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요약
2022년 12월 18일 대강절 넷째 주일
제목: 파루시아와 새로운 세상
하나님은 이 세상의 창조주시며 주관자시다. 이것은 신앙인의 고백이다. 하나님이 이 세상에 깊은 관심을 가지시며 늘 새롭게 하려고 일하신다는 고백도 신앙의 언어다. 그런데 그 신앙의 언어는 우리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즉, 이 세상을 어떻게 관리하고 다른 사람과 어떤 관계를 맺으며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가이드를 제공한다.
이런 가이드가 없는 사회는 혼돈과 파괴가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 법으로 바로잡으려는 시도도 양심과 정신을 인도하는 가이드가 무시되는 세상에서는 별 효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오늘 우리가 사는 도시에서 고학력자가 많고 정보도 차고도 넘쳐나며 법과 제도도 어느 정도 갖추어져 있지만 불법이 횡행하는 이유도 이런 데서 기인한다.
종교는 이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개입을 이야기한다. 그 개입은 창조와 재창조로 나타난다. 물론 그 과정에서 하나님은 이 세상을 끊임없이 바로잡는다. 그것을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부른다. 성경 이야기는 모두 하나님의 이런 활동을 들려주는 서사시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서사시에서 하나님의 최종적인 목적은 언제나 이 세상을 생명 충만한 땅으로 만드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이런 목적은 이 세상을 관리하도록 세우신 인간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인간은 하나님의 대리인이면서 이 세상을 다스리는 왕 같은 존재다. 인간이 그 본분을 성실히 이행하면 이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곳이 되겠지만 인간이 그 본분을 망각하고 하나님을 대적하고 그 뜻을 저버리면 그가 사는 땅은 저주를 받아 황폐하게 변하고 만다. 물론 그들은 그 땅에서 쫓겨날 것이다.
성경 이야기는 대략 이런 흐름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이 세상을 바로잡으시는 하나님의 개입에 대하여 자세하게 들려준다. 그 개입이 노아의 홍수 이야기로 나타나며, 바벨탑의 이야기, 그리고 소돔과 고모라 이야기, 출애굽 이야기, 예루살렘에 대한 심판 이야기, 그리고 바벨론을 비롯한 나라들에 대한 심판 이야기 등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한 사건은 아예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려고 오신 임마누엘이라고 소개된다. 그것은 하나님이 이 세상에 가장 직접적으로 개입하신 사건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해서 노력하셨다. 그것은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시고 병든 자를 고치시고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묶인 자를 풀어주어 다시 높이 세우시는 일이었다. 그렇게 할 때마다 사람들은 자신의 자리를 찾고 자신의 역량을 발휘하면서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살게 되었다. 그것은 이 땅에 임한 하나님 나라의 모습이었다.
그런데 예수님의 개입은 예루살렘 지도자들의 반발을 일으켰다. 사실 그들은 하나님 나라를 반대하는 원수들이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들이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선언하셨다. 그 심판의 날에 인자는 왕권을 가지고 하늘 구름을 타고 오실 것이며 그들은 그 날을 볼 것이다. 물론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도 그 모습을 볼 자들이 있을 것이라고 예수께서는 말씀하셨다. 이 말은 예루살렘에 대한 심판이 한 세대가 지나기 전에 이루어질 일이라는 의미였다.
예수님의 예언대로 예루살렘은 주후 70년, 그러니까 예수님이 심판을 선언하신 후 40년이 못 되어 로마인들에게 함락되었다. 그렇게 주님은 말씀하신 대로 예루살렘에 다시 오셨다. 그렇게 하여 교회를 위한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 교회는 주님의 말씀을 따라 복음을 전하고 본분에 충실했다. 그래서 복음은 로마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그런데 이번에는 로마제국의 지도자들이 하나님 나라를 대적했다. 예수께서는 밧모섬의 요한에게 말씀하시기를 로마도 심판을 받고 무너질 것이라고 하셨다. 그것이 요한계시록이다. 예수님은 그런 일이 속히 될 것이라고 말씀하시고 ‘내가 속히 오리라’고 네번이나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 말씀대로 로마는 더 이상 하나님 나라를 대적하는 일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기독교를 국교로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신자들은 하나님이 이 세상을 다스리시고 주관하시며 늘 새롭게 하신다고 믿었다. 그리고 마침내 이 세상은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변화될 것을 믿었다. 그런 믿음을 가지고 주님의 뜻을 따르고자 할 때마다 하나님 나라를 대적하는 세력들이 일어나 의인들을 박해했다. 그때 신자들은 주님이 속히 오셔서 이 모든 것을 바로잡으실 것을 믿었다. 그 믿음으로 박해와 유혹을 이기고 신자의 본분을 지켰다.
그런 분투와 순종으로 이 세상은 조금씩 발전할 수 있었다. 그리고 하나님을 대적한 세력들은 본디오 빌라도나 헤롯과 같이 심판을 받았고 악인의 오명을 받았다. 그들이 히틀러와 뭇솔리니, 일본 제국주의자들이다. 그리고 각국의 독재자들도 하나님의 나라를 대적하고 많은 사람의 피를 흘린 악인들이다. 그들을 심판하려고 주님이 다시 오셨다. 그때마다 주님은 이 세상을 바로잡기 위하여 개입하셨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언제나 하나님이 이 세상의 주관자시며 통치자이심을 굳게 믿었다. 그런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자기 시대의 불의와 불법을 보면서 하나님이 그것을 심판하시기 위해 개입하실 것을 믿었다. 그것이 주의 권능의 날이며, 주의 크고 두려운 날이었다.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에 대한 심판의 날을 인자의 날이라고 부르셨다. 주님이 하나님의 영광을 가지고 하늘 구름을 타고 오시는 날이었다.
초기 교회는 주님의 오심을 주의 강림하심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훗날 사람들은 그것을 재림이라고 불렀다. 모든 세대는 주님의 재림이 자기 시대에 일어날 일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주님이 속히 오셔서 사탄을 우리 발 아래에서 상하게 하실 것이라고 했고, 야고보도 주님의 강림하심이 가까웠다고 했다. 사도 베드로는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다고 성도들을 일깨웠다.
어떤 사람들은 주님의 재림이 이 세상의 멸망과 성도들의 승천, 그리고 저 우주 어딘가에 있는 천국으로 올라갈 날이라고 오해했다. 그들은 주님의 재림이 이 세상을 바로잡아 새롭게 만드는 일임을 알지 못하고 영지주의적 이원론에 빠졌다. 그 결과 모든 세대를 감찰하시고 언제나 일하시는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아직도 재림은 일어나지 않았으며 언제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젖어 있다. 그들은 사실 주님의 재림이 반갑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주님의 재림은 초림과 함께 기쁘고 즐거운 날이다. 그것은 이 세상이 새롭게 변하는 날이며 만물이 다 회복되는 날이기 때문이다. 주님이 다시 오시는 목적이 바로 그것이다. 물론 하나님 나라를 대적하고 약한 사람들을 외면하고 괴롭게 한 사람들은 심판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의 오심을 바라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 날은 기쁨과 즐거움의 날이 될 것이다.
주님의 재림을 기뻐하고 기대하며 기다리는 사람들은 주님이 속히 오셔서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아 주실 것을 기대할 것이다. 그들은 주님이 오셔서 무슨 일을 하셨는지를 잘 알고 있으며, 다시 오셔서 어떤 세상을 만드실지를 잘 안다. 그러므로 그에 맞는 행동을 하며 수고를 할 것이다.
우리는 주님을 기다리던 마리아의 찬가(누가복음 1:46~56) 속에서 마리아와 경건한 유대인들이 메시아에 대하여 어떤 기대를 가지고 있었는지를 발견한다. 그들이 기대하던 메시아는 교만하고 권세를 제멋대로 휘둘러 약자를 괴롭게 하던 자들을 흩으시고 쫓아내시며 비천한 자들을 그들의 흙먼지에서 일으키셔서 백성의 지도자들과 함께 설 수 있도록 세우실 것이다. 그 날에 주린 자들은 배부를 것이며 고통받는 자들은 즐거운 노래를 부를 것이다.
그런 세상에서 사는 사람들은 어떤 삶은 어떤 모습일까? 사도 바울의 대답으로 대신할 수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문제로 다투는 세상이 아니요, 성령 안에서 누리는 당당하고 평화롭고 기쁨 가득한 삶이다(롬 14:17, 풀어서 씀). 주님이 오셔서 펼쳐지는 세상이 바로 이런 모습이다. 그런 세상을 기다리는 것은 즐겁고 기대되는 일이며, 오늘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충분히 깨닫게 한다.
<끝>.
설교안 전문:
파루시아와 새로운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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