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함석헌은 「역사에 나타난 하나님의 섭리」라는 글로 또 한 번 큰 걸음을 내디뎠다. 이 글은 1928년 여름 <성서조선> 집회 때 ‘역사에 나타난 하나님의 진리’라는 제목으로 강연하였던 것을 보완하여 쓴 글로, <성서조선> 7-8호, 11-12호에 네 번에 걸쳐 수록되었다. <성서조선> 7호가 1929년 1월에 간행되었고 12호가 같은 해 12월에 간행되었으니, 1928년 여름부터 1929년 사이 함석헌은 섭리사관을 세우는 데 골몰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글은 짧은 서문과 다섯 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 우주와 인생, 2. 우주의 창조, 3. 메시아의 출현까지, 4. 기독교와 서양문명, 5. 미래의 전망.
1장에서 목적론적 역사관을 드러내어 말한 후, 2장에서는 창세기의 창조 사건을, 3장에서는 구약 성서의 주요 사건을, 4장에서는 서양 문명사와 교회사를 대범하게 살피고 있다. 5장에서는 신약성서의 종말론에 근거하여 인류의 구원과 만물의 완성을 전망하였다. 역사의 사건을 세세하게 살피는 데 목적이 있지 않고 큰 사건들을 통해 사관을 세우고자 하였다.
섭리사관은 성서에 드러난 역사관이니 그 자체로는 새로울 것이 없다. 하나님이 역사에 개입한다는 것, 그분이 역사를 직선적으로 인도한다는 것, 그리고 그분이 역사를 자신이 계획한 목적지로 이끈다는 것이 섭리사관을 구성하는 핵심적인 관점이 된다(데이빗 배빙턴, <역사관의 유형들>, 3장 ‘기독교 역사관’ 참고). 하지만 수천 년 전 유대인들의 역사철학이었던 섭리 사관을 20세기 조선에서 다시 말하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었을까?
이 무렵 함석헌의 고민은 ‘조선의 살 길’을 찾는 데 있었다. 그가 「조선에 기독교가 필요하냐?」(<성서조선> 5호, 1928. 7)에서 조선에 기독교가 필요한 이유로 내세우는 것은 바로 ‘살아야겠다’는 것, 살기 위해 우선 죄에서 해방되어야 하겠다는 것이었다. 함석헌이 섭리 사관을 통해 모색하고 있었던 것은 조선의 궁극적인 해방이었다. 「역사에 나타난 하나님의 섭리」의 짧은 서문에 그의 이런 고민이 잘 드러나 있다.
살기가 원願이로구나!—이것이 우리 각자의 영혼의 오저奧底에서 솟아나오는 애원이요, 저들의 살 길이 어디 있는가!—이것이 우리가 골육을 위하여 부르짖는 탄식이다. 애원하는 자는 광명을 구하는 것이요 탄식하는 자는 소망을 찾는 것이다.
소망의 빛이 원이로구나! 우리를 위로하고 우리에게 원기를 회복시키고 우리로 하여금 용기를 뽐내게 하는 소망과 진리의 빛이.
빛은 어디로 오는가? 소망은 어느 줄기에 달리는가 하고 두루 찾았다. 어린 생명을 날마다 대하며 그를 지키고 물 주고 하는 것이 자기의 할 일이거니 생각할 때에 그 원願은 더욱 간절하였다.
<성서조선> 7호, 1929. 1. 15쪽.
함석헌에게 있어서 섭리사관은 조선의 살 길을 찾아 도달한 한 지점이었다. 「역사에 나타난 하나님의 섭리」 1장 ‘우주와 인생’에서 함석헌은 섭리사관의 정당성을 이끌어 내는데, 이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모든 사람, 모든 민족에게는 삶의 토대가 되는 인생관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 인생관은 개인의 내면에서만 찾을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주관과 연관되어 있다. 우주를 기계적 운동으로 볼 것인가 목적론적인 과정으로 볼 것인가, 이 두 관점이 맞서 있지만 우리는 기계론의 관점을 수용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우주와 인생을 목적론적으로 보는 관점을 취할 것인데 여기에도 두 가지 관점이 있다. 하나는 인간 자신에게 내재하는 것으로 보는 관점. 이 관점은 ‘자기실현’이라는 근대의 표어로 드러나지만 결국 바벨탑을 쌓는 것일 뿐이다. 다른 하나는 우주와 인생을 신의 섭리로 보는 관점. 여기에 와서 섭리사관이 나타나게 된다.
철학을 가지고 신을 증명할 수 없는 것 같이 이론으로써 섭리를 증명할 수가 없다. 그러나 경건한 맘과 진실한 태도로 굉대宏大한 대자연과 유구한 역사를 바라볼 때에 허다한 사실이 우리의 믿는 바 섭리를 눈에 보여 주고 맘에 알 수 있도록 이서裏書하여 준다. 아니다. 진정한 의미에 있어서 역사란 전능의 신 자신이 지으신 우주 무대의 배후에 서서 친히 감독하시며 연행시키는 일장의 생명극에 불외不外하다. 그는 애愛와 의義를 경위經緯로 짜신 것이요 영원한 시류의 선율로써 반주를 시키는 것이다.
<성서조선> 7호, 1929. 1. 18-19쪽.
그러나 섭리사관은 근대 역사학의 객관주의와는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것은 애초에 증명할 수 없는 것이었고 역사에서 신의 섭리를 보는 이에게만 의미 있는 것이었다. 도쿄고등사범학교에서 역사학을 공부한 함석헌이 이런 사정을 몰랐을 리 없다. 위 인용문에서 이론으로 섭리를 증명할 수 없다고 말한 데서 함석헌이 근대 역사학의 객관주의를 의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1920년대 식민지 조선에서는 민족 해방, 계급 해방의 목소리가 높았고, 이를 위한 역사관이 모색되고 있었다. 하나는 단재 신채호의 민족사관이었다. 1908년 「독사신론」에서 시작되는 단재의 민족사관은 1920년대에 와서 「조선사통론」 기술로 나아가고 있었다. 역사를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의 역사로 본 「조선사총론」이 기술된 것도 이 무렵의 일이다. 근대의 역사에서 민족국가는 역사의 대주체로 자리 잡고 있었으니 민족사관은 그 자체로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다른 하나는 유물사관이었다. 1920년대 초부터 유물사관이 수용되어, 1921년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비판을 위하여>의 서문 ‘유물사관 개요’가 처음으로 번역되었다. 유물사관에 따르면 ‘역사는 발전하는 것이며 그 진행은 사회구성체의 계기적 발전에 의해 결국 인류의 전사(前史)인 자본주의가 극복되고 사회주의가 필연적으로 도래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는데, 이러한 역사관은 1920년대 사회주의자들에게 대단히 매력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함석헌이 유물사관과 민족사관을 참고하고 있었을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그가 도쿄고등사범학교를 다니던 1920년대 중반의 일본 사상계의 분위기는 사회주의에 크게 기울어져 있었고 이러한 분위기로 인해 그 역시 사회주의 운동에 투신할 것인가를 두고 고민했다. ‘유물사관 개요’는 당시 일본에서도 여러 차례 번역되고 있었기에 역사학을 공부하던 함석헌이 읽어보았을 수 있다. 함석헌이 단재를 몰랐을 리 없다. 오산의 분위기는 단재의 민족주의와 닿아 있었다. 설립자였던 남강은 단재와 더불어 신민회에 가입했었고, 뒤에 이광수가 쓴 글에 따르면 국외로 망명하려던 단재가 오산을 들렀던 일도 있다. 함석헌이 단재를 만나지 못했겠지만 단재의 이야기는 오산에 전설처럼 전해 내려오고 있었을 것이다. 1934년부터 함석헌은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를 씀으로써 본격적인 역사 기술로 나아가는데 이 글에서도 단재를 언급하고 있다. (1920년대 유물사관 수용에 대해서는 박종린, 「1920년대 초 공산주의 그룹의 맑스주의 수용과 ‘유물사관요령기’」를, 단재와 함석헌의 민족사관에 대해서는 이만열, 「신채호와 함석헌 : 역사 인식의 관련성 시고」를 참고)
함석헌의 섭리사관은 민족사관 및 유물사관과 대화하면서 경쟁하고 있었던 셈인데, 섭리사관은 이 두 사관과 큰 차이가 있었다. 두 사관이 역사를 ‘투쟁의 역사’로 본 것과 달리 섭리사관은 ‘은혜의 역사’를 주창하고 있다.
우리는 이상에서 역사의 별견에 의하여 한 사관을 말하여 왔다. 거기 의하면 역사는 우리 선조들이 생각하였던 것 같이 참혹한 운명의 변전變轉도 아니요 그들의 교양 있는 자손들이 말하는 것 같이 세계의 정복도 아니다. 또는 일부 사상가의 말하는 바 신비로은 생명의 유전流轉만도 아니다. 역사는 은혜의 역사다. 본래부터 있는 자와 그 지은 자와 지음을 입은 자 위에 내리는 은혜, 이것이 역사의 초석이다.
「있는 자」에게는 종한終限이 없다. 지음을 입은 자는 완성되어야 할 운명을 가지었다. 은혜에는 내버림이 없다. 소망 있는 미래가 있다. 우리가 이제부터 보려는 것은 미래의 역사다.
<성서조선> 12호, 1929. 12. 12-13쪽.
근대 역사학에서 함석헌의 섭리사관은 다른 두 사관과 달리 정당한 대접을 받지 못했다. 섭리사관이 근대 역사학이 요구하는 객관성을 결여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최근 포스트모던 역사학이 대두하면서 사정이 달라지고 있다. 포스트모던 역사학의 관점에 따르면 역사는 과거의 연대기적 사실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일정한 관점과 플롯에 따라 배열한 내러티브이다. 이런 변화 때문인지 최근 철학, 역사학 쪽에서 함석헌의 역사철학에 대한 학문적 관심이 새롭게 일어나고 있는 것 같다. 함석헌의 역사철학의 새로움에 대해 ‘역사의 주체인 인격적 존재를 3인칭의 대상으로서 파악한 것이 아니라 2인칭의 너로서 만났다는 데 있다’고 한 논의가 그 예이다.
신이 살아 있는 인격으로 도래하는 것은 ‘나’와의 만남 때문이다. 오직 이 만남 속에서 역사의 객관적 주체인 인격적 신은 나의 개성적 주체성 때문에 평균적 일반성에 갇힐 수 없는 생동적 의미로서 도래하게 된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역사와 만나야 할 사람은 남이 아니라 나 자신이므로, 내가 인격적으로 만나야 할 역사도 남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의 역사일 수밖에 없다. (중략) 그리고 역사를 지어내는 인격적 존재와 만난다는 것은 지금 여기 내가 살고 있는 역사의 의미를 전체 존재의 역사의 지평으로부터 이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김상봉, '만남 속에 있음', <철학> 142집, 2020, 15쪽.
다시 1929년 무렵의 함석헌에게로 돌아가자. 도쿄고등사범학교에서 역사를 전공하였고, 우치무라 간조의 성서 모임에서 예레미야 강의를 들으면서 신앙과 민족의 문제를 자기 안에 결합시켰으며, 지금 모교인 오산에 막 부임하여 선지자적 정념에 이끌리고 있던 청년 함석헌은 조선의 살 길을 찾기 위해 섭리사관에 입각한 역사 연구로 나아가고 있었다. 살 길이 막막한 현실 앞에서 조선의 해방, 인류의 궁극적인 완성을 희망하면서 역사 연구의 길로 나아갔던 함석헌에게 그것은 물 위에 씨를 뿌리는 것과 같았다. 「물 위에 씨를 뿌리는 자」(<성서조선> 5호, 1928. 7)에서 함석헌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리는 뿌리는 자다. 곳과 때를 가릴 것 없이 우선 뿌려야 할 자다. 압록강의 급류에도 뿌리고 두만강의 격탄激灘에도 뿌려야 할 것이다. 결실을 하고 못하는 것은 우리의 능히 할 바가 아니요 우리의 할 것은 뿌리는 것이다. 또 뿌리면 반드시 결실하는 때가 있을 것을 우리는 믿는다.
<성서조선> 5호, 1928. 7. 1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