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진성이씨 후손들이여 ! 원문보기 글쓴이: 김태원
晦退辨斥疏 [회재와 퇴계를 분별하여 배척해야 한다는 상소]
臣少事曺植, 重被開發之恩, 事有如一之義, 晩知於成運, 開心相與, 不視爲後輩, 分
義雖有輕重, 俱可謂之師生也。 臣嘗見故贊成李滉誣毁曺植, 一則曰“傲物輕世”, 一
則曰“高亢之士, 難要以中道”, 一則曰“老、莊爲崇”。 目成運以淸隱, 認爲偏小一節
之人。 臣心嘗憤鬱, 思一辨明, 許多年矣。]
신이 젊어서 조식(曺植)을 섬겨 열어주고 이끌어주는 은혜를 중하게 입었으니 그를 섬김에 군사부
일체(君師父一體)의 의리가 있고, 늦게 성운(成運)의 인정을 받아 마음을 열고 허여하여 후배로 보
지 않았는데, 의리는 비록 경중이 있으나, 두분 모두가 스승이라 하겠습니다. 신이 일찍이 고(故)
찬성 이황이 조식을 비방한 것을 보았는데, 하나는 상대에게 오만하고 세상을 경멸한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높고 뻗뻗한 선비는 중도(中道)를 요구하기가 어렵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노장(老莊)을
숭상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성운에 대해서는 청은(淸隱)이라 지목하여 한 조각의 작은 절개
를 지키는 사람으로 인식하였습니다. 신이 일찍이 원통하고 분하여 한번 변론하여 밝히려고 마음
먹은 지 여러 해가 지났습니다.
昔司馬光非孟子, (李遘)[李覯]、鄭叔友誣毁孟子, 辭極悖慢。 余允、 朱文公辨明, 極其底蘊。 朱
文公受誣於陸學, 陳建《編年》以明其蔀。 孟子、朱子, 日月也, 人雖欲誣毁, 亦何傷焉? 三君子猶
且爲力辨而不置, 況其下者乎? 植與運, 生同一世, 志同、道同。 以太山高喬嶽之氣、精金美玉之質,
加學問篤實之功, 小而交與辭受之間, 大而行藏出處之際, 無愧古人。 井井規模, 皆可師範, 謂之聖
門之高蹈、盛世之逸民可也。 不但一世之人, 聳動於觀感之間, 百世之下, 聞者亦宜興起, 有非區區
文字之學所能致者。
옛날에 사마광(司馬光)이 맹자를 비난하고, 이구(李遘)와 정숙우(鄭叔友)가 맹자를 비방하여 그 말
이 극도로 패악하고 거만하였습니다. 이에 여윤문(余允文)과 주문공(朱文公)이 오묘한 것을 극도
로 변론하여 밝혔습니다. 또 주문공이 육상산(陸象山) 학파의 비난을 받자 진건(陳建)이 《편년(編
年)》을 지어 그 부(蔀)를 밝혔습니다. 맹자와 주자는 해와 달입니다. 사람이 비방하고자 한들 무
슨 지장이 있겠습니까마는 세 분 군자께선 그래도 힘써 논변하여 내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하물
며 그보다 못한 사람이야 뭐라 할 말이 있겠습니까. 조식과 성운은 같은 시대에 태어나 뜻이 같고
도가 같았습니다. 태산교악(泰山喬嶽) 같은 기(氣)와 정금 미옥(精金美玉) 같은 자질에 학문의 공
부를 독실히 하였으니, 작게는 사귀고 주고 거절하고 받는 사이와 크게는 행하고 감추고 나가고 들
어앉는 즈음에 고인에 대하여 부끄러움이 없었습니다. 바르고 바른 규모는 모두 사범(師範)이 될
만하니, 성문(聖門)의 고상한 길을 걷는 사람이며 성세(盛世)의 숨은 어진이라고 함이 옳을 것입니
다. 단지 한 세상의 사람들이 보고 느끼는 사이에 권면될 뿐만 아니라 백세의 후에 듣는 자들도 역
시 흥기될 것이니, 구구한 문자의 학문으로 이룰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
滉與二人, 共生王國, 又同一路, 平生未嘗識其面目, 又無一席麗澤之和。 而一向誣毁, 至於已甚, 臣
嘗爲之辨曰, 李滉以科目發身, 不全進、不全退, 依違譏世, 自以爲中道。 植與運, 早廢科業, 鏟彩山
林, 守道不撓, 被召不起。 滉遽認爲詭異之行、老莊之道, 殊不知。 《易》不云乎? “不事王侯, 高尙
其事”。 孔子曰: “志可則也”, 程子又爲之引證曰: “伊尹・太公望之始、曾子・子思之徒是也。” 伊尹
之耕莘, 呂望之居海, 曾子、子思之不仕, 果是輕世過中, 爲老、莊之行者乎? 況乾初之“潛龍勿用”,
艮初之“艮趾永貞”, 遯之“執用黃牛之革”, 節之“不出戶庭”爻義, 滉果以爲索隱之一爻, 行怪之一義,
而伏羲、文王、周公、孔子, 亦當爲不中之指南, 老莊之祖宗耶? 其論人、論道, 大失聖賢之旨, 若非
見識之未透, 其爲私意之蔽惑明矣。
이황은 두 사람과 한 나라에 태어났고 또 같은 도(道)에 살았습니다만, 평생 한 번도 얼굴을 맞댄
적 없고 자리를 함께 한 적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일관되게 이토록 심하게 비방하였는데, 신이 시
험 삼아 그를 위해 변론하겠습니다. 이황은 과거로 출신하여 완전히 나가지도 않고 완전히 물러나
지도 않은 채 서성거리면서 세상을 기롱하고 스스로 중도라 여겼습니다. 조식과 성운은 일찍부터
과거를 단념하고 산림에서 빛을 감추었고 도를 지켜 흔들리지 않아 부름을 받아도 나서지 않았습
니다. 그런데 황이 대번에 '괴이한 행실과 노장의 도'라고 인식하였으니, 너무도 모르는 것입니다.
《주역》에 이르지 않았습니까. ‘왕후(王侯)를 섬기지 않고 고상(高尙)을 일삼는다.’라고 하였는
데, 공자가 이에 대해‘그 뜻이 법칙이 될 만하다.’ 하였고, 정자가 또 이에 대해 증거를 대기를 ‘이윤
(伊尹)과 태공망(太公望)과 같은 인물의 시초이고 증자(曾子)·자사(子思)의 무리다.’고 하였습니
다. 이윤이 신(莘)에서 농사짓고 여망(呂望)이 바닷가에서 살고, 증자와 자사가 벼슬 안 한 것이 과
연 세상을 경멸하고 중도를 지나쳐 노장의 행동을 벌인 짓이란 말입니까? 더구나 건괘(乾卦) 초구
(初九)의 ‘잠룡(潛龍)이니 쓰지 말 것이다.’와 간괘(艮卦) 초륙(初六)의 ‘첫 움직임을 그친 것이니
길이 곧다.’와 돈괘(遯卦)의 ‘잡기를 누런 소의 가죽을 쓴다.’와 절괘(節卦)의 ‘문앞을 나서지 않는
다.’는 등등의 효사(爻辭) 뜻을 이황이 과연 괴벽한 이치를 탐구하기 위한 효이고 괴이한 행실을 하
기 위한 의의라고 여긴다면, 복희(伏羲)와 문왕(文王)과 주공(周公)과 공자는 중도로 길을 제시한
사람이 아니고 노장의 조종(祖宗)이란 말입니까? 그가 사람을 논하고 도를 논하는 것이 크게 성현
의 뜻을 잃었으니 식견이 투철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면 사사로운 뜻에 가리고 의혹되었음이 분명
합니다.
(故朱文公曰: “楊雄將顔子, 只做箇塊然自守底人。 近世論顔子幾於釋、老之空寂”, 其正此之謂
也。) 且《中庸》, 子思傳道之書。 其曰: “索隱行怪, 過中者也, 中途而廢, 不及者也, 遯世無悶, 不
見是而不悔, 依乎中庸之君子也”, 夫豈非道而子思書之, 以詔後學哉? 若以遯世不悔爲非中道, 則是
子思爲謬妄之說, 以欺後人。 不獨子思自不免過中, 舜居深山之中, 木石之與隣, 麋鹿之與遊, 是亦
過中之一失, 而世無唐堯, 終焉而已, 豈得爲用中之大聖? 簞瓢不改之顔子, 終身不仕之李侗、蔡元定
諸人, 亦且入於高亢老、莊之題目中矣。
그러므로 주문공이 말하기를 ‘양웅(楊雄)이 안자(顔子)를 단지 일개 흙덩이 처럼 자신만 지키는 사
람으로 여기었다. 그래서 근세에 안자를 석노(釋老)의 공적(空寂)에 가깝다고 논하고 있다.’ 하였
으니, 바로 이런 경우를 두고 말하는 것입니다. 또 《중용(中庸)》은 자사께서 도를 전한 책입니
다. 그 책에
"괴벽한 이치를 탐구하고 괴이한 행실을 하는 것은 중도에 지나친 것이고, 중도에서 그만두
는 것은 미치지 못한 것이고
세상을 피해 있어도 근심이 없고, 인정받지 못하여도 후회하지 않는다는 것은 중용에 따른
군자이다."
라고 하였는데, 어찌 도가 아닌 것을 자사께서 써서 후학에게 일러주었겠습니까? 만약 '세상을 피
해 있으면서 후회하지 않음'을 중도가 아니라고 한다면 이는 자사가 요망한 말로 후인을 속인 것이
됩니다. 그렇다면 자사만 중도에 어긋남을 면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순임금도 깊은 산속에 살면서
나무나 돌과 이웃하고 사슴과 함께 놀았으니 이 역시 중도에서 지나친 하나의 잘못으로 세상에 요
임금이 없었다면 그냥 그렇게 세상을 마쳤을 것이니, 어찌 중도를 행한 대성(大聖)이 될 수 있겠습
니까. 빈곤한 생활을 바꾸지 않은 안자와 종신토록 벼슬 안 한 이동(李侗)·채원정(蔡元定) 등 역시
'높고 뻣뻣한 노장의 무리'라는 제목 가운데 들 것입니다.
(蓋中, 無定體, 隨時而在, 時行、時止, 或進或退, 合於時義, 則俱不失爲中。 故禹、稷、顔子, 各自
爲中, 如欲求中於禹、稷、顔子之間, 有何一片地頭, 可据而爲中也?) 此見高尙自爲中庸, 而反斥爲
異端, 將恐天下萬古, 長夜冥冥, 陋巷屢空, 不復有顔子之時中, 而知進而不知退, 胡廣之中庸, 滔滔於
世代間。 以此而言, 滉之所謂中, 殊失聖賢之旨, 灼然可見矣。 況曺植、成運, 雖曰“肥遯”, 往在先
朝, 被召趨朝, 一伸在君之志, 累上封章, 眷眷以治安時務爲言, 此果隱僻之理、詭異之行乎? 年垂七
十矣, 豈肯以致事之秋, 爲筮仕之日乎? 舍車還山, 賁趾而沒, 此果過中行怪之事乎? 老、莊輕世之學
乎? 臣竊惑之。
대개 중(中)은 정해진 형체가 없이 때에 따라 있는 것이니, 때에 따라 행하고 때에 따라 그치거나,
나아가거나 물러나거나 함이 시의(時義)에 합당하면 모두 중(中)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임
금과 직(稷)과 안자가 각각 그 자체가 중(中)이 되는 것이니, 만약 우임금과 직과 안자의 사이에서
중(中)을 구하고자 한다면 어떻게 한쪽 방면을 의거하여 중을 삼을 수 있겠습니까.〉 이로 볼 때
고상(高尙) 자체가 중용이 되는데 도리어 이단으로 배척하였으니, 장차 천하 만고가 길이 어두워
져 다시는 누추한 마을에서 극도로 곤궁한 생활을 하는 안자의 시중(時中)은 있지 않고, 나갈 줄만
알고 물러날 줄은 모르는 호광(胡廣)의 중용이 세상에 도도하게 될까 염려스럽습니다. 이로써 말
하건대 이황이 말하는 중은 자못 성현의 뜻을 잃었음을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더구나 조식과
성운은 비록 세상을 피해 은거했다고는 하지만 선대 조정의 부름을 받아 조정으로 달려가서 한번
임금을 존중하는 뜻을 폈고, 누차 상소를 올려 정성을 다해 치안과 시무를 말씀드렸는데, 이것이
과연 괴벽한 도리이며 이상한 행실입니까. 그때 나이가 이미 일흔이었습니다. 벼슬을 그만두어야
할 나이에 뭐하러 출사하려 들었겠습니까. 수레를 버리고 산으로 돌아가 자신의 행실을 닦고 삶을
마친 것이 과연 중도에 어긋난 괴이한 행실입니까? 세상을 경멸하는 노장의 학문입니까? 신은 의
문스럽습니다.
李彦迪、李滉, 往在嘉靖乙巳、丁未年間, 或爵位崇極, 或踐歷淸要, 其意果以爲可仕之時乎? 此固不
足論也, 至其晩年, 斷然引退, 屢召不至, 此亦高亢之一事, 輕世之一行。 何不以曺植, 成運之所爲爲
不屑, 而反效老、莊之過高耶?
이언적과 이황이 지난날 가정(嘉靖) 을사년(1545)과 정미년(1547) 사이에 극도로 높은 벼슬을 하
기도 하고 청요직을 지냈으니, 그 뜻이 과연 벼슬할 만한 때라고 여겨서였습니까? 이것은 진실로
논할 것도 못 되거니와, 만년에 이르러서는 결연히 물러나 나라에서 여러 번 불러도 나가지 않았으
니, 이 또한 하나의 높고 뻣뻣한 일이며 세상을 경멸하는 짓거리입니다. 어찌하여 조식과 성운이
행한 바를 탐탁하게 여기지 않고 도리어 지나치게 높은 노장을 본받았단 말입니까.
大抵以高尙爲過中, 古未嘗有, 而俑於李滉。 愚弄一世, 視爲無人, 其爲病痛, 不待賢智而後知也。
從而和之, 弄其頰舌者, 不勝其衆, 不獨曺植、成運之受誣, 誣亦及於古聖賢, 又將誑後學而害斯道,
此非細慮也。 臣之不得不辨明而見諸言語、文字間者此也。 李滉於植與運, 一節之異端之, 不復顧
惜, 至於趨時附勢, 嗜利無恥, 終始爲權姦之門客, 淸議之所棄, 如李楨、黃俊良等若干輩, 或許以道
學, 或期以聖賢, 往復簡書, 積成卷軸。 寧有頭出頭沒, 老於名利場中者, 一朝可望以道學工程、聖
賢事業者乎? 其好惡取舍, 胡亂如此, 此果出於本心之天、性情之正者乎? 此臣尤有所不厭於心者
也。
대저 고상함을 지나치다 하는 것은 옛날에는 없었는데 이황에게서 비롯되었습니다. 그가 한 세상
을 우롱하고 자기 말고는 세상에 사람이 없는 것처럼 보았으니, 그의 병통은 현자·지인이 아니라
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따라서 화답하여 혀를 놀리는 자가 너무도 많으니 조식과 성운이 무함
을 받았을 뿐 아니라 옛날 성현에게까지 무함이 미치고, 또 장차 후학을 속여 사도(斯道)를 해칠
것이니 이는 작은 우려가 아닙니다. 신이 논변해 밝혀서 언어와 문자 사이에 드러내지 않을 수 없
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이황이 조식과 성운에 대하여 절개니 이단이니 하여 다시는 돌아보지 않았
는가 하면, 심지어는 시속을 좇아 세력에 붙고 이익을 탐하여 수치가 없으며 시종일관 권간(權姦)
의 문객이 되어 맑은 논의에서 버림을 받은 이정(李楨)과 황준량(黃俊良) 같은 약간의 무리들을 도
학으로 허여하기도 하고 성현으로 기대하기도 하면서 그들과 왕복한 편지가 쌓여 책을 이루었습
니다. 어찌 앞서 나가고 앞서 숨어서 명리(名利)의 마당에서 늙은 놈을 하루아침에 도학의 공정(工
程)과 성현의 사업으로 바랄 수 있겠습니까? 그의 좋아하고 미워함, 취하고 버림이 이처럼 종잡을
수 없는데, 이것이 과연 천부적 본심과 올바른 성정에서 나온 것입니까? 이 때문에 신이 더욱 마음
에 불만스럽게 여긴 것입니다.
伏見先朝備忘之傳, 一以明人臣事君之道, 一以正士子趨舍之義, 又以發前後未發之正論, 仍及於請
殺無辜之王子。 先王認爲李彦迪事, 或以爲非彦迪也, 李滉也。 事在國乘, 雖未的指爲誰, 先王之
敎, 不爲無據則明矣。
삼가 선대 조정에서 전하신 비망기를 보니, 하나는 '신하가 임금을 섬기는 도리를 밝혔다'고 하였
고, 하나는 '선비가 벼슬에 나아가고 버리는 의리를 바로잡았다'고 하였으며, 또 '전에도 후에도 발
명하지 못한 바른 의론을 발명하였다'고 하고는, 이어서 무고한 왕자의 사형을 청한 사실을 언급하
였습니다. 선왕은 이언적의 일이라고 여기셨으나 혹자는 언적이 아니라 이황이라고 합니다. 그 일을 국가의 문적에서 비록 누구라고 명확하게 지적하지는 않았지만 선왕의 전교가 근거 없는 것이
아님은 명백합니다.
二人俱有儒學之稱, 而自垂明夷之翼, 致有不拯其隨之恥, 在人臣以道事君, 不可則止, ‘介于石不終
日’之義, 不亦不相似乎? 且其平居, 俱未免周行己之失。 若以程子爲失於誅之太甚則已, 不然, 揆諸
君子克己自修之道, 不亦遠乎? 此在俗間人, 固是尋常一事, 稍以儒學名者, 其不爲薄物細故也審矣。
滉暗於觀己而甚於責人, 此亦豈君子之心事乎?
두 사람은 모두 명색이 유학자인 주제에 소인이 득세하여 군자를 해칠 때는 구하지 못하고 행동을
같이한 수치가 있었으니, 신하가 도리로 임금을 섬기다가 안 되면 그만두는 의리와 돌처럼 단단한
절개로 속히 떠나는 의리와는 또한 너무도 다르지 않습니까? 또 그들이 평소에 한 모든 일은 주행
기(周行己)의 허물을 면하지 못하였습니다. 정자가 주행기를 너무 심하게 꾸짖은 것이 잘못이라면
그만이지만 그렇지 않다면 군자가 자기의 사욕을 이기고 자신을 닦는 도리로 헤아려 볼 때 너무도
거리가 멀지 않습니까? 이것이 속인에게 있는 일이라면 진실로 별일 아니지만 조금이라도 유학 한
다는 이름이 있는 자에게는 작은 일이 아니라는 것이 확실합니다. 이황이 자기는 돌아볼줄 모르면
서 남은 심하게 꾸짖었으니, 이게 무슨 군자의 마음씀입니까.
臣區區之見, 蓋如此, 故嘗辨植、運之被誣, 仍以語及此等事, 庶解後來之惑。 反被時輩之忿, 群聚
而詆擯極之於八路, 使臣無所容於國境之內。 今備忘之墨尙明, 儒生疏焉, 大臣議焉, 殿下聽焉, 躋
享文廟, 崇長已極, 風聲甚盛, 氣勢可畏。 搢紳、韋布, 相率而左右之, 其所右, 殿下旣右之, 其所左,
殿下亦當左之。 植、運之被誣益厚, 擯斥無狀之臣, 將不止於前日矣。
신의 구구한 견해가 대개 이와 같았기에 일찍이 조식과 성운이 무함을 입은 것에 변론하고, 이어서
이와 같은 일들을 언급하여 후학의 의혹을 풀고자 하였습니다. 그런데 도리어 시배(時輩)의 분노
를 사서 무리지어 욕하고 배척하여 팔도에 알림으로써 신이 나라 안에 붙어 있지 못하게 하였습니
다. 지금 비망기의 먹이 아직도 선명한데도 유생들이 소를 올리고 대신이 의논하고 전하께서 들으
시어 문묘에 배향함에 높여짐이 지극하고 명성이 매우 성하여 그 기세가 두려워할 만합니다. 그리
하여 조정 신하와 재야 유생들이 서로 이끌고 나서서 좌지우지하는데, 그들이 추켜세운 자를 전하
께서 이미 추켜세우셨으니, 그들이 좌절시킨 자들 역시 전하께서 당연히 좌절시킨 것입니다. 그러
므로 조식과 성운의 무함은 더욱 두터워지고 무상한 신을 배척하는 것은 장차 앞날에 하던 정도에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噫! 聖賢論道學之旨、詔後學之意, 如右所陳, 明晢如天日, 易見如視掌。 今之人不信聖賢之明訓,
惑於李滉之一言, 掩瑕爲瑜, 風靡波蕩, 百世之下, 誰復知李滉之醇疵、植・運之非老・莊也? 故臣不得
不矢口盡言, 竊附於尊孟之故, 不復避俎豆之害也。 抑臣之過慮則固有之, 文學固是聖人之一體。
源遠世末, 大失其眞, 陷溺人心, 墊沒世道, 甚於洪水, 莫可拯救, 則范甯之數王弼, 不幸而近之。 恐
其害反不小於老、莊, 安保其不爲異時之憂也?
아아, 성현이 도학을 논한 뜻과 후학에게 일러준 의미를 위와 같이 진술하였으니, 하늘의 해처럼
명석하고 손바닥을 보는 것처럼 쉽습니다. 그러나 지금 사람들은 성현의 교훈을 믿지 않고 이황의
한마디 말에 의혹되어 티를 가리고 옥이라 하여 마치 바람에 쓰러지고 물결에 밀리듯이 하고 있으
니, 100세 뒤에 어느 누가 다시 이황의 허물을 알 수 있으며 조식과 성운이 노장이 아님을 알 수 있
겠습니까. 그러므로 신이 불가피하게 입을 열어 할 말을 다함으로써 감히 맹자를 높인 고사의 의의
에 따라 다시금 도마 위에 올려 놓고 해방하는 피해 따위는 피하지 않았습니다. 또 신이 지나친 생
각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염려되는 바가 있습니다. 문학은 본시 성인의 일체(一體)입니다. 그런데
근원이 멀어지고 세대가 오래됨에 문학이 크게 그 진실을 잃어서 인심을 함닉시키고 세도를 떨어
뜨려 그 해가 홍수보다 심하여 구제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범영(范寧)이 왕필(王弼)의
죄를 꾸짖은 것과 불행히도 근사합니다. 그 해로움이 도리어 노장보다 적지 않으리니 어찌 훗날 근
심이 되지 않으리라고 보장하겠습니까.
臣是老、莊之徒也。 今者一世之趨舍定矣, 朝廷之好惡決矣, 殿下之所尙, 亦可見矣。 臣何敢靦面
前進, 自取異色之猜也? 頃者郭再祐, 一入國門, 言及時事, 唇舌紛挐, 譏詆靡有餘力, 至於上瀆天聽,
臣不得不以此爲鑑也。 誠使臣扶曳一行, 咫尺天顔, 不敢不盡其所知, 則詆斥擠擯, 欲得以甘心者,
不但如郭再祐而已。 此臣尤不敢趨命。 竊以爲不如略陳一二難進之義, 庶幾聖明憐察之爲愈也。
伏願殿下, 命遞職名, 不復收召, 使朝夕性命, 獲免狼狽, 死於田廬。 此誠覆載生成之恩, 而不敢望也,
(瞻望北闕, 只竢誅譴。 聖明之垂察焉。)
신은 바로 노장의 무리가 되어버렸습니다. 지금 일세의 나아가고 버림이 정해졌고 조정의 호오(好
惡)가 결정되었고 전하의 향하는 바도 역시 볼 수 있습니다. 신이 어찌 감히 뻔뻔스럽게 앞으로 나
아가 스스로 다른 파당의 시기를 취하겠습니까. 지난번에 곽재우(郭再祐)가 한번 도성에 들어가서
시사(時事)를 언급하였는데, 구설이 분분하여 여력을 남기지 않고 기롱하고 비난하였는가 하면 심
지어는 위로 성상을 번거롭게 했으니, 신은 이것을 거울로 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진실로 신으로
하여금 기어이 한 번 가서 가까이에서 성상을 뵙고 감히 아는 바를 다 말하게 할 경우 헐뜯고 배척
하여 마음을 상쾌하게 하고자 하는 자들이 단지 곽재우에게 했던 정도로만 하고 말지 않을 것입니
다. 이 때문에 신이 더욱 감히 명에 달려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나름대로 생각건대, 한두 가지 나아
가기 어려운 뜻을 대략 진술하여 성명께서 불쌍히 여겨 살피시기를 기대하는 것이 더 나으리라 여
겼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신을 체직하시고 다시 부르지 마시어 얼마 남지 않은 이 목숨
으로 하여금 낭패스러움을 면하고 전리에서 죽을 수 있게 하여 주소서. 이는 진실로 천지의 생성
(生成)해 주는 은혜입니다만 감히 바랄 수 없기에 북궐을 바라보고 단지 벌이 내리기만을 기다립
니다. 성명께서는 살펴주소서.
※ 조선왕조실록 복사
광해 39권, 3년(1611 신해 / 명 만력(萬曆) 39년) 3월 26일(병인) 5번째기사
정인홍이 이언적과 이황을 비방하고 문묘 종사가 부당함을 극론하다
정인홍(鄭仁弘)이 상차하여 문원공(文元公) 이언적(李彦迪)과 문순공(文純公) 이황(李滉)을 【문묘에 종사하는 것이 잘못이라고 비방하니, 차자를 궐내에 두고 내리지 않았다.】 이에 앞서 상이 여러번 인홍을 불렀으나 인홍이 병을 핑계대고 오지 않자 상이 특별히 내의원과 예관을 보내어 문병하고, 아프더라도 참고 올라오라고 유시하였다. 인홍이 마침내 상차하여 지금 맡고 있는 찬성(贊成)의 직을 사임한다는 명분에 의탁하여 언적과 황을 심하게 헐뜯고 〈문묘 종사의 부당함을 말하였다.〉 그 차자의 대략에,
“신이 젊어서 조식(曺植)을 섬겨 열어주고 이끌어주는 은혜를 중하게 입었으니 그를 섬김에 군사부(君師父) 일체의 의리가 있고, 늦게 성운(成運)의 인정을 받아 마음을 열고 허여하여 후배로 보지 않았는데, 의리는 비록 경중이 있으나, 두분 모두가 스승이라 하겠습니다. 신이 일찍이 고 찬성 이황이 조식을 비방한 것을 보았는데, 하나는 상대에게 오만하고 세상을 경멸한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높고 뻗뻗한 선비는 중도(中道)를 요구하기가 어렵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노장(老莊)을 숭상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성운에 대해서는 청은(淸隱)이라 지목하여 한 조각의 작은 절개를 지키는 사람으로 인식하였습니다. 신이 일찍이 원통하고 분하여 한번 변론하여 밝히려고 마음먹은 지 여러 해입니다.
옛날에 사마광(司馬光)이 맹자를 비난하고, 이구(李覯)와 정숙우(鄭叔友)가 【맹자를】 비방하여 그 말이 극도로 패악하고 거만하였습니다. 이에 여윤문(余允文)과 주문공(朱文公)이 오묘한 것을 극도로 변론하여 밝혔습니다. 또 주문공이 육상산(陸象山) 학파의 비난을 받자 진건(陳建)이 《편년(編年)》을 지어 그 부(蔀)를 밝혔습니다. 맹자와 주자는 해와 달입니다. 사람이 비록 비방하고자 하더라도 무슨 지장이 있겠습니까마는 세 분의 군자가 그래도 힘써 논변하여 그냥두지 않았습니다. 하물며 그보다 못한 사람에 있어서이겠습니까. 조식과 성운은 같은 시대에 태어나서 뜻이 같고 도가 같았습니다. 태산 교악(泰山喬嶽) 같은 기(氣)와 정금 미옥(精金美玉) 같은 자질에 학문의 공부를 독실히 하였으니, 작게는 사귀고 주고 거절하고 받는 사이와 크게는 행하고 감추고 나가고 들어앉는 즈음에 고인에 대하여 부끄러움이 없었습니다. 바르고 바른 규모는 모두 사범(師範)이 될 만하니, 성문(聖門)의 고상한 길을 걷는 사람이며 성세(盛世)의 숨은 어진이라고 함이 옳을 것입니다. 단지 한 세상의 사람들이 보고 느끼는 사이에 권면될 뿐만 아니라 백세의 후에 듣는 자들도 역시 흥기될 것이니, 구구한 문자의 학문으로 이룰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
이황은 두 사람과 한 나라에 태어났고 또 같은 도에 살았습니다만, 평생에 한번도 얼굴을 대면한 적이 없었고 또한 자리를 함께 한 적도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한결같이 이토록 심하게 비방하였는데, 신이 시험삼아 그를 위해 변론하겠습니다. 이황은 과거로 출신하여 완전히 나가지도 않고 완전히 물러나지도 않은 채 서성대며 세상을 기롱하면서 스스로 중도라 여겼습니다. 조식과 성운은 일찍부터 과거를 단념하고 산림에서 빛을 감추었고 도를 지켜 흔들리지 않아 부름을 받아도 나서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황이 대번에 괴이한 행실과 노장의 도라고 인식하였으니, 너무도 모르는 것입니다. 《주역》에 이르지 않았습니까. ‘왕후(王侯)를 섬기지 않고 고상(高尙)을 일삼는다.’라고 하였는데, 공자가 이에 대해 말하기를 ‘그 뜻이 법칙이 될 만하다.’ 하였고, 정자가 또 이에 대해 증거를 대기를 ‘이윤(伊尹)과 태공망(太公望)과 같은 인물의 시초이고 증자(曾子)·자사(子思)의 무리이다.’고 하였습니다. 이윤이 신(莘)에서 농사짓고, 여망(呂望)이 바닷가에서 살고, 증자와 자사가 벼슬하지 않은 것이 과연 세상을 경멸하고 중도를 지나쳐 노장의 행동을 한 것이란 말입니까.
더구나 건괘(乾卦) 초구(初九)의 ‘잠룡(潛龍)이니 쓰지 말 것이다.’와 간괘(艮卦) 초륙(初六)의 ‘첫 움직임을 그친 것이니 길이 곧다.’와 돈괘(遯卦)의 ‘잡기를 누런 소의 가죽을 쓴다.’와 절괘(節卦)의 ‘문앞을 나서지 않는다.’는 등등의 효사(爻辭) 뜻을 이황이 과연 괴벽한 이치를 탐구하기 위한 효이고 괴이한 행실을 하기 위한 의의라고 여긴다면, 복희(伏羲)와 문왕(文王)과 주공(周公)과 공자는 중도로 길을 제시한 사람이 아니고 노장의 조종(祖宗)이란 말입니까. 그가 사람을 논하고 도를 논하는 것이 크게 성현의 뜻을 잃었으니 식견이 투철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면 사사로운 뜻에 가리고 의혹되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주문공이 말하기를 ‘양웅(楊雄)이 안자(顔子)를 단지 일개 흙덩이 처럼 자신만 지키는 사람으로 여기었다. 그래서 근세에 안자를 석노(釋老)의 공적(空寂)에 가깝다고 논하고 있다.’ 하였으니, 바로 이런 경우를 두고 말하는 것입니다.〉 또 《중용(中庸)》은 자사께서 도를 전한 책입니다. 그 책에 괴벽한 이치를 탐구하고 괴이한 행실을 하는 것은 중도에 지나친 것이고, 중도에서 그만두는 것은 미치지 못한 것이고, 세상을 피해 있어도 근심이 없고, 인정받지 못하여도 후회하지 않는다는 것은 중용에 따른 군자라고 하였는데, 어찌 도가 아닌 것을 자사께서 써서 후학에게 일러주었겠습니까. 만약 세상을 피해 있으면서 후회하지 않는 것을 중도가 아니라고 한다면 이는 자사가 요망한 말을 하여 후인을 속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사만 중도에서 지나침을 면하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순임금도 깊은 산속에 살면서 나무나 돌과 이웃하였고 사슴과 함께 놀았으니 이 역시 중도에서 지나친 하나의 잘못으로서 세상에 요 임금이 없었다면 그냥 그렇게 세상을 마쳤을 것이니 어찌 중도를 쓴 대성(大聖)이 될 수 있겠습니까. 빈곤한 생활을 바꾸지 않은 안자와 종신토록 벼슬하지 않은 이동(李侗)·채원정(蔡元定) 등 역시 높고 뻗뻗한 노장의 무리라는 제목 가운데 들 것입니다.
〈대개 중은 정해진 체가 없이 때에 따라 있는 것이니, 때에 따라 행하고 때에 따라 그치거나 혹은 나아가고 혹은 물러나는 것이 시의(時義)에 합당하면 모두 중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임금과 직(稷)과 안자가 각각 그 자체가 중이되는 것이니, 만약 우임금과 직과 안자의 사이에서 중을 구하고자 한다면 어떻게 한쪽 방면을 의거하여 중을 삼을 수 있겠습니까.〉 이로 볼 때 고상(高尙) 자체가 중용이 되는데 도리어 이단으로 배척하였으니, 장차 천하 만고가 길이 어두워져 다시는 누추한 마을에서 극도로 곤궁한 생활을 하는 안자의 시중(時中)은 있지 않고, 나갈 줄만 알고 물러날 줄은 모르는 호광(胡廣)의 중용454) 이 세상에 도도하게 될까 염려스럽습니다. 이로써 말하건대 이황이 말하는 중은 자못 성현의 뜻을 잃었음을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더구나 조식과 성운은 비록 세상을 피해 은거했다고는 하지만 선대 조정의 부름을 받아 조정으로 달려가서 한번 임금을 존중하는 뜻을 폈고, 누차 상소를 올려 정성을 다해 치안과 시무를 말씀드렸는데, 이것이 과연 괴벽한 도리이며 이상한 행실입니까. 그때 나이 이미 70이었습니다. 어찌 벼슬을 그만두어야 할 나이인데 출사하려고 하겠습니까. 수레를 버리고 산으로 돌아가 자신의 행실을 닦고 삶을 마친 것이 과연 중도에 지나치고 괴이한 행실을 한 것이며 세상을 경멸하는 노장의 학문이란 말입니까. 신은 의혹스럽습니다.
이언적과 이황이 지난날 가정(嘉靖) 을사년455) 과 정미년456) 사이에 혹은 극도로 높은 벼슬을 하였고, 혹은 청직과 요직을 지냈으니, 그 뜻이 과연 벼슬할 만한 때라고 여겨서입니까? 이것은 진실로 논할 것도 못 되거니와, 만년에 이르러서는 결연히 물러나 나라에서 여러번 불러도 나가지 않았으니, 이 또한 하나의 높고 뻗뻗한 일이며 세상을 경멸하는 행실입니다. 어찌하여 조식과 성운이 행한 바를 탐탁하게 여기지 않고 도리어 지나치게 높은 노장을 본받았단 말입니까.
대저 고상을 지나치다고 하는 말은 옛날에는 없었는데 이황에게서 시작되었습니다. 그가 한 세상을 우롱하고 나 외에는 세상에 사람이 없는 것처럼 보았으니, 그의 병통은 현자·지인이 아니라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따라서 화답하여 혀를 놀리는 자가 너무도 많으니 조식과 성운이 무함을 받았을 뿐 아니라 옛날 성현에게까지 무함이 미치고, 또 장차 후학을 속여 사도(斯道)를 해칠 것이니, 이는 작은 우려가 아닙니다. 신이 논변해 밝혀서 언어와 문자 사이에 드러내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이황이 조식과 성운에 대하여 절개요 이단이라고 하여 다시는 돌아보지 아니하였는가 하면, 심지어는 시속을 좇아 세력에 붙고 이익을 탐하여 수치가 없으며 시종일관 권간(權姦)의 문객이 되어 맑은 논의에서 버림을 받은 이정(李楨)과 황준량(黃俊良) 같은 약간의 무리들을 도학으로 허여하기도 하고 성현으로 기대하기도 하면서 그들과 왕복한 편지가 쌓여 책을 이루었습니다. 어찌 앞서서 나가고 앞서서 숨어서 명리(名利)의 마당에서 늙은 자를 하루아침에 도학의 공정(工程)과 성현의 사업으로 바랄 수 있겠습니까. 그의 좋아하고 미워함과 취하고 버림이 이처럼 종잡을 수 없는데, 이것이 과연 천부적 본심과 올바른 성정에서 나온 것입니까. 이 때문에 신이 더욱 마음에 불만스럽게 여긴 것입니다. 삼가 선대 조정에서 전하신 비망기를 보니, 하나는 신하가 임금을 섬기는 도리를 밝혔다고 하였고, 하나는 선비가 벼슬에 나아가고 버리는 의리를 바로하였다고 하였으며, 또 전에도 후에도 발명하지 못한 바른 의론을 발명하였다고 하고는, 이어서 무고한 왕자의 사형을 청한 사실을 언급하였습니다. 선왕은 이언적의 일이라고 여기셨으나 혹자는 언적이 아니라 이황이라고 합니다. 그 일을 국가의 문적에서 비록 누구라고 명확하게 지적하지는 않았지만 선왕의 전교가 근거 없는 것이 아님은 명백합니다.
두 사람은 모두 유학하는 사람이라는 칭호를 지니고서 소인이 득세하여 군자를 해칠 때에 구하지 못하고 같이 행동을 한 수치가 있었으니, 신하가 도로써 임금을 섬기다가 불가하면 그만두는 의리와 돌처럼 단단한 절개로 속히 떠나는 의리와는 또한 너무도 다르지 않습니까. 또 그들이 평소에 한 모든 일은 주행기(周行己)의 허물457) 을 면하지 못하였습니다. 만약 정자가 주행기를 너무 심하게 꾸짖은 것이 잘못이라면 그만이거니와 그렇지 않다면 군자가 자기의 사욕을 이기고 자신을 닦는 도리로 헤아려 볼 때 너무나도 거리가 멀지 않습니까. 이것이 속인에게 있는 일이라면 진실로 별일 아니지만 조금이라도 유학을 한다는 이름이 있는 자에 있어서는 작은 일이 아니라는 것이 확실합니다. 이황이 자기를 살피는 데에는 어둡고 남을 책망하는 것은 심하니, 이것이 어찌 군자의 심사이겠습니까.
신의 구구한 견해가 대개 이와 같았기 때문에 일찍이 조식과 성운이 무함을 입은 것에 대해 변론하고, 이어서 이와 같은 일들을 언급하여 후학의 의혹을 풀고자 하였습니다. 그런데 도리어 시배(時輩)의 분노를 사서 무리지어 욕하고 배척하여 팔도에 알림으로써 신으로 하여금 나라 안에 붙어 있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지금 비망기의 묵이 아직도 선명한데도 불구하고 유생이 소를 올리고 대신이 의논하고 전하께서 들으시어 문묘에 배향함에 높여짐이 지극하고 명성이 매우 성하여 그 기세가 두려워할 만합니다. 그리하여 조정의 신하와 재야의 유생들이 서로 이끌고 나서서 좌지우지하는데, 그들이 추켜세운 자를 전하께서 이미 추켜세우셨으니, 그들이 좌절시킨 자들 역시 전하께서 당연히 좌절시킨 것입니다. 그러므로 조식과 성운의 무함은 더욱 두터워지고 무상한 신을 배척하는 것은 장차 전날 하던 정도에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아아, 성현이 도학을 논한 뜻과 후학에게 일러준 의미를 위와 같이 진술하였으니, 하늘의 해처럼 명석하고 손바닥을 보는 것처럼 쉽습니다. 그러나 지금 사람들은 성현의 교훈을 믿지 않고 이황의 한마디 말에 의혹되어 티를 가리고 옥이라 하여 마치 바람에 쓰러지고 물결에 밀리듯이 하고 있으니, 백세의 뒤에 어느 누가 다시 이황의 허물을 알 수 있으며 조식과 성운이 노장이 아님을 알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신이 부득불 입을 열어 할 말을 다함으로써 감히 맹자를 높인 고사의 의의에 따라 다시금 도마 위에 올려 놓고 해방하는 피해 따위는 피하지 않았습니다. 또 신이 지나친 생각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염려되는 바가 있습니다. 문학은 본시 성인의 일체(一體)입니다. 그런데 근원이 멀어지고 세대가 오래됨에 문학이 크게 그 진실을 잃어서 인심을 함닉시키고 세도를 떨어뜨려 그 해가 홍수보다 심하여 구제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범영(范寧)이 왕필(王弼)의 죄를 꾸짖은 것과 불행히도 근사합니다. 그 해로움이 도리어 노장보다 적지 않으리니 어찌 훗날 근심이 되지 않으리라고 보장하겠습니까.
신은 바로 노장의 무리가 되어버렸습니다. 지금 일세의 나아가고 버림이 정해졌고 조정의 호오(好惡)가 결정되었고 전하의 향하는 바도 역시 볼 수 있습니다. 신이 어찌 감히 뻔뻔스럽게 앞으로 나아가 스스로 다른 파당의 시기를 취하겠습니까. 지난번에 곽재우(郭再祐)가 한번 도성에 들어가서 시사(時事)를 언급하였는데, 구설이 분분하여 여력을 남기지 않고 기롱하고 비난하였는가 하면 심지어는 위로 성상을 번거롭게 했으니, 신은 이것을 거울로 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진실로 신으로 하여금 기어이 한 번 가서 가까이에서 성상을 뵙고 감히 아는 바를 다 말하게 할 경우 헐뜯고 배척하여 마음을 상쾌하게 하고자 하는 자들이 단지 곽재우에게 했던 정도로만 하고 말지 않을 것입니다. 이 때문에 신이 더욱 감히 명에 달려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나름대로 생각건대, 한두 가지 나아가기 어려운 뜻을 대략 진술하여 성명께서 불쌍히 여겨 살피시기를 기대하는 것이 더 나으리라 여겼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신을 체직하시고 다시 부르지 마시어 얼마 남지 않은 이 목숨으로 하여금 낭패스러움을 면하고 전리에서 죽을 수 있게 하여 주소서. 이는 진실로 천지의 생성(生成)해 주는 은혜입니다만 감히 바랄 수 없기에 〈북쪽의 대궐을 바라보고 단지 벌이 내리기만을 기다립니다. 성명께서는 살펴주소서.〉”
하였다. 차자가 들어감에 조야가 놀라고 분개해 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정인홍의 차자는 오로지 이언적과 이황을 공격하기 위한 것이다. 아, 언적과 이황을 어찌 쉽게 공격할 수 있겠는가. 언적과 이황은 학문이 끊어진 뒤에 분발하여 대업(大業)에 잠심하여 깊은 뜻을 천명하고 어두운 사람들을 깨우쳐 유림의 모범이 된 지가 벌써 45년이다. 온 세상 사람들이 지혜로운 사람, 어리석은 사람, 어진 사람, 불초한 사람 할 것 없이 모두 그가 대유(大儒)임을 알고 있으니, 이것이 어찌 하루아침의 언론으로 갑자기 공격하여 깨뜨릴 수 있는 것이겠는가.〉 인홍이 이러한 논변을 한 것은 대개 이황이 일찍이 자기의 스승인 조식에 대해 논한 것을 분하게 여겨서이다. 선배의 장단은 후학이 쉽게 논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두 사람이 남긴 글이 모두 있으니, 그들의 논저를 살펴보면 이황과 조식의 잘잘못을 알 수가 있다. 조식의 학은 의리를 강론하는 것을 크게 꺼려하였으니 이는 주자가 육씨(陸氏)를 공격한 바였고, 경(敬)을 논함에 심식(心息)이 서로 의지하는 것을 요체로 삼았으니 이는 도가의 수련법에서 나온 것이다. 우리 유가에서는 일찍이 이러한 공부의 과정이 없었다. 그 외에 시골에서 살면서 끼친 폐단이나 임금에게 불손하게 아뢴 말들은 모두 지나치게 미워하고 지나치게 곧은 잘못에서 나온 것으로 자못 유학자의 기상이 없었다. 더구나 그의 문사(文辭)는 괴벽하고 깊고 어두워 결코 명도 달리(明道達理)의 말은 되지 못한다. 대개 그 사람이 절개가 높고 기상이 곧아 자부심이 태과하였으나 실상은 한번도 학문의 공부에 깊이 들어간 적이 없었다. 그 때문에 이황이 높고 뻗뻗한 노장으로 지목하였던 것이다. 어찌 본 것도 없이 함부로 말하였겠는가. 벼슬하지 않은 절개는 바로 그의 장점이므로 이황이 애초에 이 점을 비난한 적은 없었다. 이황의 학문은 한결같이 주자를 표준삼아 논변과 저술에 크게 발명함이 있었고, 또 그의 기상이 화평하고 신밀(愼密)하여 자연히 도에 가까웠다. 이른 나이에 학문이 아직 성취되지 못한 상태에서 벼슬길에 올라 비록 조금의 후회가 있음을 면하지는 못하였으나 역시 몸을 잃어버리는 데까지는 이르지 않고 곧바로 떠났다. 만년에 학문이 진전되고 덕이 이루어져 우뚝하게 수립함에 성명(誠明)이 둘다 지극한 데에 이르고 행실과 견해가 함께 도달하였다. 〈후학을 개도하고 깊은 묘리를 발명하여〉 그가 사문에 기여한 공이 매우 컸기 때문에 학자들이 우리 동방의 주자라고 일컬었으니, 대체로 근사하다 하겠다. 그리고 언적의 경우는 처음과 끝의 출처가 비록 이황에게 미치지 못하는 감이 있고 〈위사 공신(衛社功臣)이 된 일도 잘 하였다고 말할 수는 없으나〉 그의 심사가 분명하므로 결코 의심할 것이 없다. 일시의 명인(名人)과 거유(鉅儒)들이 그의 학문을 추존하여 모두 스스로 미칠 수 없다고 여겼으며, 이황 역시 끊어진 학문을 전하였다는 것으로 그를 높였는데, 사람들에게 이러한 인정을 얻은 것은 반드시 그 까닭이 있는 것이다. 어찌 인홍이 용이하게 비방할 수 있겠는가. 주행기의 허물을 들어 비방한 것과 같은 것은 더욱 군자가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군자가 사람을 논함에는 항상 충후(忠厚)에 근본을 두어야 하는 법이니, 이와 같은 추잡한 말은 비록 향당의 자기만 아끼는 자에게도 할 수 없는 말인데 더구나 두 선비에 대해서이겠는가. 〈두 선비에게 진실로 이러한 일이 있었으나 이는 소년 때에 한 일에 불과하다. 대개 상대가 이미 나를 섬긴 지가 오래되었고 또 다른 큰 이유가 없다면 아무리 나의 학문이 이루어진 후라 하더라도 어찌 갑자기 끊어버릴 수 있겠는가. 의리로 헤아려 보아 큰 잘못이라고 보이지 않는다. 가령 옛 교훈에 비추어 혹 어긋나는 일이라 하더라도 현자를 위해 감추어줄 수는 없는 것인가.〉 허물이 있는 가운데 허물이 없기를 구하는 것이 본디 군자의 마음이니, 때를 씻어 흉을 찾는 것이 도리어 자신에게 손해가 된다는 것을 모른 것이다. 그리고 인홍이 문학의 폐단을 극구 말하면서 인심을 함닉시키고 세도를 무너뜨리는 해가 홍수보다 더 심하다고 하였는데 〈신은 의심스럽다.〉 대저 한갓 문학만을 일삼아 실행하는 알맹이가 없다면 참으로 자기를 위하는 학문은 아니다. 그렇지만 문학조차 모르는 자에 비한다면 또한 그보다는 우수한 것이다. 문학을 가르치는 것은 본래 실천하기 위한 것이니, 외적인 것에 힘쓰고 내적인 것을 버려두는 것은 바로 학문을 잘 하지 못하는 자의 죄이지 애초에 문학이 그렇게 시킨 것은 아니다. 〈학문을 강론하지 않은 것을 공자가 근심하였고, 사교(四敎)에 문(文)을 첫번째로 꼽았으며, 문(文)으로 넓히고 예(禮)로 요약하는 공부의 과정이 선후가 있어 격물(格物)·치지(致知)·성의(誠意)·정심(正心)·명선(明善)·성신(誠身)의 순서로 공부를 하였으니, 예로부터 성현이 사람을 가르치는 법은 이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어찌 일찍이 문학을 해롭다 하여 버린 적이 있었는가.〉 대저 문학만 알고 실천이 없는 자는 또한 실천을 말로만 하고 실지로 얻는 것이 없는 자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진실하게 공부를 해나가면 문학은 진실로 도에 들어가는 계단이 될 것이고 실없이 말만 한다면 실천이라는 두 글자 역시 무슨 소득이 있겠는가. 요컨대 그 사람에게 달려 있는 것이다. 어찌 문학으로 죄를 돌릴 수 있겠는가. 〈선유가 이 뜻을 논하여 풀이한 것이 이미 해와 별처럼 뚜렷한데〉 인홍이 방자하고 기탄없이 이론(異論)을 선창하여 만세의 학자를 그르쳤으니, 세상을 의혹시키고 백성을 속인 죄는 양자(楊子)와 묵자(墨子)의 아래에 있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두 선비를 숭상한다는 이유로 스스로 벼슬하지 않는 의리를 결단한 것에 있어서는 더욱 무리한 짓이다. 설사 두 선비가 과연 진유(眞儒)가 아니라 하더라도 소인이 아닌 것은 분명하니, 죽어서 황천에 있는 사람의 영욕(榮辱)이 애당초 자신의 진퇴와 무슨 관련이 있다는 것인가. 이 시기에 임금이 덕을 닦지 않아 조정의 기강이 날로 문란해지고 어진이와 사악한 자가 뒤섞이어 외척들이 용사를 하고 있으니, 군자로서 벼슬하지 못할 이유가 얼마나 많은데 그에 대해서는 한마디의 언급도 없이 유독 이 문제를 가지고 거취를 결정한단 말인가 더구나 세상이 두 선비를 존숭한 지가 오래 되었고 배향을 청한 것이 몇 해째인데 어찌하여 전에는 묵묵히 있다가 지금에 와서 운운하는 것인가. 그의 마음을 헤아려 보건대 임금을 협박한 죄를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대개 인홍의 사람됨이 편협하고 사나우며 식견이 밝지 못한데 방자하게 함부로 지어내어 다시금 돌아보고 거리끼는 것이 없었으므로 세상에서 이르는 현인 군자치고 그의 비방을 입지 않은 사람이 없다. 일찍이 자기편의 무리를 사주하여 상소를 올려 성혼(成渾)을 헐뜯었고 또 이이(李珥)를 매우 심하게 비방하더니, 이때에 이르러 다시 두 선비를 이처럼 힘써 공격하였다. 저 인홍 같은 자는 사문의 쓸데없는 가라지나 사류(士類)를 해치는 좀도둑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태백산사고본】
【영인본】 31책 612면
【분류】 *사상-유학(儒學)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 *역사-고사(故事) / *인물(人物) / *정론(政論) / *사법-치안(治安)
--------------------------------------------------------------------------------
[註 454]호광(胡廣)의 중용 : 호광은, 효렴(孝廉)으로 천거되어 다섯 임금을 섬기면서 후한 예우를 받았지만 임기응변으로 일을 처리했을 뿐 직언(直言)을 하지 않았으므로, 당시 사람들은 ‘호광의 중용’이라고 기롱하였다. 《후한서(後漢書)》 권44 호광열전(胡廣列傳). ☞
[註 455]을사년 : 1545 인종 1년. ☞
[註 456]정미년 : 1547 명종 2년. ☞
[註 457]주행기(周行己)의 허물 : 처신을 바르게 하지 못한 잘못을 말함. 주행기는 정자(程子)의 문인으로 기생과 관계하였는데, 정자가 금수만도 못하다고 하였다.