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보내신 것같이]
21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22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23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요 20:21~23)
독일의 나치가 2차세계대전을 일으켰을 때 그들에게는 정당한 명분이 있었습니다.
수백만의 유대인을 학살할 때 그들은 정당한 사유를 갖고 있었고, 독일 신학자와 교회는
그 명분을 성경적으로 뒷받침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반인류적 범죄 집단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들이 바른 원칙을 갖고 있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옳고 바르다는 신념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죽하면 우리를 향해 이런 말씀을 하셨겠습니까?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자신의 눈 속에 들보가 들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그릇됨을 알지 못하는 것이
인간의 실상입니다.
그러다 보니 심지어 범죄자들마저 자기들 나름대로 정당한 명분과 이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처럼 모든 사람이 자신은 옳고 바르다 여기고 있음에도 왜 이 사회는 정의롭지 못할까요?
그것은 바른 원칙을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바른 일을 바른 명분으로 행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이전에 바른 원칙을 소유하고 자신에게 적용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여기서 바른 원칙이란 두말할 것도 없이 진리입니다.
진리로 이 땅에 오셔서 진리의 원칙을 삶으로 보여주셨던 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 바른 원칙이 없을 때 내가 무엇을 행하든지 그것은 만행일 수 있고, 내가 아무리 많은
지식을 지니고 있어도 실은 나치주의와 다를 바 없을 수 있음을 깨닫는 것이야 말로
그리스도인들이 반드시 지녀야할 마음 자세인 것입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신 날 저녁, 그 때까지 부활을 믿지 못한 채 두려움에 떨면서 문을 걸어
잠그고 다락방에 숨어있는 제자들을 친히 찾아오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을
21절은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이는 주님의 제자들이 결정적인 순간에 주님을 배신한 후 주님과 가진 첫 대면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들을 꾸짖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들에게 당신의 평강을 부어 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를 보내노라”
이 말씀은 제자들이 여전히 허물이 많고, 부족하지만, 여전히 문제 덩어리지만 그러나
계속 주님의 제자로서 변함없이 신뢰해 주시겠다는 주님의 언약입니다.
이는 실로 주님의 위대한 사랑이고 은혜인 것입니다.
이 큰 사랑과 은혜를 입은 제자들이 그 이후 복음을 들고 세상으로 주저없이 나간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결과였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제자들이 아무 원칙도 없이 자기 신념만으로 간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을 그냥 마구 보낸 것이 아닙니다.
만약 그랬다면 제자들은 세상의 빛이 되긴 고사하고 오히려 세상을 해치는 무서운
이기 집단이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을 보내실 때 거기에는 분명한 원칙이 있었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아버지께서 주님을 이 땅에 보내신 것같이 제자들을 보내시는 것이 주님의 원칙이었습니다.
이는 주님의 보내심을 받은 제자들이 지켜야할 원칙이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서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보여주셨던 진리의 삶이었습니다.
즉, 제자들을 보내시는 목적은 제자들을 통해 당신의 삶을 보여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실제로 이 이후 제자들은 철저하게 이 원칙을 지켰습니다.
그들은 자신을 온전히 주님 안에 감추었습니다.
그들을 통하여는 오직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만 보였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오직 전과같이 이제도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기를 원한다” 고 고백할 정도로 원칙에 투철하였습니다.
그 결과 그들을 통하여 생명과 구원의 역사가 그들이 가는 곳마다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나도 너희를 보낸다”는 주님의 말씀은 2,000년 전 제자들에게만 국한된 말씀이 아닙니다.
2,000년이라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주님을 믿는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주님의
명령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구원과 생명, 그리고 진리를 이 세상에 보여 주기위해 삶의 현장에 보내신
주님의 제자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삶이 불신자들에게 거부감을 주고 있다면, 우리의 신앙 행위가
믿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서 위화감을 조성하고 있다면 그 이유는 한 가지 우리의 삶이
반드시 지켜야 할 바른 원칙에서 벗어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주님의 제자로서 삶의 현장에서 보여야 할 원칙을 적용하는 삶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으로 드러나야 할까요?
오직 사랑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갈 5:22~24)
이 성령의 열매야말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서 실천하신 삶의 모습이요,
우리에게 주신 절대적 원칙인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은 우리의 정욕을 십자가에 못박는 것이고,
이는 바로 그 분의 사랑으로, 그분의 희락으로, 화평으로, 오래 참음으로, 그분의 자비로,
양선으로, 충성으로, 온유로, 그분의 절제로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때 진리와 복음은 절로 증거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삶을 통해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보일 수밖에 없는 까닭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지켜야 할 원칙을 어떻게 쉽게 정의할 수 있을까요?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할 것에 언제나 당당하고 부끄러워할 것에 늘 민감한 자가
참된 그리스도인이고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인이 실천해야 할 원칙입니다.
작은 차를 타고 다니는 것, 작은 평수의 아파트에 사는 것이나 적은 수입, 또는
병든 것을 부끄럽게 여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것을 부끄러워해서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내가 정직하고 진실하게 산 결과가 가난이고 육체의 연약함이라면 그것은 수치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크나큰 자랑거리입니다.
우리가 정작 부끄러워해야 할 것은 뇌물이고, 탈세, 불의, 분노, 무절제한 탐욕, 무분별한
이기심, 이유 없는 분열, 그리고 다툼이고 진리에서 벗어난 거짓된 삶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나의 자녀인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가시오
그러면 그리스도께서 오시는 날 우리가 자신을 갖게 되고
다시 오시는 그 분에게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요일 2:28)
주님 앞에서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부끄러운 것과 부끄럽지
않은 것을 명확하게 구분하셨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제주 조천 초등학교 6학년 안현숙 양의 “우리 아빠”라는 제목의 동시를 소개합니다.
다섯 여섯 살 적엔가 처음 알았다
아빠가 말을 못 하신다는 것을
어딘가 갈 때면
초라한 추리닝을 입고
한마디 말도 못하시는 아빠가
정말로 싫었다.
그런데
내가 손을 크게 다쳤을 때
정신없이 추리닝을 입고
나를 등에 업고
병원으로 달려가신 아빠
말은 못하고
아빠 등 뒤에서
엉엉 울어버렸다
아빠가 말을 못한다는 것은 전혀 부끄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어떤 모습이든 나를 책임져 줄 아빠가 있다는 것은 자랑거리였습니다.
오히려 그런 아빠를 사랑하지 못하는 것이 부끄러움이었습니다.
그 잘못을 초등학교 6학년 때에 벌써 깨달았으니 참으로 지혜로운 소녀인 것입니다.
만약 이 소녀가 자신의 잘못을 수십년 후 아버지가 돌아가신 다음 깨닫고 땅을 치며
통곡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우리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부끄러운 것과 부끄럽지 않은 것을 구별하며
아버지께서 주님을 보내신 것처럼
우리도 주님의 보내심을 받은 참 그리스도인이 되길 기도 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