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불가(佛家)에서는 가뭄이 매우 심한데 알지 못하겠다.
우리 승려 동지들도 목마름을 느끼고 있는지.
--- 한용운, 『조선불교유신론』 머리말.
20세기가 곧 마감된다. 다음 세기의 역사가들은 20세기의스님들에 의해 저술된 불교 고전의 총서를 편집하며, 20세기의 한국불교사를 평가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맨 앞머리에 만해 한용운 스님의 『조선불교유신론』이 자리하게 될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그만큼 『조선불교유신론』은 고전적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여전히 문제작으로 살아남을 것이기에.
만해가 소외된 까닭은
언제나 만해는 세계사적 관점에 서서 일주문 밖을 향하고 있었다. 스님들의 설법이 ‘절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함’(70쪽)을 한탄하였던 그는, 스스로 불교의 벽 속에 안주하길 거부하였다. 독립을 부르짖고, 시와 소설을 쓰고, 불교유신 운동의 조직에 열성이었다. 그런 면에서 그는 ‘스님은 이렇게 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타파한 격(格) 밖의 인물이었던 셈이다. 만해는 끝내 변절하지 않은 독립운동가로, 우리 시의 한 정점을 마련한 시인으로 평가를 받아왔다.
그러나 불교계 내의 만해에 대한 인식은 그다지 긍정적이지 못했다고 하겠다. 승단 안의 그에 대한 평가는 때로 엇갈렸으며, 그의불교사상에 대한 연구 역시 깊이있게 이루어지지 못해 왔다. 여기에는 ‘정화(淨化)’라는 현대불교사의 상처가 숨겨져 있기도 하지만, 그에게도 일정한 책임이 있다. 그가 져야 할 책임은 바로 『조선불교유신론』에서 주장한 승려취처론에 있다. 그의 이러한 주장이 잘못되었음을 외면하거나 변호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무엇보다 (독신수행은) ‘윤리, 국가, 포교, 교화에 해롭다’(120-122쪽)는 그의 논리는 설득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조선조 오백 년을 통해서 불교를 탄압하던 유교의 논리에 항복하고 만 셈이며, 세간과 출세간을 구분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조선시대 유학자들은 출가하여 승려가 되는 것은 반윤리적인 일이며, 반사회적인 일이라고 주장하지 않았던가.
이러한 부분적 오류가 있었다고 해서 만해의 정신이나 『조선불교유신론』을 전적으로 외면해도 좋을 것인가? 아니다. 그래서는 안 된다. 그렇기에 『조선불교유신론』을 다시 한번 읽어보고자 하는 것이다. 3.1절 아침에, 그가 외쳤던 만세소리를 들으면서.
세상을 구하기 위한 실학(實學)
만해가 쓴 “머리말”에는 1910년(경술) 12월 8일이라 적혀 있으나, 이 책이 정식으로 출판된 것은 1913년 5월 25일이었다. 당시의 불교 전통은 이와같은 혁신적 논리가 전개될 사상적 뿌리를 가지고 있었던 것일까? 아마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만큼 조선불교의 현실은 암담했다. 그렇다면 만해의 사상적 부리를 어디서 찾을 수 있는가?
우선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양계초(梁啓超, 1874-1929)의 영향이다. 양계초는 근대 중국의 사상가, 정치가였는데, 『음빙실문집(飮氷室文集)』이 그의 전집이다. 만해는 이 『음빙실문집』을 읽었으며, 『조선불교유신론』에서 4회에 걸쳐서 ‘양계초’를 직접 거명하고 있다. 한 예로 “승려의 단결”(141-146쪽)에서 만해는 방관자의 여섯 종류를 이렇게 말하고 있다.
첫째,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지 못하는 혼돈파(混沌派)
둘째, 자기의 안락만 챙기는 위아파(爲我派)
셋째, 탄식만 하는 오호파(嗚呼派)
넷째, 비웃거나 비평만 일삼는 소매파(笑罵派)
다섯째, 되지 않을 일이라며 미리 포기하는 포기파(抛棄派)
여섯째, 아직 때가 아니라며 때를 기다린다는 대시파(待時派)
이 방관자의 여섯종류는 바로 양계초가 쓴 「방관자를 꾸짖는 글」을 직접 인용한 것이다. 그분만 아니라 양계초는 유일하게 『조선불교유신론』에 등장하는 당대의 인물이 아닌가. 칸트, 베이컨 등 서양의 많은 철학자나 종교인들을 인용하기도 하지만, 이는 모두 『음빙실문집』에서 재인용한 것이다. 이렇듯 『조선불교유신론』의 올바른 이해를 위해서도 양계초의 『음빙실문집』과의 비교는 절실하다 하겠다.
그렇지만 만해사상의 뿌리를 밖에서만 찾을 수는 없다. 우리의 사상사 속에서 어떤 계보를 찾을 수는 없을까? 나는 여기서 하나의 가설을 세워 본다. 바로 실학(實學)에서 만해사상의 뿌리를 찾아볼 수는 없을까? 나는 『조선불교유신론』을 읽을 때마다 실학을 떠올리곤 한다. 현실과 유리된 관념 체계로 흐르는 성리학을 비판하면서, 민중들의 생활에 무엇인가 이익을 줄 수 있는 학문을 하고자 했던 실학자들의 호흡을 느낄 수 있다. 『조선불교유신론』의 각론(各論)은 불교를 ‘평등주의와 구세주의’(31쪽)로 재해석한 만해의 현실을 구하기 이한 구체적인 방법론이다.
구세주의, 그것은 바로 실학불교(實學佛敎)의 본래면목이다. 이러한 실학적 전통은 현실을 구제하기 위한 학문을 역설하였던 다산 정약용(1762-1836)을 떠올리게 하는 것이었다. 실학 ⟶ 개화파 ⟶ 만해로 이어지는 전통의 맥락 속에, 1910년대의 만해는 놓여있었던 것이 아닐까.
석가로 돌아가는 불교
근래 들어 아함경(阿含經)의 복권을 통하여 석가모니 부처님에게로 돌아가자는 운동이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듯하다. 그런데 이미 『조선불교유신론』이 아함의 근본불교로 돌아가자는 소리를 높이 외치고 있었다. 특히 “염불당의 폐지”, “불가에서 숭배하는 소회(塑繪)”, “불가의 각종 의식” 등을 보라.
불, 보살로 말하자면 이름은 달라도 이치에 있어서는 하나이다. 그러기에 어
느 한 분을 들어 다른 불보살을 통합하는 경우에는 오직 석가모니 그분만이
적합할 것이다.(98쪽)
이는 불교가, 대승불교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또 우리나라에 들어와 토착화되는 과정에서, 조선시대의 탄압을 견뎌오는 과정에서 신앙의 대상이 너무 많이 늘어났으며, 그 결과 근본에서 멀어졌다는 판단에 기인한다. 나한(羅漢), 독성(獨聖), 칠성(七星), 시왕(十王), 신중(神衆), 천왕(天王), 조왕(竈王), 산신(山神), 국사(局司) 등이 그같은 경우인데, 이들을 신앙의 대상으로 섬기지는 말자는 입장이다. 오직 부처님 한분이면 족하다는 것이다.
마찬가지 관점에서 의식(儀式)에 대한 그의 비판 역시 날카롭다. “또 부처님에 대한 공양은 법공(法供)이라야 의의가 있고, 반공(飯供)은 의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일 반공을 일삼는다면 부처님을 모독하는 것일 뿐”(104쪽)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들이 그대로 숭용된 것은 아니다. 물론 만해의 주장에 반대하는 논리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같은 주장에 담긴 만해의 입장을 정확히 이해하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그가 근본불교/초기불교적 관점에 입각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근본불교의 입장에서 현실적인 불교의 모습을 비판하고 있는 것인데, 만해의 그러한 태도는 매우 소중한 태도가 아닐 수 없다. 불교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이며, 불자는 늘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을 반성의 거울로 삼아야 하기 때문이다.
불교의 유신을 위한 만해의 노력은 『조선불교유신론』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3.1운동 이후에 쓰여진 불교 논설들은 『조선불교유신론』의 한계를 극복하며, 조선불교의 발전을 가로 막는 벽이 바로 일본 제국주의임을 인식하기에 이른다.(이들 논설에 대해서는 전보삼 편저, 『푸른 산빛을 깨치고』, 민족사, 참조)
책을 덮으며, 나는 부끄럽다. 만해, 그는 영원히 살아있는 청년인데 ---. 나는? 우리는?
(『책안의 불교, 책밖의 불교』)
첫댓글 교양수업 교재에 들어갈 글입니다. "님의 침묵"을 말하는데, 참고로 조선불교유신론도 이야기할 것 같아서입니다. 나무아미타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