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끝없는 선택속에 살아야한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다가오는 피할수 없는 선택에 얼마나 현명한 결정을 내리느냐에 따라 그의 삶은 달라질 것이다.
요즘 심한 중독증세를 보이고 있는 나.
등산 중독증, 암벽 중독증, 문화답사 중독증, 인터넷 중독증 등등..
세상을 사노라면 수많은 갈등에 봉착하게 된다.
그리고 그 많은 갈등중에서 하나만을 선택해야 하는 정말 얄궂은 기로에 서 있을때면
나의 욕심은 내가 둘, 아니 몇명으로 분해되어 졌으면.. 할 때도 있다.
그 갈등은 이번에도 여지없이 나를 찾아왔다.
소청산악회의 선운산 산행과 함께 선운사의 동백을 보러갈까?
마운틴 산악회와 함께 도봉산 암릉에 도전해볼까?
아니면, 집에서 쉬면서 그동안 밀어두었던 책이나 읽어볼까? 아니면 충주의 청룡사지를 찾아갈까?
정말 행복한 갈등이며 즐거운 고민이다.
어느것을 선택하든 모두가 즐거운것,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기에
이런 행복한 갈등속에서 살수 있는것에 대하여 감사하며 그렇게 할수 있음에 행복을 느낀다.
그 선택의 갈등은 목요일쯤이면 대부분 결정이 나는데
이번에는 토요일 자정이 지나도록 결정을 못하다가 잠자리에 들기전에야
아내를 위해 충주의 청룡사지로 결정을 내렸다.
일요일이면 많은 사람들은 늦잠을 자며 쌓인 피로를 풀고
나름의 여유를 즐기기도 하지만,
여러가지로 중독증을 앓고있는 나는 오히려 평상시 보다 일찍 일어나야 한다.
빨리 일어나야 더 많은것을 접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현관문을 나서니 봄비가 촉촉히 내리고 있다.
1번국도를 달려 오산 나들목에 들어서 경부고속도로를 연이어 달리다보니
뻥뚫린 고속도로를 신명나게 달려보고픈 내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액셀을 마음껏 밟기도 전에 안성IC로 나와야 했다.
38번국도를 타고 진입하면 청룡사 입구에 쉽게 도착할것을..
새로운 길이나, 가보지 않은길이 있으면 기어코 가고야 마는 호기심을
참지못해 나는 또 객기를 부린다.
여주에서 제천까지 이어지는 3번국도는 신도로 이기에 아직 차량이 많지않다.
한적한 3번국도. 나는 먹이를 지척에 둔 아나콘다처럼..
또한 요란한 굉음을 내며 쏜살같이 달리는 폭주족처럼..
또는 상상을 초월하는 속도로 죽음의 질주를 벌이는 카 레이서처럼..
나는 액셀을 긑까지 밟아 요란한 굉음과 함께 상상을 초월하는 스피드로
초원을 질주하는 쾌감을 누린다.
때문에, 청룡사로 들어서는 도로를 찾지못해 한참을 헤메고 말았지만,
결혼식이나 칠순잔치에 가는것이 아니기에
여유를 부리며 유유자적한다.
어쩌면 이런것도 여행에서 만끽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즐거움 이기에...
주덕에서 599번 국도를 타고 남한강을 지나는 길은 언제나 아름답다.
봄비가 내리는 강가이기에
물안개 피어나는 주변의 풍경은 더욱 정겹다.
목계교를 건너 원주쪽으로 가다가
양촌리에서 청룡사(7.5KM)의 안내판을보고 좌회전하여 높진 않지만
굽이가 심한 고개를 넘으면 오량리에 이른다.
"소태"라는 아담한 마을.
진입하는 길은 멋이있거나 화려하지는 않지만
아직 사람의 때가 묻지않은 마을이기에 정감이 간다.
소태초등학교와 소태우체국을 지나 우회전하면
얼마 못가서 작은 개울 옆 둑방길이 나오는데 그 길을 따라 진입하면
청룡사의 입간판이 보인다.
추적추적 내리는 봄비로 인해 진입하는 길은 더욱 고즈넉해 보인다.
비맞은 산길은 촉촉히 젖어있다.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수많은 봉우리들..
그 사이로 피어오르는 운무는 진경산수화를 보는듯 아름답다.
봉우리에 걸린 운무는 하얀 새털처럼 포근하다.
손을 내밀면 잡힐것만 같은 하얀구름..
높진않지만 희끗희끗 드러나는 준봉들은 하늘을 뚫을듯 솟아올라
장관을 연출하며 그 아름다운 산세는 환상을 보는듯 아름답다.
예정없이 찾아든 청룡사지. 초행의 길이기에 모든것이 낮설기만하다.
하지만 진입할수록 인적없는 오지의 한적함에 마음을 빼앗겨
청룡사에 거는 기대는 자못 컸었다.
"적어도 안성의 석남사 정도는 되겠지" "어쩌면 그곳보다 더 좋을지도 몰라"
우리는 내심 그렇게 기대하며, 또 그러기를 바랬다.
청룡사. 우측으로 450m.
보각국사정혜원융탑. 직진 300m란 안내판을 보며,
어떤 미지의 세계가 나타날지..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청룡사를 향하여
좁고 제법 가파른 언덕길을 비행기 이륙하듯 올라섰으나
꿈이 너무 요란했나.. 우리는 그곳에서 아무것도 얻지못하고,
그저 허탈한 마음으로 내려와야 했다.
청룡사엔, 스레트 지붕의 어수룩한 집한채와 그 위로
요즘에 중창불사된듯
주황색 철계단을 휘돌아 오르면 작은 산신각만이 중생을 맞이한다.
청계산 북쪽 중턱에 위치한 이곳 청량사.
보조국사와 보각국사가 은거 하였던 곳.
중생은 그 자리, 그 흔적을 찾지못하고 이렇게 허전하게 내려서고 있다.
옛날 조선 태조 이성계의 사부였던 보조국사는
지금의 청룡사 자리인 충주시 소태면 오량동 청계산 중턱에 머물며
말년을 보낸다. 이에 태조는 스승에 대한 은공의 보답으로
이곳에 사찰을 창건한다.
이 절의 폐사 시기는 조선말기로 조선시대의 많은 권력가들이 그랬듯이
이곳도 조선말 판서 민대룡이 소실 묘를 쓰려고 절을 불태워
폐사지로 내려오고 있다.
이곳으로부터 서쪽 언덕진 곳엔
조선전기 석조미술을 대표할 보각국사의 정혜원융탑과 탑비, 그리고
석등 등이 남아 있으며
탑의 아래 쪽으로 거대한 석종형부도와 위전비 등이 남아 있어
조선전기 매우 번창한 사찰이었음을 알 수 있다.
길을 바꿔 진입해 부도밭 입구에 들어서니 작은주차장이 조성되어있다.
왼쪽으로 난 시멘트길을 오른다면,
다시한번 허탈감을 느끼며 내려와야한다.
호기심이 많은 나는 차를끌고 한참동안 진흙으로 범벅이를 하며
비포장길을 오르다가 결국엔 되돌아 내려와야 했다.
부도밭은 우측의 작은 소롯길로 올라야 한다.
낙엽쌓인 숲길은 제법 운치가 있다.
모퉁이를 돌아서면 나타나는, 청룡사위전비.
위전비는 조선시대 청룡사의 경비를 충당하기 위하여 신도들이 기증한
논과 밭의 내역을 적어놓은 높이 1.65m의 비로서
비교적 단조로운 모습이나 귀부와 비신 이수를 모두 갖추고 있다.
봄비내리는 소롯길은 늦가을인양 아직도 낙엽이 소복히 쌓여있다.
떨어진 나뭇잎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아려온다.
좁은 숲길의 회갈색 나뭇잎.. 그 풍경이 너무 아름답다.
바스락거리는 낙엽을 밟으며,
앙상한 나목에 부딪쳐 떨어지는 가는 빗줄기를 바라보며 오르는 숲길은
제법 운치가 있다.
후드득거리며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으면...왠지 마음이 서글퍼진다.
뭔가, 귀중한것을 잃어버린 어린애모양 마음이 허전해진다.
곁에 아내가 없었더라면..
왈칵, 원인모를 눈물이 흘렀을지도 모르겠다.
둔덕을 오르면, 작은 부도밭이 있고,
적운당사리탑인 석종형 부도와 부도 부재석들이 어지럽다.
석종형 부도는 전형적인 조선초기의 돌종 모습으로
높이 1.7m의 화강암 부도이다.
하대석은 단석1매로 3단의 괴임이 있고 탑신의 윗 부분은 보발 모양으로
장식되어 있는데 몸돌에는 적운당사리탑이라는 명문이 음각되어 있다.
석종형 부도 앞에는 파손된채 놓여 있는 부도재가 있어 안타깝다.
원래의 모습이었다면 제법 아름다웠을 부도재는 지대석 위에
하대석,상대석,옥개석 등이 남아 있고 탑신석이 없어진채
모진 세월의 아품을 위로해 주려는듯 푸른 이끼만이 부재를 감싸고 있다.부재는 모두 6각형을 이루고 있는 것이 특이하고
구름무늬등이 장식되어 있어 아름답다.
아무도 없는 숲속은 적막하고 쓸쓸하다.
빗방울 떨어져 부숴지고 앙상한 나목은 황량한데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하나는
오.헨리의 "마지막 잎새"처럼 애처롭기만 하다.
가을이 지나고,
추운겨울도 지나고,
이제 꽃피고 새우는 새봄이 왔건만,
계절잊은 나뭇잎은 세월을 망각한채 저렇듯 모질게도 붙어있다.
나목의 숲길..
바람에 떨어지고, 흩날려 쌓이고, 빛바랜 나뭇잎들...
어찌보면 흔히 접할수 있는 풍경이건만
자연, 그리고 모든 보이는것에 약한 나는, 그 미지의 아름다움에 취해
비를 맞으며 한참을 그곳에 서 있었다.
조금더 위로 오르면 또 하나의 부도밭이 있다.
국보 제197호 보각국사 정혜원융탑과 보물 제656호 사자석등, 그리고
보물 제658호로 지정된 탑비가 바로 그것이다.
보각국사(1320~1392)는 고려말 선사로, 나옹선사의 신표를 받았으며
공민왕,우왕,공양왕 등은 보각국사를 왕사와 국사로 책봉하고
원찰등에 주석케 하였으나
보각국사는 이 모든 것을 거부하며 전국사찰을 편력,
선회(禪會)를 크게 여는등 불교발전에 진력했다.
태조 1년 보각국사가 입적하자
태조는 명복을 빌기위해 청룡사를 크게 중창했다고 한다.
이곳에 있는 유물들은
조선전기 석조미술을 대표할 수 있는 뛰어난 것들이다.
그렇기에 우리에게 남겨진 이 귀중한 보물들을 한점 한점 음미해보면서
그곳에 담긴 아름다움..
그리고 그곳에 스며진 조선초 석조미술의 진수를 느껴보려한다.
아는만큼만 느끼겠지만....
보물 제658호. 청룡사 보각국사 정혜원융 탑비.
탑비는 고려31대 공민왕과 공양왕 그리고 조선 태조의 국사로 있던
보각국사의 비이다.
보각국사의 성은 조씨이며 법명은 혼수로 고려 충숙왕 7년에 출생,
시호는 보각, 정혜원융이라 하였다.
이 비는 보각국사가 태조원년(1392) 73세로 입적하자
문인이었던 희달이 태조3년(1394)에 왕의 명을 받아 세운것으로
비문은 권근이 지었고, 글씨는 승려 천택이 써서 탑명을
정혜원융이라 하였는데,
비에 새긴 필체가 특출하여 이 비 이후에 조선조를 통하여 이에 필적할
글씨가 없을 만큼 뛰어난 필체를 보이고 있다.
하지만 비에 각인된 글씨는 인고의 세월을 견디지 못하고
깍이고 쓸리고 스러져서 알아볼 수 없는데, 남아있는 필체도
짧은 식견의 중생은 읽어낼 수 없기에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
탑비는 화강암이고 대석은 방형이며 귀부나 이수가 없고
지대석위에 홈을파고 비신을 세웠으며 고려중기 이후부터 나타나는
비신의 상단 양끝을 귀접이한 규수형(圭首形)을 취해 특이한데
이와 유사한 비석은
충주에 있는 보물 제16호 억정사 대지국사비,
용인에 있는 보물 제9호 서봉사 현오국사탑비 등에서도 볼 수 있다.
국보 제197호인 청룡사 보각국사 정혜원융 탑.
탑은 8각 원당형으로서 지대석 위에 하대,중대,상대를 얹고 그 위에
8각의 탑신과 옥개석을 갖춘 우수한 부도탑으로
전반적 형태 및 세부구조 등이 조선초기 석조미술의 표본임을 보이는
중요한 유물로 평가받고 있다.
8각 지대석 위에 놓인 8각의 하대,
원주가 불룩하여 독특한 중대,
그리고 1단의 각형 받침위에 16엽의 앙연이 하대의 복연과 아래위 대칭으로 조각되어있는 상대는 그 상단에 8각의 홈을 파서 탑신을 안정시켰다.
탑신은 중대석과 같이 불룩한 원주로 올려놓아 특이하며
빈공간없이 빼곡한 조각술에서 화려함을 느낀다.
8각의 합각마다 두리기둥으로 표현된 우주가 있는데 두리기둥 위에
창방과 같이 목조가구의 각부가 표현되어 있으며
우주마다 기둥을 기어오르는 반룡이 조각되어 있어 특이하며
아름다움과 함께 조각의 정교함이 극치를 이룬다.
또한 면마다 장방형의 안상이 마련 되었는데 안상안에 사천왕상이
정교하게 양각되어 있어 그 아름다움은 절정에 이른다.
옥개석엔 기왓골이 없고 합각마루에는 용머리와 봉황을 돋음새겨
독특한 멋을 풍기는데 양각한 추녀가 있어 더욱 돋보인다.
지대석과 몸돌 위면에는 사리공이 있어
보각국사의 사리 및 옥촛대, 금망아지, 금잔 등이 있었다고 하나
일제 강점기에 도난 당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탑은 조선시대의 배치방식을따라
탑을 중심으로하여 뒤에는 보각국사비를 세우고 앞에는 배례석과 석등을
일열로 배치하여 장엄해 보인다.
보물 제656호 청룡사 보각국사 정혜원융탑전 사자석등
이 석등은 보각국사의 명복을 빌기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각 부재가
완전한 형태로 남아있으며
고려시대에 유행한 전형적인 방형등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지대석 윗면을 하대석이 꼭 들어맞게 파서 하대를 놓았는데
석등의 하대석은 희귀한 예로서 한 마리의 사자가 앞을 향해
엎드려 있는데 그 모습이 퍽 인상적이다.
포효하는듯하나 결코 무섭지 않은 인상,
통통하고 복스러운 모습에서 어쩌면 살지운 두꺼비같은 인상을 풍긴다.
튀어나온 눈과 큰 숨을 토하는듯 벌름거리는 코가 힘이있고
길게 찢어진 입으로 상하 이빨을 앙물고 있어
포효하려는듯 생동감이 있으며 턱의 근육에서 힘을 느낀다.
앞 뒤 네발은 날카롭게 조각되어 잔뜩 웅크린 모습에서
금방이라도 뛰어오를것만 같은데 꼬리는 뭉툭하니 유려하게 표현하여
통통한 양의 엉덩이를 보는듯 온화함을 느낀다.
한개의 돌로된 4각의 작은 중대석위에
앙련을 조각한 4각의 큰 상대석을 올려, 화사석을 지탱하였는데
역시 한개의 돌로된 4각의 화사석에는 4모서리에 우주를 모각하고
화창구는 터널을 뚫듯 앞에서 뒤로만 뚫어 독특하며 옆 2면의 벽면과
창구 간지에는 아무런 문양을 넣지않아 소박한 모습이다.
옥개석은 방석같이 생긴 둥근 돌 하나로 되어 있는데
그 모습이 매우 이색적으로 여느곳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모습이다.
마치 쇼파에 올려 놓아 다용도로 쓰는 사각의 방석 모양인 지붕돌은
바람을 넣은듯 도톰한 모습에서
고려시대 양식을 계승하였음을 알 수 있으며
꾹~ 누르면, 쑥~- 들어갈것만 같이 생동감을 느끼며 그 모습에서
포근한 여유를 느낀다.
옥개석 4모서리에는 작은 귀꽃이 조각되었고
전각에도 반전이 있으나 낙수면의 경사는 급하고
얄상하게 조각된 용머리는 둔후하다.
이 석등은 경주 남산 천룡사자 귀부와
경기도 양주 회암사지 쌍사자석등과 더불어 조선시대 사자석등의
대표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사각형의 석등 양식은 고려초기부터 조성되었던 것인데
이곳의 사자석등은 중대석 측면의 조각이나 상대석의 양식 수법을 비롯
화사석의 화창이 2구로 된점 등이 북한 개성에 있는
고려말의 걸작이라 일컽는, 국보 제39호 공민왕의 무덤(현릉)과
왕비의 무덤(정릉)의 석등과 흡사하다고한다.
이 석등은 연판의 조각수법이나 우주의 모각에 있어서
석등과 같은자리에 남아있는 보각국사 정혜원융탑의 각부와 같아
"방형사자석등"이라 볼 수 있으므로
보각국사 정혜원융탑전 사자석등이라 일컽게 된 것이다.
그러나 조형미가 정혜원융탑과는 수법의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보아
정혜원융탑이 조성된 후에 세운 것으로 판단하여
조선 중기의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
짧은 식견의 나는 그것까지 구별할 수 있는 안목이 없다.
하지만 이곳의 여러 석조물과 같이있는 점과, 또한
위와 같은 구조에서 볼 때 이 석등은 이곳의 여러 석조물과
같은 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조선초인 1392~1394년에 조성된 것으로
보는것이 타당할듯 하다.
오늘 나는 또 하나의 조선초기 석조미술의 진수를 느껴보았다.
만져보면 싸늘한 돌들.
어쩌면 한낱, 어떤이들의 무덤이기만 한 이 돌들속에서
그곳에 담긴 철학과 의미, 그리고 그곳에 깃든 아름다움을 생각하며
때로는 기뻐하며, 감동하고
때로는 분개하며, 아파하고
때로는 한없이 안타까워하면서..세월의 풍파를 견디지 못하고
깍기고 지워지며 퇴색되어가는
이곳 유물들을 바라보면서 노천명의 시 "사슴"처럼...
어쩌지 못하는 슬픔에 긴 모가지를 하고 먼데 산을 바라본다.
그리고 우리것에 대한 애착심과 사랑을 키워나간다.
탑과 부도와 같은 석조물은
우리나라 어디에 가든 산재해 있다.
그러나 이곳 조선초기의 석물들은 여느것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기에
애착이 간다.
지금도 비는 내리고 있다.
폐사지의 쓸쓸함을 위로라도 하려는지...
인적끊긴 한적한 숲속엔 끊임없이도 비가 내리고 있다.
첫댓글 잘읽었습니다..여행시 많은 도움이 될것 같아요
장길산, 임꺽정 소설이 떠오르네요... 귀접이 즉 규수는 고려중기에 나타나는 비석의 특징으로 포항의 보경사에도 있지요. 잘 읽고 느끼고 갑니다.
아주 잘 읽었습니다. 청룡사..아주 한적한 곳에 자리잡고 있지요...다시 가서 어루만지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