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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삼각산 승가사(三角山 僧伽寺)를 찾아서
-약사전, 마애불, 그리고 부도탑-
약사전(藥師殿)
대웅전을 참배하고 지장전을 겨쳐 마애불을 참배하러 가면 앞에 거대한 바위가 보이는 데 이곳이 약사전입니다. 승가사에서 가장 중요한 전각 중의 하나입니다. 천연동굴에 승가대사(僧伽大師) 석상(石像)을 약사불(藥師佛)로 모시고 기도하는 법당(法堂)입니다. 승가대사 석상 뒤로는 약수가 나오는데 이 물을 마시면 치병에 효험이 많다고 합니다. 바위를 자세히 보면 '영수(靈水)'라는 글자가 각자(刻字)되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세종대왕과 승가사
『고려, 조선시대 때 승가사는 왕실과 가까운 관계에 있었으므로 여러 임금들이 이곳에 행차했던 기록이 있다. 그 가운데 특히 세종은 승가사를 왕실의 기도처로 삼았었던 듯, 여러 차례 신하를 이곳으로 보내곤 했다.
《조선왕조실록》 권16 세종 4년 5월 경오(庚午)조와 8월 임진(壬辰)조에 보면,
「우의정 정곡을 흥천사(興天寺)에 보내고 곡산 부원군 연사종을 승가사에 보내어 약사 불에게 정성을 다해 재를 올리도록 하였다.」「평양군 조대림을 진관사(津寬寺)에 보내 고 찬성사 맹사성(孟思誠)을 승가사에 보내어 재를 올리며 부처님께 빌도록 했다.」는 등의 기사가 보인다.
왕비인 소헌왕후(昭憲王后)의 신병을 고치고자 흥천사ㆍ진관사ㆍ승가사에 신하를 보내 어 불공을 드리게 했던 것인데, 영험이 있어 병이 낫자 그 보은으로 절을 중수케 했다. 이때부터 승가굴이 치병에 효능이 크다 하여 약사전(藥師殿)으로 전각의 이름이 바뀌었 다.
(庚戌)조에 보면 예조(禮曹)에서 전국의 사찰을 36개만을 남기고 통폐합하자는 계획을 내놓은 적이 있었는데, 이 때 승가사가 갖고 있던 전지(田地) 60결에 다시 90결을 더 주 자는 건의가 나와 세종의 허락을 얻은 기록이 있다. 세종은 소헌왕후가 이곳에 불공을 드려 병이 나았으므로 승가사에 특별한 관심을 지녔던 모양이다. 한편, 그 빼어난 경치 때문에 승가사는 내외인들에게 두루 유명한 곳이었던 듯 여러 문 인들의 탐방기록이 남아 있다. 심지어 「명나라 사신 만세덕(萬世德)이 숙소에서 몰래 빠져나와 승가사에 가 부처님에게 고개 숙여 절을 했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보며 술을 마시고는 은전(銀錢)을 절의 스님에게 나누어 주었는데, 해가 저물어서야 숙소로 돌아 갔다.」(《조선왕조실록》권123 선조 33년 3월 임술조)라는 외국사신의 비공식 탐방기록 이 있다. 또 순조 때의 문인 윤치영(尹致英)의 《석오집(石梧集)》에도 〈유승가사기 (遊僧伽寺記)〉라는 승가사 순례의 글이 있다.』 -전통사찰총서에서-
승가대사상(僧伽大師像) -보물 제1000호-
서울 승가사 석조승가대사좌상(首尔 僧伽寺 石造僧伽大師坐像)
『이 상은 삼각산의 석굴 안에 모셔져 있는 승가대사의 석상이다. 석상의 광배 뒷면에 1024년(고려 현종 15)에 조성되었다는 명문이 있다. 승가대사는 원래 서역의 승려로 7세기에 당나라에 와서 활동하였는데 수행이 뛰어나고 교리에 밝으며 송주(誦呪)에 능 하여 많은 신도들이 그를 존숭하였다고 전한다. 대사는 입적 후 십일면관음보살(十一 面觀音菩薩)의 화신으로 숭배되었는데, 비를 내리고 홍수를 다스리며 병을 낫게 하는 영험한 존재로 받아들여졌다. 통일신라 말에 승가대사의 신앙이 우리나라에 전래되어 나라에서 봄, 가을로 재(齋)를 지냈다고 한다.
이 상은 머리에 두건(頭巾. 風帽)을 쓰고 몸에는 가사를 입은 모습으로 조성되었다. 왼손은 가사 속에 넣었고, 오른손은 검지를 펴고 있는데, 이것은 변설(辨說)을 상징하는 손짓[手印]이다. 광배에는 연화문, 당초문, 보상화문, 화염문 등 화려하고 섬세한 문양 이 가득 새겨져 있다.
이 승가대사상은 고려 중기의 유명한 승가대사 신앙을 알려 주는 거의 유일한 예로 정 확한 제작 연대를 알 수 있는 중요한 문화재다.』
이 안내문을 읽어보면 부적절한 문장이나 틀린 용어가 눈에 띕니다. 그래서 안내문 중 '그는 죽은 뒤에'를 '대사는 입적 후'로 고쳐 적었습니다. '광배에는 연화문, 당초문, 보상화문, 화염문 등 화려하고 섬세한 문양...' 운운하였는데 '당초문, 보상화문, 화염문'은 잘못된 용어라고 배운 바 있습니다. 바른 표현은 영기문 (靈氣文)이라 하니 이 용어가 정착되었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
약수를 담으시는 미소님
저도 한 바가지 떠서 마셔보았습니다. 아주 시원하여 생기가 났습니다. ^^
향로각(香爐閣)
연꽃 모양의 지붕을 한 원통형 건물을 향로각(香爐閣)이라 합니다. 이곳은 스님이나 불 자들이 마애불을 바라보며 향화를 받들며 예불하는 전각입니다. 이곳에 들어 마애불을 바라보면 정면으로 뵙게 됩니다.
마애불을 친견하러 가는 108계단
앞서 비니초님이오르고 각현님이 뒤따르고 있습니다. 불교집안에서는 108이란 말을 즐겨 사용합니다. 108이란 108번뇌를 이릅니다. 108번뇌는 중생들이 갖는 많은 번뇌를 상징합니다. 이 번뇌를 보리(菩提)로 바꾸고자 하는 것이 108의 의미입니다. 그러자면 우리의 맑혀야 하는데 우선 참회부터 해야 합 니다. 한 계단 한 계단 오르면서 참회해야 합니다.
"옴 싸르와 붓다 보디쌋뜨와야 쓰와하...." (옴 모든 부처님과 보살님들께, 쓰와하)
위에서 내려다 보았습니다.
비니초님과 각현님은 거의 다 올라오셨고, 뒤에 염화님과 미소님이 오르고 계십니다. 묘법님은 밑에서 계시겠다고 하시고... 그런데 나중에 올라오셨죠. ^^
염화님과 미소님께서 사인을 보내 주시네요. ^^
마애석가여래좌상(磨崖釋迦如來坐像) -보물 제215호-
이 마애불은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하신 석가모니불인데 고려 초기에 제작된 것으 로 전체 높이 5.94m, 너비 5.04m라고 합니다.
거대한 화강암벽에 돋을새김(浮彫)한 고려시대의 마애불
서울 북한산 구기동마애여래좌상(舊基洞磨崖如來坐像)
지정번호 : 보물 제215호. 시대 : 고려시대
『이 불상은 북한산 기슭의 바위에 새겨진 장대한 규모의 고려시대 마애불상이다. 이 불상은 대체로 고려 초기인 10세기 전반에 만들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큰 규모와 위엄 있는 모습으로 보아 석굴암 본존 불상이나 국립박물관에 있는 광주 철불의 형식을 따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불상 얼굴 부분의 이목구비가 선명하게 드러나고 몸에는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는 방법 (偏袒右肩)으로 가사를 입고 있다. 오른손은 무릎 아래로 내렸는데, 이와 같은 손의 표 현을 석가모니부처님이 깨달음을 얻는 순간을 나타내는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이라고 부른다.
대좌에 새겨진 연꽃잎은 매우 부드러우면서도 화려하여 불상제작 기술의 우수성을 잘 보여 준다. 불상의 좌우에는 네모난 구멍이 뚫려 있는데 불상을 보호하기 위한 목조가 구(木造架構)가 이곳에 새겨져 있었을 것이다. 현재 불상 머리 위에 있는 천개석(天蓋 石)은 나중에 만들어 얹은 것으로 생각된다. 이 불상은 비슷하게 만들어진 마애불상 가운데 제작기법이나 규모가 매우 뛰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안내문에서-
부처님께 인사올립니다. 염화님
마애불 앞에 선 미소님
염화님과 미소님
마애불을 참배하고 내려와 약사전과 호국보탑을 돌아 나와 최근에 조성된 상륜 스님 부도탑으로 향했습니다.
호국보탑에 오르는 108계단 청운교 옆의 승가사사적비 바로 아래에 최근 조성된 상륜 스님의 부도탑을 찾아 예를 올렸습니다. 시간이 많이 흘러 오후 1시 20분 정도가 되었 습니다.
승가사사적비(僧伽寺事蹟碑)
반대방향에서 본 승가사사적비(僧伽寺事蹟碑)
부도탑이 있는 전경
사적비 아래에 조성된 부도탑과 탑비
최근에 조성된 부도탑과 탑비
옆에서 본 모습
무아당 상륜 장로니 수연탑(無我堂 相侖 長老尼 隨緣塔)
이 부도탑은 팔각 지대석 위에 복련을 새기고 팔각부분에 상서로운 영기문을 새기고 다시 그 위에 연봉형 탑신을 세우고 연잎형 옥개석을 덮었습니다. 이런 부도탑은 처음 보는 것이어서 새로운 느낌을 받았습니다.
북한산 승가사 주지 상륜니 수연탑비 北漢山 僧伽寺 住持 相侖尼 隨緣塔碑
승가사를 중창시킨 상륜(相侖) 스님은 불기 2551년(2007) 12월 28일(음. 11월 19일)에 법납 60세, 세납 78세로 용인 법륜사에서 입적하셨습니다.
無我堂 相侖 長老尼 行狀
「상륜스님은 1929년 진주시 수곡면 대천리에서 창녕 성씨 가문에서 출생하였습니다. 부친의 호는 법농(法農) 이며 이름은 성형(成炯)입니다. 대대로 유학가문으로 집안의 전통을 자랑으로 삼으면서 농사에 전념하였습니다.
모친은 어질고 못사는 사람을 돌보는 것을 낙으로 삼으시며 불행한 사람은 자기의 모든 것을 주는 것을 기쁘게 여김으로 생활에 지장이 없는 가정임에도 언제나 식량부족이 되 어 가족의 불만도 따랐으나 이웃에서 살아 있는 보살상이라 불렀으므로 가족도 더 이상 불만도 하지 않았습니다.
상륜스님은 1945년에 연화사에서 성능스님의 법문을 습득한 후 부처님께 귀의를 결심 하고 1946년에 통도사 경봉(鏡峰) 스님을 계사로 모시고 사미니계 보살계를 수지하였습 니다.
1951년에 양산 내원사에서 수옥(守玉) 강백 스님으로부터 2년간 참선 수업을 하고, 1955년에 수덕사 견성암에서 법희(法喜) 선사를 은사로 모셔 득도하고 시봉에 정성을 다 하였으며 1966년에 범어사에서 고암(古庵) 대종사를 계사로 모시고 대교과 졸업과 동시 보살계를 수지하였습니다.
1971년에 북한산 승가사 주지로 진산하였으니 승가사는 신라시대 이후 왕실 원찰로 전성을 극했던 명찰이 퇴락의 이름없는 암자로 전락됨을 개탄하여 이후 30여년간 중창 개창을 거듭하여 오늘의 명찰로 부각시켰습니다. 특히 비봉의 순수비 인연따라 황룡사 구층탑의 민족통일의 대원을 성취코저 구층보탑을 세웠으며 사적비도 육천자에 달하는 대불사도 이뤘습니다. 이어 육백쪽의 사지 편찬도 발간하니 각국 고승으로부터 격려의 방문도 뒤 따랐습니다.
승가사 사지편찬에 있어 두 가지 보람있는 일을 하였다고 봅니다. 승가사에는 타사찰에 없는 승가대사상을 모시고 있습니다. 고증과 연유를 알려고 중국의 유명사찰을 방문하 여 나름의 문헌을 기초하여 승가대사의 생애 행적을 70쪽 분량으로 기록한 바 있습니다.
2003년 중국의 오공사 옛 절터에서 승가대사의 사리 유물 석함의 각자 등이 발굴되어 아마 중국 정부의 보물급이 되리라고 보고 있습니다. 이중에 대사의 행적과 년대등이 승가사 사지의 내용과 거의 일치를 보게 되니 승가사 스님, 신도 등 10여명이 중국 상주 박물관까지 원행 친견을 하였고 우리의 문헌을 대조한 현지 박물관장도 격려의 찬사까 지 받으니 흐뭇한 마음 그지 없었으며 중국 불교연합회에서는 순옥불 100Kg을 상륜스 님에게 기증하는 감격도 따랐습니다.」
이수부분(螭首部分)
「1978년 상륜스님은 육군5군단 사령관 정동호 중장과 협의하여 영내에 호국 금강사를 건립하고 이후 15년간 매년 6.25 전쟁으로 희생된 100만인에게 20명의 스님을 대동하 여 천도위령제를 거행한 바 그후 노태우 대통령께서 청와대로 초청하여 만찬위안회까 지 한바 있었습니다.
1985년에 전국 비구니회 부회장과 비구니 목련회 회장을 수임하고 1992년에는 불교 방 송국 후원회장을 맡아 불교 진흥에 헌신한 바 큽니다.
1993년에 서울 양천구 체육센타 관장으로 국민 체력향상에 기여와 더불어 부처님 전법 에 심려를 다하여 전회원을 불교신앙에 귀의토록 하였습니다.
1987년 장승포 앞바다의 객선 침몰의 대참사에 거센 파도를 무릅쓰고 삼일간 수륙천도 재를 거행하였으며, 이어 진해 해군기지에 범종 기증과 함께 해군장병 3000명에게 수계 를 단행하였습니다.
2005년 용인땅 문수산에 법륜사를 창건하였으니 특이한 건축양식과 경주 석굴암 석불 님의 4배 크기의 본존석불의 위대한 모습 그리고 극락전과 만공스님으로부터 전수받은 관음불상을 모신 관음전, 삼성각, 적묵당, 5층의 요사채 등 사찰로는 유례없는 대찰로 이룩하였습니다.
상륜스님은 부처님께 귀의한지 60년이 되었습니다. 오직 불사에만 몸과 마음을 다 하 였기에 빛나는 불전 모두가 무에서 유를 형성한 셈입니다. 원담(圓潭) 대종사께서 무아 (無我)의 당호를 내린 것도 숨은뜻이 있으리라 봅니다.」
이상은 다음은 조계종 총무원에서 제공한 스님의 행장인데, 비문을 읽어 보니 다소 차 이를 보여 비문 내용을 일부를 옮겨 봅니다.
「.....중략..... 스님은 경남 진주에서 아버지 성형(成泂)과 어머니 정씨(鄭氏)의 삼녀 (三女)로 태어났다. 1962년 세연(世緣)을 접고 입산하여 수덕사(修德寺) 견성암(見性 庵)에서 법희선사(法喜禪師)를 은사로 불문(佛門)에 들었다. 1966년 부산 범어사(梵魚 寺)에서 고암화상(古庵和尙)을 계사(戒師)로 구족계(具足戒)를 수지(受持)한 스님은 수 옥(守玉) 스님 문하에서 대교과(大敎科)를 마치고 1971년 북한산 승가사 주지로 진산 (晋山)하였다. ..... 중략 ..... 이처럼 인연따라 세상사에 임하되 보리도량(菩提道場)을 조금도 벗어나지 않는 삶으로 일관하던 스님은 2007년 (음)11월 19일 할 일을 마친 듯 편안히 원적(圓寂)에 드니 세수 (世壽)는 78, 법납(法臘)은 45세였다. ...중략... 」
행장에서는 「1946년에 통도사 경봉(鏡峰) 스님을 계사로 모시고 사미니계 보살계를 수지. 1951년에 양산 내원사에서 수옥(守玉) 강백 스님으로부터 2년간 참선 수업. 1955년에 수덕사 견성암에서 법희(法喜) 선사를 은사로 득도. 1966년에 범어사에서 고암(古庵) 대종사를 계사로 대교과 졸업과 보살계를 수지.」
1946으로 따지면 법납 61세이고, 1962년으로 계산하면 45세... 무엇이 문제일까요? ^^ 이력도 좀 다르고... 스님의 선고장 휘(諱)도 성형(成炯)과 성형(成泂)으로 다르고...
6월 7일 1시 26분, 승가사 일주문을 나서서 출출해진 위장을 위로하고자 승가사 옆으로 난 비봉 가는 길로 향했습니다. 다음은 사모바위와 비봉입니다.
감사합니다. 백우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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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잘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_()_
승가사 다녀온지도 일주일이 지났네요. 시간은 잘도 흘러갑니다. _()_
사모바위와 비봉이야기가 기다려집니다.
참 빨리도 지나갑니다. 오늘 사모바위편을 올렸습니다. _()_
승가사 가람을 변모시킨 상륜스님의 큰 원력이 느껴집니다. _()_
절이 크게 부한 곳에는 반드시 원력보살이 있게 마련인데 상륜스님이 그런 분이었음을 알 수 있네요.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