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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효의 사상은 논문 1 < 대각국사 의천의 원효사상의 선양宣揚과 그 영향>을 워드 필사 하였습니다.
논문 1 < 대각국사 의천의 원효사상의 선양宣揚과 그 영향>
이병욱(고려대 강사)
1. 원효 사상의 개관
원효元曉(617~ 686) 사상은 거시적 관점에서 세 가지로 나누어서 접근할 수 있다. 첫째 화쟁사상, 둘째 무애행, 셋째 정토행이다.
첫째, 원효의 화쟁사상의 기본은 《대승기신론》의 ‘일심이문一心二門’에 있다. 먼저 일심이문의 의미는 인간이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 마음이 일심一心’이라는 것이며, 이 ‘한 마음’에는 두 개의 문이 동시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 ‘일심’은 두 가지 측면은 이러하다.
하나는 진리의 입장인데, ‘심진여문心眞如門’이다. 다른 하나는 현상계의 입장인데, ‘심생멸문心生滅門’이다. 인간에게는 이 두 측면이 서로 섞여 있으므로, 이 두 입장으로 세계를 설명할 수 있다.
또한 원효는 ‘일심이문’으로 모든 불교사상을 포용할 수 있음을 또 다른 측면에서 말한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대승기신론》의 뜻을 펼치면, 무수히 많은 경전과 논서의 뜻과 통한다. 《대승기신론》의 뜻을 간추리면, 바로 ‘일심이문’이 핵심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대승기신론》의 뜻을 무한정 펼쳐서 전개하여도 아주 많은 경전과 논서의 뜻이 ‘일심이문’의 다른 표현에 지나지 않으므로 번거롭지 않으며, 여러 경전과 논서에서 《대승기신론》에만 주목해도 ‘일심이문’에는 이미 여려 깊은 뜻이 함축되어 있으므로 좁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둘째, ‘무애행無礙行’은 원효의 윤리사상이다. 무애행은 행위의 외형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내면의 세계가 의미 있다는 것이다. 원효는 자신이 겉으로 보기에는 계율에 어긋나는 듯이 행위를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계율의 정신에 부합하는 행위를 한다고 주장한다.
원효는 계율을 이해하는 데에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고 했다. 하나는 계율을 얕게 이해하는 것으로 행위의 동기를 보지 않고 결과만을 보고 판단한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계율을 깊게 이해하는 것인데 행위의 겉모습에 구애되지 않고 동기를 따진다는 것이다.
셋째, ‘정토사상淨土思想’이다. 정토 경전에서는 누구나 나무아미타불을 10번 염불하면 극락정토에 태어난다고 하였다. 원효는 이러한 내용을 두 가지로 해석한다. 하나는 표면적인 의미[현요의顯了義]다. 이는 위기의 순간을 맞이했을 때 살려는 간절한 마음이 생기듯이 그처럼 간절한 마음으로 10번 염불하면 정토에 태어난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깊은 의미[은밀의隱密義]다. 10번의 의미를 횟수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고 그것에 철학적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모든 지혜로운 마음을 내고, 아주 청정한 마음을 낸다는 것 등이다.
2. 의천의 원효 사상에 대한 선양宣揚
의천은 고려시대에 원효의 사상을 널리 선양한 인물이다. 의천은 원효를 보살의 지위에 있는 인물로 파악하였다. 또한 해동에서 천태사상을 처음 수용한 인물로 보고 있기도 하였다.
의천은 국청사에서 천태종을 열었을 때, 원효가 천태사상을 받아들인 인물이라는 것을 밝힌다. 원효가 먼저 받아들였고 그 뒤에 고려 초에 ‘제관諦觀’이 발전시켰다고 하였다. 그 자세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생각해 보니 해동에 불법이 전래된지 700년이 되어 비록 여러 종파에서 다투듯이 경연하고, 많은 교敎에서 서로 자기의 교의敎義를 진술하지만, 천태종의 한 가지는 이 시대에 그 밝음이 사라졌구나. 과거에 원효 보살이 앞에서 그 천태종의 교의를 칭찬하였고, 제관 법사가 뒤에서 그 가르침을 전하고 휘날렸지만, 어찌하겠는가? 근기根機와 인연이 익지 않아 천태종의 가르침을 빛내고 휘날릴 길 없음에랴! 천태종의 교법敎法이, 이 땅에 유통되기를 기다려야 엎드려서 겨우 만날 수 있을 듯이 보였도다. <대각국사문집>3권
의천이 원효에 대해 품고 있는 존경의 마음은 각별하다. 다음의 시詩에서 의천은 원효를 ‘마명’(馬鳴 : 《대승기신론》의 저자로 알려진 인물)과 ‘용수’(龍樹 : 《중론》의 저자)와 견주고 있다. 원효를 마명과 용수와 같은 급의 인물로 보고 있는 것이다.
著論宗經闡大猷저론종경천대유 / 논서를 짓고 경전을 근본하여 부처님의 가르침을 휘날렸으니
馬龍功業是其儔마용공업시기주 / 마명과 용수의 공功과 업적에 견줄만하다.
如今惰學都無識여금나학도무식 / 지금에 배우기를 게을리 하는 무리는 모두 알지 못하니
還似東家有孔丘환사동가유공구 / 흡사 동쪽 집에 공자가 산다는 꼴이구나. <대각국사문집>20권
원효가 여러 가지 논쟁을 화해시키고, 중생과 함께하는 삶을 살면서 자비로운 교화를 펼쳤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리 해동보살(원효보살)만이 성性과 상相을 융섭해서 밝히고, 과거와 지금을 은밀히 통괄하고, 백가百家의 다른 논쟁의 단서를 화해시켜 한 시대의 지극히 공정한 논의를 하였다. 하물며 신통은 헤아릴 수 없고, 묘한 용用은 생각하기 어려우며, 티끌(중생)과 함께 하지만 그 진眞을 더럽히지 않고, 광명과 화합하지만, 그 근본體을 바꾸지 않는다. 그리하여 이름이 인도와 중국에 떨치고, 자비로운 교화는 저승과 이승을 감싸 안으니, 칭찬하여 올리려고 해도 생각하여 의론하기가 진실로 어렵다. <대각국사문집>16권
또한 의천은 중국의 원소元紹율사에게 보내는 글에서 원효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선양하였다. 하지만 내용이 중간에 빠져 있어서 전체의 내용을 파악하기는 어렵다. *선양하다/널리 떨치다
그런데 원효는 수나라 말에 태어나 당나라 초기에 수행을 하고 교화를 하였는데, 백 곳에서 모습을 나타내고, 여섯 곳에서 죽음을 알렸습니다. 무슨 경전이든지 모두 소(疏 : 주석서)가 있고, 어떠한 논서에도 다 통했습니다. <대각국사문집>11권
의천은 원효 사상 가운데 ‘화쟁사상’ · ‘중생과 함께하는 삶’ · ‘자비로운 교화’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중생과 함께하는 삶은 ‘무애행’(중생과 함께하지만 내면에서는 계행을 철저히 지킴)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이고, 자비로운 교화는 ‘정토사상’(중생을 교화하는 데 주안점을 둔 사상)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이에 대해 구체적인 서술은 드러나지 않고 있다. 좀 더 구체적인 서술은 의천의 제자(계응)와 그 뒤의 천태종 사상가(요세)에서 나타난다.
3. 의천의 원효 사상 선양의 영향
무애지국사 '계응'의 원효에 대한 관점
의천은 원효의 사상을 선양하였는데, 이것은 의천의 제자 계응과 그 후의 천태종의 승려 요세의 사상에도 영향을 미쳤다. 또한 의천이 원효의 사상을 선양한 것이 13세기 원효의 화쟁사상을 주장하는 해동종(분화종)이 활동하는데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추론되고 있다.
계응은 의처의 권유에 의해 출가했고 그의 제자가 되었다. 그 후 40여 년이 지나서 계응은 왕에게도 공경을 받게 되었다. 계응에 관한 기록을 살펴보면 이러하다.
태백산인 계응戒膺은 대각국사의 수제자이다. 계응이 어렸을 적에 절에 살면서 독서를 하였는데, 대각국사가 담장 너머로 그 책 읽는 소리를 듣고는 “이 사람은 진정한 법기法器이다.” 라고 하면서, 계응이 출가하여 자신의 문하에 있기를 권했다. 계응은 아침저녁으로 도道를 닦는데 힘쓰더니 도의 깊은 이치에 넉넉하게 들어갔다. 그리하여 계응이 대각국사를 계승해서 위대한 법을 널리 알린 지 40여 년에 임금에게도 공경을 받게 되었다. 항상 서울을 떠나지 않았는데, 자주 태백산에 돌아갈 것을 청했다. 그리하여 손수 각화사華寺를 창건하여 법(가르침)의 보시를 크게 열었더니, 사방의 학자가 폭주하여 배우는 사람이 날마다 천백 명에서 줄어들지 않았다. 그 강의를 법해용문法海龍門이라고 불렀다. 이인로,<파한집>중권. 유재영 역(일지사,2001),126쪽
계응은 태백산에 은거해서 왕이 불러도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이러한 행적은 원효사상 가운데 ‘무애행’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계응이 ‘무애지無礙智국사’라로 불리는 것과도 연관되어 있다고 보인다. 이인로의 『파한집』에 따르면, 계응이 ‘무애’를 제목으로 시를 지었다고 한다. 계응의 생애가 전반적으로 ‘무애’와 관련지어진 것으로 보아서 계응은 원효의 ‘무애행’을 행한 것으로 추론된다.
이인로의 『파한집』에는 ‘고려시대에 원효의 무애행에 영향을 받아서 불교의 경전과 논서의 게송으로 가사를 지은 노래, 곧 ’무애가無礙歌‘와 그것에 동반한 춤에 세상에 널리 퍼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과거에 원효 大聖이 고기 파는 곳과 술파는 곳에 드나드는 가운데 일찍이 목이 굽어진 조롱박을 가지고 놀면서 시장에서 노래하고 춤추었는데, 그 조롱박을 ‘무애無礙’라고 불렀다. 그 뒤에 호사가들이 조롱박 위에다 금방울을 매달고, 조롱박 아래에다 채색한 비단을 두어서 조롱박을 장식하였다. 그래서 조롱박을 부딪치면서 나아가고 물러났는데, 모두 음절에 맞았다. 이에 그 곡조에다 경론의 게송으로 가사를 붙여서 ‘무애가無礙歌’ 라고 불렀다. 밭에서 일하는 노인도 이것을 본받아서 조롱박을 가지고 놀았다. 무애지국사가 일찍이 ‘무애無礙’를 제목해서 시를 지었다. “이 물건은 오랫동안 무용無用으로 용用을 삼았고, 과거의 사람도 이름하지 않음으로 이름 삼았네.” 이인로,<파한집>하권. 유재영 역(일지사,2001),240쪽
의천이 원효 사상을 선양할 때 화쟁사상은 분명히 말하였지만, 무애행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말하지 못하고, 다만 “중생과 함께 하지만 그 진眞을 더럽히지 않는다.” 라고만 하였다. 이에 그의 제자 계응이 ‘무애행’을 분명하게 드러낸 것이라고 사료된다.
원묘국사 '요세'의 원효에 대한 관점
원묘국사圓妙國師 요세(了世, 1163~1245)는 천태종의 승려로서 ‘백련결사白蓮結社’를 세운 인물이다. 요세는 매일 선정을 닦고 경전과 논서를 가리치고, 《법화경》을 독송하고, 준제진언을 천 번 외우며, 아미타불을 만 법 불렀다고 한다.
그리고 공부하는 사람을 위해서 ‘천태삼대부’ 즉 『법화문구』 • 『법화연의』 • 『마하지관』의 내용을 요약한 ‘절요서節要書’를 작성할 만큼 불교의 학식에도 뛰어 났다.
요세가 백련결사를 결성하면서 제시한 수행법은 그 자신이 만든 수행법이 아니었고, 모든 사람에게 적합한 수행법이었다. 즉 요세는 이때 ‘법화삼매法華三昧’와 정토에 태어나기 위한 수행법을 제시한 것이다.
이처럼 요세가 백련결사에서 제시한 수행법은 원효 사상의 영향이라고 볼 수 있다. 요세의 비문에서는 원효의 『징성가澄性歌』에 나오는 정토사상에 관한 서술의 일부분이 소개되고 있다.
요세의 비문에 등장하는 『징성가』의 내용을 풀이하면 이러하다.
“ 법계, 곧 진리 세계의 모습은 분별의 지식으로 알 수 없다. 법계, 곤 진리 세계의 모습은 고요해서 어떠한 것도 조작하지 않고 평온한 것이지만, 이미 그 속에서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지는 무한한 힘이 작동하고 있다. 정토에 태어나는 것도 이와 같아서, 부처님을 따르는 마음, 이 한마음만 순일하면 자연히 태어난다는 것이다.” 「만덕산 백련사 원묘국사 비명병서」,<조선금석총람>상, 592쪽
요세가 소개한 ‘징성가 -정토사상’은 요세와 함께 당시의 사상게를 주도했던 보조국사 ‘지눌’(知訥, 1158~1210)의 저술인 『벌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에서도 나타난다. 이 저서에는 원효의 『미타증성게彌陀證性愒』를 인용하고 있다. 요세가 제시하는 『징성가』와 지눌의 『미타증성게』는 제목은 다르지만 같은 저술을 가리키는 것으로 판단된다.
의천은‘ 원효의 정토사상에 대해 간략히 ‘자비로운 교화’라고 말했지만, 요세는 원효의 『징성가』를 인용하여 원효 사상 가운데 정토사상을 더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다.
해동종과 분황종의 활동에 영향
13세기에 들어서서 고려 불교계에 변화의 바람이 불었다. 그 가운데 하나는 새로운 종파가 등장하였다는 것이다. 여기서는 새로 생긴 종파 가운데 ‘해동종海東宗’과 ‘분황종芬黃宗’에 대해 살펴본다.
해동종과 분황종은 원효 사상에 근거한 종파이다. 이 두 종파가 서로 다른 종파라는 주장도 있지만, 이 글에서는 선행연구에 근거해서 해동종과 분황종은 같은 종파의 다른 이름이라고 가정하고 논의를 진행한다.
해동종이 언제 성립되었는지는 알 수 있는 자료는 현재 없다. 다만 13세기 전반에 해동중의 승려가 수좌首座와 승통僧統으로 임명되는 글이 남아 있다. 그 가운데 『해동종승통관고』에서 원효의 화쟁사상을 분명히 제시하고 있다.
원효가 신라 시대에 등장해서 ‘백가百家’의 다른 논쟁을 조화시켰고, 여러 주장을 합해서 『대승기신론』의 ‘일심이문一心二門’으로 돌아가도록 하였다. 『동문선』27권, 「해동종승통관고」
이와 같은 지점을 의천이 원효 사상을 선양한 것과 관련해서 생각해 보자면 이러하다. 의천이 원효 사상을 선양한 그 직접적 사실이 해동종(분황종) 성립에 영향을 주었거나 또는 적어도 최소한 해동종이 활발하게 황동하는 데에 있어서 사상적 배경이 되었던 것은 분명하다고 추론해볼 수 있다. 의천이 원효 사상을 선양했던 행적은 고려 시대의 불교계에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원효의 사상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해서 새롭게 이 땅에 적용하는 것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