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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히 프롬 Erich Fromm(1900-1980)】 "사랑의 기술 넘어 존재의 기술"
에리히 프롬(Erich Fromm)은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주요 인물 중 한 명입니다. 그는 프랑크푸르트 사회 연구소의 일원이었으며, 마르크스주의와 정신분석학을 결합하여 사회와 인간의 본질에 대한 비판적인 분석을 시도했다.
사회심리학자이자 정신분석학자, 인문주의 철학자인 프롬은 프랑크푸르트 사회 연구소에서 활동하면서 마르크스주의와 정신분석학을 접목하여 사회 구조, 개인의 자유, 권위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제시했다.
프랑크푸르트학파(Frankfurter Schule)는 1930년대 이후 등장한 프랑크푸르트암마인대학교의 사회연구소를 중심으로 일어난 신 마르크스주의 사회이론가 집단을 가리키는 말이다.
초기 프랑크푸르트학파 구성원들은 마르크스의 일부 추종자들이 마르크스 사상을 이해하지도 못하고 일부분만을 반복해 말한다고 비판하던 정통 마르크스주의학자들이었다. 그러다가 이들은 전통적 마르크스 이론으로는 20세기에 자본주의가 예상 밖으로 급격하게 발전한 것을 설명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자본주의와 소련연방의 사회주의에 모두 비판적이던 이들 학자들은 또 다른 사회 발전 과정의 가능성을 지적하는 주장들을 하기 시작했다.
프랑크푸르트학파의 학자들은 마르크스의 접근법과 유사한 방식으로 접근했다. 그 과정에서 사회 변화를 일으킬 요건들이 무엇인지 고민했다. 칸트의 비판 철학과 이를 계승한 독일 관념론 특히 헤겔 철학을 이용하여 변증법적 모순이 현실의 본질적 특성이라고 말하며 실증주의과 유물론 곧 결정론의 한계를 극복하려고 했다.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사상은 1968년 이른바 ‘68 혁명’이라고 일컫는 유럽과 일본의 대학가를 강타한 학생 운동의 지적인 배경이었다. 이 학파의 중심인물은 허버트 마르쿠제, 막스 호르크하이머, 테오도어 아도르노, 에리히 프롬, 카를 비트포겔, 레오 뢰벤탈, 프리드리히 폴로크 등이었다.
독일의 내전 기간 중의 정치적 소용돌이는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발전 과정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이 사상가들은 1918년과 1919년 사이에 (마르크스가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날 것이라 믿었던) 독일 등의 서유럽에서 나타난 노동자 계급의 혁명이 실패로 돌아간 것과 경제적, 기술적으로 발전된 독일에서 일어난 나치즘에서 특히 큰 영향을 받았다. 많은 마르크스주의 사상가들은 마르크스의 사상 중 어떤 부분이 이런 변화를 설명할 수 있는지를 찾기 위해 노력했다.
나치의 영향이 점차 커져감에 따라 사회 연구소의 설립자들은 연구소를 나라 밖으로 옮길 것을 준비하기로 했다. 1933년 히틀러의 집권 이후, 이 연구소는 제네바로 옮겼고, 1935년에는 콜럼비아 대학교와 연계해 뉴욕으로 옮겨갔다. 이 시기부터 중요한 연구 결과가 나오기 시작해 미국과 영국 학계에서 점점 호의적인 반응을 얻어갔다. 호르크하이머, 아도르노, 폴로크는 1950년대 초 서독에 정착했으며, 마르쿠제와 레벤탈, 키르히하이머를 비롯한 나머지는 미국에 남았다. 이 연구소는 1953년이 되어서야 형식적으로 프랑크푸르트에 다시 설립되었다.
프랑크푸르트 학파를 포함한 유럽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대부분 거의 부유한 부르주아나 관료 등 상층계 출신이 다수이며, 이탈리아 공산당 지도자 안토니오 그람시 정도를 제외하면 대부분은 직접적 혁명 경험이 없고, 이론적 차원이상의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혁명 운동이란 것이 대학강단, 학자들의 논의 속에 나타날 뿐 노동운동이나 정당운동과 연결되지 않았다. 이들은 대부분 정치학자나 경제학자가 아닌 예술, 철학, 문학 비평가였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프랑크푸르트 학파였다. 68년 학생운동의 지적 배경이 되었으면서도 그들 자신은 참여하지 않았다.
고전적 마르크스주의는 자본주의에 대한 정치경제학적 분석을 했음에 비해 유럽 마르크스주의는 근본적으로 인식론적 방법, 미학, 철학 등 분야에서 마르크스주의가 전개되었다. 정치경제학으로부터 철학 미학 등의 분야로까지 마르크스주의를 확대시켰다는 의미에서는 발전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나, 전통적 마르크스주의의 특성이 많이 쇠퇴하고 마르크스주의 입장에서는 패배주의적 경향이 깔려있음을 또한 부인할 수 없다. 형식과 주제에서도 차이가 난다. 전통적 의미에서 계급 혁명, 사회주의 혁명은 더 이상 이들에겐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프랑크푸르트학파 이론의 핵심은 헤겔과 마르크스의 유산인 변증법을 부정하는 '부정(否定)의 변증법'이라는 개념체계였고, 시대적 문제의식은 혁명을 해야하는가 였다. 초기 마르크스의 낙관주의적 견해에서는 자본주의 발달 속에서 노동자의 해방 전망이 높아져 간다고 했으나 실제론 그 가능성이 쇠퇴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노동계급의 혁명적 역할에 더 이상 기대를 걸지 않게 되었다. 왜 합리적, 이성적 서구문명이 비이성적 파시즘으로 전락했는가? 왜 비인간화가 추진될 수 있었는가?
경애하는 에리히 셀리그만 프롬 (Erich Seligmann Fromm, 1900.3.23-1980.3.18.)사망 39주년. 생전의 "사랑의 기술(The Art of Loving)" (1956)에서 사후의 “존재의 기술”(The Art of Being)"(1993)까지 이어진 프롬의 가르침!
자신(이기주의)과 돈(배금주의)이 판치는 천민자본주의, '불타는 태양(버닝썬)'인양 광란하다
타락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독립운동 100년 기념의 우리나라. 우리 삶을 쉴새 없이 무차별적으로 옥죄이는 "인간 소외"라는 소유(To have)의 침략들. 이에 맞서 힘겹게 근근히 버텨가고 있는 "사람다움"이라는 존재(To be)의 저항들!
마치 우리나라의 현대사를 그리는듯한 경종을 울리는 말씀이다 !
'무한한 발전이라는 저 위대한 약속'ㅡ 자연을 지배하고 물질제 풍요를 가져 오며 최대 다수의 최대의 행복, 박해를 받지않는 개인적 자유의 약속ㅡ은 산업시대의 개막 이래 여러 세대의 희망과 믿음을 지탱해 왔다. 위대한 약속의 영광, 산업화시대의 놀라운 물질적 · 지적 성취를 마음에 그려봄으로써 비로소 그 실현의 실패에 대한 인식이 오늘날 일으키고 있는 충격을 이해할 수 있다. 왜냐하면 산업화시대는 분명히 그 '위대한 약속'을 이행하는 데 실패했고, 점점 많은 사람들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인식하고 있다.
1. 모든 욕망의 무한정한 충족은 복리를 가져다주지 않았으며, 그것은 또한 행복에 이르는 길도 아니고 최대의 쾌락에 이르는 길도 아니다.
2. 자기의 독립된 주인이 된다는 꿈은 우리의 사상 · 감정 · 취미가 정부와 산업, 그리고 이들이 지배하는 매스커뮤니케이션에 의해 조종되며, 우리는 모두 관료적 기계장치 속의 톱니바퀴가 되었다는 사실에 우리의 눈이 뜨이기 시작하면서 끝나버렸다.
3. 경제적 발전은 여전히 부국에 국한되어, 풍요한 국민과 가난한 국민들 사이의 간격은 계속 넓어져 왔다.
4. 기술적 발전은 생태학적 위기와 핵전쟁의 위험을 만들어냈으며, 이중 어느 하나, 혹은 이 둘이 합세하여 모든 문명, 그리고 어쩌면 모든 생명에 종말을 가져올지도 모른다.(<소유냐 삶이냐>, 김남석 역, 15-16쪽, 1986년)
이기주의, 자기중심주의, 탐욕이라는 선천적 본성이 정복욕과 적대감을 추동하며 시나브로 변모하는 ‘자연의 변종’ 인간의 몰락!
“이기주의자가 되는 것은 내 행동뿐만 아니라 내 성격에도 관계 된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나는 모든 일이 내가 원하는 대로 되기를 바란다. 공유가 아니라 소유가 내게 쾌락을 준다. 내 목표가 소유라면 나는 더욱 많이 소유할수록 더욱 그 존재가 확실해지므로 나는 탐욕스러워질 수밖에 없다. 나는 다른 모든 사람들 즉 내가 속여야 할 고객과 없애야 할 경쟁자와 착취해야 할 노동자에 대해 적의를 품어야 한다. 소망에는 끝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결코 만족할 수 없으며 나보다 많이 소유한 사람을 시기해야 하며 더 적게 가진 사람을 두려워해야 한다. 그러나 나는 이 모든 감정을 억누르고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의장하듯이 내 자신은 미소를 머금고 합리적이며 성실하고 친절한 인간임을 과시하지 않으면 안 된다. 소유에 대한 정열은 끝없는 계급투쟁을 기어이 유발할 것이다.”(21쪽)
소유의 양식(mode of having)과 존재의 양식(mode of being)은 어떠해야 하는가 !
괴테가 파우스트를 통해 보여준 존재의 양식인가 !
나는 알고 있노라 아무 것도 내 것이라고는 없음을
다만 내 영혼으로부터 막힘없이 흐르는
사상만이 있음을.
그리고 사랑에 찬 운명이
마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 나를 기쁘게 하는
모든 행복한 순간만이 있음을. (35쪽)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수도원장이 가르친 '가난'하며 평화를 위해 '달리는' 존재의 양식인가 !
"아무 것도 '원하지' 않고 아무 것도 '알지'못하며 아무 것도 '갖고 있지' 않는 자는 가난한 인간이다."(84쪽)
"평화 속으로 달려라! 달리는 상태, 평화를 지향하여 끊임없이 달리는 상태에 있는 인간은 성스러운 인간이다. 그는 끊임없이 달리고 움직이며 달리면서 평화를 추구한다."(90쪽)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고 선포한 예수님을 따르는 그리스도인들과 교회의 존재 양식은 어떠한가! 소유의 양식에 따라 성장주의•물질주의에 항복하여 "예수를 '기념'하는 종교지, 예수를 '사는'종교가 아니다"(박경미)고 고백해야 하는건가 !
"물신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그리워하는 동무들의 나라, ‘예수의 교회’는 아마도 식민지 시대 만해 한용운이 쏟아지는 눈물 속에서 망설일 때 보았던 ‘당신’의 얼굴과 아주 닮았을 것이다.
당신을 보았습니다
당신이 가신 뒤로 나는 당신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까닭은 당신을 위하느니보다 나를 위함이 많습니다.
나는 갈고 심을 땅이 없으므로 추수(秋收)가 없습니다.
저녁거리가 없어서 감자를 꾸러 이웃집에 갔더니 주인은 “거지는 인격이 없다. 인격이 없는 사람은 생명이 없다. 너를 도와주는 것은 죄악이다”고 말하였습니다.
나는 집도 없고 다른 까닭을 겸하여 민적(民籍)이 없습니다.
“민적 없는 자는 인권이 없다. 인권이 없는 너에게 무슨 정조냐?” 하고 능욕하려는 장군이 있었습니다.
그를 항거한 뒤에 남에게 대한 격분이 스스로의 슬픔으로 화(化)하는 찰나에 당신을 보았습니다.
아아, 온갖 윤리, 도덕, 법률은 칼과 황금을 제사지내는 연기(烟氣)인 줄을 알았습니다.
영원의 사랑을 받을까 인간역사의 첫 페이지에 잉크칠을 할까 술을 마실까 망설일 때에 당신을 보았습니다." (박경미,'예수의 교회, 마몬의 교회' 녹색평론제96호,2007년9월)
'소유의 양식'인가 아니면 '존재의 양식'을 따르는 사람인가? 팔려고 내놓은 '물건'이 아닌 '존재'인가? 이웃의 고통에 민감하고 고귀함의 감각을 잃지 않는 '단순한 사람'인가?
이순간 삶의 절벽에서 시나브로 떠나가는 존재의 꼬라지를 성찰합니다.
첫댓글 프랑크푸르트학파가 이데올로기 비판을 통해서 추구한 것은 객관과 주관의 매개물로서 이데올로기 비판을 통해 올바른 인식에 도달할 수 있다고 보았으며, 바로 그것을 추구한 것이었다. 헤겔 전통과 마르크스와 연계성을 확장시켜갔다. 객관적 현실과 사회적 실천을 매개하는 것이 의식(넓게는 이데올로기)이며 객관적 현실과 사회적 실천을 떼어놓고 볼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