그러나 낫을 든 민간인들이 모두 대한민국 민간인들은 아니었다. 그것도 사실이다.
여기 낫으로 국군 일개 사단을 상대로 싸운 일당 백의 용사가 있었다. 여기 그 공로로 북한에서 5.18 광주의 영웅이란 칭호를 받은 용사가 있었다. 그런데 그도 광주사태의 희생자였다. 광주에서는 낫을 든 민간인 역을 맡았던 그가 북한에서는 낫을 든 군인들과 싸워야 했고 그 싸움에 이가고도 희생자가 된 기구한 이야기가 있다. 한 탈북자가 전하는 이 이야기는 모두 사실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이 네러티브가 사실일 때에만 어째서 5월 21일 오전 8시에 20사단 병력이 몇 명의 민간인이 휘두르는 낫을 보고 겁에 질려 부상병들을 팽개친 채 모두 도망가는 해프닝이 일어났었는지 설명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 이야기를 들어보자.
5.18 광주의 영웅 장중한을 평양사자라고 부르는 전 북한군 제대군인은 그가 공병국 제27건설여단에서 근무하고 있었을 때 그를 만났다. 북한에서는 매일 건설현장에 나가서 막노동을 할 뿐 대우를 받지 못하는 건설 부대들을 가리켜서 거지부대, 날라리 부대라고 멸시하기에 건설부대는 도적놈 집단이요, 강간과 패싸움을 전문으로 하는 부대로 알려져 있었다. 깡패 기질이 있는 건설부대는 패싸움을 할 때 몽둥이와 곡괭이와 삽을 무기로 삼았다. 그런데 그의 부대원들이 어느날 열차에서 5.18 광주의 영웅, 즉 1980년 5월 21일 오전 8시에 국군 20사단을 상대로 일 당 백의 용맹으로 싸웠던 대남 공작원을 잘못 건드리게된 일화는 이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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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월 21일 오전 8시에는 민간인으로 위장한 대남공작원 장중한이 국군 20사단 병력을 향해 낫을 휘둘렀는데, 2년 후에 북한에서 수십 명의 북한군이 그를 향해 낫을 휘두르는 희얀한 싸움판이 벌어졌었습니다. 수십 매의 탈북자 수기가 포함된 이하의 글은 너무 길므로 전자책을 만들었습니다.
http://www.study21.org/518/sickle-in-518Kwangju-n-in-nk.pdf 에서 읽으세요. 카페 회원들만 읽으실 수 있는 전자책입니다.
첫댓글 가져갑니다
늘 건강 하새요
전자책 만료됐나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