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욥42:1~17 복을 눈으로 확인하는 욥 2024. 7. 28.
오늘 본문은 동방의 의인이었던 옵이 고난 중에 어떻게 살고 어떤 생각을 했는가에 대한 최종적 표현입니다. 최후의 고백이 무엇인가? 5절입니다. 7절 이하부터 최종결론이 나오지만 사실 한마디의 말하면 5절이 결론이고 고백이며 신앙입니다. 5절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나이다. 5절은 7절 이하의 많은 부분을 함축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모든 것을 자신의 귀로 듣기만 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란 표현을 사용하여 그 무엇에 대한 변화를 말합니다. 그 변화의 내용은 직접 눈으로 보는 새로운 그 어떤 것입니다.
1. 여러분, 수용이라는 것, 받아들임이 있습니다. 수용성이 있느냐? 없느냐? 라는 말도 합니다. 요즈음 실용음악, 미학이란 학문이 있습니다. 아름다움의 본질이나 형태를 연구하는 학문인데, 자연이나 인생 또는 사람들이 창작해 놓은 작품까지 광범위합니다. 수용미학이란 분야가 있습니다.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은 그 대상이 있는데 음악으로 예를 들면 그 대상이 작곡자와 연주자와 청중입니다. 작곡가는 곡을 쓰고, 연주자는 연주를 하고, 청중은 음악을 듣습니다. 각자 자기 역할이 있는데 수용 미학적 관점은 작곡가가 오선지 위에 그려 놓은 악보 상의 음표는 실상 최소한의 것이고 진실로 드러 내고자하는 생각은 악보 속에 깊이 숨겨있습니다. 연주자는 작곡가의 생략된 악보 수백 배의 생각을 연주로 찾아내서 청중에게 전달을 합니다. 그런데 연주를 통하여 겉으로 드러난 악보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듣는 청중이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말씀으로 하나님의 생각과 행동을 표시했습니다. 거기서 하나님의 진정한 뜻을 찾아야 했습니다. 목사와 지도자는 말씀으로 하나님의 진정성과 뜻을 읽어내야 하고 그 뜻을 백성에게 전달해야 합니다. 그런데 전하는 말씀을 듣습니다. 듣고 아는 것만으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삶에서 다시 생명력으로 소생되고, 만들어져야 합니다. 그러니까? 아름다움을 완성하는데 있어서 가장 책임이 있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청중입니다.
그 동안 듣는 사람의 역할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작곡가나 연주자에게 그 책임을 지웠기 때문입니다. 감동을 받지 못하는 것은 작곡가의 예술적 근원이 깊지 못하거나, 연주자들이 곡 쓴 사람의 의도를 제대로 살리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수용미학에서는 그 책임의 대부분을 청중입니다. 수용미학에서는 오늘 예배에 참여한 모든 사람에게 돌립니다. 그렇기 때문에 수동적인 청중은 아니 됩니다. 이제는 보다 적극적으로 들을 준비가 필요하고 그 준비는 작곡가와 연주자가 노력하는 수준까지 이르러야 합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심장까지, 목사의 눈높이까지 다다르는 수준이어야 합니다. 이는 받아들이는 쪽이 가장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살면서 드러나는 눈앞의 현상은 우리가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경우가 많고, 또 알고 보면 거기에는 현상보다도 훨씬 더 깊은 사실이 숨겨져 있습니다. 그래서 드러난 현실을 보면서 하나님의 의도를 신앙의 마음으로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하는 문제가 우리들이 감당해야 될 몫입니다. 바로 수용, 받아들임입니다. 드러난 현상을 어떻게 해석하며, 그것을 받아들여야 한다면 어떤 방법으로 할 것인가? 오늘 말씀은 욥이란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느닷없이 닥친 상황에 대해 치열하게 싸우고 난 후에 깨달은 사실을 승전보처럼 간증합니다. 욥의 인생은 봄처럼 화창했습니다. 모든 것이 활짝 피었습니다. 7남 3녀의 자녀와 수많은 가축과 종을 거느렸습니다. 양이 7000, 악대가 3000, 소가 500겨리, 1000마리, 암나귀 500이 있었다고 욥기 1장에서 말씀을 합니다. 동방의 제일 큰 부자이었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을 멀리하는 사람입니다. 흠 없고 정직한 의인입니다. 더 이상 다른 복이 필요 없는 행복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떨어집니다. 떼도둑이 나타나서 그 많은 가축을 한꺼번에 강탈해 가고, 종들은 살해를 당합니다. 곧 바로 비보가 이어지는데 전혀 예상 밖의 일로 전 재산이 다 날아갑니다. 마지막의 소식은 하늘이 무너질 소식이었습니다. 맏이네 집에서 함께 모여 밥을 먹고 있던 10남매가 집이 무너지면서 한꺼번에 다 깔려 죽었습니다. 슬픔을 가눌 힘조차 없는 욥에게는 발바닥부터 정수리까지 온 몸에 악성 종기가 납니다. 잿더미 위에 앉아서 기왓장으로 몸을 벅벅 긁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그의 아내는, 차라리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어버리라고 합니다. 동방 제일의 갑부요, 세상에 부러울 게 하나도 없었던 욥이었는데, 이 모든 일이 순식간에 일어났습니다.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고 받아들일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런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우리의 현실과 동떨어진 이야기이며 욥에게만 일어날 수 있는 일인가요?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현실에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여기에 대한 답이 본문에 나와 있는데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선택과 받아들임의 문제이며, 둘째는 결국 받아들여야만 한다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하는 문제이고, 셋째는 눈으로 보는 하나님이 계실 때에 어떤 또 다른 의미와 또 다른 뜻이 있는가? 입니다. 여러분, 우리들의 삶은 늘 끊임없이 어느 것이든 결정을 해야 하는 모토위에 서 있습니다. 무엇인가를 결정을 하면 그 책임은 자기가 직접 져야합니다. 여러분들이 이곳으로 오셨습니다. 동기야 어떻든 이것은 여러분이 결정한 것이고, 이제 여기서 버텨내느냐 어떠냐 하는 것은 여러분의 책임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이 결정을 하고 감당해야 될 일들이 얼마나 빈번합니까? 그런데 사실 삶에는 우리가 선택해야 될 요소도 많지만, 반대로 선택의 여지가 없는 부분들도 많습니다. 그런데 작고 자잘한 문제들은 결정으로 가능하지만 중요하고 타고 난 문제들은 결정 할 여지가 없는 것도 있습니다. 바꾸고 싶은데 바꿀 수 없는 것들이 있습니다. 요즈음 많은 사람들이 내적인 자질과 가능성보다도 외형적인 것이 중요하다고 합니다. 가문이나 외모, 피부색 이런 건 얼마나 중요합니까? 거기에 따라 삶의 질이 달라지는데요. 하지만 바꿀 수 있나요? 결정과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여러분, 태어나고 싶어서 스스로 결정을 하고 태어난 사람이 있습니까? 스스로 결정을 하고 여기 오셨습니까? 내 의지와 노력으로 여기까지 온 것 같지만, 정직하게 돌아보면 그것도 아닙니다. 결정과 선택의 여지없이 어떤 불가피한 상황 때문에 인생행로가 결정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중요한 문제는 무엇입니까? 바로 받아들임과 수용의 문제입니다. 여러분, 인생은 무엇을 결정하느냐에 달린 것이 아니라 어떻게 수용하고 어떻게 받아 들이냐에 달려 있습니다. 좀 더 강조하면, 한 사람의 인생은 무엇을 선택하느냐에 달린 것이 아니라, 신앙 안에서 주어진 상황을 어떻게 받아 들이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자포자기나 포기가 아닙니다. 여러분! 받아들일 때 더 풍부해 질 때가 있습니다. 많은 문제들 역시 선택을 통해서가 아니라 받아들임으로써 해결될 때가 있습니다. 10 남매가 하루아침에 죽어나간 것과 노비들과 양떼들이 다 타 죽은 것과 떼도둑이 몰려와서 가축들을 뺏어간 것과 머리부터 발끝까지 부스럼이 난 것 중에서 욥이 선택하고 결정을 한 것이 어디 있습니까? 하지만 그가 다시 행복을 찾은 것은, 기쁨을 찾은 것은 그 모두를 받아들이는 것에서부터 시작이 됐습니다. 여러분, 사람이 불행해지는 것은 여러 경우가 있지요? 하지만 가장 심각한 불행은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할 때입니다. 사람을 불행하게 하는 것은 고난 때문이 아닙니다.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들을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태도 때문일 때가 있습니다. 실패하는데 실패하지 않은 척 합니다. 연약함이 속속 드러나는데 그 연약함을 계속 숨기려고 합니다. 아프고 괴롭고 고통스러운데 감추고 숨기면서 삶의 울타리를 만듭니다. 그럴 때 사람은 불안하고 초조하며, 마음엔 화가 쌓이고 평안이 없습니다. 수용할 것을 수용하지 않고, 받아들여야 될 것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받아들이지 않음으로 삶의 진행이 지체가 되고, 길이 열리지 않을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수용하지 않음으로 홧병에 죽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여러분! 그러면 받아들이고 수용하는 것은 쉽습니까? 이것 또한 수용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받아들이는 데는 고통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이 고통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삶을 피하려 합니다. 고통은 결코 피해야 할 어떤 것이 아닙니다. 고통을 해결하는 최선의 방법은 고통을 겪는 것입니다. 우리 몸도 그렇지요? 의학적으로 우리가 느끼는 고통은 몸의 건강을 유지하기 위한 매우 중요한 메커니즘입니다. 즉 고통은 몸에 이상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생명 시스템의 일부고, 건강의 불균형을 경고해 주는 중요한 기능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육체의 고통을 느낀다는 것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메커니즘이 힘차게 작동하고 있다는 또 다른 뜻입니다. 영적인 고통을 느끼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기 위한 신앙이 작동한다는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고, 고통을 느끼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은 대단히 우매한 일입니다. 흔히 문둥병이라고 부르는 나병은 한센 바이러스라는 세균이 병을 일으킵니다. 그런데 이 한센 바이러스는 처음엔 사람의 신경세포와 친화력을 유지한다고 하다가 점차 신경세포들을 파괴하고, 마침내 고통을 느끼게 하는 신경까지 파괴합니다. 그래서 나병환자는 자기 발가락이 떨어져 나가고 코가 뭉개져도 고통을 느끼지 못합니다. 오늘날 고통을 느끼지 못하거나 혹은 고통을 피하려고 애쓰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영적환자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여러분, 알고 보면 육체적 고통이든 영적 고통이든 고통은, 오히려 생명을 위한 축복의 조건입니다. 고통을 통해서 더 건강하고 온전하게 회복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고통을 피하려고 애쓰지 마시고, 고통을 겪어내고 고통을 적극적으로 그리고 용감하게 받아 드리고 싸워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먼저 그렇게 수용하고 받아들이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1. 그러면 어떻게 고통을 피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삶으로 바꾸고 실현시킬 수 있을까요? 여러분, 스스로 수용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스스로 받아들이는 것은 어렵지만, 은혜를 주시고 의미를 달리하면 됩니다. 그러니까? 생의 모든 분야에서 다 개혁 같은 변화가 일어나야 되는데, 저 사람이 어제 알던 그 사람이 맞아? 할 정도가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을 진정으로 받아들이는 신앙이고, 그렇게 받아들임이 수용의 진리를 깨달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욥은 처음에 모든 재산과 자녀를 잃는 참담한 일을 겪고서도 그 모든 일을 잘 받아들이는 것 같았습니다. 1:21. 모태에서 적신으로 나왔은즉 또한 적신으로 돌아갈지라. 빈 몸으로 왔다가 빈 몸으로 갈 사람들, 주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가져가신 분도 하나님이시라고 멋지게 고백을 했습니다. 그러나 욥은 때때로 자신에게 닥친 불행과 고난을 제대로 수용하지 못했고,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3;2-10절까지 욥은 스스로 자신의 생일을 저주하면서 차라리 내가 태어나던 날이 사라져 버렸더라면, 차라리 그 밤이 아무도 잉태하지 못하는 밤이었더라면, 차라리 어머니의 태가 열리지 않았더라면, 차라리 하나님이 돌아보시지 않았더라면, 차라리 빛도 그날에 비치지 않았더라면, 차라리 태에서 나오지 않았다면, 그렇게 한탄하며 고통스럽게 울부짖었습니다. 수용하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말로는 되는데 마음으로 안 되었습니다. 여러분, 말로는 되는데, 마음으로는 되는데 왜 안 될까요? 모든 재물과 사랑하는 자식을 한 순간에 모두 잃었는데 얼마나 고통스런 시간이었을까요? 그런데 오늘 욥기 마지막 장에서 마침내 욥이 하나님을 진정으로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무엇이라고 합니까? 42:3.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입니까 나는 깨닫지 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깨닫지 도 못하고, 스스로 알 수 없는 말을 했었다고 고백합니다. 4-5절. 내가 말하겠사오니 주는 들으시고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무슨 간구를 합니까? 잘 알지도 못하면서 주님의 뜻을 흐려놓은 사람이 바로 자신이라고 합니다. 깨닫지 못하면서 함부로 말한 사람이 바로 자신이라고 합니다. 지금까지는 귀로만 들었는데, 이제서야 눈으로 주님을 본다고 합니다. 지금부터는 자신의 주장을 거두어들이고, 눈으로 본, 그래서 이제는 은혜와 복이 보이는 주님에 대한 생각을 이전과 바꾸고 현재도 티끌과 잿더미에 위에 앉아 있을지라도 무한하신 능력과 사랑의 하나님을 받아들이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욥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받아들이자 그제서야 자신이 겪은 그 모든 일들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됩니다. 여러분, 욥이 그 동안 하나님을 몰랐을까요? 욥이 지금까지 하나님을 믿지 않았을까요?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믿었지만, 하나님을 참 하나님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귀로만 들었습니다. 생각만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눈으로 실제의 하나님을 봅니다. 여러분, 진실로 하나님을 창조주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 복 주시는 하나님으로 믿는다면, 진실로 훈련을 시키시고, 예비하시고, 동행하시고, 져 주시는 하나님을 믿는다면, 신뢰를 한다면, 끝까지 극진한 사랑을 베푸시는 하나님을 믿는다면, 삶의 모습이 전혀 다르게 됩니다. 여러분, 회개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눈으로 본 하나님을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결코 어렵지 않습니다. 여러분, 요사이는 많이 없지만 그래도 명맥을 유지하면서 공연하는 써커스 단이 있습니다. 그 써커스 공연에서 가장 묘미가 있는 종목이 공중 그네뛰기입니다. 지상 10 m 쯤 되는 높은 곳에 그네를 매달아 놓고 두 사람이 양쪽에서 그네를 타는 공연입니다. 그네타기의 묘미는 두 사람이 그네를 타다가 한 사람이 그네에서 손을 놓고 회전할 때, 다른 그네에 매달려 있던 사람이 손 놓은 파트너의 손을 잡아주기 때문입니다. 만약 손을 놓치면 물론 보이지 않는 닐이 있지만 손을 놓은 사람은 아래로 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공연에서 매달려 있는 사람보다 그네에서 손을 놓는 사람의 역할이 더 중요합니다. 손을 놓는 사람은 반드시 명심해야 할 두 가지 원칙이 있는데, 하나는 자기 생명을 붙들어 주고 있다고 믿고 있던 그네에서 과감하게 손을 놓는 공연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그네에서 손을 놓은 후에, 절대로 파트너의 손을 자기가 잡으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파트너가 자기 손을 잡도록 완전히 믿고 맡겨야 이 묘기를 성공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무엇인가 느낌이 오십니까? 놓기와 맡기기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먼저 무엇인가 잡고 있던 손을 놓는 것입니다. 살아오면서 많은 것을 꼭 붙잡고 있지요? 안전하다고 믿어왔던 것들과 확실하다고 믿어왔던 것들과 고집스럽게 붙들고 있던 것들이 있지요? 이런 것들에서 손을 놓아야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자기 자신의 능력의 한계를 받아들이고 손을 놓기까지는 엄청난 고통과 번민이 됩니다. 하지만 그 용감하게 꼭 움켜지고 있던 것에서 손을 놓아야 합니다. 손을 놓아야 다른 누구의 손이 나를 붙잡는다는 확신이 있으면 됩니다. 그러면 보이는 평안이 찾아옵니다. 그런데 평판과 인정과 전문 분야에서의 인지도 같은 것에 목매고 있습니다. 할 수 있는 한 놓치지 않으려고 합니다. 꼭 붙잡고 있었고 목숨처럼 여겼던 가치에 손을 놓을 때 비로소 열리게 됩니다. 절대적인 줄 알고 붙잡았던 것을 놓는 사람들에게 곧 더 큰 하나님의 손이 붙잡아 줍니다. 나의 시대는 하나님의 손에 있다는 다윗은 삶의 모든 것을 놓았습니다. 다윗이 떨어져 생명이 끝났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타이밍을 놓치지 말고 더 늦기 전에 그네에서 손을 놓으시고 하나님이 내 빈 손을 잡으시도록 완전히 내 맡겨야 합니다. 그 능숙하고 세련된 손을 가지신 하나님께서, 강하고 힘센 팔을 가지신 하나님께서 나의 손을 굳게 잡아주십니다. 실수하지 않기 때문에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놓고 맡기는 이것이 하나님을 받아들이는 복입니다. 이삭은 힘써 판 자기 우물에서 손 놓았습니다. 그래서 브엘세바를 얻었습니다. 마태와 바울이 그렇습니다. 누가는 의사에서 손을 놓았습니다. 하지만 정확하신 주님의 손이 이들을 잡았고 가장 좋은 디자인으로 각각 세워 주셨습니다. 손을 놓고 확실한 것을 붙잡게 되시는 모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 눈으로 하나님을 뵙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뵙고 눈으로 경험이 되고 체험이 되어야 합니다. 왜 하나님을 눈으로 볼 수 있어야할까요? 눈으로 보는 그때부터 잃어버리고, 빼앗겼던 그 모든 것이 회복되기 때문입니다. 눈으로 볼 수 있을 때부터 돌아오기 때문입니다. 눈으로 볼 수 있을 때부터 용서가 되고, 축복과 계산이 되지 않는 복을 받기 때문입니다. 마13:16. 너희의 눈은 봄으로 너희의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눈은 보아야 복이 있고 귀는 들어야 복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 뿐인가요? 시126:2. 그 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 입에 웃음이 가득하고, 혀에 찬양이 계속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어떻게 물위를 걸을 수 있습니까? 배 밖으로 나와야 물위를 걸을 수 있습니다. 어떻게 기적을 경험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42;5-6.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 욥은 귀로만 들어왔던 하나님을 이제는 눈으로 볼 정도로 확실한 신앙인이 되었습니다. 눈으로 하나님을 보게 되는 욥이 더욱 풍성한 축복을 누리게 됩니다. 욥42;10-17절의 내용입니다. 10절. 이전의 배가 됩니다. 17절. 여호와께서 욥의 모년에 복을 주사 처음 복보다 더하게 하시니 그가 양 일만 사천과 약대 육천과 소 일천 겨리와 암나귀 일천을 두었고 또 아들 일곱과 딸 셋을 낳았으며 그 후에 욥이 일백 사십 년을 살며 아들과 손자 사 대를 보았고 나이 늙고 기한이 차서 죽었더라. 이 땅에서 잘되고 형통하며 장수하는 복을 받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벧전4;12-13절.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그리스도의 영광에 이르는 복입니다. 여러분, 감당할 수 없고 받아들일 수 없지요? 피하지 마시고 오히려 감사함으로써 받으시고 인내로써 이겨나가면 됩니다. 복의 근원과 이름의 창대와 모든 민족 가운데 의뜸이 어떻게 이루어집니까? 어떻게 100세에 낳은 아들을 번제로 태연하게 드리게 됩니까? 어디서 이런 신앙이 나옵니까? 계속되는 아픔의 현실을 통하여 수용하고 받아드리고, 손을 놓고 맡김으로서 만들어진 체험의 결실이며, 인내의 열매입니다. 그래서 히11;17-19.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 저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17절의 말씀에서 아브라함이 어떤 사람이라고 합니까? 약속을 받은 자입니다. 담보로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약속 때문에 시험이 오고, 그 시험을 통하여 수용하고 받아들임으로서 약속대로 축복을 받았습니다. 어느 때에 받습니까? 눈으로 하나님을 뵐 수 있어야 받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약속을 받아드리시고 손을 놓으시고 맡길 수 있는 믿음의 눈으로 보실 수 있는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