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달래 연정
그는 화려하지 않다. ‘날 좀 봐 주이소’라며 나부대지도 않는다. 온실 속에서 핀 것들은 화장을 지나치게 한다. 붉은 조명 아래 정육점 고기 같다. 하지만 그는 누가 봐 주지 않아도 절로 피고 진다.
멀리서 보면 더 장관이다. 온 산이 붉게 물들면 이내 계절이 돌아 온 것을 안다. 꽃은 한 때를 위해 존재한다. ‘화무십일홍’이라고 했던가. 하지만 그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말이다. 그를 기다리며, 앞산을 바라보는 것이 습관이 된지 수 십 년이다.
내 고향 달빗골은 봄이 오면 그들의 잔치였다. 임휴사를 지나 삽작골에 이르면 계곡 양 옆에 지천으로 피어 눈을 어디에 둬야할 지 몰랐다. 향기로운 꽃지짐에 눈과 귀가 멀었다고 했던가. 앉은뱅이 도토리나무를 꽃꽂이 소재로 하여 우뚝 세워진 꽃대, 이를 받치고 있는 수반인 산은 언제나 든든한 어머니의 자태였다. 해마다 찾아오는 낯설지 않은 손님, 연분홍 미소를 닮았던 유년의 그 아이가 생각날 때면 무언가 목울대를 울컥울컥 넘어 왔다.
산 밑 동네라 어릴 적부터 나무를 하러 다녔다. 겨울방학이나 휴일이면 하루 두 번을 다녔다. 아버지는 어릴 적부터 내게 맞는 지게를 만들어 주셨다. 열 살짜리 어깨에 맞는 지게는, 허리에 매고 다니는 책 보따리만큼 소중한 것이었다. 그 날도 휴일이라 아침나절에 일찌감치 한 짐을 해 놓고, 마른 나무를 하러 산을 올랐다. 가까운 산엔 이미 부지런한 이들이 거치고 간 터라 마른 나무는 제법 깊이 들어가야 했다. 제법 어른의 흉내를 낼 만큼 나무의 높이가 올라갔다. 산에 가선 나무 욕심을 내지 말아야 하는데도 기어이 한 아름 더 얹고서야 마지막 단을 묶었다. 흐드러지게 핀 꽃을 한 움큼 꺾어 나뭇짐 위에 꽂았다. 제법 짐 꼴이 어우러졌다.
휴일 낮이라 읍내 사람들이 꽃구경을 많이 나왔다. 그깟 꽃구경을 하러 삼삼오오 몰려드는 게 이상하였다. 마주치기 싫어 서둘러 내려오고 싶었지만 그날따라 짐이 더 무거웠다. 동네를 발치에 두고 쉬고 있으려니 지나는 이들마다 힐끔거렸다. 길은 외길이라 그들의 시선을 피해 갈 수는 없었다. 흔히 있는 일이라 태무심하기로 했다. 하지만 어쩌랴, 그들의 눈길을 외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낯익은 아이의 얼굴이 눈에 들어온 건 막 지게를 지려는 찰나였다. 부모님의 손을 잡고 꽃놀이를 하러 다가오고 있는 그 아이는 다름 아닌 같은 반의 짝꿍이었다. 학급에선 그래도 부반장까지 하는 내가, 그 아이에게 감춰둔 속내를 들켜버린 듯 얼굴이 화끈거렸다.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외면을 해야 했다. 피하는 게 최우선 방법이었다. 얼른 나뭇짐 뒤로 몸을 돌렸다.
‘아뿔싸!’ 그만 받치고 있던 지게작대기에 팔이 걸리고 말았다. 삭정이 나뭇짐은 여지없이 내 머리 위로 곤두박질 쳤다. 꽂아두었던 꽃묶음은 여기저기 흩어져 널브러졌다. 날카로운 나뭇가지에 찔려 선홍색 피가 뚝뚝 떨어졌다. 아픈 건 둘째 문제였다. 정작 놀란 건 나보다 그 아이였다.
다음날, 학교에 갈까 말까 망설였다. 그 아이를 어떻게 볼까. 벌써 학교에 와서 다른 아이들에게 소문을 다 퍼뜨렸는지도 모른다. 평소 차분한 성격의 그녀인지라 조금은 위안은 되었지만 마음이 영 내키지 않았다. 앞으로 그 아이를 어떻게 볼까 생각하니 눈앞이 아득하기까지 했다.
느지막하게 교실에 들어갔다. 마침 선생님이 오시기 전이라 아이들은 시끌벅적하였다. 그런데 누구 하나 나를 눈여겨보는 이들이 없었다. 평소와 같이 그녀는 다소곳하게 자리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나를 보고 살짝 미소를 짓더니,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이마에 난 상처를 바라보았다. 외면하며 자리에 앉았다.
누가 갖다 놓았을까, 선생님 책상 위엔 진달래꽃이 꽂혀있었다. 힐끔힐끔 그 아이 바라보듯 꽃을 훔쳐봤다. 아직도 그 연분홍 꽃은 내 가슴 속에 자리 잡고 있다.
첫댓글 진달래꽃과 어린 소녀의 미소는 무쇠같은 소년의 마음을 미풍에 흔들리는 갈때와 같이 흔들고 말았구먼...책갈피에 숨겨놓았던 소년의 편지를 읽는듯하여 입가에 웃음이...친구야, 늘 소년으로 살자!
연분홍 치마와 진달래가 어울려 휘날리는것 같은 아련한 추억속의나의 애기인것같다 진달래와 좋은글보고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