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고향 양꼬랑의 추억
1942년 6월 17일 음력으로는 5월 4일이다 충남 청양군 화성면 산정리 349번지에 무너저 내릴듯한 오두막집에는 땅거미가 짙게 내리고 어머니는 여섯째 아들을 낳으시려고 산통을 겪으시였고 그순간이 바로 내가 태어난 순간이다 나는 여섯번째로 위로 세분의 누님이 계시고 두분의 형님이 계셨다 그리고 6년후 여동생이 생겨 칠남매가 되였다 이 오두막집은 칠남매 모두가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지지리도 가난했던 오지奧地속의 시골동네에는 이십여 가구가 옹기종기 살았는데 시계가 있는집은 건너편에서 사는 심서방네 집이 유일하였다 세상물정을 전혀 모르고 땅이나 파서 먹고 사는것 밖에 모르고 사는 이들에게는 훤하면 들에나가 하루종일 일하다가 어두우면 집에와서 저녁먹고 흐미한 등잔불 아래서 길삼이나하고 새끼를 꼬거나 가마니를 짜며 잠이나 자는게 고작이였으니 어쩌면 시계는 사실상 없어도 조금도 불편을 모르고 살았으려니와 전화는 무엇인지 알지도 못했다
1960년은 내가 처음으로 서울에 올라온해였다 지금으로 말하면 서울 구로구 오류동을 중심으로 천왕동 온수동 철산동 광명동 고척동 개봉동 일대를 통틀어서 가정이나 기관에 전화는 불과 45~6 대에 불과했고 기관이나 다방 음식집 목욕탕 등으로 30여대가 조금 넘었고 나머지는 그래도 내노라하는 부자집이였다 거의다가 전화가 무엇인지 모르고 전화에 대하여 필요성은 물론 불편조차도 모르고 살던 시대였었다 서로 교신할 일이 생기면 우체국에가서 전화신청을 하거나 전보로 연락했고 특별히 바쁜일은 별사배달 別使配達전보를 사용하였다 별사배달 전보란 발신자가 비싼요금으로 전보를 치면 전보받은 우체국에서는 낮이고 밤이고 도착즉시 사람을 사서라도 열일을 제껴놓고 연락해주든 제도였다
그러나 대개는 이런제도가 있는것도 몰랐고 전화가 없어도 전혀 불편을 모르고 살았다 시골 산촌에서는 나드리 할일도 별로 없는데다가 시간에 구속받아야 될일이 없으니 사실상 시계는 사치품이였다 시대가 바뀌고 세월이 바뀌고 생활이 바뀌고 문화가 바뀌면서 시계나 전화는 없어서는 않될 필수품이 되였다 전화기는 스마트폰이라는 괴물로 변하면서 늙은이고 젊은이고 심지어 어린아이까지 없서서는 않될 애물단지가 되였고 사람마다 시간만 있으면 들여다보고 없으면 불안하기까지 하다는게 대부분의 의견이다
음력 5월의 땅거마질 무렵이면 대략잡아 오후 7시 전후가 아닐가 싶어 어쩌다 토정비결이라도 볼라치면 유시(酉時)로 계산하였으니 토정비결을 푸는데 어림짐작의 시간으로 계산하였으니 맞을리가 없다 그래도 정월이 되면 작은 동네에서 너나 없이 토정비결을 맹신하였고 문맹이 그득한 그시절 그래도 한글을 깨친이들은 이사람 저사람 토정비결을 읽어주는 특별한 변사이기도 했다 없는 가정으로 출가오신 어머니(순흥안씨 안저安渚씨와 전주이씨 사이의 장녀)는 호랑이 채서방이라는 별명을 가지신 홀로되신 시아버지를 모시고 사시였다 생전에 보지못한 할아버지는 근엄하시고 잘생기셨다며 갑술생 개띠라고 어머니께서 늘 하시던 말씀이 생각난다 정확하게는 할아버지( 중묵重默)는 1874년 갑술년 6월 23일이 생일 이셨고 할머니(전주이씨)는 1871년 신미년생 이시니 할아버지보다 세살이나 나이가 많은 연상이셨다
할머니는 1893년 계사년 10월 2일 22살 되시던해에 큰 아들( 규흥奎興)을 낳으시고 그리고 1899년 기해년에 딸(규희奎喜)을 낳으신후 31살 되시든 1901년 신축년 12월 7일에 작은 아들( 규인奎仁)이자 나의 아버지를 낳으시고는 1903년 계묘년 2월 3일에 젊은나이 32세로 어린것들을 남겨놓고 돌아가시니 할아버지는 29세의 젊은 나이셨고 아버지 나이 세살 때였다 모든것이 기억하기 싫은 추억이지만 엄연히 나에게는 하나의 역사이기도하다
옛날 어머니께서는 아무것도 보지 않은채 양반이라는것 하나만 보고 아버지께 오시였다 다락논 두어뙈기의 가난한 살림에 홀로되신 시아버지까지 모시고 여러남매를 키우셨으니 그 고생이야말로 말하지 않아도 유리알 속처럼 훤하게 들여다 볼수가 있다 할아버지께서는 1937년 6월 27일 63세로 돌아가셨으니 아버지 나이 37살 되시든 해였고 나는 1942년에 낳았으니 내가 낳기 5년전의 일이다 할아버지께서는 잘나고 똑똑한 큰아들을 형님에게 양자로 보내시고 융통성이 모자란 아버지와 같이 사시였으니 당연히 어머니가 할아버지인 시아버지를 모시고 사신것이다
세간에 오가는 말은 양자는 자식이 아니라는 의식이 팽배하였고 그것은 사실이였다 [양자는 줄것이 못되어, 나의 사전에는 양자는 없어]어머니께서 자주 하시던 절대적인 말씀이 지금까지도 머리속에서 생생하게 자리하고있어 생각에서 떠나지 않는다 큰아들이 지고 가야할 무거운짐을 가난이 찌든 생활속에서 평생을 대신하여 지셨으니 가이 이해가 간다
양자라고 해서 홀로되신 아버지에 대한 생각이야 왜 없을가마는 일단 호적을 옮기였으니 모든 생활권이 양부모로 옮겨가면서 이쪽 저쪽을 돌볼겨를이 없는것도 이유중에 하나이다 바쁘다는 핑게아닌 핑게로 어쩌다 때가 되어야 일년에 겨우 몇번 찾아오는게 양자간 큰 아들이니 말만 형식적인 아들이였고 족보상이나 호적상이나 생활상으로는 아들이 아닌 엄연한 조카이다
욕심이 많으시고 성격이 불같으신데다가 부인까지 돌아가시고 홀아비로 사시면서 잘난 아들까지 형에게 빼앗기고 속에서 터저나오는 화통을 제어할곳이 없어 양반타령이나 하시든 할아버지는 어쩌다가 시장통에서 약주라도 하시고 취할라치면 온갖 푸념과 넋두리 그리고 주체할수없는 실망감으로 온동네를 휘젓고 다니시며 떠들석 하셨던것 같다 그래서 생긴 별명이 바로 [호랑이 채서방]이다 당시만 해도 양반텃세에다 지방 수령으로 계신 잘난 아들이 뒷받침을 하고있으니 아무것도 거칠것이 없었고 주변에서도 그위세에 눌리어 누구하나 감히 말대꾸 하지 못했으니 그위세가 가이 짐작이 간다
게다가 아들 선호시대에 첫 손녀를 보고 연이어 손자를 보신 할아버지는 다소나마 마음의 위로에서 부풀었을 지음 연거푸 두 손녀를 보고는 더욱더 속이 끓으신것 같다 자식도 필요없는 세상에 딸년만 수두룩 하니 더더욱 분통이 터젓고 그것은 고스란히 며느리 탓이였다 착하디 착한 며느리에게 화풀이 못하시는 분통을 엉뚱하게 술로 푸시고 모자라 온동네 휘젓고 다니신 것이다 반상제도가 사라진지 이미 오래 되였지만 시골 작은 동네에서는 할아버지는 여전히 대감나리셨고 샌님이셨다 양반이 무엇이길래 그토록 오랜세월이 지나오도록 구습에 젖어있었다
우리증조부( 동환東煥 증조할머니는진주정씨)께서는 세아들을 두시였는데 큰아들( 인묵麟默)이 대가 끊기게 되자 큰아버지( 규흥奎興)께서 양자로 대를 이으신것이다 증조할아버지의 세아들중 막내 아들(원묵元默 종조할머니는 교하노씨)은 또한 이름모를 여인을 취하여 얻은 자식이라고 해서 서자이셨다 증조할아버지께서 벼슬길에 오르시고 금의환향하시는 길에 우연히 처녀를 취하여 얻은 자식이라고 하시는 말씀을 들은것이 내가 아는 전부이다
옛날에는 그런일이 다반사多般事였다니 가히 양반들의 무소불위無所不爲 시대가 아닌가 나는 일찌기 할아버지도 외 할아버지도 모르고 오직 내게는 종조 할아버지 한분이 유일한 할아버지였다 종조할아버지는 1878년 무인년 5월 27일 생으로 일찌기 한살때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의 얼굴 조차 모른채 서름을 받으며 서자로 자라 제대로된 혼인도 못하시고 딸이 하나 딸린 과부 교하 노씨 여인과 정식적인 혼인이 아닌 호적에 오른 부부로서 살고 계셨다 길게자란 하얀 수염을 하고 얼굴은 약간 길죽하시고 팔자눈섭으로 앉아있으시면 비록 행색은 초라할망정 양반의 피에 걸맞게 으젓하시고 앉은 키가 크신 기억이 난다 역시 부전자전이 아니였을가 싶다
종조할아버지 께서는 배가 다르고 정실正室인 두형님과 는 달리 부모도 않계신데다 서자라는 이름으로 그다지 대접을 받지 못하시고 시세말로 구박덩어리 지내신것 같다 옛날풍속에는 서자는 부모님 제사에도 감히 같이 자리하지도 못할뿐 아니라 술한잔도 올리지도 못하고 문밖에서 별도로 자리를 깔고 절을 하였다고 하니 그서름이 얼마나 깊었는지 알수가 있다
양반사회의 고질은 옛날 고려시대로 부터 이어왔다 제사풍속도 제각각 달라서 정몽주의 제례규정에 보면 3품관은 증조까지 6품관은 조부모까지 일반 서민은 부모제사만 모시도록 되여있다 조선조에 와서 김국광의 경국대전에는 3품관은 고조까지 6품관은 증조까지 서민은 부모제사만 모시도록 되어있다
이토록 고급 양반가에서는 4대봉사를 자유로히 했지만 일반 서민이나 상인은 부모제사만 드리도록 하기도 한것이다 이 제도는 이조고종왕 31년인 1894 갑오경장이 일어나기 까지 계속되어 내려왔지만 신분제도가 철폐되면서 누구나 다가 고조까지 모시도록 되였고 한때는 1969년 가정의례준칙에 부모까지만 모시도록 되어있으나 여전히 오래도록 이어온 폐습은 고처지지못한채 옛날 그대로 이어오고 있었다 나에게는 서자의 한을 답습하는 또다른 사촌이 두분(형석과 홍석)이나 계시였다 한참이나 잘나가시던 큰아버지께서 작은 마나님을 얻으셔서 두아들을 두신것이다 사촌 역시 호랑이 할아버지로 부터의 한이되는 응어리의 미움으로 서자의 서름을 알게 모르게 톡톡히 겪으시며 살아가고 있었든것 같다 쉽게말해 할아버지 께서는 두사촌을 친손자로 인정하지 않으신 것이다
워낙히 외모가 반듯하시고 출중하신 큰아버지께서 빼어난 미인을 얻으시었으니 그아들들 또한 출중하였지만 정실이 아닌 이유로 해서 푸대접을 받다보니 두 사촌에게는 마음속에는 응어리가 되여 있었다 할아버지를 대할때마다 느끼는 차거운 눈초리가 한이 되였고 알게 모르게 거리를 느끼는 사촌이나 직계를 보면서도 은근한 열등의식을 지울수가 없었다
한편 종조부 역시 자손이 없어 조카의 양자는 하지 못하고 널뛰기 손자들이 일곱이나 되였지만 감히 양자소리는 입 한번 열지 못하고 데리고온 딸을 데릴사위로 맞아 그나마 노후를 의지하고 계셨다 요지음 같은 세상이라면 그래도 입적이라도 해서 딸의 지위를 물려받을수 있었을지 모른다 오빠라고 한번이라도 부르고 싶다는 종조부의 의붓딸 오씨부인의 기억이 이따금 떠오른다
내가 태어난 곳은 좁아터진 시골읍내에서 사양면 구봉광산으로 가는 작은산 언덕아래 조그마한 마을이다 옛날 매스컴에서 요란스레 떠들석 하였든 구봉광산 매몰사건은 1967년 8월 발생한 충남 청양군 사양면에있는 구봉광산에서 일하던 김창선이 지하 125m에서 매몰된지 보름이 지나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나온 곳이다 우리동네와 구봉광산이 있는 사양면은 작은골이라는 산으로 경계되여있다 읍내에서 올라오면 해뜸 음지편 공덕지 양지편 터골 고래가 여기저기 띄엄띄엄 떨어제 동네를 이루고있다 다합처야 스므가구가 조금 넘는다 월산에서 발원하여 공덕지를 통하여 내려오는 골짜기 물과 해뜸에서 내려오는 골짜기 물이 고래앞에서 모이어 흘러가다가 또다시 장계리와 화강리에서 내려오는 물과 합친다 해서 합천 또는 모듬내가 된다
여기가 바로 모듬내(合川)이자 이십여 가구가 옹기종기 모여있는 코딱지 같은시골읍내이다 그래도 읍내에는 5일장이 설때마다 사방에서 모여드는 사람들로 시끌벅적했고 가믐에 콩나듯 오랜만에 막걸리 한잔을 드신 어르신들은 자신의 힘을 주체치 못하시고 온몸을 흔들고 다니시며 술주정하시든 모습도 잊혀지지 않는다 그래도 어려서 이곳을 지나노라면 별의별것 다있는곳으로 알았다
우리집 앞으로는 흐르는냇물의 웅덩이마다 미꾸라지 중태 송사리 빠가사리 장어 우렁 고동이 물반 고기반으로 우굴거렸으며 계속해 올라가노라면 양꼬랑이라 불렀는데 이는 양지고을 안쪽이라는 말이 아닌가 싶다 양꼬랑의 좁은 냇뚝을 타고가면 소위 말하는 삿갓배미(아주 작은논)가 골짜기를 이루고 이 골짜기에는 소담스러운 쑥 씀바위 냉이 민들레 돌나물 가새씀바위 고돌배기들이 늘비하여 앉은 자리에서 한바구니 뜯기는 잠간이였고 길가로는 할미꽃 개나리 시영 찔레나무 버들강아지가 장관을 이루는 골짜기였다
조금더 올라가면 커다랗고 무서운 범이 앉아서 쉬고 갔다는 집채보다도 커다란 전설의 범바위가 있고 범바위 아래에는 커다란 바위틈을 비집고 뚫고 나오는 샘물이 하얀 물안개를 뿜으며 펑펑 쏟아저 흘러내렸다 이 샘물은 얼마나 차거운지 그속에서 단 삼분도 견디지 못하고 뛰어 나온다 해서 옷샘이라 불렀다 아주 깨끗하고 얼음같은 물이였다 나는 지금 까지 살아 오면서 이렇게 깨끗하고 찬물은 본적이 없다 집에서 옷샘까지는 꾸불꾸불하고 가파른 길로 대충잡어 1km 정도 곧바로 올라간다
요지음처럼 흔해터진 플라스틱통이나 함석통이 없어 2L짜리 커다란 유리 대두병에 물을 가득 담아 오느라면 행여 넘어저 깨질세라 진땀을 흘렸고 집에오면 그토록 차거운 얼음같은 물은 미지근한 물로 변해 있었다 아마도 지금처럼 등산이나 다니고 건강식을 찾는 사람들에게는이보다 더좋은 곳이 있을가 장어가 배를 뒤집고 미꾸라지가 꿈틀대며 쓴나물들이 지천이였으나 먹을줄 모르고 지나친 세월이였다
지금 사는 우리집에서 1km정도가면 삼성산 자락의 삼막골에 유명한 추어탕집이 있다 1.2층 홀이 아주 넓어 100여명이 식사할수있는 곳인데 언제나 만원이다 때로는 조금 늦으면 자리가 없어 한참을 기다려야 한다 때마침 고향 친구녀석 하나가 하도 심심 하다기에 또다른 친구를 같이 불러 추어탕과 더부러 막걸리 한잔 하려고 이곳을 찾았다 여전히 만원이다 요지음은 개고기 보신탕이 시들해지면서 부담감없는 추어탕집을 찾아오는 손님으로 북적댄다
그옛날 그토록 많기도 하고 통통하게 살짠 미꾸라지가 생각난다 많아도 엄청 많았다 논두렁 벼포기 밑에는 크고 살찐 미꾸라지들이 우굴거렸고 냇가에 보뚝아래는 아예 오물오물 대었으며 비오는 날이면 마당 한가운데서 도미꾸라지들이 꿈틀대기도 할정도였다 그런가 하면 팔뚝만큼이나 큰 장어들이 허연배를 내놓고 돌아다녔다 냇뚝에는 요지음 보기힘든 씀바귀 고돌빼기 민들레가 지천으로 깔리어 합창을 했다
씀바귀는 써서 싫었고 미꾸라지는 비린내 나서 싫었고 시래기는 하도 많이 먹어 질렸던 그 시절의 양꼬랑 추억이 추어탕 먹는 내내 머리속에서 떠나지 않고 떠오른다 지금도 보리밥집이나 시래기집은 넌더리가 난다며 아예 얼굴을 돌리는 녀석이 그래도 시래기가 가득한 추어탕 한그릇을 말끔히 치우며 막걸리 한대접을 마시드니 [옛날 그토록 배고프던 시절에 미꾸라지를 잡아먹을 줄을 왜 몰랐지 너무나 무식하게 살아왔어 ]하며 옛날 얘기를 꺼낸다
시골의 추억은 오늘도 막걸리 안주로는 아주 제격이다 봄에는 진달래가 온산을 붉게 덮었고 양꼬랑 냇뚝 양쪽에는 샛노란 개나리꽃이 노랗게 골안쪽을 물들였으며 우리들은 팬티도 없이 훌렁 훌렁 벗어던지고 냇물로 뛰어 들었다 손고락을 벌리고 얼굴을 가리며 낄낄대고 지나가든 그때의 가시나도 할망구가 되어 어디엔가 있을것이다 이른 가을 청자빛 하늘에는 면사포 두른듯한 뭉게구름이 눈부시고 개울가 미류나무에서는 매미들이 극성스레 울어대든 시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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